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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비평

[일상비평] 공감에 관한 개똥철학

연희관공일오비 2017. 10. 22. 15:38

 

서재 문이 열려 있어 바닥에 사랑이가 똥을 쌌다. 이 똥은 누구의 책임일까? 

1. 똥을 싼 사랑이

2. 서재 문을 열어둔 누군가

3. 열린 문을 보고도 닫지 않은 누군가

4. 사랑이 똥을 제때 치우지 않은 엄마

5. 누구도 아니고 사랑이 똥을 엄마만 치우는 분담 구조

6. 사랑이에게 밥을 준 누군가

7. 사료 제조업자

8. 똥을 가리지 못하는 사랑이의 DNA

9. DNA를 물려준 사랑이의 부모

10. 사랑이를 키우자고 주장한 필자

11. 개를 길들인 인류의 선조

12. ...

  우리 집 개 사랑이는 열 살을 먹어 놓고도 아직 집 안 모든 곳이 자기 화장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즐겨 찾는 곳은 서재인데, 서재 문이 열려있다면 열에 아홉의 확률로 사랑이가 남겨놓은 흔적과 마주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이가 들어가지 못하게 서재 문은 항상 꼭 닫아두는 것이 중요하다. 이 사실을 우리 가족 모두가 알고 있지만 서재 문단속에 신경 쓰는 것은 사실상 사랑이 뒤처리를 도맡아 하는 어머니뿐이었다. 내가 이 노력에 동참하게 된 것은 서재의 한 켠에서 운동을 하기 시작하면서다. 그 전까지는 책을 가지러 정말 가끔 들락날락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개똥쯤은 못 본 척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두어 시간씩 그곳에 있어야 해서 강아지 실례는 더는 무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서재 문이 닫혔는지 수시로 확인하는 습관마저 생겼다.

  한 끗 차이로 달라진 자신을 보면서 든 생각은 어이없게도 ‘공감’에 대한 회의감이었다. 나에게 공감은 앎의 문제였고 ‘안다-공감한다-행동한다’는 하나의 수식이었는데 내 앎은 행동으로 이어질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문제가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 전에도 ‘1. 서재 문이 열려있으면 사랑이가 들어가 똥이든 오줌이든 쌀 것이다. 2. 사랑이 똥오줌을 치우는 것은 매우 귀찮고 고통스럽다. 3. 그러니 이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서재 문을 닫고 다녀야 한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개똥을 치워야 하는 위치에 놓이기 전까지는 별로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좀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서재 문 닫기를 설득했다면 이것이 잘 지켜졌을까? 사랑이 똥을 치우는 것이 얼마나 귀찮고 고통스러운지 호소하거나 마루를 닦는 데 써야 하는 물티슈가 경제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큰 손해라는 것을 지적했다면? 며칠 동안 서재 문이 잘 닫혀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금세 또다시 어머니만의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혹은 서재 문을 열어두는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열어둘 때마다 벌금을 매겼다면? 처음 몇 번은 몰라도 비난은 씨알도 안 먹혔을 것이며 벌금 제도는 애초에 성립되지 않거나 얼마 안 가 아무도 지키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공감에 회의감을 갖게 된 것은 어느 날 서재 바닥의 사랑이 똥을 치우면서 갑자기 찾아온 계시 같은 것이 아니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공감 불신론자였다. 아마 시작은 번화가면 으레 있는 자선 단체 부스 앞을 붙잡히기 싫어 빠르게 지나치면서 느꼈던 찝찝함이었을 것이다. 감정적으로 일절 동하지 않는데 감정이 없는 자체가 내가 상상한 것이든, 실제든 비난의 이유가 되었고 영문도 모른 채 나쁜 사람이 되기 일쑤였다. 가끔 그 찝찝함을 이기지 못하고 멈춰 서서 받은 팸플릿에는 누군가의 고통이 자극적인 이미지로 박제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든 불쾌감은 서명이나 기부에 참여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 불쾌감을 풀어쓰면 잘못한 게 없는데도 죄인이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문제의 원인이 전혀 다른 곳에 있는데도 엉뚱한 곳에 책임이 지워진다. 관심이 없어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아서, 기부하지 않아서 그런 고통이 계속 발생하는 것처럼 묘하게 책임소재가 바꿔 치기 된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은 그러한 개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그들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없기 때문에 결국 애초의 불쾌감은 좌절과 무력감으로 종결된다. 평론가 존 버거는 이것을 도덕적 무능함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그 원인을 단절에서 찾았다[각주:1]. 고통의 순간을 기록한 사진들은 맥락과 격리된 고통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것을 마주한 개인은 어떤 단절 고통스러운 누군가와 그렇지 않은 나 을 느끼게 되고 그에 대해 (당연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무력감은 단순히 무시되거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일종의 속죄 행위를 유발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사진들은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 이상으로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을 해결하는 데는 어떠한 효과도 내지 못한다. 팸플릿 속 아이가 지뢰에 사지를 잃은 것은 지구 반대편의 내가 기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지만, 아이의 고통 앞에서 영문 모를 죄책감에 개인들은 우왕좌왕한다. 그 뒤로 정작 책임이 있는 전쟁은 자취를 감춰버린다.

