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이전의 풍경을 꺼내는 데

나무들이 쓰이는 것은

이들이 뿌리 내린 자리의 주인이기에

함부로 베일 수 없었던 까닭이오, 그렇기에

언제나 늘 있을 것만 같은 그 자리에

누군가와 추억을 만들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 박만수, 나무 헤는 밤중에서[각주:1]

 

   장마의 끝에서 백양로를 걸으면서 길 가운데의 잔디밭을 유심히 보았다. 얼마 전까지 이제 막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잔디들을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가 쳐져 있었는데 다시 보니 사라졌었다. 많이 내린 비 덕분에 잔디들은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마찬가지로 학교의 다른 풀들도 무성하게 자라서 대대적인 제초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잘려나간 풀밭에서는 평소보다 풀내음이 많이 난다. 본관 앞의 정원 역시 그런 풀내음으로 가득했다. 냄새를 맡으며 걷던 중에 둥그런 정원수들을 보며 문득 생각났다. 이렇게 둥근 친구들이 공사 이전 백양로에는 가득했었지.

공사 이전의 백양로의 모습. 차도와 인도의 경계를 만들어주는 브로콜리들이 예전엔 있었다

  공사 이전에는 지금보다 굵은 은행나무와 브로콜리(둥근 친구들은 편의상 이렇게 부르자)들이 아스팔트 길을 따라 백양로에 줄지어 있었다. 물론 백양로 공사와 상관없이 연세대에는 정말 나무가 많다. 장식적으로 정돈된 본관과 연희관 앞뜰의 나무들부터 웬만한 건물들보다 높게 솟아 있는 나무들까지 모양과 분위기 또한 다양하다. 심지어 캠퍼스 안에는 수풀로 뒤덮인 언덕과 이름을 가진 숲도 있다. 이 나무들은 오래된 학교 역사만큼 종류에 상관없이 어제도 있었고 내일도 이 모습 그대로, 내년에도 마찬가지로 꽃을 피우리라 기대가 된다. 그래서일까, 백양로가 재창조된 이후의 풍경은 아직 한없이 낯설기만 하다. 처음에는 새로 만들어진 조경이 낯설어서 그런 줄 알았다. 작은 차이지만, 그 원인은 나도 모르게 옛날의 풍경이 문득 떠오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열매가 맺는 계절만 되면 학교는 은행이 떨어져 풍기는 구린내로 진동을 했다. 길을 따라 쭉 올라오면 중앙 도서관 앞 한글탑 근처에는 한 가지에서 세 가지 색깔의 꽃이 나는 미친 꽃나무가 있었고, 북으로 더 가면 삼거리 오른쪽 길에 용재관이란 이름을 가진 다 쓰러져가는 건물과 대조되는, 해가 어디 떠 있는지에 따라 색깔이 묘하게 바뀌는 진달래밭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재창조라는 이름으로 사라진 보로콜리들을 생각할 땐, 나무들이 항상 곁에 있으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교정의 나무 중 몇을, 글과 사진으로 남기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바로 이 나무에서 시작한다.


화백나무 a.k.a. 크리스마스 트리 나무[각주:2]

점등된 화백나무의 모습

  12월에 들어서면 본관으로 가는 길목에 우뚝 서 있는 이 나무는 전구들과 장식품으로 된 옷을 입는다. 그 주위는 작은 나무들로 촘촘히 울타리 쳐져 있어 나무에 다가가려면 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하지만, 쏟아지는 빛줄기 속에서 친구들 혹은 연인과 맞으며 찍는 사진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기념사진 중 하나가 된다.

  이 나무는 유심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듯이 오른편의 나무와 같은 종류인 화백나무이다. 측백나무과에 끝이 살짝 뾰족한 이파리를 가진 이 나무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나부터도 트리면 구상나무[각주:3] 아니냐하는 정도였으니까. 중요한 것은 이 나무가 지난 몇 년 동안 부쩍 약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가 나오면 으레 그거 겨우내 트리 하느라 안 좋은 거 아니야?”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전구의 열기와 빛은 나무가 느끼는 계절과 밤낮을 헷갈리게 한다. 이것은 분명 트리 나무의 건강을 해치는 원인 중에 하나지만, 같은 종류 비슷한 나이의 오른편 화백나무가 특별히 더 건강해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전구들이 가장 큰 이유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트리 나무 옆에도 오른쪽 그룹과 대칭되게 울타리 안에 전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고 한다. 대략 7~80살의 나이를 가진 이 나무들은 자연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영역에 들어와 있는 나무들이다. 연이어 소개할 나무들 또한 그러한데, 이렇게 정원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자연에서 자라는 나무들보다 병충해에 취약하며 상대적으로 짧은 생을 산다고 한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서 가꿔도 끝은 분명 있는 법. 먼저 쓰러진 전나무처럼 이 나무도 그 끝을 향해 살아가고 있다. 아마도 쓰러지면 크리스마스트리는 또 다른 나무의 몫이 되겠지만 말이다

