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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도시의 존재 존재의 도시] I, Seoul, You

연희관공일오비 2019. 9. 22. 16:51


 서울의 하루는 바쁘게 흘러간다. 바쁠 수밖에 없다. 서울은 긴 시간 동안 한반도 내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굳히며 형성된 한국의 심장과 같은 공간이다. 그리 넓지 않은 땅을 가진 서울에는 약 1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우리나라 총인구의 약 20%에 달하는 숫자다. 그리고 동시에 약 1500여 개의 공공청사 및 복지시설이 존재한다.[각주:1] 국회의원들은 저 멀리 바닷가의 공기 좋은 마을이 아닌 서울에 모여 열띤 토론을 나눈다. 대통령의 집무실과 거주공간 또한 당연하게도 서울에 있다. 만일 영화나 소설 속에 흔히 등장하는 재난 사태가 서울까지 퍼지게 된다면, 우리나라의 모든 기능은 마비될 테다. 이런 특수한 상황조차도 서울이 배경이라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한국의 심장이 과연 건강한지, 그리고 심장이라 불리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애정 어린 시선을 받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이 글을 읽고 있을 독자 중 대부분은 서울에 거주하고 있을 것이며, 필자 본인도 곧 서울에 거주하게 될 사람이다. 서울이라는 공간을 통해 나와 당신이 조금 멀게나마 공통점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새로운 일인가.

 

 재미있게도 이번 공일오비에 실린 글을 쓴 편집위원들은 전부 서울 태생이 아니다. 서울과 도시에 관한 글을 구상하고자 안간힘을 쓰던 와중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다. 서울에 오래 머문 사람은 있어도,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해외든 지방이든, 모두 엄밀히 말하면 서울 기준 이방인인 셈이다. 편집위원들에게 서울과 출신지에 관한 가벼운 서면 인터뷰를 진행한 후에는 서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더욱 커졌다. 같은 질문에 대한 다른 답변을 정리하며 과연 나는 서울에 대한 어떤 감상을 가진 사람인가, 하는 가볍지 않은 질문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맴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천천히 글을 시작하려 한다. 나와, 서울, 그리고 당신.

 

 

 

#달라도 너무 다른 이곳

 

 서울의 인프라는 압도적이다. 우리나라 인구의 5분의 1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니 그럴 수 있다 하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으리라. 하지만 비서울 지역, 특히나 서울과 인접해있지 않은 지역과 서울 간의 차이는 심각할 정도로 크다. 이는 비서울 지역 출신의 사람이라면 체감하기 아주 쉬운 지점이다. 필자를 예시로 들어보자면, 본인은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 전라도가 아닌 지역에서 장기간 머물러본 적이 없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철저한 지방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내가 서울을 간혹 올라가야 할 일이 생기곤 했는데, 학교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라든지 체험학습이라든지 뭐 그런 일들 덕이었다. 덕이라고 말하는 게 옳은 것이, 서울을 다녀올 때마다 나의 세계는 조금씩 넓어져 갔기 때문이다. 고작 지구에 붙어있는 작은 나라의 수도뿐인데 무슨 세계까지 넓어지냐고 비아냥거린다면 딱히 할 말을 찾기 어렵겠지만 실제로 그러했으니 그 자체가 증거 아닐까. 전주는 도시다.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도 나름 잘 알려져 있고 딱히 살면서 불편한 점을 찾지 못한 아주 적절한 거주공간이다. 그런데 이제껏 그런 공간에서 종일 지지고 볶다가 대뜸 버스를 타고 서울을 향한 대장정(?)을 시작하고 보니, 이곳은 정말 믿을 수 없이, 조금은 무서울 정도로 적절한곳이었다. 그 유명한 샌드위치 브랜드인 서브웨이의 실물도 처음 보았고, 서울 사람이라면 눈감고도 탄다는 지하철도 처음 보았다. 심지어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헤매지도 않고 지하철역을 누비는 많은 사람을 보았다. 나와 친구들은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노선도를 보고, 또 보고, 다시 보았는데 말이다. ‘눈 뜨고 코 베어간다, 우리 할머니는 내가 서울을 갈 때마다 걱정하며 놀렸다. 전주같이 촌에서 올라온 애들은 서울 가시나들이 바로 깐본다고[각주:2] 정신 단단히 붙들고 다니라고도 하셨다. 눈동자의 생기를 잃은 채 기계적으로 자기 갈 길을 가는 사람들의 빠른 발걸음을 보며 저절로 할머니가 떠올랐다. 저 사람들이 내가 눈을 뜨고 있는데도 내 코를 베어 갈진 모르겠는지만 알 수 없는 냉기 때문에 괜히 코가 좀 시린 것 같기도 했다. 내게 서울의 첫인상은 그만큼 차가웠다.

