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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린 시절, 편히 앉아있는 내게 엄마는 여자가 그렇게 앉으면 안 돼요.”라고 가르쳤다. 조금 큰 후에는 계집애가 다리 그렇게 벌리고 앉는 것 아니야!”라고 일침을 가했다. 한 번도 두 번도 아닌, 일상에 걸친 이 훈계는 이젠 귀를 통해 나의 온몸에 익어 버렸나 보다. 다리를 벌리고 앉으면 스스로가 어색하고 민망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반면 남동생은 줄곧 다리를 쩌억 벌리고 앉는데,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그 아이가 나와 같은 이유로 어른들에게 질타를 받은 일은 없다.

내가 계집애가로 시작하는 훈계를 들은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나는 집에서 하의를 잘 걸치지 않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너는 여자애가 아빠, 남동생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니? 옷을 그렇게 훌렁훌렁 벗고 다니니?” 하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엄마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했기에 마지못해 바지를 챙겨 입었는데, 지금에 와서야 의문이 든다. 왜 팬티만 입고 다니는 남동생에게는 그 누구도 질타를 가한 적이 없는 지 말이다. 왜 나에게만 에티켓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가?

다른 사람의 속옷 차림은 아무리 가족이라도 보기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나 성별이 다를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기에 내가 엄마의 잔소리를 듣고 잠자코 바지를 주워 입지 않았던가? 아무리 날씨가 덥고 아무리 집 안이라도 말이다. 팬티를 입고 다리를 쩍 벌린 남동생의 모습은, 그쪽에서 여기는 팬티 입고 다리 쩍 벌린 내 모습만큼이나 꼴불견이란 말이다!

 

1. ()스럽다는 것

정숙한 자세의 압박은 대다수의 여성들이 경험하는 것이지만, 사실 집에서 옷을 갖춰 입는 문제의 경우는 각 가정의 문화와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위의 두 사례가 공통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있다. 바로 여성에게 좀 더 조심성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쟤는 참 천상여자다.

쟤는 진짜 상남자야.

성과 관련해서 문제시되기 쉬운 발언들을 모두 압축하면 크게 위의 두 마디가 된다. 여성스럽다거나 남성스럽다는 의미를 가진 발언들은, 특정한 성별을 지닌 사람은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프레임을 강화시킨다.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쥐도 새도 모르게 위의 발언들을 몸에 익혀 왔다. 이제는 내가 다리를 벌리고 앉으면 어색한 기분이 들고, 더운 여름에 남동생이 팬티만 입고 집을 당당하게 배회할 동안 혼자서 에티켓을 지킨답시고 이전에는 답답해했던 바지를 자연스레 챙겨 입는 것처럼 말이다.

남성→여성의 젠더 질서

남과 여의 구분

나에게 그랬듯 대다수의 여성에게는 꼼꼼하고 세심할 것이 요구된다. 이러한 따뜻함, 세심함, 얌전함, 정숙함 등등 여성스러움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들은 대부분이 꼼꼼한 성격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일상 속에서 우리에게 여성스러움을 요하는 것들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우리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입게 되는 교복을 떠올려 보자. 기본적으로 여학생은 치마를 입을 것이 기대된다. 바지 착용을 허용하기는 하지만 절대다수의 여학생들이 치마 교복을 입을뿐더러 실제 학부모와 학교 측 모두 여학생들이 바지보다는 치마를 입고 다닐 것을 장려한다. 왜 그런 것일까?

그냥 치마를 입는 것그 자체보다는 치마를 통해 여성들의 조신한 행동이 어느 정도는 체화된다는 점에서 이를 눈여겨보아야 하겠다. 어린 시절부터 신체의 은밀한 부위와 속옷을 타인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속바지를 챙겨 입어야 하고, 앉았을 때 다리를 모으고 앉아야 한다. 다리를 벌리고 오므리는 일은 성적 함의를 지님에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여성들은 다리를 모을 것이라는 제재를 통해 자세와 성적 욕망을 억압받기 십상이다.

여자아이들의 행동을 힐난하는 말들은 여자애가라는 말로 시작한다. 여성스러운 것의 범주를 이탈한 행동을 하면 여자애가 그게 뭐니!”라는 말로써 압박이 가해지는 것이다. 글씨체가 예쁘지 않으면 여자애가 글씨가 왜 이러니?”, 걸음걸이가 팔자이거나 보폭이 넓을 경우에는 여자애가 왜 그렇게 걷니?”, 욕설을 내뱉거나 거친 표현을 사용할 경우 여자애가 말투가 그게 뭐니?”라고 질책한다. 여성은 글씨체가 오밀조밀 예뻐야 하고, 일자로 예쁘게 걸어야 하고, 말투도 조곤조곤해야 한다는 것을 학교라는 사회에서도 내면화시키는 것이다. 자연히 교실을 꾸미는 활동이나, 게시판을 정리하거나 칠판에 전달사항을 적는 일들은 여학생들에게 맡겨진다.