  그러니까 개똥을 다 같이 방지하고 치우기 위해서는 얄팍한 공감을 유도하거나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답이 아니다. 애초에 문제는 무관심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재 문을 잘 닫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에게 사랑이 뒤치다꺼리가 몰방 된 구조가 문제다. 서재 문이 열려 있어서 생기는 불상사가 한 사람만의 문제였던 구조 말이다. 이 구조에서는 당사자가 아니면 문제가 발생해도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이 없기 때문에 서재 문이 열려 있어도, 닫혀 있어도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결국 어떻게 구조를 뒤집을 것이냐의 문제다. 그리고 이 거창한 과업의 실마리는 역설적이게도 공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쿵저러쿵 해도 사회적 경계를 초월하고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데에 공감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맥락이 없어서 공감이 힘들다면 맥락을 만들어주면 될 테니 이 문제는 곧 우리 사회가 얼마나 역지사지의 경험을 쌓아갈 수 있는 곳인가의 문제가 된다, 이를테면 강아지 뒤처리 담당자가 아니더라도 살면서 적어도 몇 번은 의무적으로 개똥 치우기를 체험해야하는  그렇게 함으로써 개똥 치우기의 곤란함을 구성원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 사회가 있을 수 있고, 개똥 치우기 따위에 일말의 관심을 주지 않아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사회에서 서재의 문이 더 잘 닫혀 있을지, 더 나아가서 개똥 치우기를 모두가 돌아가면서 하는 날이 더 빨리 올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개똥 이야기에 영 설득이 되지 않는다면 채식주의자가 있는 모임에서 회식 메뉴를 정할 때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채식과 육식을 모두 할 수 있는 뷔페는 아마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선택지일 텐데 이것은 좋은 답이 아니다[각주:2]. 뷔페에서는 고기 먹을 사람은 고기를 먹고 채소 먹을 사람은 채소를 먹으면 되지만 채식에 대해서 더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때 채식은 여전히 채식주의자만의 문제로 남게 된다. 그래서 이 모임은 채식 식당에서 회식을 해야 하는데 그래야지 다수자가 소수자로서의 경험을 하면서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감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채식 식당을 찾는 것부터 실제로 채식을 하는 것까지 비 채식주의자들은 채식주의자들의 일상을 경험하게 되고 회식을 하는 동안 채식은 중요한 대화 주제가 된다. 그리고 회식이 끝난 뒤 비 채식주의자들이 비 채식의 일상으로 돌아가더라도 그 일상은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되기 시작할 것이다. 자주 가던 식당에 채식 메뉴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거나 시판 식품들에 육류와 유제품, 난류가 상상 이상으로 많이 사용된다는 것을 알게 될 수 있다. 이로써 이 한 번의 회식은 일회적인 체험에 그치지 않고 마음 속 어딘가에 채식주의자로서의 경험을 간직한 비 채식주의자 홀씨들이 널리 퍼져나갈 수 있게 하는 민들레 씨앗 역할을 하게 된다. 이 홀씨들이 곳곳에 뿌리내려 깨트려낼 바위의 수는 무궁무진하다.

  공감 불신론자가 공감의 무궁무진함을 설파하기까지는 우리가 생각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있었다. 그 고통이 바로 옆 방에서 개똥을 치우는 어머니만큼 가까이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내 문제가 아니라면 진짜로 알기 힘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이었다[각주:3]. 네 살배기와 숨바꼭질을 하면 머리를 구석에 처박거나 방 한가운데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 숨었다고 한단다. 아이는 자신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보일 수 있고, 내 인지 속의 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어른이 되어 가며 차차 깨닫는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사회화도 삶을 살아가면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에 그 과정 중에 있는 우리는 이불을 뒤집어쓴 아이와 같다.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왜 아무것도 보지 못하냐며 다그치는 게 아니라, 시야를 가리고 있는 이불을 걷어내어 아이가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게 하는 것일 테다.

  물론 이불 밖으로 나오길 거부하는 아이도 있겠다. 죽어도 개똥을 치우지 못하겠다고, 한 번의 회식일지라도 꼭 고기를 먹어야겠다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공감도 비공감도 자유이기에 그들을 딱히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공감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만큼이나 공감하지 않는 사람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상대에 따라 절교, 이별, 탄핵 등 선택지는 다양하다. 호적에서 파버리는 것 역시 하나의 선택지다. 엄마 사랑합니다.

 

 글 편집위원 수딩



  1. 존 버거. 『본다는 것의 의미』. 동문선, 2000. [본문으로]
  2. 2016년도 봄학기 ‘교육과 문화’ 수업 중에 나임윤경 교수가 한 말이다. ‘뷔페는 답이 아니다.’는 말만 남겼고 나머지는 미궁에 빠진 글쓴이와 친구들이 1년 간 토론하여 내린 나름대로의 결론이다. [본문으로]
  3. 물론 내 문제가 아니어도 알 수 있고 겪어 본 사람이 더 하기도 하다. 그러나 내 생활 반경에서 먼 고통일수록 타자의 위치에 머문 채로 상상력에만 의존하여 공감하기란 점점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한편 ‘나 때는 더 힘들었어’로 대표되는 꼰대들은 겪어본 사람이 더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주 우수한 사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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