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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

[조각조각 쓱싹쓱싹] 東方女人

연희관공일오비 2019. 9. 29. 15:20



일전에 나는 대뜸 수수에게 그랬다.

 

 

우리 여행 가자.”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받아 칠 줄 알았던 녀석은 나를 빤히 보다가, 들고 있던 젤리를 입에 휙 던져넣고는 그랬다.

 

 

유럽. 겁나 멋있게.”

파리.”

받고 체코.”

.”

 

 

그 뜬금없는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에펠탑 보면서 와인 마시고 싶다, 와인 마실 줄은 아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뭐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내 자리로 돌아가 앉아 책을 펼치며 방금 한 대화가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단 느낌이 들었지만, 오히려 머릿속 여행은 점점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책을 한 장 넘길 때마다 베르사유 궁전이, 루브르 박물관이, 센강이, ...... 세상에, 이대론 안되겠다. 당장이라도 여행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나를 강하게 휘감기 시작했다. 그래. 여행의 시작은 아주 소소한 상상에서부터, 이렇게 시작했다.

 

 

 

 

 

#1. Comment puis-je aller à la Tour Eiffel?

에펠탑은 어떻게 가야 하나요?

 

 

호텔에 체크인을 하자마자 우리는 바로 매고 다닐 가방을 챙겼다. 짧지 않게 머물 예정이긴 했으나 단 하루도 헛되이 보내지 않겠다는 지독한 패키지여행자 근성이었다. 생각해보면 긴 비행 때문에 피로했을 것이 분명한데, 아무리 그래도 마냥 호텔에 누워 퍼져있기엔 너무 아쉬웠다. 다른 곳도 아니고 여긴 파리인데요! 결국 필요한 것들만 크로스백에 넣어 단단히 채비를 갖춘 우리는 호텔에서 나왔다.

 

 

그니까, 여기가 파리라는 거지?”

. 프랑스 파리할 때 그 파리.”

날아다니는 거 말고?”

. 날아다니는 거 말고.”

 

 


여행의 시작은 언제나 즐거움의 연속. 처음으로 발을 디딜 곳을 에펠탑으로 정해놓자 즐거움의 파장은 폭발했다. 에펠탑은 늘 역사책에서나, 아니면 사진 속에서나 보던 건축물이었다. 에펠탑의 역사적 의미도 수업 시간 때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으니 그건 둘째치고. 아무튼, 언젠가 프랑스를 가게 된다면 한 번쯤은 에펠탑을 배경으로 하는 멋진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생각만 했지, 그것이 정말 현실이 될 줄이야! 흥분한 건 나만이 아니었다. 수수는 이곳에서 자신의 인생샷을 건지겠다며 온갖 포즈를 연구하고 있었다. 팔을 오른쪽으로 뻗었다가, 순식간에 내리고 왼쪽 팔을 올린다던가. 그저 재밌었다. 나와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호텔에서 에펠탑이 있는 곳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꽤 길게 이동해야 했기에 우리는 벌써 깜깜해진 하늘을 뒤로한 에펠탑을 볼 수 있었다. 어느새 환하게 조명이 들어와 있는데 그 광경이 어찌나 황홀하던지. 파리 시내에는 높은 건물이 많지 않아 에펠탑이 높은 건물 축에 속하는데, 밤이 찾아온 이 시각 환히 빛나는 에펠탑을 바라보며 파리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지 문득 궁금해졌다. 저 반짝거리는 아름다움을 보고 있으면 고된 하루도 사르르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함께 찾아왔다. 아침에 일어나 에펠탑을 보고, 저녁에 집에 들어와 밝은 버전을 또다시 보는 삶이라니. 꿈 같지 않을까?

 

한참을 사진만 찍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관광객 두 명은 이제, 드디어 에펠탑 안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미리 준비해간 종이 바우처를 들고 입구로 걸어갔는데, 공항에서나 볼법한 소지품 검사용 기계가 이곳에도 있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가방을 내려놓으며 괜히 긴장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받아본 적 없는 절차라 잠재적 범죄자라도 된 기분이기도 했고. , 저들한테는 맞는 말일 수도 있겠다.

 

그때였다.

 

 

“Chinese?”