이즈음에서 잠시 위의 두 번째 발언을 돌이켜 보자. “쟤는 진짜 상남자야.”라는 말. ()스러울 압박은 남성에게도 가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생물학적 남성임에도 사회에서 요구하는 남성성에 부합하지 않아 고통스러워하는 남자들이 상당히 많다. 심지어 남성들의 고통이 의외로 여성들의 고통에 비해 침묵으로 일관되는 경우도 있다.

여자아이들에게 기대되는 여성스러움이 세심함이라면 남자아이들에게 기대되는 남성스러움은 주로 묵직함과 투박함으로 간추릴 수 있다. 말이든 행동이든 통제되어 있을 것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우는 것이 남자답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도 묵직함을 기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일례이다.

남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대표적인 사항들은 감정을 통제하고, 입이 무겁고, 힘이 세고, 운동을 좋아하는 것 등이다. 여성스러움과는 확연히 대비된다. 학교에서 학급의 업무를 분담할 때 짐을 운반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는 남학생들에게 맡기고, 남학생들은 체육 수행평가에서 유리할 것으로 여긴다.

남자아이들이 남성스러운 범주에서 이탈한 행동을 할 경우 여자아이들에게와 비슷하게 남자가라고 시작하는 말들로써 제재가 가해진다. 자신이 지닌 생물학적 성과 그에 따른 역할을 새삼스럽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류의 질책들은 너의 행동은 남자가 하면 안 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너 남자 맞니?” 내지는 여자애 같다는 말은 대부분의 남자 아이들에게 큰 모욕으로 여겨진다. 남성스러움에 부합하지 못하는 남학생은 때때로 게이 같다는 조롱을 받기도 한다. (게이가 뭐 어때서!)

 

2. ()스러울 압박

사람들이 성()스러울 압박을 느끼는 이유는 첫째로 정상과 비정상의 확연한 구분에 있다. 사람들은 다수에 속하고 싶어 하며 다수와 소수의 구분은 너무나도 뚜렷하다. 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여성스러움과 남성스러움은 아주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고, 여성의 경우 여성스러움에 속하지 못할 때 소수가 되며 남성의 경우 남성스러움에 속하지 못할 때 소수가 된다.

사실 구분 자체가 특정 성별에 부합하는 행동을 해야 할 압박을 만든다기보다는, 이러한 구분을 통해 다수에 속하는 범주가 권력을 획득하게 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 사람들은 다수에 속하고 싶어 하기 마련이며, 우리는 성별의 구분에 있어 다수에 속하는 범주가 어떤 것인지 아주 철저하게 내면화한 상태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여성스럽다고 여겨지는 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남성스러운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며 자신의 성에 부합하는 역할을 이행하지 않았을 때의 시선을 두려워한다.

, 우리가 다수에 속하기 위해 계속해서 일종의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행해 온 연기 가운데 일부는 이미 교정되어 이제는 우리 몸에 배어 있기도 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위의 사람들을, 우리가 그들을 알든 그렇지 않든, 의식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각자의 생물학적 성에 기대되는 행동의 범주 내에서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대다수의 여성들은 몸가짐을 단정하게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주의를 기울이고, 흐트러진 자세로 있다가도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고쳐 앉고는 한다. 성 역할을 구분하는 압박과 다수의 권력, 그리고 그에 따르는 우리 자신의 통제는 모든 곳에 스며들어 있다. 우리의 집에도, 학교에도.

 

3. ()을 둘러싼 장벽을 무너뜨릴 것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일상 속의 성 내면화는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미 여성스럽다’, ‘남성스럽다는 말을 듣자마자 특정한 단어와 이미지들을 반사적으로 떠올린다. 사실 생물학적 특성상 태생부터 여성과 남성은 구분되며, 신체적 조건 또한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체적 구분으로 인해 특정한 행동양식이 요구되는 것은 많은 문제를 낳고 있다.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성()스러움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에 따른 사회적 역할기대가 거의 강요에 가깝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로 인해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처음에 예로 들었던 몸가짐 역시도 그렇다. 남성이 다리를 꼭 붙이고 앉으면 계집애처럼 여겨지지만 여성의 자세가 흐트러져있을 때는 손가락질 받는다. 이는 그저 누가 어떻게 앉거나 제스처를 취하는것에서 그치지 않고 남성과 여성을 자연스럽게 구별 짓는 기제로 작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다른 사람 의식하지 말고, 모두 편하게 앉읍시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러한 문제를 인지하는 모든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다리를 벌리고 앉을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 다리를 모으는 것이 장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에 대한 억압 기제로서가 아니라, ‘남녀를 불문하고에티켓으로써!

자세를 포함해 다른 사람들을 의식한다는 것과 그에 따른 자신의 행동 통제는 사회생활에 필수적인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모르는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아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지하철에서 다리를 쩌억 벌리고 앉아 옆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것. 다리를 모으는 것이 언젠가는 성별 불문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으면 좋겠다.

무슨 말이냐고? 남성과 여성의 구분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구분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강요가 나쁘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는 행동 자체가 불편해서 싫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별에 따라 다른 잣대로 이뤄지기에 싫은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자기 통제는 성별에 의해 구분될 것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사는 사회에서 원활히 어울리기 위한 에티켓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는 말이다. 여자는 이래야 하고 남자는 저래야 한다는 강요가 아니라.

 

 

글 편집위원 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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