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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 나는 오사카에 가서 한국을 보았다

연희관공일오비 2017. 1. 24. 12:58

0. 일본 이야기는 아닌 일본 여행기


2015년 여름에 오사카를 다녀왔습니다. 일본 제2의 도시로, 한국 여행자들에게는 종종 일본의 부산(!?)으로 소개되곤 합니다.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어차피 초과 학기 내정자였지만) 취준 따위는 접어둔 채 오사카로 떠난 까닭은 그냥 한 번 푹 쉬러 떠나고 싶었습니다. 여러 조건이 맞아서 간 것 뿐, 꼭 오사카여야 할 이유 같은 건 없었어요. 멀리 떠나기엔 돈이 없었고, 계획도 세우기 귀찮았는데 다행히 친한 친구가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다니까, ‘이번 여행지는바로 오사카다!’ 했던 거죠. 그래서 떠났습니다.


그런데 막상 떠나려니 일본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더군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닌데, 보통의 한국 사람들보다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영 무관심했던 것 같습니다. 역사로도 배우고, 일본 음식도 즐기고, 혼자 있는 날이면 일본 동영상도 찾아보고는 했지만 그게 일본에 대한 관심이나 특정한 태도를 갖추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던 겁니다. 살다 보면 언젠가는 한 번 쯤 가볼 기회가 있겠지, 하는 정도였죠. 물론 배워서 아는 지식이 있기는 합니다. 한국과 일본이 역사적으로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덧붙여 단순화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광복 이후 지금껏 한국이 국가적으로 써먹어왔던 내러티브가 대체로 일본으로부터 도전받고,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이야기였다는 것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럼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이 소중한 지면에 굳이 이런 얼토당토아니한 일기를 쓰느냐!” 하시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저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기어이 변명을 하나 하자면, 오사카를 돌아다니면서 저도 모르게 한국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3년 전, 온통 이국적인 풍경과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유럽을 여행할 땐 칼칼한 게 당길 때 빼고는 도무지 한국을 생각할 틈이 없었는데 말이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쌓이던 불편함이, 귀국한 후로도 몇 달 동안 쉽사리 마음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대체 그 불편함은 어디서 온 걸까요. 너무나 비슷해서 더욱 미묘하게 느껴졌던, 그래서 낯선 유럽의 모습보다도 더 거대한 차이로 다가왔던 일상의 모습에서 온 게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일본을 잘 모르는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이고, 그런 점에서 이 글은 일본 여행기이지만 일본 이야기는 아닙니다.



1. 쯔리센 트레이


이국을 여행하다 보면 종종 미처 생각지 못할 정도로 사소한 것들이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가령 버스를 타도, 뒷문으로 타고 앞문으로 내려야 하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돈도 탈 때가 아니라 내릴 때 지불해야 하는 나라가 있는 거죠. 일본에서는 결제하는 방식이 그랬습니다. 도착하던 날 밤, 야식을 사러 편의점엘 갔을 때였습니다. 제가 현금을 손에 쥐여주려고 하면, 알바는 단호한 표정을 짓고는 한사코 돈을 받지 않고 계산대 위에 놓인 네모난 접시를 손으로 가리켰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어쩌라는지 알 수도 없어 넋 놓던 차에 친구가 그 접시에 현금을 두는 거라고 알려주더군요. 일본어로는 쯔리센(거스름돈) 트레이라 합니다. 편의점만 그런 줄 알았는데, 식당, 백화점 업종이 뭐든 일본의 가게들은 대개 그 쯔리센 트레이를 쓰는 듯했습니다. 저로서는 뭐 이런 게 다 있나싶었어요. 손에서 손으로 바로 줘도 되는 걸 굳이 금액을 맞춰 트레이에 돈을 두고, 다시 그 트레이에 거스름돈을 돌려받는 게 귀찮으니까요.