 

 

소지품 검사를 진행하던 한 중년의 파리 아저씨가 대뜸 웃으며 물었다. 주변을 빠르게 스캔하니 동양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우리와 저기 저 멀리서 에펠탑을 찍느라 바쁜 몇몇 관광객뿐. 분명 우리에게 묻는 말이었다. 중국인이냐고요? 참나! 인구로 밀어붙였을 때만큼은 절대 중국을 이길 수 없는 우리나라는 관광객 수에서도 그리 차이가 나나 보다. 동양인을 봤을 때 무조건 중국인이냐 묻는 백인들의 저 못된 습관에 짜증이 나긴 했지만, 괜히 이런 일로 에펠탑에서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대충 고개를 저으며 Korean, 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오우, 하는 입 모양과 함께 고개를 끄덕거린다. 곧바로 옆에 있는 다른 직원과 키득거리는 것이 이상하게 기분 나빴지만 별수 있나. 아는 불어라고는 봉쥬르가 다인 실력으로 저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하튼, 그때부터 슬슬 내 안의 빻음 감지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파리에서의 첫 시동이었는데 그게 그렇게나 속상할 수가 없었다. 파리에는 빻은 놈들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운 좋게 만나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또다시 멍청해지는 순간이다. 감지기 수치가 오를락 말락 할 때쯤, 소지품 탐색이 끝나 우리의 가방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빠르게 가방 쪽으로 손을 뻗어 가져가려는데 그런 우리를 향해 이 직원들은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며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Do you have boyfriends?”

 

 

보이프렌드. 남자친구. 그니까, 맥락상, 여성으로 보이는 우리에게 보이프렌드라 함은, 연인으로서의 남자를 의미하는 것.

좋아. 이쯤 되니 레이더의 수치는 의심에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저 새끼들이 어떤 의도로 저런 질문을 하는지는 세렝게티 초원 뺨치게 훤히 보여서 헛웃음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턱수염 덥수룩한 백인 남성 둘이, 앳돼 보이는 동양인 여성 둘에게 하는 질문 중에 과연 적절한 것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에펠탑까지 오는 동안 운 좋게도 크게 위험한 일을 겪지 않았지만, 막상 이런 일을 처음 겪게 되니 당황스러움에 모든 동작이 올 스탑이었다. 우리끼리 이런 상황이 오더라도 절대 기죽지 말고 한국어로 욕이라도 내뱉고 보자며 다짐했었지만, 현실은 좀 참담했다.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후다닥 가방을 들고 들어가 버리는 게 최선이었다. 웃을 수도, 욕을 할 수도 없었다. 첫날부터, 심지어 그토록 동경해 마지않던 에펠탑 초입에서 이런 상황을 겪게 되니 나와 수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쓸모없어진 종이 바우처만 구겨댔다.

 

파리 전망을 볼 수 있는 에펠탑 상부층으로 올라가면서도, 그렇게 기분이 나쁠 수가 없었다.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밤하늘을 배경으로 독보적으로 빛나는 에펠탑의 빛깔을 보며 신나지 않았던가! 저 남자들은 저게 단순한 유머라고 생각했을까. 아니, 어쩌면 벌써 까먹고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또 다른 동양인 관광객들에게 눈을 돌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 신경 쓸 시간에 에펠탑에서 내려다보는 파리 시내에 집중하고 싶었는데 그것마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괜찮은 척 가벼운 웃음으로 넘겨버리고 에펠탑 입구에서 그랬던 것처럼 열나게 사진을 찍을만한 기분이 아니었다. 심지어 에펠탑 전망대로 올라가는 리프트 속 동양인은 나와 수수 둘뿐이었던 터라 또다시 이들 사이에 갇힌 느낌이었다. 올라가서 예쁜 야경을 보면 기분이 또 금세 풀릴지, 그것마저도 불투명한데 심지어 올라가는 그 시간 동안 이들 사이에 이방인으로서 끼어있는 기분이 들자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다. 도대체, ! 뱉을 수 없는 분노 섞인 외침은 그렇게 속을 맴돌며 잔뜩 상처를 내고 있었다.

 

 

 


 

#2. Yellow C-A-R-D (pee-pee!)

