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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나를 소개하는 글을 쓸 기회가 있었다. 낙제점을 받은 자소서를 낼 수 없었기에 빈 화면을 띄워 두고 쓸 것들을 생각한다. 처음 던져야 하는 질문은 필연적으로 나를 향했다. 그래, 나는 무엇을 좋아하지?’

 

    답을 낼 수 없어 어려웠던 것 같다. 늘 누군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을 묻는다면 나는 몇 분이 지나도 확신하며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아마 입 밖으로 꺼내기 두려웠을 뿐, 정말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현재진행형의 기쁨을 여러 번 무시하고 진짜는 따로 있을 거라고 최면 걸었다. 내가 좋아해도 되는 것들을 질문하고 살았다. 피곤하게 눈치 봤다. 미성년의 나는 무서운 게 많아서, 그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수많은 질문을 해댔으나 자신에게 한 마디도 물어준 적 없었다. 좋아하지 않으면 진심일 수 없어 나는 그간 나에게 진심이었던 적 없었던 것만 같았다. ‘라는 기표 안에 가둬두기만 했을 뿐, 그 의미로 다가가기에 그간 나는 내게 너무 무심하지 않았나.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남녀공학을 졸업했다. 다 같이 미숙한 가운데서도 웃을 수 있는 쪽이 있고, 그럴 수 없는 쪽이 있다. 클론처럼 교복을 입고 책상에 앉아 있는 아이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 노는 무리가 있고, 삼십여 명의 작은 반 안에도 그들만의 질서와 규칙은 존재한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은 성에 대해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대상화를 피할 수 없다. 청순하고 무지한, 말 그대로 누군가에게 무해한이미지가 덮어 씌워졌다가 그 만들어진 껍질에 부응하지 못하면 한순간에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곤 한다. 해야 하는 일과 좋아해도 되는 것, 혐오해야 하는 것들이 모두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많은 아이들이 그렇게 자신이 재단 당하는 데 불만을 품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그 규격에 맞지 못하는 실패작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 그것은 질서를 위한 수용이자 침묵이었다. 만들어진 생애 계획을 따라 도태되지 않고 성공한 성년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미성년의 한 길목에서, 나를 깎아내는 일은 고민의 노력을 줄여 주는 삶의 체계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계절이 바뀌면 블라우스 소매가 짧아지던 시절이었다. 같은 교실 안에서, 모두가 입시 제도 아래에 놓여 있었지만 나는 그때의 아이들이 저마다의 고민을 지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배운 적 없었지만 몸으로 느끼는 것들이 있었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도 이상한 일이라고 알려주지 않아 침묵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이 싫어서 엎드려 울어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어딘가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피느라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된 사람이, 다른 사람이 웃을 때 웃느라 내가 언제 웃고 싶은지 알지 못했던 사람이. 외롭지 않기 위해 날 갈아 넣을 필요 없다는 걸 알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그래서 이 글은 억울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나의 미성년을 위한 마음에서 출발한다.

 

 

 

 

 

1. ‘보호가 오독되는 방식

 

    청소년[각주:1]에게는 자신의 삶을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사회는 이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조력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동시에 청소년은 미성숙한 존재로서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이다. 따라서 첫 번째로 던져야 하는 물음은 이 보호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주류 교육 담론에서는 청소년이 지닌 가장 큰 문제는 입시 위주의 교육에 있다고 말해 왔다. 따라서 청소년들은 일정한 교육 기간이 지나고 이 입시라는 문제가 해소되고 나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해 유예해 왔던 욕망을 실현하며, 순조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형태의 담론은 청소년을 학생으로만 가정한 채 이뤄져 왔다. 그 속에서 자신의 노동으로 먹고사는 청소년, 가정을 벗어난 청소년, 연애하고, 섹스하는 청소년들은 모두 비가시화되었으며 이들의 행위 또한 그저 바람직하지 못한 하나의 일탈로만 간주되었다.