 

서울에 와 보니 서울에는 맛있는 식당, 예쁜 카페가 훨씬 많고 여기에 없는 볼거리 놀 거리도 너무 많더라고요. 서울에 비해 허전하고 텅 빈 느낌이 들고 제 바쁜 일상의 대부분이 서울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여기에 있다 보면 뭔가 놀고만 있는 것 같고 뒤처진 느낌이 들어요. 서울에 가야 일상에 다시 시동이 걸리는 느낌이고 바쁜 사람들 틈에 섞여 있으면 뭔가 저도 나름 바쁘게 잘살고 있는 것 같은?” - 대전 노은동에서는

 

저에게 제가 살던 동네랑 서울은 어떤 차이가 있다고 대답하기 힘들 정도로 다른 공간이에요. 그냥 서울에 와서 경험하는 거의 모든 게 저의 동네엔 없었고, 동네에서 제가 살던 기존의 생활 방식은 서울에서 전혀 가능하지 않았으니까요.” - 구미 선산읍에서는

 

대중교통은 배차 간격이 엄청 커서 주로 걸어 다니거나 부모님 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생각해보면 이용할 수 있는 병원이나 의료기관도 되게 적었어요. 그래서 제대로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큰 병원을 가려면 또 전주나 광주를 갔습니다.” - 정읍에서는

 

 공간의 차이가 불러오는 변화는 명백하다.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살다가 서울로 거주지를 옮기게 된 이들은 방대한 인프라가 익숙해지고 시야에 걸리는 수많은 사람에 익숙해진다. 더욱이 인프라가 부족해 고향에서 겪었던 불편이 사라지게 되니 자기도 모르게 서울은 편하다라고 생각하는 경향도 없지 않아 존재한다. 그것이 어떤 류의 편안함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하나부터 열까지, 곱씹을수록 고향과 서울은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점차 느끼게 된다.

 

 

 

#비교가 만들어낸 균열

 

 아까 필자가 전라도를 벗어나 산 적이 없다는 말을 했었다. 그럼 20여 년 동안의 내 고향은 나에게 어떤 감상을 주었는가? 간단하다. 편안했다. 익숙했고, 이 정도면 만족스러웠다. 고향을 떠나는 것이 삶의 목표고 서울이 아니면 죽어버릴 것 같은 극단적인 감정 따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나고 자란 곳에 대한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세계가 바로 이곳 전부였기 때문이다. 나를 둘러싼 공간, 자연, 사람들. 모두 전주에서 비롯된 환경이 내 세계 그리고 나 자신을 만들어냈다. 아마 서울에 대한 첫인상이 시리도록 차가웠다고 느꼈던 것이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엄청난 유동인구와 복잡함으로는 세계 제일일 듯한 지하철 등등은 모두 내가 처음 겪어 본 것이었다. 전주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으니 당연히 낯설고 어색했겠지. 더 나아가 그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심지어 그것에 스며든 서울사람들을 보며 두려움까지 느꼈더랬다. 그리고 생각했다. ‘굳이?’

 

 ‘굳이?’가 가지는 뜻은 크게 두 가지 정도가 있었는데, 첫 번째로는 괜한 자존심에서 비롯된 혼자만의 아성이었다. 서울이 외국도 아니고 말이 안 통하는 곳도 아니고 어차피 다 대한민국인데! 이런 곳에서 굳이 두려움에 벌벌 떨어야 하는 건가, 하는 당찬 생각을 했다. 물론, 솔직히 고백하자면 자기 합리화였다. 처음 지하철을 탔을 때 일회용 티켓을 잘 사용하지 못해 지하철 개찰구에 있는 기계에서 턱, 막혀버렸었다. 곧바로 직원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지하철에 탑승할 수 있긴 했지만, 그 일이 있고 난 후 자신을 위로하고자 저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외국도 아닌 이곳에서 통행의 어려움을 겪고 창피하다는 감정을 느꼈다는 걸 애써 감추기 위한 나만의 방식이었다.

