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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비평

['미성년'] 어떤 미성년과의 조우

연희관공일오비 2019. 9. 24. 12:50

들어가며: 과정이 아닌 존재의 청소년에 대하여

     ‘한국 영화’를 떠올린다. 깡패나 조폭은 꼭 있을 것 같고, 정의감에 불타는 형사도 한 명쯤 나올 것 같고, 돈에 눈이 멀어 윤리의식 따위 개나 줘버린 기업 총수도 나올 법하고, 무모하게 사건을 파헤치는 기자 캐릭터도 그려지고…. 줄거리와 인물 소개, 출연 배우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훤히 보이는 틀에 박힌 영화들이 계속해서 쏟아지는 것이 웃긴다고 생각할 때쯤, 문득 이러한 영화와 그 등장인물들의 공통점을 생각하게 되었다. 정의롭거나 악덕하거나 비열하거나 순수하거나, 그들은 모두 성인 남성이라는 사실. 그러고 보니 이제 나에게는 ‘성인 남성’이라는 주인공 디폴트값이 너무 깊게 박혀버려 더 이상 다른 인물들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일부러 시선을 정반대로 돌려보기로 했다. 성인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 이들, 여성 청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자연스레 떠오르는 인물상이나 대표적인 스토리 같은 것은 당연히 없었다. 여성 청소년이 나온 영화는 생각나지 않았고, 내가 그런 영화를 본 적이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어쩌면 이제껏 보아 온 영화에서 여성 청소년 캐릭터가 너무 비중 없게 다뤄져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난 후, 그제야 나는 ‘청소년영화가 정말 없구나.’ 하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영화에 대한 지식이 얕아서인가? 적어도 한국 영화 중에서, 보조 인물이 아닌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으로 여성 청소년을 내세우는 영화는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고사(2008)>나 <여고괴담(1998)> 시리즈 등 학교를 배경으로 한 공포 영화로 반문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너무도 장르 특수적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머리를 짜내 <완득이(2011)>나 <써니(2011)>를 떠올리고, 생각의 범위를 넓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2012)>, <말할 수 없는 비밀(2008)> 등의 유명 영화를 기억해냈음에도 뭔지 모를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위의 작품들을 포함하여 이제껏 우리가 봐온 청소년 서사가 일률적이기 때문이었다. 청소년영화에서, 연애 감정은 ‘순수하고 풋풋하고 설레며 촉촉한’ 추억의 첫사랑으로 그려지며 분노나 우울, 저항심과 같은 어두운 감정은 그 시절 누구나 한 번쯤 갖는 치기 어린 반항심으로 취급된다. 영화 속 청소년들은 미화되거나 낭만화되며, 그들이 갖고 있는 고민도 어차피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시간이 해결해 줄 성장통에 불과하다. 그리고 결국은 그것을 극복하여 한 층 더 성장하거나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며, 마침내 어른이 된다. 요컨대 일반적인 청소년영화는 청소년의 존재 자체보다는 어른이 되는 과정으로서의 청소년만을 다루어 온 것이다. 영화 속 청소년은 어른이 되기 위해 존재했다. 그랬기에 영화 속 청소년 서사와 청소년에 대한 고민은 획일적이었고, 얕았고, 진지하지 못했다.

     영화를 만드는 이가 청소년이 아닌 성인이기 때문이라는 변명은 안일하고 궁색하다. 존재의 이유를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찾지 않는, 미화되지도 낭만화되지도 가벼워지지도 않는 청소년 서사가 필요했다. 청소년을 전형적이고 이상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무게 있게 담으려 노력한 영화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미성년(2019)>과 <죄 많은 소녀(2018)>라는 제목의 영화 두 편을 보게 되었다.

 

미성년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필자는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지도, 지식이 풍부하지도 않음을 밝힌다. ‘영화 덕후’라고 불릴 만큼 영화를 많이 보지도 않았고 영화의 기법이나 감독 및 배우들에 대해 해박하지도 않은, 한국의 평범한 관객 중 한 명에 불과하다. 그런 필자가 보기에도 영화 <미성년>은 지금까지 보거나 들어왔던 청소년영화들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존의 청소년영화에 등장했던 ‘어른’과 ‘청소년’의 역할을 바꿔놓은 듯했다.

     ‘성년이란 곧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나이’라는 흔하고도 익숙해져 버린 명제에 나타나듯, ‘책임’은 성년을 표현하는 주요한 키워드 중 하나이다. 사회는 성년의 개인에게 책임을 질 의무와 함께 책임질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하지만 책임이라는 말은 모호하다. 어디까지가 책임이며 무엇을 해야만 책임을 졌다고, 혹은 책임감이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선을 긋기 어렵다. 이때 성년의 개인이 반드시 져야만 하는 책임은 ‘법적 책임’에 한정된다. 법에 구체화되어 있지 않은 행위라면 책임을 질 필요가 없고, 책임을 져야 한들 명시되어 있는 것만 수행하면 그만이다. 그러면 그는 처벌받지 않고, ‘더 이상 책임질 것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법정은 그 이상을 묻지 않는다.

