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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에 가지런히 걸린 옷을 마주하고 서서 무엇을 입어야 할지 생각한다. 그러나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청바지와 체크 무늬 남방. 흔하되 무난한 선택이다. 시도해보지 못한 상위와 하위의 조합, 곧 새로움에 관한 상상은 한없이 빈곤하다. 서둘러 옷을 꿰어 입고는 밖으로 향한다. 거울은 확인하지 않는다. 설령 본다 하더라도 의례적인 행위에 그칠 뿐이므로. , 향수만큼은 주의를 기울여 고르려고 노력한다. 여름에 어울리는 우드세이지 앤 씨솔트를 뿌릴까 하다가 결국 스타워커를 집어든다. 다소 중후하긴 하나, 우디계열의 나무열매 향인 middle note와 달달함이 섞인 base note가 매력적인 녀석이다. 그러고 보면 향은 아침마다 내가 오로지 나의 의지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패션 아이템이다. 그래서 향수를 뿌리는 순간은 언제나 즐겁다. 흡사 새하얀 도화지에 직접 선을 긋고 색을 칠하는 아이처럼. 엄밀하게 따지면 몸을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꾸미는 듯한 감각을 소비하는 셈이다.

 까끌하다. 매끄럽다. 두껍다. 얇다. 단추가 n개 있거나 없다. 장식이 있거나 없다. 양각으로 무언가 적혀 있거나 그렇지 않다. 주머니, 모자 등이 달려 있거나 그렇지 않다. 착용감이 좋거나 좋지 않다. 길이가 길거나 짧다.

 옷에서 내가 인식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에 대한 서술이다. 나는 시각장애 1급이고, 벌써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온 시간이 어느덧 15년 이상이 되었다. 15년이라는 시간은 시각에 대한 상당량의 기억을 흐릿하게 하고, 꿈의 세계조차 회색빛으로 물들게 했다. 나와 가족의 얼굴, 자연풍경, 글자의 형태, 뚜렷한 원색을 제외한 대다수의 색깔. 그렇게 나는 감각이라는 것도 학교에 출석하듯, 매일같이 꾹꾹 눌러 담아야 잊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삶으로 경험했다. 여전히 살아남은 원색에 대한 이미지가 기특할 따름이었다. 이래서 존재는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걸까.

 나는 이 글을 통해 한 명의 사람, 특히 시각장애인으로서 감각한 을 기록하고자 한다. 따라서 현상적으로 나의 경험을 기록하는 데에 집중할 것이다. ‘타인으로부터 인식되는 나내가 인식하는 타인에 관해 나누어 서술한다. 증언의 기회를 주신 ‘015b’ 에 감사드린다.

 

타인으로부터 인식된 나의 몸

 패션에 대한 나의 서사는 꽤나 유구하다. 우선, 초등학교 시절에는 부모님이 꺼내주시는 옷이면 군소리 없이 입었다. , 핑크색이나 꽃무늬는 곤란했다. 어리석게도 여자가 입는 옷과 남자가 입는 옷은 명백히 분리될 뿐만 아니라, 반드시 구별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우스운 것은, 10살 무렵 갑작스럽게 시력을 모두 잃게 되면서 핑크색과 꽃무늬에 대한 제약마저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막연한 거부감은 남아있었지만, 어차피 보이지 않을 건데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그래서 무조건 착용감이 좋고, 활동하기에 편한 옷을 추구했다.

 그런데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차츰 패션에 관심이 생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중학교 2학년쯤이었을까. 나는 조숙했고, 수염, , 목소리 등 어느 것으로 보든 26살인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후줄근한 차림으로 다니던 어느 날, 길에서 담배를 한 까치 달라는 아저씨와 마주쳤다. 여자아이들 역시 내게 아저씨 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충격은 당시 28살이었던 담임선생님과 참석한 외부 행사에서 절정을 맞았다.

아이구,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쪽이 학생이시고, 이쪽이 선생님이시죠?”

그래. 외견상으로 학생은 교사였고, 교사는 학생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저시력인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수없이 많은 평가를 요청하였다.