 

쯔리센 트라이


그런데 여행을 다녀온 뒤 일본인 친구에게 물어보니 쯔리센 트레이를 쓰지 않으면 매너가 없다는 인상을 받고, 왠지 꼭 써야 하는 느낌이 있고, 혹여 계산할 때 이게 없으면 어디에 돈을 내야 하는지 곤란한 느낌까지 받는다고 합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이 사람들에게는 나름 중요한 사회적 약속이었던 거죠.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제는 일상적인 모욕에 익숙해진 한국의 편의점 알바 친구들이 떠올랐습니다. 한국에도 쯔리센 트레이가 있었더라면, 무심코 돈을 던지는 손님이 조금은 줄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일본에서는 그런 손님이 한국보다는 적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더 착해서가 아니고, 이 접시 때문에요. 이 접시에 담긴 약속이 사람들의 행위를 구속하는 탓에 손님은 돈을 바구니 바깥으로 던지기 어려울 것이고, 판매자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이 조그만 물건으로 서로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심리적 거리를 얻고 있었던 셈입니다.

 

 

2. 유난스러운 깔끔함은 어디서 왔을까  


오사카의 길거리는 놀라울 정도로 깨끗했습니다. 물론 보행자 수보다 쓰레기통이 부족한 도심에는 버려진 쓰레기도 많았지만, 희한하게 골목으로 들어갈수록 거리가 청결하더군요. 깔끔하게 정돈된 드라마 세트장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피곤하다면 잠시 누워서 쉬어도 옷이 더러워질 것 같지 않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오사카의 골목


도심으로 갈수록 청결하고 골목으로 갈수록 더러워지는 서울과는 정반대죠. 서울의 중심가(청계천 부근 또는 강남)는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 촘촘한 경찰력으로 관리됩니다. 남대문 앞 건널목에서 담배꽁초를 버렸다가 과태료를 물은 기억이 나네요. (반성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일임에도 아직도 기억하는 건, 저를 잡은 경찰들이 혹시 제가 도시를 더럽힐지 모른다는 사실보다는 실적이 중요했는지 멀리서 오래도록 저를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제가 말하고 싶은 요점은, 한국이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이 바로 뜸한 감시와 그 뜸함을 상쇄하는 강력한 페널티라는 것입니다. 허나 감시만 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 거리까지 깨끗하게 만들 수는 없는 법이겠죠. 반성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 순간 제 반응은 잘못했다보다 에이 씨X 재수 없게!’에 가까웠어요. 왜 나만 갖고 그러냐는 불만의 표현은 개인적인 것이겠지만, 그 불만 자체를 촉발하는 데는 사회적인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합리적 선택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이 단지 도덕적이지 않아서 규칙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보다 규칙을 어겼을 때 자신이 잡힐 확률과 그때 지불해야 할 비용을 기대값으로 계산해 따져보는 거죠. 그동안 한국사회는 잡힐 확률을 낮추고, 페널티를 높이는 방식으로 질서를 유지해왔습니다.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의 그 유명한 명대사처럼 난 한 놈만 패!’ 였던거죠. 내가 그 한 놈일 가능성이 적다면 누구나 한 번쯤 위험을 감수해볼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사회가 이런 방식으로 운영될 때 관리 비용은 절약될지 몰라도, 우리의 윤리 의식은 나만 아니면 돼!” 의 수준을 벗어나기 어려울 듯싶습니다.


선진국의 국민성 운운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일본인은 태어날 때부터 깔끔함이라는 DNA를 갖고 태어난다고 말하면 히틀러와 지옥에서 만날 확률만 높아지겠죠. 또 뭐, 일본인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일본인도 여기 오면 분명히 지하철 환기구에 먹다 남은 커피 올려둘거라 봅니다. 다만 도시를 청결하도록 만드는 문화적 요인이 궁금할 뿐입니다.