 

 

에펠탑에서 우리가 머무는 호텔까지는 지하철로 약 30분 거리였다. 그리 멀지 않기도 했고 에펠탑의 여운이 남아있는 상태라 서두르지 않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겨울이라 확실히 바람이 차디차 에펠탑 위로 올라갔을 때는 바람 때문에 말소리가 묻힐 정도였다. 다시 내려오니 바람은 덜해졌지만 발갛게 달아오른 두 볼을 녹이느라 한동안 손으로 계속 비비적거리며 수수와 키득거렸다.

 

 

, 파리 시내 한 번 보겠다고 바람에 이렇게 공격받는 거 너무 억울하지 않냐.”

 

 

 

 

녀석의 말마따나, 정말 억울할 정도로 바람이 불어댔다. 목소리가 묻히는 건 기본이고 옷이 펄럭대는 수준이 제대로 붙잡지 않으면 곧바로 벗겨질 것 같았다. 나는 목도리를 옷 속으로 꽁꽁 싸매 바람에 뺏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좀 수고스럽긴 했지만, 그런 모든 노력도 정당화시킬 정도로 파리의 밤은 너무나 예뻤다. 빌딩 숲이 아니라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더 눈에 띄었던 것 같다. 중간중간 보이는 성당이나 유명한 관광지를 알아차릴 때면 수수와 나는 신기하다는 듯이 사진을 찍었다. 바람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짧았던 야경 구경을 뒤로 한 채 내려오긴 했지만.

 

에펠탑에서 내려와 호텔로 돌아가는 길은 또다시 컴컴했다. 하지만 다행히 유명관광지 근처라서 그런지 사람들도 북적거렸고, 지하철 입구까지만 가면 별로 큰 위험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와 수수는 잔뜩 신이 나서 걸었다. 지하철까지 이어지는 인도의 양 사이드를 차지하고 있는 다양한 노점상들을 지나쳐 걸으며 우리는 슬슬 입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시동이 뭐냐 하면, 그러니까, 조금 민망하긴 하지만...

 

 

옐로 씨 에 알 디!!!!”

그 선 넘으면 침범이야 삐

삐삐!!”

 

 

참고로 말하는데 저 마지막 삐삐는 완전 높은 톤의 목소리로 마무리 해줘야 한다. 왜냐면 그게 이 노래의 포인트거든!

우리가 한국인인 이상 여행에서 노래는 빠질 수 없다. 이미 파리에 온다고 결정이 난 후로 제목에 ‘Paris’가 들어간 온갖 노래를 섭렵하며 설레발을 쳤던 듀오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곳에 온 뒤로도 신나기만 하면 바로 입에 시동을 걸었다. , 시동을 건다는 건 결국 우리가 노래를 부르며 주접을 떤다, 의 순화된 의미라고도 볼 수 있겠다. 아니, , 우린 부끄럽지 않았다! 적당한 데시벨로 부르면 얼마나 신나게요? 게다가 여기서 아는 사람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이곳에서는, 지나가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을 만나는 것보다 아침에 눈 뜨고 창문을 열었을 때 에펠탑을 볼 확률이 훨씬 크단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 부끄럽지 않다. . 절대로.

 

아무튼 그렇게 입에 시동을 걸고 열심히 삐삐를 부르며 걷고 있던 참이었다. 당시 아이유의 삐삐가 유행하기도 했었고, 원래 노래를 흥얼거릴 때는 생각나는 거 하나만 무한돌림 합창을 하는 법이기도 하고. 하여튼 그래서 저 옐로카드가 나오는 부분만 과장 좀 보태 20번 정도 돌려 부르고 있었는데,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내 오른쪽으로 어떤 아저씨가 휘파람을 불면서 가까이 오고 있었다. 당시 우리는 에펠탑 입구에서 있었던 불쾌한 일도 잠시나마 잊어버리고 마냥 신나느라 이 낯선 인간이 다가와도 그저 물음표 상태였던 것 같다. 한 마디로 무방비 상태라는 뜻이다.

