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이 글은 <연희관015B> 3호에 실린 글로, 2015년 초에 쓰여졌습니다.

 

대학에 들어온 후 항상 내 머릿속을 차지한 고민은 다름 아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철학자들이나 던질법한 심오한 질문이지만 대부분 20대들이 이런 생각을 달고 살지 않을까. 대학에 들어올 때만 해도 뭔가 특별한 삶이 시작될 줄 알았는데 대학생1이 된 느낌만큼 괴로운 것이 없었고, ‘여긴 어디, 나는 누구’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 흘러가는 시간의 압박을 견디며, 이제는 직장인1이 되는 걸 두려워한다. 하지만 선뜻 다른 방향을 향해 과감하게 움직이진 못한다. 항상 특별함에 집착하지만 사실 그게 뭔지도 잘 모르겠으니까. 이런 참을 수 없는 감정들을 꾹꾹 눌러 담은 채 오늘도 나는 스마트폰을 보며 학교 가는 버스에 올라탄다. 페이스북에 고충을 털어놓는 덧없디 덧없는 짓도 새내기 때나 했지, 이제는 뭔가 의미 있어볼까 하고 뉴스를 뒤적거려 본다. 솔직히 뭔 말인지 잘 모르겠는 말들도 많고, 이걸 알아서 내 삶에 무슨 의미인가 싶은 말들이 태반이다. 다시 멜론에 들어가서 음악이나 찾아듣는다. 곧 내가 고뇌 중이었다는 걸 까먹고 가벼운 리듬을 타며 대학생1이 되어 교실에 들어간다. 몇 년째 반복되는 이 무한루프. 나는 왜 이다지도 이도 저도 아닌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는가. 여기에 그 변명들을 가볍지 않은 척 늘어놓고자 한다.[각주:1]




변명1


젊음이란 참혹한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그리스 비극 배우의 장화에, 다양한 무대 의상 차림을 하고,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면서, 광적으로 신봉하는 대사를 외워서 읊으며 누비고 다니는 그런 무대이다. 역사 또한, 미숙한 이들에게 너무도 자주 놀이터가 되어주는 이 역사 또한 끔찍한 것이다. 네로라는 풋내기, 나폴레옹이라는 애송이, 흥분하여 날뛰는 수많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흉내 내는 열정이나 간단하게 맡아버린 역할들은 처참하도록 실제적인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밀란 쿤데라, 『농담』 中


밀란 쿤데라의 『농담』의 한 문장은 20대 초반도 다 지나간 지금 내가 느끼는 두려움, 망설임 그리고 혼란이 무엇인지 꿰뚫어보는 듯하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의 역사에 대한 회의는 나에게 위안을 준다. 내가 그동안 아무 가면도 택하지 않은 데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아무 가면도 쓰지 않고 있음으로써, 이 사회에서 아무것도 아닌 듯 느껴진다. 존재감 없이 무대 밖에 서 있는 것 또한 참혹하게 느껴지기는 매한가지이다. 저 무거운 가면, 그리고 지금의 미칠 듯한 가벼움[각주:2], 사실 이 중 그 어느 것도 맞는 길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여러 변명거리에 떠밀려 여전히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속에 체념과 회의를 번갈아 맛보고 있다.


버스에서 내려 캠퍼스에 들어서면 봄바람에 돌아가는 바람개비들 사이 청소노동자 부당해고에 관한 대자보가 여기저기 서툴게 붙어있다. 얼마 전엔 그 자리에 최씨 아저씨께 보내는 편지들이 붙어있었고, 더 얼마 전엔 안녕들 하냐는 대자보들이 붙어있었다. 하지만 그 외침들이 원자화된 무리를 뚫고 내 귀에 닿았음에도, 어쩐지 난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글 앞에 모였던 사람들이 흩어지고 종이가 너덜너덜해지는 것을 보며 마음 한켠은 불편하다. 어쩔 땐 이 불편함을 외면하려 스스로 무뎌지는 것도 같다. 그렇게 크고 작은 사건들과 함께 씁쓸한 사회를 씁쓸한 모습으로 바라만 보아왔다. 20대의 정치적 무관심을 얘기할 때는 흔히 자기 입신양명밖에 모르는 ‘20대 개새끼론’ 혹은 구조적 문제와 한계를 나타내는 ‘88만원 세대’ 담론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변명을 하고 싶다. 