 


3. 오사카 시립 미술관, 67회 고교전


오사카에 2주를 머물렀는데, 하필 한여름에 가서 더위 때문에 고생을 꽤 했습니다. 나갈 때마다 속옷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땀을 흘려서 열을 식히려고 아무 건물에나 불쑥불쑥 들어갔던 기억이 나네요. 오사카 시립미술관도 무슨 건물인지 모르는 채 방문했습니다. 원래는 바로 옆에 있는 야외 동물원을 구경하려고 했거든요.


시립미술관에는 의외로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의외였냐면, 아무래도 한국에선 중고등학생이 미술관을 가는 게 흔치 않으니까요. 덕분에 야자 도망갈 핑계만 궁리하던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에어컨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둘러보니, 학생들뿐만 아니라 지역주민들도 많이 관람하러 오는 듯 보였어요. 어른들이 꽤 많았거든요. 대체 무슨 전시길래 애고 어른이고 이렇게 사람이 많을까 궁금해져서 읽지도 못하는 전시 카탈로그를 집어 들었습니다. 일본어는 한 단어도 읽을 수 없지만, “고교전한 단어만큼은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전시회가 무려 67번째라는 것도요. 그러니까, 그 큰 오사카 시립 미술관에서, 오사카 지역 고교생들의 작품을 모아, 67번째 전시회를 열었다는 거겠죠.

 


무척 부러웠습니다. 시립미술관이 고작고등학생들의 전시회를 열어준다는 게 부러웠고, 그게 무려 반백년 넘게 이어져 온 유서 깊은 행사라는 역사가 부러웠고, 여름방학이었음에도 삼삼오오 모여 그림을 보러 나왔다는 교육현장의 여유로움이 부러웠습니다.(방학이 아니었다 해도, 평일 하루를 고교전시회를 위해 내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부러웠을 겁니다) 넘치는 샘을 애써 숨기고 학생들의 작품을, 아니 저에게는 없었던 그 미술관의 풍경을 오래도록 감상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교양으로 미술사 강의를 듣기 전까지 미술관은 미대생이나 미대지망생들만 가는 곳인 줄 알았습니다. 고등학교 미술 시간에 A3 흑백 갱지에 인쇄된 요약본으로 고낭자사인신후[각주:1]를 달달 외운 게 그전까지 제가 받은 미술교육의 전부였거든요. 책상에 앉아 갱지를 외웠을 시간에 좋아했던 친구의 전시를 보러 시립미술관에 다녀올 기회와 여유가 저에게도 있었다면, ‘나의 10대도 지금보다 조금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시절 제가 좋아했던 미대지망생 친구는 자기 그림을 프랜차이즈 미술학원 영원한 ㅇㅇ건물 앞 길거리에 전시했었는데 말이죠. 전시라기보다 학원 홍보 행사에 가까웠을 겁니다. 그 짧은 거리에 서로 엇비슷한 그림들이 수십 개가 있어서 친구의 작품을 찾는 일은 좋아한다는 마음이 민망할 정도로 꽤 힘들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실소가 나오는 게, 그림의 주제가 발상과 표현, 사고의 전환, 이 두 개였거든요. 그렇게 창의적인 주제로 누구나 비슷한 그림을 그렸던 게, 제 친구나 학원생들이 상상력이 부족해서는 아니었겠죠.


오사카 시립미술관에 걸린 학생들의 작품들은 이 학생은 이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구나.’하는 인상을 받을 정도로 각자의 개성이 뚜렷해서, 회화에 문외한인 제가 보아도 주제나 표현이 다채롭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서로의 특질이 존중받는다는 이야기겠죠. 이 모든 게 말 그대로 컬쳐 쇼크였습니다. 바다 잠깐 건너면 도착하는 가까운 나라인데 학생들은 참 다르게 길러지는 모양입니다. 한국의 학생들은 언제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4. 끝나지 않은 국민 만들기