 

남자는 길거리에 있었던 노점상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어마어마하게 유명한 관광지 근처라 그런지 별 기념품을 다 파는 노점상이 즐비했는데, 아마 그 상인 중 한 명인 듯싶었다. 그리고 한 쪽 손에는 노란 액체가 들어 있는 투명한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는데, 휘파람을 불며 우리 쪽으로 유유히 걸어오더니 그 봉지를 들며 활짝 웃어 보이는 게 아닌가. 신종 싸이코인가, 마냥 우리같이 신난 외국인인가. 도대체 정체가 무언가, 하며 그 짧은 시간 동안 고민하던 우리는 남자가 손을 들어 보여준 봉지로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노란색... 출렁출렁... 그리고...

 

 

“Pee, pee

 

 

아저씨는 우리가 부르던 삐삐를 저리 따라부르더니 또다시 유유하게 쓰레기통으로 걸어갔다. 그 아저씨가 쓰레기통에 봉지를 버리는 것까지, 그 모든 일련의 행동을 우리는 말을 잃은 채 쳐다봤다.

 

솔직히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그 상황 자체를. 남에겐 일절 관심을 가지지 않는 한국 사람들 사이에 있다가 갑자기 외국으로 나오니, 생각보다 우리는 타인에게 여러 종류의 관심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비행기에서도 그랬고 호텔에서도 그랬는데, 별다른 건 아니지만 전혀 면식이 없는 사람과의 대화나 인사가 어색하지 않은 공간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아저씨도 처음에 휘파람을 불며 다가와 우리 옆에서는 노래를 따라 부르길래 우리가 너무 신나게 불러서 영감이라도 받은 건가 싶었다. 한국어 노래든 영어 노래든 상관없이 흥만 있으면 따라부르는 사람인 건가? 하지만 그런 혼란스러움과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곧 깨달았다. . . pee....[각주:1]

그래, 차라리 우리가 한국식 학업 시스템에 굴복했거나 반항적이었다면 애초에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랬으면 저 아저씨가 왜 따라 불렀는지도 몰랐을 것이고, 저 노란 액체의 정체도 몰랐을 텐데...

 

 

제발 누가 나한테 pee가 저 pee가 아니라고 말 좀 해줬으면 좋겠어.”

 

 

수수가 초점을 잃은 눈으로 말했다. 물론, 나도 천프로 만프로 동감하는 상태였다.

다시 호텔을 향해 걸으며 우리는 이 혼란스러운 감정과 분노가 섞여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이가 없었다, 없어도 정말 너무 없었다. 여행 블로거들의 글을 보며 온갖 경험을 다 간접체험 해 봤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넓고, 그 넓은 세상 중 파리에도 또라이는 많았던 것이다. 그 액체가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pee인지는 모르겠지만 하필 그 단어와 발음이 비슷한 그 노래를 따라부르며, 쓰레기통에 넣을 작정이었던 노란 액체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그 또라이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그렇게 연결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영어 잘하는 파리 사람은 찾기도 어렵던데 도대체 저 인간은 어떻게 노래와 자기 소변 봉투를 연결 지어 우리에게 다가올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불쾌함은 천천히 올라와 빠르게 퍼져나갔다. 화장실만 가도 그 아저씨가 생각날 지경이니 말은 다 한 셈이다. 그리고 서글프게도, 이럴 땐 자꾸만 아빠나 남동생이 생각난다. 속상하지만, 과연 우리 옆에 남자가 한 명이라도 서 있었다면 그래도 저렇게 능글맞게 웃으며 다가왔을까, 하는 생각을 해버렸다. 기분 나쁘지만, 어쩔 수 없는 가정이다.

 

 

 

 

 

#3. Little Little Hitler

 

 

파리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행복한 공간에서의 즐거움은 아쉽게도 오랫동안 머금기 어려웠다.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손가락으로 세면 셀수록 이 야속한 시간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지나갈수록 우리는 파리 이곳저곳을 더 열심히 돌아다니기 시작했는데, 그중 가장 많이 지나쳤던 곳을 뽑으라 하면 당연히 샹젤리제 거리일 것이다.