필자가 대학에 처음 들어왔을 때를 떠올리며 그 심경을 풀어내겠다. 몇몇 친구들에게 들은 바, <연희관 015B>가 속해 있는 사회과학대학은 ‘운동권’이 지속적으로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영향은 새내기들이 대학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페미니즘이니 학생운동이니 그러한 것들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필자가 속한 문과대학은 이러한 것들과 거리가 멀다. 공적인 자리에서 기본적인 타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 같은 원칙 이외에 정치적 색채를 띈 슬로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의 학생회 주체들 또한 흔히 말하는 ‘운동’의 색채와는 거리가 있다. 그야말로 거의 탈정치화된 분위기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새내기 시절 대학에 대한 환상과 허영을 품고 있던 필자는 사회의식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무식해도 되는 것인가 이렇게 개인주의적 쾌락만 즐겨도 되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정작 그런 종류의 기회가 다가왔을 때 필자가 느낀 것은 두려움이었다. 알고 지내던 선배가 독서모임을 제안해왔는데, 그 선배와 그 모임에 속한 지인의 모습을 보니 그들은 다분히 ‘운동권’적 색채를 띠었고 또 멍청했던 나와 달리 똑똑해보였다. 그 둘이 주고받는 정치적인 농담은 그 성향을 여실히 나타내주었으며, 나는 이를 다 이해할 수도 따라서 그들과 같이 웃을 수도 없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에 들어가 공부를 한다 생각하니 필자는 덜컥 겁이 났다. 그냥 내가 얼마나 멍청해 보일까가 문제가 아니었다. 어리숙한 상태에서, 단순한 동경을 가지고 정치적 색채가 뚜렷한 집단에 들어가게 될 때, 내가 나를 잃지 않을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들에게 너무나도 쉽게 동화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러한 부류로 쉽게 호명되지 않을까.


이러한 두려움은 최소한 3년 전 보다는 똑똑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정치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내려면, 나 혼자서 움직일 수 없다. 정치는 그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집단의 힘을 필요로 하고, 그 결과 개인은 특정 노선을 선택하여 동참하게 되어있다(혹은 그 노선을 만들어 내든지). 하지만 과연 내가 선택한 노선이 정말 나의 생각과 일치할까. 어느덧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나의 생각’이라 착각하고 그것들을 흥분하며 지껄이고 있진 않을까. 그 집단속에서 행동할 때 그것들은 모두 순수하게 나의 자발적인 움직임일 수 있을까. 그들이 정말 과연 내 목소리를 대변해줄까. 이와 같은 두려움들은 내게 정치에 대한 회의감과 거부감을 주어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외면하게 만든다. 평소에 가지고 있던 이 일련의 느낌 덕에 나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을 때, 그가 말하는 키치 개념에 몰두하게 되었다.


여러 사조가 공존하고 그들의 영향력이 서로를 제한하고 무화하는 사회에서는 키치의 독재로부터 어느 정도 빠져나올 수 있다. 개인은 자신의 독창성을 보호할 수 있으며, 예술가는 예기치 않은 작품을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 흐름 하나가 모든 권력을 쥐는 곳에서 사람들은 대번에 전체주의의 키치 왕국에 빠지게 된다.

내가 전체주의라고 표현한 까닭은 키치를 훼손하는 모든 것은 삶으로부터 추방당하기 때문이다. 모든 개인주의의 발현,(모든 부조화는 미소 짓는 연대감의 얼굴에 내뱉은 가래침이기 때문이다.) 모든 회의주의,(사소한 세목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하는 자는 마침내 있는 그대로의 삶, 그 자체를 의심하기 마련이다.) 아이러니, (키치의 왕국에서는 모든 것이 진지하게 간주되어야 하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가족을 버린 어머니나 여자보다 남자를 좋아해서 “교미하라 번식하여라.”라는 신성불가침한 슬로건을 위협하는 남자.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쿤데라에게 키치 개념은 인간이 갖는 특정한 존재방식을 지칭한다(우리가 흔히 예술분야에서 사용하는 키치 개념보다 확장, 심화되었다고 보면 된다.) 키치는 대략,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 집단의 ‘보편적’ 감정에 무비판적으로 휩쓸리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즉 나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이 아닌, ‘보편적’ 감정이 주는 익숙함과 편안함에 아무런 저항 없이 따라가는 것이다.[각주:3]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러한 키치가 체코를 점령했던 소련의 스탈린주의 뿐 아니라, 소련에 대항하는 체코의 독립운동 집단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각주:4] ‘정치 흐름 하나가 모든 권력을 쥐는 곳은 전체주의의 키치 왕국에 빠진다는 것’ 이는 그 정치 흐름이 전체주의이든 혹은 反전체주의적이든 하나의 사조가 지배적인 곳에서 개인이 몰개성화되기란 너무나도 쉬움을 보여준다.