줄기 가까이서 본 화백나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은, 은행나무

백양로에 서 있는 수많은 은행나무들

  연희관의 뾰족한 양 끝 삼각 지붕은 금방이라도 건물이 통째로 하늘을 향해 솟아버릴 것 같은 인상을 종종 준다. 그 지붕의 아래로 시선을 쭉 옮기면 역시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가로수로도 흔한 이 나무는 백양로를 들어서면 길게 줄지어 있는 그 나무다. 공사 이전의 백양로에는 지금보다는 꽉 찬 은행나무가 많았다. 여름이 되면 샛초록이었다가 가을에는 샛노랑이 되는 모습은 계절이 지나감을 느끼게 해줬다. 한편 떨어지는 은행들은 낭만과는 조금 거리가 먼, 코를 찌르는 냄새를 풍겼다. 하지만 길이 바뀌면서 풍경도 바뀌고 냄새도 사라졌다. 지금 있는 나무들은 가느다란 가지에 한여름임에도 백일 배기 아이의 손바닥만 한 작은 이파리들을 가지고 있지만, 대신에 전에 있던 선배 나무들처럼 커질 창창한 미래를 갖고 있다. 그럼 그 많던 선배나 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공사를 진행하면서 많은 나무가 뽑혔고 몇몇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교목[각주:4]들 위주로 보존이 진행되었다. 백양나무 이후 백양로를 지킨 은행나무[각주:5]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는데, 공사와 함께 일산의 삼애캠퍼스로 이전되었다가 마무리됨에 따라 그 자리에 다시 심으려고 했다. 그러나 공사를 거쳐 땅이 바뀌었다. 또한, 학교 가운데 길의 나무들은 조경의 측면에서 통일성이라는 숙명을 가지게 되는바, 몇 번의 이주와 이식 후 생존을 위해 가지가 잘려나갈 일을 약속하고 있는 기존의 은행나무들은 그 목적에 부합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의 원래 자리를 지금의 후배들에게 내줄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러한 사연을 가지고 백양로에서 새로이 자라나는 은행나무들은 총 93그루이다. 참고로 선배 은행나무들 46그루는 학교 남문부터 회전교차로까지 이르는 길에 새로이 자리를 잡았다. 가지치기해서 예전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곧 그 모습을 되찾을 거라 믿는다.

멀리서 보이는 남문의 은행나무들. 몇 번의 이주를 거치고 예전의 모습을 많이 잃었다


겹꽃 복숭아나무 a.k.a. 미친 나무

맨 왼쪽에 나무기둥으로 받쳐진 나무가 복숭아나무다

  한글탑이 있는 잔디밭 한켠에 올봄부터 자리를 잡고 있는 나무가 한 그루 있다. 한 나무에서, 심지어 한 송이의 꽃에서도 여러 색깔의 꽃잎이 나는 이 나무는 일명 미친 나무라는 이름을 가졌던 옛날 그 나무의 아이나무다. 주변 친구들로부터 벚나무다 혹은 언론에 예전에 소개된 바 풀또기[각주:6]다 하는 얘기들은 다 사실이 아니다. 심지어 이 나무의 광증(狂症)은 누군가에 의해 가지 붙이기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국문과의 서상규 교수님이 열매를 받아 그의 고향에 심어서 키운 지금의 나무[각주:7]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나무는 미친것이 아니라 보통의 복숭아나무들과는 조금 다른 꽃을 피우는 나무인 것이다.

  그런데... 이 나무와 똑같이 생긴 나무가 어학당 쪽에도 있다는 것을 아는가? 이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하면, 어학당 앞에 있는 것은 옛날 그것의 뿌리에서 자라난 작은 나무를 학교에서 보관한 것이다. 씨앗을 보관해 싹을 틔운 서상규 교수(언어정보연구원장)의 일터이기도 한 어학당 앞에 학교에서 기념으로 심은 것이다. 이 두 나무는 촌수로 따지면 3촌쯤 되는 것이다.