오늘 입은 티랑 바지 잘 어울린다.”

오늘은 바지가 좀....”

파마는 별로인 것 같아.”

넌 밝은색이 잘 어울려.”

 내게 옷은 더 이상 색이나 모양 등의 이미지로 기억되지 않았다. 조합이었다. 이를테면 A 티셔츠와 1번 바지, B 남방과 2번 바지와 같은 식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조합은 타인, 특히 패션 감각이 좋거나 잘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 맞추어졌다. 신발, 가방, 시계 등 몸에 걸치는 것이라면 모두 그랬다. 낙제점을 받은 옷은 점차 옷장 안쪽을, 성공적인 점수를 획득한 옷은 바깥쪽을 차지해 갔다. 하나의 조합이 너무 오래된다 싶을 때면 새로운 조합에 골몰했고, 그래서 이따금씩 처참한 패션을 자랑하곤 했다. 주기적으로 어울리는 옷 끼리 짝짓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철저하게 타인의 시각을 빌어 나의 몸을 구성했다. 제각기 다른 평가 속에서 일반성을 찾고, 특이하지 않으려 무던하게 노력했다. 그러면서 종종 옷을 잘 입는다거나 깔끔하다는 말을 듣는 것에 대해 안도감과 우쭐함을 느끼곤 했다. 한 예로 1~2개월 전쯤, 지하철역에서 공익요원의 도움을 받기 위해 기다린 적이 있었는데, 당시 나는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호출한 공익요원이 오지 않기에 역사로 전화를 해보니 그는 당황한 듯이 옷을 너무 깔끔하게 잘 입고 계셔서 시각장애인이신 줄 몰랐습니다.”라고 했다. 도대체 시각장애인의 옷차림은 어때야 하는걸까 하는 불쾌함과 동시에 적어도 일종의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생각에 순간적인 기쁨을 느꼈다. 초라한 기쁨 앞에서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타인에게서 비롯되는 나의 몸 이미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나는 정상성을 선망했고, 타인들의 몸, 정확히는 이미지에 대한 평가가 이를 증명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심 나도 당신들처럼 좋은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고, 시각적인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던 거였다.

 시각장애인들에게도 몸을 영위하는 나름의 방식은 있다. 향기, 피부 결, 목소리, 촉각으로 마주하는 근육이나 살의 형태 등. 특히 목소리는 시각장애인에게 몸이나 마찬가지다. 과연 목소리를 몸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긴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성대에서 비롯되는 것이 곧 사람의 음성이므로 몸이라고 보는 편이 더욱 자연스럽다. 사실상, 이러한 의문 자체가 에 대한 시각적 편향성을 증명한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에서 눈으로 전유할 수 없는 것은 몸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목소리가 시각적이지 않아 몸으로 평가되지 못한다는 주장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위장, 심장, 맹장, 뼈 등은 어떠한가? 피부 내측에 싸여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몸이라고 할 수 없는가? 물론 뼈 중에서 신체의 일부로 자주 언급되는 것들이 있긴 하다. 대표적으로 쇄골, 골반, 광대가 그러하다. 이들은 미적인 기준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의 기관과는 사뭇 다르다. 여기서 나는 몸에 대한 인식이 철저히 시각에 기초하는 한편, ‘()’ 에 기속된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외모보다 마음을 봐야 한다거나 시각적인 평가를 지양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가치와 기준의 획일화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어릴 적에 양치를 할 때마다 거울 속에서 좌우가 뒤집힌 채, 나를 바라보던 자화상은 잊은 지 오래다. 누구도 생김새를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고, 나 역시 이를 요청하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보이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지만, 내가 나를 어떻게 인식하는지는 그다지 큰 흥미를 끌지 못했다. 실제 나의 이미지를 감각하는 것은 타인이었고, 그렇기에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몸에 대한 나의 감각은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작용했다. 우선, 향기, 피부 결, 목소리, 손으로 만졌을 때 느껴지는 군살 등에 관심을 기울였다. 타인의 평가와 관련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내가 감각할 수 있는 영역에 속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몸의 통증이나 질병을 상상케 하는 증상에 민감했다. 그러나 타인과 소통할 때에는 오로지 시각에 기초하여 나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른 방식으로 가능한 접근은 후각과 청각이었다. 후각은 향수를 통해 해결했고, 목소리는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톤이나 말투에 집중했다. 문제는 타인에게 이러한 감각에 응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대개 후각이나 청각적인 것은 시각적인 것에 비해 자주 이야기되지 않았다. 확실히 먼 거리에서 후각, 촉각 등은 설 자리가 없었다.