변명2



그러나 나는 단지 탈정치화가 우월하다거나 정치 나부랭이는 다 썩어빠졌다는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키치는 단순히 정치 영역에만 존재하는 태도가 아니기에, 탈정치적 인간 역시 언제나 키치가 될 위험에 놓여있다. 정치적 키치가 아닐지라도 자신의 판단과 의지 하에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저 지배적 시류에 편승하여 살아가고 있다면, 그 자 역시 키치적 인간인 것이다. 정치 연극을 바라보며 느끼는 왜소함과, 그것이 비록 키치일지라도 무거움에 대해 느끼는 동경은 비정치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남들 사는 대로 살기 싫지만, 남들만큼 살기 위해 처절히 노력한다. 우리 대학생들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서포터즈, 공모전, 대외활동 등 각종 스펙을 쌓아서 원하는 기업에 들어가기.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은 서로 얼마나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정말 우리의 판단과 결정에 의한 것인가. 에리히 프롬은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근대인의 안쓰러운 모습을 다음처럼 얘기한다. 

근대인은 ‘자신의 것’으로 생각되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할 때는 커다란 위험마저도 무릅쓴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에 대해 스스로의 목표를 부여하는 위험과 책임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여 이를 행하지 않는다. 격렬한 행동은 때때로 자신이 결정한 행동의 증거라고 오해되기도 한다. … 연극의 일반적인 줄거리가 교부되면 모든 배우는 자기에게 배정된 역할을 열심히 연기할 수 있으며, 자신 있는 부분, 연기의 세세한 부분은 자기가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는 주어진 하나의 역할을 연기하는 데 불과하다.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中


에리히 프롬은 거대한 자본주의 시스템에 원자화되어 순응하고 있는 근대인에 대해, 밀란 쿤데라는 너무나도 쉽게 격정에 휩쓸려 정치화되는 청춘에 대해 말하지만, 두 사람은 공통적인 메시지를 보낸다. 우리가 자신의 모습이 아닌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정치적 자유 · 경제적 자유 · 신체적 자유 등등 온갖 권리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다고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단지 근대인을 억압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갖게 된 행동 결정권으로, 소극적 의미의 자유에 불과하다. 진정한 자유는 ‘……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가 아닌 저마다의 목적을 향하는 ‘……에 대한 자유(freedom to)’여야 한다.[각주:5] 우리는 부유하는 자유를 진정한 자유로 만들기 위해 나름대로의 격정을 거치며 무게를 쌓아가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가벼움을 참지 못하고 너무나도 쉽게 사회가 주는 가면으로 도피한다.


결국 우리가 탈정치화된 삶을 살아가든, 정치화된 삶을 살아가든 이는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내가 내 욕망과 판단에 따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이다. 하지만 문제는 ‘내 생각을 만들어가기’, 이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다. ‘내 생각’을 만들어가 가기 위해서는 사색의 시간이 필요하고, 또 이를 위한 나름의 공부가 필요하다. 인문학이든 사회학이든 종교학이든 어떤 형태로든 내 머릿속 퍼즐들을 맞춰가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너무나도 쉽게 ‘순진한 몽상’으로 치부된다. 


잠깐이라도 고민의 시간을 가질라 치면, 아무런 ‘생산과 효율’을 가져다 줄 수 없는 이 시간 속에서 우리는 이내 극도의 불안을 느낀다. 우리가 진리를 구해보겠다고 깝치는 동안 부모님은 너도 이제 고학번인데 무슨 생각으로 사냐고 물어 오시고, 잘나가는 친구들은 학점 스펙 다 챙겨가며 취업의 수순을 밟아간다. 돌아가는 시간 벨트에서 이탈한 우리는 안절부절못한다. 결국엔 실업자 신세를 면하기 위해 다시 그 대열에 올라타기 십상이다. 이렇듯 삶에 대한 그리고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 자체가, 우리의 삶에서 무게를 차지하기 힘들다. 그 결과 우리는 자신의 것이 아닌 목표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와 같은 문제들을 광적으로 피하려 애쓴다. 그렇게 우리는 바라도록 ‘되어 있는 것’을 바라면서, 자신이 바라는 대로 살고 있다는 환상 속에 살아간다.[각주:6] 이러한 환상을 유예하며, 졸업학기를 바라보는 나는 대책 없이 가벼워질 뿐이다.