샹젤리제 거리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화려하다는 말을 위해 태어난 장소인 것 마냥, 모든 것들이 반짝거리고 눈을 사로잡았다. 크리스마스는 한참 지난 시점인데도 가로수에는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용품 같은 조명이 걸려있었고 눈이 내려 옅게 쌓인 눈송이들이 색깔 대비를 이루듯 나뭇잎에 살포시 얹혀있었다.

사실 다른 것보다도, 우리의 샹젤리제 투어의 시작은 최초의 마카롱이 탄생했다는 라뒤레(La Durée) 본점이었다. 여행을 계획할 때부터 라뒤레에서 파는 모든 종류의 마카롱을 한 입씩 먹어볼 거라며 잔뜩 들떠있던 수수 못지않게 나 또한 어마어마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마카롱 만든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는데 노벨 평화상은 그 사람 거였어야 했어.”

너 말에 동의하는 거 되게 오랜만인 것 같다.”

우리 그냥 여기서 한 박스 더 사 먹고 한 며칠 굶을래?”

난 선 넘는 사람 싫어해. 여행 중에 버림받고 싶어?”


 

그래도 시식을 참을 수는 없어서, 방금 산 마카롱을 들고 하나씩 꺼내먹으며 샹젤리제 거리를 돌아다니던 우리는 어느새 어둑해지는 하늘을 보며 그제야 우리가 몇 시간 째 샹젤리제에서만 시간을 보냈다는 걸 알아차렸다. 수수는 이제 막 태어나 아직 본인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조카를 위해 선물을 사가겠다며 나를 끌고 아기용품점을 돌아다녔고, 나는 엄마 아빠의 으름장을 이기지 못하고 동생이 원하는 축구선수의 유니폼을 사기 위해 수수를 끌고 스포츠 매장을 돌아다녔다. 여담이지만, 정말 입고 다니는지 나중에 확인이라도 해야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아무튼 샹젤리제 거리에 처음 가게 된 날은 우리 둘 다 나름 이것저것 할 일이 존재하는 바쁜 날이었으므로, 슬슬 아려오는 발바닥을 의식해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저녁은 호텔 근처에 있는 새로 발굴한 샌드위치 가게에서 떼울 작정이었다. 어차피 마카롱을 하도 많이 꺼내먹어서 거창한 식사는 할 수도 없었고 오늘의 지출을 생각하자니 저절로 싼 값의 음식으로 생각을 돌리게 됐다. 샌드위치 정도면 풍족한 식사라고 우리끼리 합리화를 하며 우리는 샹젤리제를 떠나 골목길로 들어갔다.

 

파리 시내의 골목길은 석양을 마주할 때 가장 아름다운 것 같다는 생각하게 된다. 르네상스풍의 정확히 그게 뭔지도 모르지만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 그 사이 여백으로 태양의 붉은 빛이 들어오는 광경이란, 진짜 프랑스 불법체류라도 하고 싶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우연하게도 관광지에서 호텔로 돌아가는 길을 지도로 확인했을 때 비좁은 골목길로 안내하는 경우가 많아서 해가 질 저녁 무렵 그런 석양에 갇혀 길을 거닐게 되었다. 덕분에 이런저런 사진도 많이 찍게 되었지만 한 가지 불편한 점이 존재했다. 석양이 깃든 골목길의 아름다움과 비교되게 가끔 그 골목길을 자기들의 소유물처럼 차지하고 있는 인간들이 서성이고 있다는 점이다.

 

 

“.... 쟤네 봐봐.”

“...돌아가긴 늦은 것 같지...?”

 

 

그들은 우리의 발걸음을 멈칫하게 만들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인 것 마냥 겉모습에서부터 불량스러운 포스가 끈적하게 묻어나왔다.

 

 

아 느낌 안 좋은데.”

너도? 나도...”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어쩔 수 없이 꾹 참고 지나쳐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바로 지금처럼.