 요컨대, 타인이 인식하는 나의 몸과 내가 인식하는 몸은 주로 사용되는 감각에 따라 철저히 분리되고, 타인들 간에는 시각이 획일적, 절대적 기준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감각하는 타인은 어떠한가? 아래에서 논하도록 한다.

 

내가 인식한 타인의 몸

 나는 가족, 친구, 애인 등의 생김새를 알지 못한다. 특히 시각을 잃고 난 후에 알게 된 대다수에 관해서는 아무런 시각 정보가 존재하지 않는다. 꿈에서조차 이들은 후각, 청각, 촉각의 범위에서만 등장한다. 그러고 보면 무의식의 세계는 상상 이상으로 정직하다. 실제 감각하지 않은 것들에 함부로 이미지를 부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시각에 취약함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당장 내일 볼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직접 말을 건네지 않는 한,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야말로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게 되는 거다. 여기서는 내가 타인의 몸을 감각하는 방식을 소개할까 한다. 편의상 동성과 이성으로 나눌 것인데, 이는 현실적으로 시각장애인이 이성의 몸을 인식하는 것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분류한 것인바, 오해가 없으시길 바란다.

 

우선, 동성의 경우를 본다.

 동성끼리는 상대적으로 접근이 수월하다. 무엇보다 기본적인 신체의 특징은 스스로의 것을 통해 경험한 바가 있으므로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사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저 주변 사람들의 평가로부터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를 추론할 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겉모습이 어떤지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심지어 나처럼 중도 실명한 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보이지 않은 사람에게는 잘생겼다라는 말 만큼 추상적인 것은 없다. 이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타인들의 대화에서 추론하고, 그 평가에 매달려 잘생기거나 예쁜 외모를 선호하긴 하지만 본래 감각되지 않는 아름다움은 무의미한 법이다. 목소리를 듣고 체형이나 외모를 상상할 수는 있으나, 그 또한 타인의 평가와 비교가 있지 않은 한, 그저 사실행위에 그칠 따름이다. 요컨대, 시각장애인에게 외적인 정보는 사실로서 지각되고, 가치로서는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원론적인 분석에 지나지 않으며, 선천적으로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경험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동성과 친해질 때에는 후술하겠지만, 대개 이성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친밀함을 목적으로 하느냐, 섹슈얼함을 목적으로 하느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성격, 취미, 사람을 대하는 태도, 가치관 등이 주로 관찰의 대상이 된다. 생각보다 목소리나 말투에서 갈리는 때가 많다. 단순히 목소리가 마음에 들 거나 그렇지 않은 차원의 얘기는 아니다. 음성과 말투에서 추론되는 성격과 태도가 중요하다.

 한편, 내밀한 영역에 대한 접근은 조금 다르다. 한 예로 성기 사이즈를 들 수 있다. 흔히 목욕탕에 가면 내심 서로의 것을 비교한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자를 들이대며 직접 측정해달라고 하는 것은 물론이고, 만져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성의 경우를 본다.

 “, 혹시 여자 몸은 어떻게 생겼어?”

 고등학교 시절, 선천적으로 시각장애를 가진 후배가 조심스럽게 건넨 질문이다. 처음 그 질문을 받았을 때 몹시 난감했다. 대략적으로 생김새를 알고 있어 설명해 줄 수는 있었지만, 도대체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예쁘다는 게 뭐야? 딱 보면 그게 느껴져?”