 

 두 번째, 이번에는 자존심이라기보다는 낯선 것에 대한 거부 반응과도 비슷했다. 한 사람이 별 탈 없이 살아가기 위해 정말 이런 복잡한 교통시설들과 문화시설이 필요한 걸까? 지난 시간을 서울이 아닌 곳에서 잘만 살아왔던 나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었다. 이만한 인프라가 구축되어있다는 것은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다음 단계의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서울은 과하다!’고 생각하는 순진함이 존재하기도 했지만.

 

성인이 되기 전 저에게는 살기 좋은 곳이었어요. 지금의 저를 만드는 데 긍정적인 영향도 많이 준 곳이었다고 생각하고요.” - 구미 선산읍은

 

서울에 살기 전까지는 제 본가가 있는 이곳이 정말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여기서 살아야겠다는 말도 입에 달고 살았고요. 사람도 많지 않고 식당이나 카페 노래방 등등 있을 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 대전 노은동은

 

 전주는 나에게도 그랬다. 살기 좋은 곳, 이만하면 평생 여기서 살아도 좋을 곳.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일 수 있겠지만 정말 그렇게 믿었다. 전주는 날씨가 온화했고 적당한 인구가 모여있었으며 식사도 맛있게 할 수 있고..., 등등. 뻔한 말들이지만 진짜 사람 살기 이만한 도시는 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살기 적당한공간에 대한 나의 확신은 서울의 면면을 마주하고 나서부터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살기 좋다는 말, 도대체 나는 어떤 기준으로 내가 사는 공간을 그렇게 수식했던 걸까.

 

말하자면 여기도 꽤나 화려한 동네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여기보다는 서울이 훨씬 화려하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서울에 사는 동안 서울의 화려함에 물들어버려서... 분명히 이 곳도 살기에는 정말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더 화려하고 더 풍부한서울을 지향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뭔가 즐기고 누릴 것이 많고 생활이 편리해도 서울보다는 덜 하다, 이런 느낌?!” - 부산 해운대는

 

 서울은 내가 살던 곳과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거대한 곳이다. 어떤 지역을 단순히 그곳이 차지하고 있는 넓이로 판단할 수 없다는 건 당연하고, 그런 당연함 속에서도 서울은 독보적인 위치다. 살기 좋고 나쁨을 떠나서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최적의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실 공간이라는 단어로 속박할 수도 없다. 서울은 분명 한국인에게 공간으로도 인지되지만, 심리적인 면에서도 서울은 그 자체로 큰 의미를 가진다. 중심, 센터, 심장. 근원, 모든 것의 집합을 이르는 또 다른 단어인 것이다. 전주가 살기 좋은 이유를 굳이 나열하려고 했던 내 노력은 서울이라는 거대한 이름 앞에서 조금씩 초라해진다. 서울을 경험한 후로는 고향에 없는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그런 것들이 하나씩 쌓여 또 다른 기준을 만들어낸다. 내가 살아가던 공간은 진짜 살기 좋은 곳인지에 대한 의문과 함께.

 

 

 

#나는 어디사람?

 

 스스로를 서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천사람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 여름이 지나면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 약 4개월을 살아야 할 것이고, 4개월이 지나면 서울에 거주할 준비를 해야 하지만. 전주를 떠나 산 지 고작 4개월이면서 애초에 내가 인천사람이니, 서울사람이니 따질 것이 못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곧 태어나고 자란 곳을 뒤로하고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보낼 곳이 서울일 확률이 굉장히 높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미래의 내가 과연 자신을 서울사람이라고 지칭할지는 아주 재밌는 질문이 될 것 같다. 죽을 때까지 나는 전주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물론 중학생 때 멈췄다. 선생님은 늘 좋은 학교를 나와야 네가 하고픈 선택에 학력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하셨고, 여기서 좋은 학교란 당연히 서울에 소재한 학교라는 전제를 포함했다. 주변의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앉아서 공부하는 것 정도는 열심히 해낼 수 있었던 나는 서울로 대학을 가야 한다는 강박과도 같은 목표 아래 펜을 잡았다. 결과적으로 목표는 이뤘고 자연스럽게 전주를 떠나는 몸이 되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붙어야 하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전주 토박이로서의 평생은 자연스럽게 저버렸던 것이다.