 

    이러한 사회에서 미성숙한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제가 어떤 방식으로 오독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가정폭력으로 인하여 집을 나온 이른바 탈가정 청소년의 경우가 있다. 자신의 힘으로 노동하며 살고 싶어도 현재의 규범 아래에서는 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만 집을 얻거나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그러니 폭력이 발생하는 가정으로 다시 돌아가거나 가출청소년으로서 위법과 불안정의 나날을 견디며 불안한 삶을 지속하는 수밖에 없다. 그 어디에도 보호는 없다. 이처럼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루어지는 잘못된 방향의 범주화는 무용할뿐더러 오히려 청소년에게 독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청소년 보호의 맹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청소년의 성을 둘러싼 태도이다. 한국 사회에서 아동과 청소년의 성은 보호받아야 하며 자신도 탐닉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사회는 이들이 성적 무지 상태에 머무르도록 정보를 통제한다. 본래 순수함의 의미란 강요받지 않은, 완벽히 주체적인 한 인간의 의지이자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아이다움과 순수함을 명목으로 청소년에게 특정한 역할을 강요한다. 이 강요되는 순수에는 정답이 존재하는 것이다. 청소년 여성은 순종적이며, 무지한 대상이 될 것을 요구받는다.

 

    한국 넷플릭스의 이용자라면,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라는 이름의 드라마를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이 드라마는 오티스라는 고등학생이 성 상담사인 엄마의 어깨너머로 습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친구들에게 성 상담소를 여는 스토리를 다루고 있다. 나는 처음 이 드라마의 한국어 제목을 들었을 때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없었다. 비밀 상담소라니, 학교 구석의 위클래스나 또래상담소 따위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충 청소년기의 통상적인 고민을 다룬 성장 드라마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당신은 이 드라마의 원제를 아는가. 바로 sex education이다. 한국에서는 같은 내용의 드라마가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방영되고 있다. 이는 성에 관한 논의를 터부시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에서의 성은 여전히 비밀인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성의 음지화에는 분명한 문제가 뒤따른다. 성을 은밀하게만 다루면 드러내기가 어려워지고, 드러났을 때 당사자가 느낄 수치심도 커질 수밖에 없다. '' 이라는 단어가 던져졌을 때, 즉각적으로 떠오르게 되는 선정적인 이미지나 왜곡된 정보는 바람직한 성적 지식을 습득하지 못한 채 자극적이고 선정적이기만 한 방식으로 성을 접한 결과일 수 있다. 사회에서는 성적인 표현 자체를 꺼리고, 학교에서는 임신과 출산, 자궁과 난자, 정자 등 오로지 생물학적인 표현만 배우다 또래 집단이나 미디어를 통해 자극적이고 선정적이기만 한, 왜곡된 방식으로 성을 처음 접하게 되는 청소년은 그러한 형태의 성 가치관에 먼저 물들 수밖에 없다. 단순히 성적인 것이 곧 음란함과 동의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처럼 청소년에게 필요한 정보가 차단되는 상황에서, 보호받아야 한다고 말해지는 이들의 성을 이 사회가 진정으로 보호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한 의문이 남는다. 청소년을 주체성이 결여된 미성숙한 존재로 보는 사회에서, 청소년들은 욕망과 성에서 분리된 채 존재하며, 여성 청소년들은 자주 순진한 이미지를 강요받는다. 그리고 이 순수함과 순진함의 이미지는 주로 수동적이며 이미지로서의 여성, 즉 언어의 생산자로서가 아니라 묘사되고 말해지는 피동적 존재로 이들을 그린다. 여학생들은 말하는 자로서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주체가 아닌 이미지의 대상이 되는 법부터 습득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많은 사람은 한 번쯤 학칙으로 연애 금지 조항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다닌 학교는 이성 연애를 엄격하게 금지했다. 연애하다 적발되거나 남녀가 복도에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키기만 해도 불이익을 받았다. 벌점이 이십 점이 쌓일 경우 해당 학생은 교내봉사 피켓을 들고 점심시간의 급식실 앞에 서 있어야 했다. 그리고 연애는 벌점 십오 점이었다. 이처럼 학교가 보호와 선도라는 명목하에 일상적으로 학생들을 통제하는 학내 권력 구조 속에서 폭력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치마와 와이셔츠 길이 등 여학생의 복장을 통제하는 것은 물론이며 속옷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또 그 속옷을 가리기 위해 나시를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와 양말의 색깔, 스타킹의 종류, 심지어는 속옷의 색깔까지 통제하기도 한다. 추운 겨울에도 골반을 겨우 덮는 길이의 짧은 재킷을 입지 않으면 외투를 입을 수 없었고, 비치는 검정 스타킹이 성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된 적 있다. 발목이 보이는 검정 레깅스를 단속하고, 살구색을 제외한 유색 속옷을 단속하는 여학교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성적이라는 이유였다. 이처럼 사생활을 통제당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폭력을 맞닥뜨려도 그 개인은 바로 자신이 경험한 것이 폭력이라고 규정하기가 어려워진다. 당연한 통제였고, 억압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사회에서 폭력은 이런 식으로 살아남는다. 폭력이 폭력인 줄 모르게 길러진다. 여성과 청소년이 조심할 것을 강조하는 일은 바꿔 말하면 강자의 폭력을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함을 뜻한다. 이 체제 아래에서 한쪽은 폭력을 피하도록 길러지고 한쪽은 폭력이 폭력인 줄 모르도록 길러진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슬럿 셰이밍[각주:2]이다. 당신은 어떤 여성 연예인이나 친구의 옷차림을 보고 야하거나 헤퍼 보인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가? 혹은 연예인이 사귀고 헤어지는 것을 보며 저 사람은 가벼운 사람이라 욕한 적이 있는가? 이 슬럿 셰이밍의 대상은 주로 여성이다. 성에 대한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기대를 위반한다고 인식하여 상대방을 ‘slut’이라 낙인찍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개 이러한 슬럿 셰이밍이 일어날 때 가해자는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폭력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설리는 친구들과 파티하는 사진을 자신의 SNS 계정에 게시해 논란이 된 적 있다. 그때 댓글창에는 헤퍼 보인다’, 혹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류의 비난이 쏟아졌다. 그녀 혹은 그녀와 함께 모인 사람들의 옷차림, 사진의 구도, 표정 등이 그 이유였다. 이처럼 슬럿 셰이밍에 대해 알고 있으며 이것이 나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여성들조차도 어쩌면 한번쯤은 타인에게 ‘slut’ 프레임을 씌운 경험이 있을지도 모른다. 폭력이 폭력인 줄 모르게 길들여진 결과이다.

