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서사

[서사] 사회과학대 1학년생의 다짐

연희관공일오비 2017. 1. 13. 15:44

미얀마에서 얻은 깨달음, 새 학기를 준비하며

나는 올해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말하기 민망한 수준이지만 처음으로 사회과학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공부하게 되었다. 아직 사회과학을 공부한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짧은 시간동안 초보 사회과학대 학생으로서 느꼈던 고민들과 그것을 해결하려던 나의 노력을 적어보려 한다.

고등학교 때에는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에 신경을 끄고 당장의 내 일에만 집중하는 게 편했던 적이 많았다. 이다음에 세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지금은 내게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면서 사회문제를 고민하고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일단 대학교에만 들어가면 나는 사회를 탐구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사회에 보탬이 될 만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자기합리화를 했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했다. 원하던 사회학과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장 급한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의 긴장은 대학에 오는 ‘급한 일’을 해결하면서 풀렸다. 고등학교 때 핑계로 삼던 일차적 요소가 해결되었으니 더 이상 결심했던 것을 미루기 싫었다. 비록 하나뿐이지만, 전공 수업에서는 젠더며, 범죄며, 빈곤이며 그동안 궁금했던 일들이 다루어지면서 나를 자극했다. 시간도 훨씬 자유롭게 쓸 수 있었기 때문에 기회만 되면 뭐든 하리라는 마음으로 의욕이 말 그대로 불타고 있었다. 사회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던 중 학내 언론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언론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마침 그것이 내가 속한 공동체에 대해 더 알고 싶고 대학생활을 바쁘게 하고 싶던 나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렇게 언론사에 속하면서 학내 문제를 취재하게 되었다. 전공수업에서는 경제적 지구화에 대한 보고서를 쓰고, 전공 서적도 읽으려 시도했다. 갖은 언론사에 좋아요를 눌러놓고, 강연 소식이 보이면 신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곧 지쳤다. 처음에는 호기심을 가지고 찾던 기사 아이템들이 의무적인 일이 되어 버렸고, 보고서는 같은 내용만 반복하고 있었고, 전공서적은 한두 장 넘기다 잠들고, 뉴스피드는 읽지도 못하는 기사들로 꽉 차고, 강연은 신청해놓고 안가기 일쑤였다. 사회과학대 학생이 되었으니 뭐라도 더 알아야한다는 마음의 짐과 그동안 몰랐던 것들을 채우려던 의욕과다가 불러온 결과였다. 어중간하게 들은 얘기들은 많아졌지만 거기에 대한 내 의견은 없었다. 어려운 글을 읽으려하고 똑똑한 사람들과 얘기하다보니 지적 자신감은 갈수록 바닥을 쳤다. 더 이상 채워지는 느낌도 잘 안 들면서 습관적으로 바쁘게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이 때 느꼈던 가장 큰 고민은 세 가지다. 첫째, 어디서 알게 되는 정보들이 많아져도 그것을 스스로 소화시킬 수가 없었다. 둘째, 새롭게 안다고 해도 내가 거기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았다. 셋째, 소화도 못시키고 할 수 있는 일도 없으니 자신감이 없어 그런 주제에 대해 말하는 것도 점점 어려워졌다. 

생각 없이 주어진 일만 하던 나는 처음 겪는 혼란에 어떻게 해결할지 몰라서 계속 바쁘게 다른 일들을 찾아서 했는데, 그래도 그게 하나 좋은 선물을 주기는 했다. 습관적으로 신청해버린 해외봉사에 운이 좋게도 뽑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여름방학의 2주동안 나를 포함한 20명의 단원들, 인솔자 선생님과 함께 미얀마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 감사한 기회를 통해, 한국에서의 고민을 침착하게 풀어볼 수 있었다.

미얀마의 수도 양곤에서부터 다시 1시간 국내선을 타고, 1시간 넘게 버스를 타야 도착할 수 있는 혜호의 탕쥐마을에서 내 인생 최고의(과장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진심인) 여름을 보냈다. 외국인이 발을 딛는 것은 처음인 그곳에서, 교육봉사·노력봉사·문화교류 및 소소한 사건들로 하루하루를 알차게 채워나갔다.

탕쥐마을에 있으면서 한시라도 행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처음 며칠간은 그냥 한국과의 단절이 좋았던 것 같다. 사회에 대해 더 알아야한다는 압박감이나 벌려놓고 해치우지 못한 일 등등 머리 아팠던 고민들을 다 잊고 지낼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스마트폰이며 인터넷이며 탕쥐마을 밖의 소식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없었기에 나는 지금 내 앞에 펼쳐진 ‘새롭고 처음인’ 일에만 집중하면 되었다. 기사 써야한다고 연락 받을 일도 없고, 나를 유혹하는 새로운 모임이나 강연 정보도 볼 수 없고, 최신 사건들을 따라잡지 못해 느끼는 불안감도 없었다. 