변명3



문제는 비단 이러한 구조적 한계뿐만이 아니다. 용기를 내어 구조 따위 개의치 않고 내 발로 내 길을 걷고 싶어도, 지도니 이정표니 하는 것들을 좀처럼 찾기 힘들다. 어느 길로 나아갈진 모르더라도, 도대체 내가 어디 있는 지라도 알고 싶다. 나는 도대체 어떤 시대에, 사회에, 국가에 살고 있는지 말이다. 우리는 그 지도를 머리에 그리기 위해 각종 역사책을 뒤지거나 대한민국 헌법을 보거나 정치학개론을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굴러가고 있는 이 사회를 나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건 뉴스다. 우리는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정치·경제·문화 모든 것에 대한 공신력 있는 정보를 일차적으로 뉴스로부터 얻는다. 그러나 쏟아지는 뉴스는 우리에게 그러한 지도를 제공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무질서하고 불가해한 정보를 매분매초 무한대로 흘려보내 우리를 혼란과 무지의 세계로 떠민다. 알랭 드 보통의 『뉴스의 시대』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하여 이상적인 뉴스의 역할을 다음처럼 제시한다.


인간 뇌의 일부는 특정한 기초 범주에 따라 분류된 정보들이 꽂힌 서재로 묘사할 수 있다. 우리가 날마다 접하는 것 대부분은 머릿속 서가의 어느 지점에 보관되어야 하는지 즉각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명쾌한 신호를 보낸다.…하지만 낯설거나 비중이 작은 기사일수록 어느 서가에 꽂아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도 더 힘들어진다.…그런 오갈 데 없이 떠도는 정보 조각들을, 거기 감춰진 논리를 가장 적절하게 드러내주는 서가로 운반하는 데는 도움이 필요하다. 이런 사서의 작업 중 일부를 떠맡는 것이 바로 언론이다. 자잘한 사건들을 포함하는 더 큰 범주의 주제에 대해 감을 잡도록 해주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中


우리에게 ‘사서’역할을 하는 뉴스는 사막의 오아시스만큼이나 희귀하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근대 문화는 개인적인 삶이나 사회적인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또한 심리적 ·경제적· 정치적·도덕적인 문제에 대해 단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 특징은 ‘논점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뉴스는 그가 말하는 근대 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너무나 복잡하고 보통 개인으로서는 파악하기 힘든 ‘전문가들’만 이해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그 두꺼운 연막에 우리는 스스로의 사고능력에 대해 자신감을 잃는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이와 같은 영향은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한다. 그 하나는 듣는 것, 읽는 것 모두에 대한 회의주의와 냉소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권위를 가지고 이야기되는 일은 무엇이건 어린아이처럼 믿어버리는 일이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냉소주의와 순진함의 결합이 근대의 개인에게 지극히 전형적인 모습임을 꼬집는다. 나아가 그 본질적 결과는 한 개인이 자기 자신의 사고나 결정을 내리는 용기를 상실케 하는 것임을 견지한다.[각주:7]


그래서 나는 ‘나’로서, 자의식을 갖고 살기 위해 어찌하면 된단 말인가. 이 책에서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해답을 말하자면 일단 뉴스는 아니더라. 뉴스가 교체되는 주기는 거침없이 빠르며 어제의 뉴스가 얼마나 중차대했는지와 무관하게, 매일 아침마다 불협화음이 한꺼번에 다시 울리기 시작한다. 무자비한 파편들에 이리저이 치이다보면 어제의 의구심은 까맣게 잊히기 마련이다. 이렇듯 뉴스의 중심에는 우리를 기억상실증으로 몰고 가는 기제가 존재한다.[각주:8] 알랭 드 보통은 여기에서 벗어나 우리 내면을 탐사할 것을 요청한다. 그는 뉴스가 더 이상 우리에게 가르쳐줄 독창적이거나 중요한 무언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챌 때 삶이 풍요로워진다고 말한다.[각주:9] 우리가 먼저 자신만의 생각을 잉태시킬 만한 인내심 많은 산파의 기술을 터득하지 못하는 이상,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는 단단한 무엇을 하나도 갖지 못할 것이라며. 방랑하는 사색 속에서 자신만의 목적을 찾는 것, 이것이 그가 말하는 독립적인 사고를 갖는 방법이다.