     법의 실효성 따위를 말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법정이 개인에게 요구하는 좁다란 책임에 딴지를 걸어 보고 싶다. 당연하게도 개인의 모든 행동이 법으로만 판단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법적 책임의 수행 여부는 한 개인이 죄인인지 아닌지를, 다른 말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인간인지 아닌지를 가려낸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다. 그것은 그가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책임감 있는’ 성년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법적 책임에서 자유로운 성년이라고 해서,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고 퉁 쳐질 순 없다. 정말 성숙하다면, 그렇기 때문에 그가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면, 좁은 책임 이상의 ‘넓은 책임’을 져야 한다. 자신의 행위와 그것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깊고 섬세한 고민과 배려, 그리고 성숙한 판단이 전제되어야 한다. 법적 책임의 여부와 관계없이, 그러니까, 좁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해도.

     그런 의미에서 <미성년>의 성년 캐릭터들은 무책임하다. 비겁하고, 찌질하고, 이기적이다. 물론 누군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심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만의 상처와 삶의 무게가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함께 무책임한 일을 저지르고 그로 인해 타인의 삶에 원치 않던 파동을 가져온다. 한편 성년들이 만든 파동을 온전히 직면하고 그것을 수습하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이는 오히려 미성년들이다. 그들은 성년들과는 다르게 도망치지 않는다. 회피하지 않고, 지키고 싶어 하고, 지키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 서로 싸우거나 부딪히거나 위로한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님에도 그들은 책임을 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미성년인 그들이 책임질 수 있는 범위는 너무 좁다. 책임질 수 있는 여건도 되지 않고 책임질 능력이나 권리도 없으며, 성년인 누군가에게는 더 이상 관여하지 말고 평소대로 돌아가라는 말이나 들을 뿐이다. 그들의 일상에 ‘도저히 평소대로 지낼 수 없는’ 사건을 던진 것은 역설적이게도 성년들이었지만 말이다.

     <미성년>은 불륜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법적 책임의 기준에서 그 사건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지만, 실제로는 물론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설명되어야 하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영화 속에서 이때 책임을 지는, 적어도 책임을 지려고 노력하는 이는 책임질 능력과 의무가 있는 성년이 아니라 책임질 능력도 부족하고 의무도 없는 미성년이다. 우리는 과연 어느 쪽이 더 성숙하고 ‘된’ 인간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법적으로 책임질 권리와 의무가 있지만 외려 법의 울타리 안에서 그 이상의 것을 외면하는 성년. 법적 권리와 의무는 없지만, 책임져야 할 것을 책임지려고 노력하는 미성년.

     사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성년이라고 성숙하지도, 미성년이라고 미성숙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주위를 둘러보면 미성숙하고 무책임한 성년과 성숙한 미성년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청소년영화에서 미성년은 이상하리만치 성숙하지 못하고 어딘가 부족하며 철없는 존재로만 그려져 왔다. 하지만 <미성년>은 성년과 미성년, 성숙과 미성숙의 등치를 거부한다. 청소년영화에서 과대 대표되어 온 ‘책임감 있는 성년과 철없는 미성년’을 밀어 넣고 정반대의 인물들을 꺼내 든다. 책임이라는 말에 대하여, 성년이란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질 나이니까 어련히 그렇게 행동할 테고 그런 만큼 미성년은 당연히 책임에서 물러나 있으리라는 통념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된다. 언제나 어른보다 부족한 모습으로만 그려지는 청소년영화의 청소년들을 보고 싶지 않을 때, 영화 <미성년>을 추천한다.

 

죄 많은 소녀

     과정으로서의 청소년은 청소년이 언제나 변화하는 중임을 전제한다. 대체로 더 밝고, 희망차고, 안정적인 미래의 모습으로. 그러나 어떤 청소년은 어떤 상태, 대부분의 관객이 기대하는 ‘좋은 어른’의 미래로 진행하지 않고 지금 이 시점에서 멈추어버린다. 고민이나 상처 같은 것, 설명되기 어려운 무언가를 극적으로 극복하여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끌어안고 잠식한다.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본인만의 아픔과 생각을 계속해서 붙들고 있는 이들을 종종 본다. 그럼에도 청소년이 그러한 고통과 우울을 끌어안고 있을 거라고는 쉽게 생각하지 못한다. 은연중에라도 청소년의 고민쯤이야 다 거기서 거기일 거라고, 힘들어봤자 얼마나 힘들겠냐고, 무엇보다도 성인인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청소년의 아픔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번, 영화 속 청소년들의 아픔은 다 극복되어왔다. 그들의 고통은 그저 고통이 아니라 ‘성장통’이었다. 성장하면서, 미래로 나아가면서, 수그러들거나 해소될 마음. 하지만 어떤 마음은 극복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무른다.