천장이 뚫린 야외 욕실에서 푸른 하늘과 산을 그대로 느끼며 샤워를 하는 것이 좋았다. 그 안에서 단원들과 차가운 물을 끼얹어주고 있을 때 여자 아이들 몇 명이 쪼르르 들어와 ‘밍글라바(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해 당황한 기억도 재밌었다. 손을 씻을 때 물에 손을 2초 동안 담갔다가 뺐던 아이가 손 씻기 송을 함께 한 후 비누를 묻히고 깍지를 껴가며 손 씻기 송을 불러 보이던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평소에는 잘 먹지도 않는 고기반찬을 해주면서 ‘수줍어하지 말고 많이 먹으라(Don't be shy)’고 오히려 수줍게 말하던 모습이 고마웠다. 말도 안 통하는 현지 기술자 아저씨들과 손짓 눈짓으로 얘기하며 평생 안 해보던 소위 ‘공구리’를 치다보니 교실이며 화장실이 만들어지는 것도 마냥 신기했다.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과 등교하고, 미장을 하고, 수업을 하는 일상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계속 행복했다. 지속되는 행복함은 초반에 느꼈던 단순한 단절, 새로움, 뿌듯함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바쁘기로만 따지면 새벽부터 일어나 체육대회를 하고, 응급처치, 손 씻기 수업 후에, 춤 연습, 문화 공연에 밤늦은 회의, 다음날의 수업 준비까지 하루를 이틀처럼 한국에서보다 바쁘게 살고 있는데도 전혀 힘들지 않고 즐거운 이 상황을 이해하고 싶었다. 행복한 이유를 더 고민하면 미얀마를 떠나더라도 이 느낌을 이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먼저, 그동안 공동체의 문제를 알려고 했지만 자꾸 포기하게 되고, 그것이 어렵게만 느껴진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정보에 접근한 동기에서, 내용에 대한 호기심보다 알아야한다는 의무감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 학기동안 ‘어떤 이유나 계기’를 통해 무언가 궁금해져서 내 주변을 관찰하고 공부하려한 것이 아니라, 그저 ‘알아야한다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두고 이것저것 두리번거렸다. 그러다보니 글이나 강연이나 경험에서 무엇을 얻어야하는지 방향도 잃었고 재미도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진짜’ 접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탕쥐마을의 학교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아이들이 왜 동자승이 되기를 선택하는지, 높은 산인데 물은 어디서 끌어다 쓰는지, 선생님은 왜 한 분밖에 안 계시는지와 같은 궁금증이 저절로 생겼다. 그래서 그들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미얀마의 상황을 더 검색해보기도 했다. 이미 기반적인 지식들이 있다면 그것들 사이에서 연결고리를 만들어 보다 깊은 공부를 이어갈 수 있겠지만, 그런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호기심부터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직접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꽤나 큰 자극이 되는 것 같아서 이번 학기에는 현장에 직접 갈 수 있는 기회들을 찾아서 공부를 시작하는 계기들을 많이 찾아보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찬찬히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고도 느꼈다. 무언가에 진짜 ‘몰두’하는 경험을 하고 나니, 그동안 내가 집중력이나 끈기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못 찾은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왠지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들리는 대로 보이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우선 나만의 기준을 만들고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판단할 능력을 기르기로 결심했다. 미얀마에서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고, 일을 기획하고, 새로운 현장을 느낄 수 있는 곳에서 일하는 것에 내가 행복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당분간은 내가 행복함을 느끼는 포인트들을 찾는 데에 힘써야겠다. 나의 중심을 잡기도 전에 커다란 일들에 뛰어들다보니 기대와 다른데도 쉽게 그만두지 못하고, 일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없어서 쉽게 지쳤던 것 같다. 오랜 시간 진행하는 프로젝트보다는 일상생활이나 단기적인 경험을 꼭꼭 씹으면서 앞으로의 선택에 사용할 나의 기준을 만들어 볼 것이다. 

내가 손 댈 수 있는 문제가 없다는 무기력감도 꽤 극복했다. 지금은 그런 문제에 손 댈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것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으면 된다. 내 주변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을 지금 실천하면 관심의 끈도 놓지 않고 무기력함도 어느 정도 이길 수 있다. 단원들끼리 마음을 모아 한 달에 한번 우리끼리 만든 통장에 저금을 해서 맨발로 많이 다니는 아이들에게 쪼리를 선물하기로 했다. 그리고 미얀마 청소년 친구들과는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 간간히 연락을 하고 있다. 행복했던 일, 나에게 자극을 주었던 일을 잊지 않고 고민하며 그것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을 이어나가는 것 정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에 그런 꾸준함 속에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발전하려고 노력해야할 것이다.

모순적일 수도 있지만 이 깨달음들은 갓 입학해 내 중심 없이 여기저기 덤볐던 기회가 준 것이기도 하다(물론 그때도 덤비기 전에 좀 더 나를 살폈더라면 덜 급격하게 지치기는 했겠지만). 그렇기에 무턱대고 건드렸던 한 학기가 후회되지는 않는다. 대신 다시 그 혼란을 겪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앞으로는 ‘얻어 걸려서’가 아니라 몰두할 일을 ‘먼저’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 일에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나를 먼저 다지고 준비시킬 것이다.



글 편집위원 수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