  물론 어학당 앞의 나무와 달리 한글탑 잔디밭에 위치한 복숭아나무는 이제 예전처럼 사람들이 맘껏 그 앞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모양은 아니다. 자그마한 울타리가 쳐져 있고 전에 비하면 외진 곳[각주:8]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소 뜬금없게 자리 잡고 있는, 이제는 솜사탕 나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진[각주:9] 이 아이는 여름을 맞아 솜털이 달린 새파란 복숭아를 맺으며 묵묵히 자라고 있다.

한여름의 복숭아 나무, 올해 가을에는 복숭아가 영글고, 내년 봄에는 삼색의 예쁜 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학교의 몇몇 나무들의 사연과 정체를 밝히는 작업을 지난 여름 동안 했으나 맨 처음 시작이었던 백양로의 브로콜리들을 아는 주변 사람들은 많지가 않았다. 그들의 정체를 알만한 고학번 선배들은 공룡들이 멸종하듯이 교정에는 보이지 않고 몇몇은 대학원 연구실이라는 곳으로 찾아가야 있었지만, 대부분 ~ 그 뭐 백양로에 있었지하는 정도의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캠퍼스 내 나무탐구에 도움을 주신 조경팀 박현식 팀장님으로부터 늦게나마 얘기를 들었을 땐, 다른 관목들처럼 브로콜리[각주:10]들도 공사 때 다 사라졌다고 한다.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이제 흙이 아닌 주차장을 종착지로, 막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잔디들이 있다. 재창조 공사의 영역 안에 있던 나무와 풀들은 이제 그 풍경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만 있을 뿐, 어디에도 없다.

  무더위에 지쳐가는 나무와 사람들을 보며 청경관 옆 벤치에서 브로콜리들을 그리워하던 중 바닥을 뚫고 심어진 굵은 나무가 보였다.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이 나무, 나무의 주변을 둘러싼 벤치의 바닥이 자연스러운 듯 낯선 이 나무. 이 나무는 무엇일까. 이 나무에 대해서 아는 것이 나무를 지키고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하지만 생각할 틈도 없이 식물도감을 찾으러 중도로 가는 발걸음은 빨라지기 시작했다.


 글 편집위원 쑤쑤


  1. 본 글에 나오는 각종 수치에 대한 나무에 대한 정보는 시설처 조경팀의 박현식 팀장님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본문으로]
  2. 백주년기념관에 있는 연세대학교 박물관 내 연세기록보존소에 문의한 바 2003년 12월에 점등 된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본문으로]
  3. 크리스마스트리는 한국의 ‘구상나무’? by 국립생태원 블로그. 제주 특산종인 구상나무는 특유의 멋진 수형으로 크리스마스트리에 쓰는 나무로 유명하다. [본문으로]
  4. 2m 정도의 높이를 기준으로 그보다 작으면 관목, 크면 교목이라 한다. 단순히 키로 비교하는 것은 아니고 줄기가 중심 줄기에서 뻗어 나가는가 땅속 부분에서부터 갈라져 나오는가 등 여러 요소로 구분한다(네이버 두산백과를 바탕으로 정리) [본문으로]
  5. 연세춘추 2013년 10월 6일 자 정치외교학과 김용호 교수의 칼럼 “백양로에는 백양나무를 심어보자”에 보면 1960년대 후반, 최루탄 때문에 백양나무(초창기 이과대의 Becker 교수가 백양나무를 심어서 백양로라 불리는 것이다)가 다 스러져가서 은행나무를 심기 시작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일간스포츠 2006년 10월 17일 자 기사인 “한나무에 세가지 색깔 꽃이 피는 xx나무”에 보면 ‘풀또기’라고 나와 있다. 한편 동아닷컴 2008년 4월 18일자 [헉! 튀는 과학] 코너에는 ‘겹벚나무’라고 소개되며 이명민 연세대 생명시스템대학 교수가 돌연변이가 일어난 나뭇가지를 꺾꽂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지만, 전부 사실이 아니다. 언급된 두 나무와 미친 나무 모두 장미과라는 공통점이 있긴 하지만. [본문으로]
  7. 기존 나무의 2세대인 지금의 나무 역시 똑같이 다양한 색깔의 꽃을 가진 것을 보면, 단순한 접목이 아니라 유전자가 달라져서 그렇게 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본문으로]
  8. 공사 이전처럼 한글탑 옆에 심으려고 했으나 잔디들과의 공생을 위해 한가운데가 아닌 변두리에 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13년도 1학기 수업에서 서 교수가 제자들과 함께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연세춘추 4월 17일자 페이스북 기사에서 참고) [본문으로]
  10. 향나무라고 하며 본관 앞에 심어진 둥그런 정원수들과 같은 종류의 나무들이다. [본문으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