     고등학생이 실종된다. 학교에 경찰들이 오고, 학교가 발칵 뒤집힌다. 정황을 봐선 이미 사망한 것 같은데, 설상가상으로 며칠 후 강가에서 시신까지 떠오른다. 왜 죽었을까? 죽었으니 이유를 밝혀내야 한다. 학업 스트레스 때문인가 보다, 친구 관계가 좋지 않았나 보다. 그것도 아니라면 탓할 누군가를 지목해야만 한다. 설명되지 않는 청소년의 죽음은 용납될 수 없다. 성인인 경찰, 선생, 엄마의 상상력과 이해력을 뛰어넘는 죽음의 이유 같은 건 없을 테고, 없어야 한다. 그래봤자 애들이고, 애들 고민이 다 비슷하고, 나도 다 겪어봤으니 말이다.

     물론 성인이 아니라고 해서 죽음의 이유를 궁금해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전교생, 특히 같은 반이었던 이들 역시 죽음의 이유를 뒤적인다. 수군거리고, 소문을 내고, 누군가의 가방과 책걸상을 뒤지고, 평소라면 하지 못했을 폭력을 대담하고 잔인하게 행사한다. 그러면서도 죽은 친구를 위해서라며 교묘한 변명을 대고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이렇듯 모두가 죽음에 대한 설명을 갈구할 때, 소위 ‘어른들’은 더 비열하다. 그들은 진짜 이유에는 별 관심이 없다. 죽은 이의 진심 같은 것보다는 본인이 이미 내정해 놓은 ‘답’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라는 공간에서 자신의 힘과 지위를 이용해 학생들에게 답을 유도하고 원하는 답을 찾도록 부추긴다. 그러면서도 학생들의 궁금증은 통제하려 하고, 정보는 공유하지 않는다. 결국 모두의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누군가는 너무도 쉽게 답, 죽음의 책임, ‘죄 많은 소녀’가 된다.

     <죄 많은 소녀>는 암울하다. 청소년을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와 비겁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청소년들의 어두운 면모를 한가득 담는다. 영화 속 청소년들은 밝거나 순수하지 않다. 이기적이고 충동적이며 학교와 교실이라는 공간의 생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어떻게 해야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는지, 주류가 될 수 있는지, 죄책감을 덜 수 있는지. 그뿐만 아니라 영화는 영화의 분위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어둡게 잡아 자살 사건과 관련된 이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극복은 없기에 다시 밝아지지 않는다. 그들은 떨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고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관객도 알 수 없다. 극 중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궁금해하는 것이 전부다.

     영화를 보며 답답하고 짜증 나기도 했다. 그래서 쟤가 왜 죽었는지, 쟤네는 왜 저렇게 우울한 건지. 필자의 이런 생각은 영화 속 경찰이나 선생의 태도와 다르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영화가 의도한 바일지도 모른다. 고등학생이 저렇게까지 어두워질 이유가 뭐가 있는지 의문스러워 하는 것, 내가 경험했다는 이유로 ‘청소년’이라는 존재를 온전히 안다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그들의 감정을 평가절하하고 사소하게 취급하는 것. 영화는 성인 캐릭터들을 비난하고 한심해하는 관객들에게 ‘너는 다를 것 같으냐’는 질문을 던지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관객인 우리 역시 청소년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성인임을 일깨워준다.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청소년영화를 보고 싶은 독자, 청소년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고픈 독자에게 <죄 많은 소녀>를 추천한다.

 

나가며

     기존의 통념과 예상을 뒤엎는 것은 무엇이라도 충격으로 다가오며, 우리가 이제까지 무엇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었는지를 일깨워준다. 영화를 보며 느끼는 신선함과 해괴함, 이해 불능. 어쩌면 우리는 딱 그만큼 전형적인 청소년영화에 젖어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양한 개인’이라는, 이제는 당연한 문구의 ‘개인’에 과연 성인이 아닌 청소년도 포함되어 있었는지를 생각해본다. 영화 속 성년들이 다채롭고 입체적인 만큼이나 영화 속 미성년도 그러한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미성년>과 <죄 많은 소녀>는 성년이 보고 싶은 청소년 말고, ‘성년이 보고 싶어 하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청소년’들을 수면 위로 잘 끌어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스포일러를 줄이기 위하여 나름대로 노력했기 때문에 영화의 내용과 인물에 대한 설명이 거칠고 울퉁불퉁하다. 실제 영화에는 이보다 더 복잡한 관계와 사건, 입체적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글을 읽고 두 영화에 흥미가 생겼다면, 먼저 영화를 본 후 공일오비 본 호 「미성년, 울음과 물음 사이」를 읽기를 추천한다. 해당 글에는 영화의 상세한 내용과 더 다양한 감상이 담겨있다. 그럼, 즐거운 감상이 되기를 바란다.

 

글 편집위원 말랑(mallang015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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