 

    미성년들이 모인 학내에서도 이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한 여학생은 여러 번 연애를 했다는 이유로 걸레’, ‘헤프다등의 모욕적인 언사를 들어야 했다. 또한 평소 옷차림이 단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은 쉽게 셰이밍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야해 보인다든지, 헤퍼 보인다든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낙인 찍기는 이렇게 쉽게 일어난다. 셰이밍이란 사실 청소년기에 있어 다른 어떤 통제보다도 강력하게 작용하는 수단이 된다. 그맘때의 예민함은 청소년이 본인이 정상성에서 벗어났다는 수치심을 느낄 때, 빠르게 또래 집단으로 속하고자 하는 욕구를 자극한다. 슬럿 셰이밍은 이러한 방식으로 당신이 당신 스스로를, 또 타인으로 하여금 당신을 통제하도록 하는 수단이 된다. 따라서 자신이 누군가에게 셰이밍을 할 때 이것은 타인들로 하여금 당신을 평가하고 낙인찍도록 허용함과 다름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슬럿 셰이밍을 하는 행위는 자신을 그 ‘slut’에 반대되는,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여성이 되라고 몰아넣는 것과 다를 바 없다.

 

 

 

 

 

2. 청소년과 섹슈얼리티

 

    청소년은 얼마나 자신의 성적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에 대해 탐색할 기회를 가질까. 청소년기 교육은 한 번도 나에게 성적지향에 대해 탐색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사회는 단지 청소년들에게 그들이 정상적인것으로 정해 놓은 젠더 개념과 섹슈얼리티를 주입하기 위한 장치들을 마련해 놓을 뿐이다. 학교에서는 성교육을 명목으로 올바른 이성 교제의 행동 양식을 나열하며 -이마저도 이뤄지지 않기도 한다. 학교에서의 성교육은 주로 생물학적인 이론 부분에 그치는 것이 다반사- 이성애주의를 설파한다. 드라마나 영화, 매체들은 이성애 연애만을 보여준다. 같은 수위의 장면이더라도 두 이성 간의 애정행각은 문제가 되지 않은 반면, 동성 간의 애정행각은 청소년 관람 불가 딱지가 붙기도 한다. 드라마 <선암여고 탐정단>에서 두 여고생의 키스신은 방영 당시 두고두고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청소년 관람 불가 딱지가 붙지 않은 타 드라마에서 방영되었던 베드신에 가까운 이성 키스신은 문제가 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이렇게 자유와 욕망을 주체적으로 표출하고 영위할 수 있는 권리는 주로 허락된특정 계층이나 성별, 섹슈얼리티의 범주 안에 한정되어 있다.

