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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비평

[읽어내기] I have to kill you

연희관공일오비 2019. 10. 4.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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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otic beats, Pati Amor-<Killing Shangri-lah> (킬링이브 OST)

 

 

대한민국을 강타한 OTT 서비스[각주:1]에 남들보다 빨리 눈 떠 넷플릭스,

왓챠에서 꼭 봐야 한다는 드라마, 영화들은 일찌감치 정복한

상태였다. 이제 드라마를 5분만 봐도 나와 맞는지 안 맞는지 판단할 수 있는 ‘짬’이 생겼고 웬만한 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각종 SNS 광고에서 접하게 된 것이 <킬링 이브>였다. 두 여성 주연에 청불 범죄 스릴러라니, 이제까지 없던 조합에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킬링 이브>는 빈, 베를린, 런던 등 세계 각지를 배경으로, 그리고 영국 정보국 요원 이브(산드라 오)와 사이코패스 킬러 빌라넬(조디 코머), 두 주인공을 축으로 진행된다. 이브는 보안국 M15에서 일하다가 무능한 상사에게 욕을 퍼부은 후 비밀정보국 M16에 스카우트되고 빌라넬은 ‘트웰브’라는 의문의 조직 아래에서 청부살인을 업으로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킬링 이브>는 <루머의 루머의 루머>, <블랙미러>, <아메리칸 반달리즘>과 함께 나의 몇 없는 ‘인생 드라마’로 등극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킬링 이브>를 제외한 나머지 세 드라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이니, <킬링 이브>를 수입ㆍ배급한 건 2019년 왓챠플레이가 가장 잘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이 글의 목적은 단순히 당신이 <킬링 이브> 1화 플레이 버튼을 누르게 만드는 것이다. 버튼을 누른 후로는 이브와 빌라넬이 책임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네 인생이 영화나 드라마처럼 화려하거나 극적일 수는 없겠지만, 보니 앤 클라이드 같은 절체절명의 사랑이나 세계의 주목을 받는 스파이로서의 삶이 마치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미치도록 그리울 때가 있다. 따분한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탈출구를 찾아 나선다. 그것이 달콤한 디저트 한 입이든, 영상을 통한 대리만족이든. 이브와 빌라넬 역시 지루한 일상에 신물이 나 그 종착점에서 결국 서로를 만나고 새로움에 대한 갈증 속에서 서로에게 이끌린다. 보통의 관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브와 빌라넬이 각각 정보부 요원과 사이코패스 킬러라는 점인데, 양극단에 위치해야 할 것 같은 이들은 점점 서로에 대한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이브는 풍성한 검은색 파마머리를 빼면 처음 봤을 때부터 시선을 끄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다. 그마저도 묶고 다니는 경우가 많으니 외관상으로는 큰 특징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브의 수사능력이나 관심사는 예사롭지 않다. 상사들보다 두 발짝은 앞서 범죄자의 특징을 잡아내고 미끼를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집요함까지 갖췄다. 이브는 국제적인 여성 암살자들의 ‘팬’이기도 한데, 이 남다른 관심이 빌라넬에게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이브 자신은 안 그런 척하지만 사실 새로움에 굉장히 목마른 사람이다. 이브에게 따분한 것과 새로운 것은 극명하게 나뉜다. 따분한 건 지고지순한 남편 니코, M15에서의 생활, 고스트. 새로운 건 M16에서의 생활, 그리고 빌라넬, 빌라넬, 빌라넬. 원래도 여성 암살자들의 ‘팬’이었던 이브에게 나 잡아보라는 듯한 과시형 살인 방식에 젊음과 빼어난 외모까지 갖춘 빌라넬은 그야말로 완벽한 사냥감이 아닐 수 없다.

 

성서에서 이브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 그를 둘러싼 세상이 뒤바뀌듯, 잔잔한 일상에 질릴 대로 질린 이브에게 빌라넬은 달콤한 선악과. 빌라넬을 맛보고 이브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빌라넬을 안 순간부터 이브는 다른 것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빌라넬을 수사하는 데 수단과 방법, 합법과 위법을 가리지 않고 새롭게 등장한 조용한 살인마 ‘고스트’를 보고는 “저 사람 킬러 맞아? 재미없게”라며 짜증을 낸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브는 점점 충동적으로 변해 온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기도 하며, 매력적인 선악과이자 선악과를 건넨 뱀이기도 한 빌라넬은 결국 이브의 손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만든다.