남의 생김새를 가지고 멋대로 그들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우리가 지나가야 하는 길목에 서 있는 사람들의 겉모습을 보고 발걸음을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놈들은 총 넷이었는데, 나잇대는 대충 또래로 보였고 추운 날씨도 잊은 건지 아주 가볍고 얇아 보이는 겉옷을 걸치고 우리를 향해 낄낄 웃고 있었다. 불쾌한 웃음을 공유하고 있던 네 사람은 아름답다고 생각한 석양 속 거리 한가운데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생존을 위해 목덜미가 절로 오싹해지도록 설계된 인간의 대단한 DNA는 슬슬 발현되기 시작했다. 애초에 골목을 들어올 때부터 우릴 쳐다보며 입꼬리를 당겨 웃고 있던 저 인간들은 우리의 감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표정이었다. 돌아가긴 글렀고, 그렇다고 우리보다 덩치 큰 남자 네 명을 당당하게 째려보며 비꼴 용감함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을 빠르게 지나쳐 가기로 했다. 혹시 모르잖아? 사실 저 먼 동양에서 온 관광객이 조금은 신기해 보였을 수 있는 순수한 놈들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그냥 우리 뒤편에 있던 걸 보다가 자기들끼리 웃었을 뿐인데 우리가 오해한 걸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Hey, madam.”

 

 

그래. 솔직히 이쯤 되면 아무리 합리화해도 좀 무섭다. 슬슬 우리 쪽으로 걸어오며 말을 걸기 시작하는데 나는 몸이 굳기 시작했다. 다행히 나보다는 정신머리가 단단한 수수는 내 손목을 붙들고 걷는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는데 그런 우리를 놀리듯 걸음을 맞춰 따라오는 그 남자들은 낄낄 웃으며 입으로 익숙한 소리를 냈다.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휘파람을 부는 거였는데, 다른 말로 짧게 줄이자면 그 말로만 듣던 캣콜링이었다.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성 여행자에게 경고하는 상황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었던 경우다. 그것을 처음 겪게 되었으니 나름의 불쾌감이 들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내 머릿속은 더욱 단단히 굳었다. 불쾌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경고음만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이다. 그래서 캣콜링이고 뭐고 일단은 저 새끼들이 얼른 꺼져줬으면 하는 마음에 정말 쳐다보지도 않고 발걸음만 재촉했는데, 그중 한 명은 굳이 굳이 우리의 시야로 들어와 양손으로 두 눈을 찢어 보였다. 고작 해봐야 동갑, 아니면 더 어려 보이는 놈들이 명백한 성희롱과 인종차별적 제스처를 해대는데 너무 속상하게도 우리는 고개를 정면에 고정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서는 이럴 때 멋진 주인공은 욕도 해대고 가끔 심하면 가랑이도 걷어차던데. 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몸이 뻣뻣해지는 건지.

 

골목길을 빠져나오고 큰 대로변으로 진입하고 나서야 우리는 숨을 고를 수 있었다. 혹여나 여기까지 따라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뒤를 계속해서 돌아봤고, 그놈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제야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두려움에 잔뜩 짓눌려있던 탁하디탁한 분노였다. 우리의 분노는 겨우 그런 탁한 색이었다. 붉게 타오르는 선명한 색이 아니라.

 

 

개새끼들. 미친 거 아니야 진짜?!”

개새끼라고 하지 마. 개들한테 미안해지니까.”

 

 

안 그래도 녹초가 된 몸에 마음마저 변색하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석양빛은 사라지고 온갖 더러운 색깔이 속을 가득 메워갔다. 고작 그런 놈들한테 공포감을 느꼈고, 우리가 느낀 공포감은 절대 허상이 아니라는 것에 더더욱 화가 났다. 나 자신에게 난 건지 그놈들한테 난 건지 모르겠다. 분명 분노의 대상은 그들이어야 하는데 그 화살의 끝이 나에게 향하는 것 같아서 그것도 화가 났다. 왜 자꾸만 화가 나는지 모르겠는데, 여하튼 우리는 화로 가득 찬 채로 호텔을 향해 걸었다. 분노의 끝점은 결국 스스로를 향한 자책과 후회라는 게 빡치고, 또 슬펐다.

 

 

 

 

§

 

 

 

 

고객님, 여행은 어떠셨습니까?

좋았어요. 내가 언제 또 유럽을 맘대로 쑤시고 돌아다니겠어!

 

다행이네요. 파리는 아름답던가요?