 

    청소년 개인의 정체성 탐색 과정에서도 앞서 말한 셰이밍과 같은 수치심이 작용한다. 청소년기의 또래 집단은 이런 면에 있어 남자다움여자다움이 극대로 작용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무성애적이거나, 얌전하거나, 다수의 남학생들과 다른 취미를 가졌거나, 서열질에 관심이 없거나, 소위 여성적이라 패싱 되는 것들을 좋아하는 남학생들은 또래 집단 사이에서 자주 떨궈지곤 했다. 그리고 달라붙는 꼬리표는 게이거나 찐따. 여학생의 경우에도 셰이밍은 작동한다. 흔히 사회에서 여학생은 남학생보다 무성애적인존재로 여겨지는 경우가 잦다. 여학생들끼리의 스킨십은 비교적 남학생의 경우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곤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학교에는 멋대로 뽀뽀를 하거나 가슴을 만지고 도망치는 여학생들이 많았다. 그때의 또래 집단 내에서 그것은 단순히 친구 사이에 허용되는 모종의 자연스러운 장난으로만 인식되었고, 사회에서도 이들이 이러한 행위를 한다고 해서 동성애자거나 양성애자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제로 많은 동성애자나 양성애자 청소년들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성적지향을 알렸을 때, 주변에서는 어려서 그런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 되돌아오곤 한다. 아직 많이 경험해 보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들에게 이성애 규범 안으로 들어올 것을 요구한다. 나는 어릴 때는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믿었으나 성장한 후에는 이성과 연애하는 사람들을 몇 알고 있다. 이들은 바이였을 수도, 혹은 동성애자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몇몇은 자신이 사랑했다고 말하지만, 몇몇은 아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청소년이 자신의 성적 지향성을 탐구하지 못하도록 할 합리적인 이유인가. 그때 그 감정이 무엇이든 청소년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청소년은 자신을 탐색하고 정의할 권리를 지닌다, 당연하게도.

 

    친구들이 자조 섞인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의 편견이 보호하는 레즈비언! 단순하게 당신더러 당신이 바이인지, 동성애자인지 생각해 보라는 말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사랑을 당당하게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범주는 한정적이며, 더불어 성적 욕망 또한 법적 기혼자만이 떳떳하게 표출할 수 있는 권리로 여겨진다. 이성애자라 하더라도 결혼하거나 연애하지 않는 여성이 성적 욕망을 표출하는 것은 쉽게 터부시되곤 한다.

 

    이곳에서 나는 나의 몸,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에 대해 제대로 탐색해 볼 기회를 가졌었던가? 확실한 것은 나는 이런 모든 것들을 교육 과정을 통해 배울 수 없었다는 것이다. 사회의 주류 규범은 주로 사회화 기간이라는 일정 시간 동안에 주입된다. 흔히 말하는 청소년기는 이 기간에 해당하고, 따라서 사회가 정해둔 정상성의 규범에서 벗어남이 없어야 한다는 압박이 한층 더 강하게 작용한다. 게다가 많은 사람은 청소년이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청소년은 몰개성적이며 순종적인 사고를 강요받으며, 철저한 위계질서와 이중규범이 작동하는 공간 안에 존재하게 된다. 그 안에 놓인 청소년은 보통의 기준에 맞지 않는 자신을 통제하며 자신을 틀에 맞도록 검열하고, 깎아낸다.