 

 

 

 

 

<킬링 이브>를 보고 빌라넬에게 홀리지 않을 수 있을까. 선악과가 유혹적이지 않다면 선악과일 수 없다. 빌라넬 역은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에서 클로이 역을 맡았던 조디 코머가 연기했는데, 얄미웠던 레이의 친구가 이번에는 사이코패스 킬러로 변신했다. 빌라넬에게 빠져들되, 당신이 이브가 아닌 이상 그녀가 당신에게 하는 모든 말은 진심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자.

 

조디 코머는 인터뷰에서 ‘여자 암살자라면 가죽 캣슈트를 입고 6인치 힐을 장착한 채 벽을 타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해서 배역을 거의 거절할 뻔했다고 밝혔다. 그녀의 예상과 달리 빌라넬은 살인을 위해 위장할 때를 빼고는 드리스 반 노튼, 몰리 고다드 등 세계 각지 디자이너 브랜드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실제로 입고 나온 옷이 마음에 들어 몇 벌 구입하기도 했다고 한다. 빌라넬의 패션은 어딜 가든 주목 받고 싶어 하는 그녀의 성격과도 떼려야 뗄 수 없다. 매회 화려하고 값비싼 옷들로 자신을 감싸는데, 빌라넬의 패션이 이 드라마에서 하나의 볼거리가 되는 이유는 그녀의 옷들이 단순히 눈에 띄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세련될뿐더러 그녀의 이미지와 어우러져 캐릭터에 더욱 빠져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상단의 오른쪽 사진은 무려 그녀가 스파이로서 적격한지 상담을 받으러 갈 때 입었던 옷으로, 심각한 자리에 오버핏 시폰 드레스를 고른 엉뚱함이 참 빌라넬답다.


 

이브의 패션은 빌라넬과는 정반대다. 이브 역의 산드라 오 배우가 ‘솔직히 조디의 의상이 부러웠다’고 말할 정도로 이브의 의상은 대부분 무채색에 조금은 후줄근하고, 무엇보다 한결같다. 특히 M16로 이직하기 전 M15에서는 거의 사무직원과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옷에도 업무의 피곤함이 녹아 있다. 스타일링으로 배우의 이미지를 어떻게 형성하는지에 따라, 시청자들이 얼마나 그 인물을 닮고 싶다고 느끼게 만드느냐에 따라 몰입도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시종일관 머리를 질끈 묶고 있는 수수한 차림의 이브, 가발을 썼다가 아름다운 금발을 자랑했다가, 외관에서도 끊임없는 자극을 추구하는 빌라넬. 의상의 디테일에서도 나타나는 둘의 명백한 대비가 작품의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아무튼, 그런 이브를 위해 빌라넬은 이브의 캐리어를 훔쳐 ‘라 빌라넬’이라고 적힌 향수와 이브의 사이즈에 맞춘 5000달러 상당의 고급 옷을 한 무더기 채워 돌려보낸다. 이브는 향수를 뿌리고 낯선 칵테일 드레스를 입어보고는 자신의 실루엣을 놀랍도록 아름다워 보이게 하는 드레스에 감탄하며 빌라넬을 느낀다. 드라마 전체에 은은하게 퍼져 있는 섹슈얼한 분위기가 그 향수의 향기일지도 모르겠다.

 

 

 

 

 

매력적인 빌라넬에게 취해 정신을 놓았다간 피 보기 십상이다. 빌라넬에게 선물 받은 립스틱에 숨겨져 있던 칼 때문에 입술에 상처가 난 이브처럼. 빌라넬에게 살인은 그저 직업이자 숨을 헐떡이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재미를 느끼는 미션이다. 사이코패스인 빌라넬은 타고난 머리가 좋고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주어진 미션을 완수하는 데에 대단한 준비가 필요하진 않다. 경비가 삼엄해 실패할 거라고 콘스탄틴이 경고했던 임무에서도 타겟이 조향사라는 점을 이용해 향수를 가장한 독한 화학약품으로 질식하게 하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한다. 성별에 관계없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빌라넬이지만, 빌라넬의 외모만 보고 그녀를 탐하는 단순한 남성을 공격할 땐 더더욱 쉽다. 그들은 일단 젊은 여성에게 위협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빌라넬이 타겟에게 접근하기가 수월하다. 자신을 만지려는 나이 든 남성에게 “상대방을 만질 땐 동의를 구해야지”라며 가차 없이 머리핀으로 눈을 찔러 살해하는 장면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빌라넬은 워낙 평범한 것을 싫어해 살인 또한 과시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곧이곧대로 명령을 따르지 않고 언제나 헤드라인 감의 살인을 저지른다. 그러다보니 빌라넬의 상사인 콘스탄틴조차 빌라넬을 통제하기가 어렵고 또 해고하기엔 실력이 너무 뛰어나니, 비밀 조직으로서는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장 빌라넬다웠던 살인은 수간 페티쉬가 있는 남성을 살해한 것이었는데, 아내 몰래 사창가에서 변태적 유흥을 즐기는 남성을 유인한 뒤 투명한 유리창 안에 거꾸로 매달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배를 갈라버린다. 살해한 사람이 자신임은 철저히 숨기면서 살인을 했다는 사실과 살인 방식은 전혀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전시하고 싶어 한다. 흔히 괴담이나 잔혹한 살인 사건에 흥미를 느끼고 찾아보는 것처럼, 킬링 이브에서도 빌라넬의 살인은 한편으로는 끔찍하면서도 계속 보게 되는 어떤 것이었다.