 후배가 두 번째로 건넨 질문이다. 난감함을 넘어 황망함이 찾아왔다.

 이성의 몸에 대한 접근은 쉽지 않다. 교육은 더욱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교육에서조차 피임을 강조할 뿐, 생김새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화면해설을 해주는 야동은 왜 없는지 모를 일이다. 하기사 설명을 해준들 직접 만져보지 않는 한, 이해하기 곤란할 게 분명하다.

 그러면 이성애자인 시각장애인의 경우, 무엇을 기준으로 마음에 드는 이성을 선택하는가? (본인이 이성애자이고, 동성애자의 경험에 대해서는 무지하므로, 이성애를 서술의 대상으로 한 것이니 이해를 요청하는 바이다) 나는 한번도 사귀기 전에 상대의 신체를 알지 못했다. 손이나 팔을 잡을 때 대략적으로 체형이 어떨 것이라는 예측만 했을 뿐, 그 이상은 불가했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사람의 몸매를 타인의 눈과 평가를 빌어 알고 싶지는 않았기에 선뜻 물어볼 수 없었다. 그러니까 상대의 신체와는 사귄 후에 차츰 인사를 하게 되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관심이 생기기까지는 목소리, 향기, 성격, 지적 능력, 가치관, 대화가 통하는지 여부 등이 주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관계가 가까워지고 내밀해짐에 따라 촉각을 통한 인식이 성립하면 그때부터 나는 상대의 몸에서 생김새와 서사를 읽는다. 가령, 어깨가 뭉쳐 있다거나 발에 굳은살이 많다거나 손목 등의 근육 상태가 좋지 않다면 상대가 치열하게 견뎌온 삶을 생각한다. , 피부나 머리카락이 푸석할 때면 피곤하지 않은가 걱정을 한다. 특히 최근에는 상대의 몸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신체 부위를 일컫는 단어 대신, 그 서사를 기억하고 상징할 만한 단어를 갖다 붙인다. 한 예로 애인의 다리는 기특이다. 하도 열심히 걸어 다니느라 고생을 해서 그렇다. (웃음) 타인들이 애인을 두고 이쁘다거나 귀엽다거나 하는 말은 기분이 좋긴 하지만, 평가의 자료로 삼고 싶지는 않다. 나의 몸을 구성할 때와는 달리 상대와 나 두 사람의 관계에서 출발했고, 그렇다면 타인의 시각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참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추구하는 나름의 몸은 있다. 상대의 몸을 보지 못한 채로 사귀었다고 해서 아무런 기준을 갖고 있지 않은 게 아니다. 특히 이러한 기준은 연애의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 변천된다. 다만, 시각과 차이가 있다면 사귀기 전에 이상형의 을 인식할 수 없을 뿐이다. 주변에 친구들의 경우, 사진을 보여주며 예쁘게 생겼는지 여부를 물어보기도 하지만, 그건 엄밀히 말해서 설명이지 나의 감각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천천히 상대의 몸과 친해지는 것도 무척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사실 동성이든 이성이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타인의 몸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준과 접근방식을 가지고 있다. 어차피 개인은 사회로부터 독립될 수 없는 것이어서 순수하게 나름의 기준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시각 외에 타인을 인식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실제 목소리나 말투는 얼굴에서 표정과 같은 역할을 한다. 어디든 신체와 감각의 일부라면 흔적이 남기 마련이고, 따라서 고유한 각자의 네러티브가 형성된다. 나는 가급적 그 서사를 읽으려고 노력한다. 내가 사용하는 방식은 시간을 필요로 하므로, 속도나 범위에 있어 한계가 있다. 그러나 깊이가 필요할 때에는 강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것이 나의 경험이고, 감각이다.

 나는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조금은 다른 기준으로 세상을 감각하는 한편, 타인을 인식하며 살고 있다고 증언하고 싶었다. 시각 외에 다른 기준이 있고, 그것은 어느 것이 옳고 틀리다기보다 실재의 문제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조금 더 다양한 실재가 논의되고 기술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다.

기고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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