 

 “‘어디사람입니다.” 이는 분명히 어디에서 왔다고 설명하는 말과는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어디에서 왔다는 말과 어디사람이라는 말을 동일시해 사용할 때가 있다. 출신지로 확정되는 특징과 본인이 생각하는 자신의 정체성은 분명 다를 수 있는데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곳에 대한 애정은 당연하지 않다. 그 공간이 나에게 주는 것들에 대한 감사 또한 마찬가지다. 그곳은 편안하지 않을 수 있고, 애틋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숨 쉬며 살아가는 공간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지니지 않은 무색무취의 장소가 될 수도 있다. 아무리 좋은 시설과 인프라가 나를 위해 갖춰져 있다고 하더라도 마냥 감사하지 않을 수 있다. 이방인들에게 서울은 그런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서울에 살고 계시는 큰이모를 만난 적이 있다. 인천이든 서울이든 나에겐 영 살만한 곳이 못 되는 것 같다고 큰이모에게 털어놓자 그녀는 웃으며 내게 말했다. 1년만 있어 보라고, 집에 내려가기 싫어서 울고불고할지도 모른다고.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도대체 뭐 때문에 울고불고한단 말이야?

 

서울사람이 되어버렸는데 서울사람이 되기 싫은, 그러나 되지 않는 걸 또 약간 두려워하는 서울사람입니다.”

 

 편집위원들로부터 서면 인터뷰 답변을 받았을 때 가장 공감이 갔던 말이다. 서울사람이 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감상. 서울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할 때마다 드는, 혼자서는 정의하지 못하는 묘한 감정에 가장 가까운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살고있는 사람들에게 서울이 가지는 의미가 거대한 만큼 그곳에 포함되지 못하는 삶에 대해서 실패 또는 뒤처짐이라고 여기는 풍조가 어디서나 존재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회와 사람들 속에서 혼자만의 신념을 가지고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기에 서울을 거스르는 자신에 대한 불안함은 제거하기 힘들다. 나는 서울사람이 아니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서울사람이어야 할 것이고, 가끔은 서울사람이기를 강요당할 때도 존재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스스로를 결정짓는 순간 내가 어떤 공간에서 배제되는지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

 

 

 만족의 기준은 사람마다 매우 다르다. 기존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환경 탓일 수도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마음가짐이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우리는 만족의 기준에 대한 평균을 서툴게나마 만들게 되는데, 이는 각자의 기준을 털어놓으며 시작된다. 이런 시설 정도는 있어야지? , 동네에 그게 없으면 어떻게 사냐? 일상에서 가볍게 나누는 대화 속, 특정 공간에 대해 만족할 수 있는 기준은 점차 평균으로 수렴한다. 타인의 의견을 인식하고 무의식중 자신의 의견과 절충하는 것이다. 굉장히 추상적이고 주관적일 수 있는 지표가 다수의 생각을 펼치게 되면 점차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수준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그 결과, 어떤 곳이든 모든 이의 환심을 살 수는 없지만 서울은 그 자체의 특수성 덕에 만족의 평균이 되었다. ‘서울정도라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서울을 동경하는 것을 마냥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시선이 그것을 증명한다. 필자에게 과연 서울을 동경하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하겠지만, 서울에 대한 생각이 번져가고 그 과정이 복잡해질수록 단호하게 아니라는 답을 이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서울에 대한 환상이 분명 나에게도 있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이런 회의적 태도가 조금 우스울 수는 있겠다. 번쩍거리는 거리와 목 근육이 뻐근해질 만큼 고개를 올려야만 끝이 보이는 빌딩 숲, 내가 살던 곳에선 보지 못한 무수히 많은 문화시설. 차갑디차가운 첫인상의 서울은 그 와중에도 분명 어린 내게 막연한 동경을 끌어내곤 했다. 하지만 서울을 여러 차례 직접 마주한 이후 겪은 환상의 균열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잔상으로 남는다. 더는 서울이라는 공간을 온전히 꿈과 희망이 넘치는 곳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일상의 배경으로 바라보는 서울은 자신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생각이 떠돌든 말든 잘만 굴러간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자주 내긴 하지만 그 수많은 사람을 짊어지고 또다시 굴러간다. 그 위에 탄 많은 이들의 일상은 오늘도 서울에서 시작하고, 서울에서 끝난다



글 편집위원 두별(jhanstar@hanmail.net)

  1. 권영은, 「낡은 도시 인프라 보수에 7조600억원 투입」, 한국일보, 2017.06.12.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706121677182656 [본문으로]
  2. 깐본다 : 전라남도 지방에서 주로 쓰이는 ‘깔보다 (얕잡아 보다)’의 방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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