 

빌라넬이 주변인들과 관계 맺는 방식을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꾸며내고 연기하는 것에 능하기 때문에 빌라넬에게 정말 소중해 보이는 인물이라도 10분 뒤에는 빌라넬 손에 죽어있기도 하다. 물론, 빌라넬은 그 사람에게 아무런 미련도 없다. 이웃집에 살았던 세바스티안은 빌라넬에게 반해 단둘이 데이트까지 하고 잠자리를 갖는다. 그는 빌라넬에게 “당신에게는 절대 상처 주지 않을 거예요”라며 진심어린 사랑고백을 하지만 그가 죽은 후에도 빌라넬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요즘 흔치 않은 순박한 청년 같아 내심 아까운 마음도 있었지만, 누가 봐도 잠깐 나타났다 사라질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래도 감안할 수 있다고 하자. 이후에 나타난 빌라넬의 옛 애인 나디아와는 정말 애틋하고 깊은 사연이 있는 것 같았지만 임무 수행에 방해가 되자 나디아가 트렁크에서 뭔가를 찾는 사이 차를 뒤로 몰아 뭉개 버린다. 이렇게 놀라울 정도로 ‘피도 눈물도 없는’ 빌라넬이 처음으로 죽이는 것을 망설이고, 죽이지 않기로 약속하고, 심지어 사랑까지 느끼는 인물이 바로 이브다. 앞서 말했듯 둘은 정반대의 삶을 살아왔는데, 사실 단순히 정반대인 캐릭터 둘만 가져다 놓는 것은 진부하다. 킬링 이브가 특별한 이유는 교집합이 없는 듯 있는 두 주인공이 서로에게 욕망을 느끼고 끌린다는 점에 있다.

 

 

 

Watch Out for the Snake

 

 

빌라넬은 이브에게 마음을 내 줄 듯 내주지 않는다. 이브를 향한 애정을 숨기지 않다가도 “당신을 특별하게 만드는 유일한 이유는 나야”라며 둘의 관계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툭 밀어낸다. 그동안 서로의 존재를 아는 것에서 그쳐 호기심이 생겼다면 회차를 거듭할수록 단둘이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서로의 사적인 영역에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발을 들인다. 그렇게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둘은 서로를 닮아가지만 둘 중 어느 하나도 호락호락하게 통제되지 않는다. 아무리 입으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도 상대는 어쩔 수 없는 뱀. “당신과 있을 때만은 감정을 느껴”라고 말하지만 방에서는 전날 함께 밤을 보낸 여자들이 줄줄이 나오는 빌라넬을 쉽사리 믿긴 힘들다. 빌라넬과 함께하며 계속해서 마주하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이브는 이제껏 살아온 삶에 대한 관성 때문에 집으로, 남편에게로 돌아가려 하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계속된다.

 

직장에서는 유머러스하고 좋은 일꾼, 가정에서는 남편과 다정한 삶을 살았던 이브에게서 빌라넬이 이끌어 내는 욕망, 충동, 호기심, 그리고 그것들이 이브와 주변 인물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주목해보자. 당신이 이브처럼 평탄한 삶을 살고 있다고 했을 때, 빌라넬이 건네는 선악과를 먹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모든 것이 빌라넬의 뜻대로 조종되고 빌라넬에 대한 당신의 욕망도 커질 때쯤, 그녀가 당신의 목에 칼을 대고 묻는다.

 

 

 

 

 

 

“Will you give me everything I want?”

 

 

 

 

 

 

 

 

 

편집위원 이네 (xiunnu@gmail.com)

  1. over-the-top. 광대역 인터넷과 이동통신의 발달로 스트리밍 서비스가 가능해져 PC, 스마트폰 등 다양한 기기로 OTT 서비스가 확장되었다. 대표적인 서비스로 미국의 넷플릭스(Netflix)와 훌루(Hulu), 국내 지상파 방송사의 푹(pooq) 등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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