아름다워요. 정말로요. 글쎄, 몽마르뜨 언덕에는 쥐들이 돌아다니고, 소매치기범들이 밤낮없이 열일한다길래 많이 걱정했는데 그 정도까진 아닌 것 같고. 실은 손가락 빠지도록 가방끈 붙잡고 다니긴 했지만... 여튼 그래도 너무 예뻐요. 에펠탑 야경은 또 어떻고!

 

또 한번 가고 싶으신가요?

... 또요? , 또 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 다음엔 조금 더 공부해서 박물관도 제대로 돌아보고 싶고.

 

정말로요?

...뭐가요?

 

정말 다시 방문하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니까요.

 

행복만 하셨나보네요.

 

 

다행입니다.

 

 

즐거운 귀국 되시길!

뭐야 이거...?

 

 

 

 

§

 

 

 

 

번쩍. 눈을 뜬다. 역시, 꿈이다. 그것도 애매모호해서 매우 짜증 나는 꿈. 이젠 하다 하다 AI랑 대화하는 꿈까지 꾼다. 여독이 심하긴 한가 보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몽글몽글한 구름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어릴 땐 솜사탕 같다며 즐거워했던 것 같은데 이젠 나름 현실적으로 성장한 건지 여기서 떨어졌다간 얼마나 큰일이 날까, 하는 무서운 생각을 하게 된다. 저 귀여운 솜사탕 구름은 우릴 보호해주지 못하겠지, 뭐 이런 생각도.

 

인천까지의 길은 멀고도 멀다. 10시간이 넘는 비행은, 가끔 사람을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게 한다. 잠도 질리고, 영화도 질리고, 하다못해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질리고, 장시간 비행 때문에 묘하게 불편한 속을 의식하기도 질릴 때쯤. 딱 그때쯤이다.

20살의 한국인 여자인 내가 아니라, 20살의 영국인 남자인 내가 여행을 다녀온 것이라면. 내 추억의 면면은 많이 바뀌지 않았을까, 하고. 영국인이라고 굳이 설정할 필요는 없다. 벨기에여도 괜찮을 것이고, 호주여도 괜찮을 것이다. 우리와 특징적으로 외관상 차이를 가진 모든 나라의 남성들을 대표한 한 사람이면 될 것이다.

좋았다, 여행은 참 좋긴 했는데, 그 좋은 기억 속 끼어드는 불쾌한 장면이 생각보다 많다. 이걸 어찌할 수도 없고, 이 찜찜한 기운을 계속 안고 가야 하는 건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닌가. 돌아가서 누군가 여행은 즐거웠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생각이긴 하지만, 위험하진 않았냐고 묻는다면... 글쎄. 내가 겪었던 불쾌한 일들이 과연 생명의 위협을 줄 만큼 중대한 사건들이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온갖 공포에 시달려 온종일 주변을 경계해야 했던 지난 며칠간의 우리를 생각하면, 분명 너무 무섭고 두려웠던 것 같은데. 여행에서 느꼈던 감정을 곱씹자 여자애들 둘이 여행 간다고 별걱정을 다 하던 엄마 아빠가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결국 두 사람이 했던 별걱정은 절대 별것이 아니었다. 죽을 만큼의 위기 또한 우리가 운이 좋게 피해간 걸 수도 있고, 이만하면 동방에서 온 낯선 여성 이방인이 나름 안전하게 여행을 다녀온 셈일 수 있다. 그런데도 여행을 돌이키면 중간중간 얼굴을 드러내는 몇몇 인간들. 이들을 어찌해야 옳을까. 결론적으로 무탈하게 여행을 끝낸 것에 안도를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더한 분노라도 표출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유럽이랑 인천은 왜 또 멀어서, 이런저런 생각을 자꾸만 하게 하는 건지. 빨리 공항에 도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반복하며 또다시 창밖 구름으로 시선을 돌렸다. 몽글몽글한 구름에 폭 파묻혀 보고 싶다. 정확히 말하자면, 구름 속에 뛰어들어 환상인 것처럼 즐겁기만 하고 싶다. 행복했던 파리와 행복했던 우리만 남겨놓고. 깔끔하게 불순물은 구름 아래로 떨어트리고. 이 또한 상상이란 걸 알지만, 마음이 훨씬 편해질 수 있도록





글 편집위원 두별(jhansta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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