 

 

 

 

 

3. 당신의 ()성년을 응원하며

 

    성적 권리는 어떠한 폭력이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몸과 정체성, 욕구와 욕망 등을 충분한 정보와 편견 없는 조건 속에서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자유롭게 탐색하고 긍정하며 실현할 권리이며, 이를 바탕으로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나갈 권리이다. 나의 몸과 욕구를 제대로 탐색해보고 긍정할 수 있는 조건이 선행되지 못한다면, 혹은 그 조건이 사회경제적, 문화적으로 불평등하게 주어져 있다면 관계 역시 불평등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각주:3] 자신을 제대로 탐색하고, 긍정할 수 있는 조건과 기회가 선행되었을 때 사람들은 타인의 속성을 혐오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정립하고 긍정할 수 있게 된다.

 

    청소년 권리 담론의 목적은 단순히 청소년에게 성년과 똑같은 대우를 해 줄 것을 주장하기 위함이 아니다. 청소년의 성적 권리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현재의 청소년들이 지금의 성년 세대가 겪고 있는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며, 결국은 미성년과 성년 모두를 속박하고 있는 어떠한 억압을 끊어내고자 함이다. 성적 권리라고 했을 때, 다수의 사람은 최소한의 권리만을 떠올린다. 하지만 성적 권리가 침해되는 사례는 비단 성폭력뿐만이 아니다. 자신에게 질문해 보길 바란다. 오늘 나는 성별에 따른 옷차림을 요구하는 직장, 학교의 규정과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불편한 옷차림을 해야 하지는 않았나? 나에게는 나의 몸, 나의 성적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에 대해 과연 제대로 탐색해 볼 기회가 있었을까? 나는 나에게 필요한 피임 도구를 잘 찾아 구할 수 있고 성 관련 질병이 생겼을 때 편하게 병원에 찾아갈 수 있나? 나는 내가 원하는 파트너를 찾을 수 있고, 상대방과 평등하고 만족스러운 성관계를 맺을 수 있나? [각주:4]그리고 이를 위한 모든 것들을 교육을 통해 사회에서 습득할 수 있었던가?

 

    나는 내 삶의 주체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수많은 청소년들은 선택하는 법을 빼앗긴 채 그런 줄 모르고 살아간다. 그렇게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와 같은 고민 이전에 필수적인 질문인 자신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충분한 질문을 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잔인한 쪽은 언제나 정상성이었다. 만들어진 틀에 맞게 날 깎아내면서 아픈 줄 몰랐다. 그렇게 그저 주어진 목록 속에서 행했던 어쩔 수 없는 선택들과, 선택했지만 선택하지 못했던 순간들의 궤적이 직조한 지금.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나로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살아가야 할 세상에 도저히 자신의 존재를 대입해볼 수 없었던 사람들, 이성애주의, 남녀라는 이분법으로 나뉜 사회의 젠더 규범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부정당했던 사람들. 그리고 선택했다고 말하지만 선택할 수 없었던 순간들 속의 모든 사람들. 걱정 없이 대입만 하면 되는 고등학생에게 삶이 뭐 그리 버겁냐고, 선택이니 의지니 배부른 소리 말고 발밑을 보라며, 그렇게 잔인하게 자위하며 껍데기 쓴 채 살기를 종용받는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나이고 싶었다.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만들어진 내 틀을 깨트리며, 또다시 굽고, 이를 반복하고 스스로 나를 빚으며. 그렇게 크고 싶었다. 내게는 나를 돌볼 권리가 있고 책임이 있다. 그리고 청소년기에 미성년은 그 방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다시 한번 질문하길 바란다. 진짜 당신은 무엇을 좋아하는가,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사람을 표현할 수 있는 수많은 단어가 미성년의 뒤에 붙을 수 있기를 바란다.

 

 

 

글 편집위원 베개 (mellinn0309@naver.com)

 

 

 

 

  1. 어린이와 청년의 중간 시기. 통상 ‘청소년’이라 함은 만 14세 이상 19세 미만인 사람을 뜻하며, 이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기에 해당. [본문으로]
  2. 슬럿 셰이밍 (slut-shaming) : 한 개인의 옷차림이나 연애사, 또는 성생활을 이유로 그 사람을 수치스럽게 하거나 모욕하는 행위를 의미. [본문으로]
  3. 「우리에게는 ‘성적 권리’가 있다」 , 월간 워커스 56호-2019년 7월, http://workers-zine.net/30758 (검색일자: 2019.08.18) [본문으로]
  4. 위의 기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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