여행을 마무리할 무렵, 시간이 남아 오사카시 안의 작은 섬인 나카노시마라는 곳에 들렀습니다. 슬슬 걸어서 다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작기는 해도 시청, 중앙은행, 중앙 공회당 등, 정치, 경제의 핵심 건물이 들어서 있어 서울의 여의도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산책을 하다 그곳에서 마주친 몇몇 건물들이 저를 매우 당혹스럽게 만들었는데, 서울에서 자주 보던 건물들과 빼다 박을 정도로 닮았기 때문입니다. 섬 끄트머리에 있는 오사카 중앙공회당을 보자마자 서울 한복판의 구-서울역사가 떠올랐고, 몇 걸음 건너 일본중앙은행 오사카지점을 보자마자 소공동에 자리한 구-한국은행 본관이 떠올랐습니다. 저만 몰랐을 뿐 닮은 게 당연한 건지도 모릅니다. 이 근대 건축물들은 비슷한 시기(일제강점기 전후), 비슷한 공간(도시의 중심지), 같은 건축가가 지은 것이니까요.




그때, 착잡한 마음으로 원본의 거리를 서성이다 제가 느껴왔던 불편함의 근원을 발견했던 것 같습니다. 유사-서울역과 유사-한국은행 사이에서 글로만 읽었던 조선(이자 한국)의 왜곡된 모더니티를 몸소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론적으로 모더니티를 여러 방식으로 정의 내릴 수 있겠지만, 중요한 논점 중 하나는 부정할 수 없이 식민주의일 겁니다. 지금은 제3세계나 남북문제라는 이름으로 대체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많은 국가가 식민주의의 유산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요. 조금 독특한 양상이긴 하지만, 조선 역시 모더니티와 본격적으로 조응한 시기가 일제강점기였고 한일관계는 여전히 그 자장 속에 놓여있습니다.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친일파 청산 문제, 심지어 으레 있는 한일전까지도 말이죠. 모두 중요한 문제이지만 지속적으로 이슈화가 된다면 일본과 어떻게든 해결점을 찾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유산에 대해선 어떻게 할 수 할까요. 저는 이것이 한국사회에서 앞으로 더욱 진지하게 다뤄져야 할 이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은폐된 유산은 정치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영역에까지 광범위하고 깊숙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 유산이란 다름 아닌 국가권력에 의한 국민 만들기입니다. 서로 다른 인종 간 경제적 착취를 주목적으로 행해졌던 일반적인 식민 지배와 달리, 식민지 조선은 내선일체라는 이념 아래 일제로부터 같은 ()()민이 되기를 강력히 요구받았습니다. 일제의 통치가 더욱 혹독해지고, 조선의 저항도 더욱 격렬해졌던 까닭입니다. 한국은 해방 이후 다방면에서 일색을 지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만, 정작 통치 방식에서는 과거의 일제를 그대로 계승했습니다.[각주:2] 비판적인 민주시민 양성보다는 순종하는 국민 만들기가 국가 이데올로기를 내면화시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일까요, 어쨌든 내용은 바뀌었으나 형식은 그대로였던 셈입니다.


훈련소에서 신병을 훈육하듯 일사불란한 국민을 길러냈던 일이 국가 위주의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됐을지는 몰라도, 문화적 질적 성장에 있어서는 확실히 해가 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사회의 문화라는 건 도대체가 국가가 만들고 싶다고 해서 개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득 한류를 이끌라는 사명을 띠고 세금 1억을 투자받아 제작된 김치워리어가 떠오르네요. 이제는 한국에서도 마땅한 삶의 방식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해봅니다. 







글 편집위원 realstupid

  1. 고전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인상주의, 신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본문으로]
  2. 아이러니하게도 전후 일본에서는 한국보다 더욱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교육체제의 틀이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학교 교육의 정상화 자체가 일차적인 과제였던 반면, 일본에서는 미군정이 군국주의를 혁파할 목적으로 민주시민 교육을 적극적으로 장려했기 때문입니다. 송현숙 기자 , 「[광복 70주년 기획 - 우리는 과연 해방됐는가] ‘신민’ 만들기가 ‘국민’ 만들기로… 일본도 버린 ‘잔재’ 여전히 답습」, 경향신문, 2015년 2월 14일 , 8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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