변명4



나는 나이를 먹어가고, 부모님은 걱정을 하시고, 친구들은 취업을 하지만, 그래도 이 모든 것을 잊으려 노력하고 사색하는 것! 이것이 가장 노답인 해답인가보다. 하지만 이는 적잖이 감동적이었다. 사색하며 흘려보내는 시간에 대해 다소 죄책감을 느끼고 불안해하는 나에겐 매우 위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이없을 정도로 당연하게, ‘내 생각’을 만들려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야 하지 않겠나. 뉴스의 연막에 가려진 복잡한 사회와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하는 나를 사색하기 위해선 또 얼마나 많은 공부가 필요하겠는가. 우리의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할 땐 정말 노답이지만 이게 유일한 답인 것이다(아니면 원래 인생은 노답인 것 같다). ‘이상’적인 것을 꿈꾸면서 그 방법이 ‘현실’적이길 원한다면 그건 지나친 욕심일지도 모른다(여기까지 겨우 읽었는데 이게 무슨 개소리야! 하신다면, 죄송합니다. 전 일개 대학생1일 뿐인걸요). 보통 말고도 공부를 많이 하신 많은 분들이 이러한 뜬 구름 잡는 소리를 많이 해주셨다. 마르쿠제니, 벤야민이니, 아도르노니 비슷한 얘기들을 하시더라(사실 요즘 수업시간에 배우고 있는 아저씨들이다). 이들 중 필자의 가슴에 훅 들어온, 아도르노 얘기를 나누며 글을 끝마치고 싶다.


아도르노는 1903년에 태어나고 1969년에 죽어서 양차대전을 모두 경험하고 파시즘의 광풍과 자본주의의 독식을 모두 지켜보고 죽었다. 프랑크푸르트학파[각주:10]의 1세대인 그와 호르크하이머는 "왜 인류는 진정으로 인간적인 상태에 진입하는 대신에 새로운 종류의 야만성에 빠져버렸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계몽의 변증법』에서 그 원인을 지적한다. 이들이 지적한 원인은 다름 아닌 계몽, 곧 그 주체인 이성이었다. 이성은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사회적 조직을 필요로 했고, 또한 사회를 지속시키기 위해 인간의 내적 자연성 즉 자유를 희생시켜야 했다. 그 결과 인간은 인간 본연의 가치를 존중하기보다 주체의 목적을 위해 타자를 수단화시키는 도구적 이성[각주:11]을 발달시켜왔다. 


아도르노는 도구적 이성에서 벗어나 다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기 위해서는 심미적 가상을 통해 태초의 자유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미적 가상이란 그 음성적 이미지가 시적으로 들리듯, 그 의미 또한 시적으로 다가온다.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진리 혹은 압도적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떨림’ 이 정의가 다소 모호하다면 동시대에 활동한 마르쿠제의 설명을 덧붙이는 게 도움이 될 듯하다. 그에 의하면 심미적 가상은 야만을 변혁할 수 있는 원천이다. 그는 일상을 사는 우리 스스로가 혁명가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즉 개인은 심미적 가상을 회복하여 오늘 내 삶이 아름다운지를 반성하여야 한다. 비록 개인에게 인류·사회를 바꿀 힘은 없다 하더라도 스스로의 삶과 감성을 바꿀 힘은 있으며, 이는 위대한 거부로 이어질 수 있다. 이 위대한 거부는 전체를 바꿀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당시 중동과 베트남에서 자본주의의 권력 하에 자행된 폭력에 분노하며 일어난 68혁명은 이 같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에 지적인 기반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프랑크푸르트학파 자신들은 이 운동에 동참하지 않았다. 이에 유럽의 피 끓는 젊은이들은 '우리는 당신들로부터 감화받아서 움직이는데 왜 정작 그대들은 가만히 있느냐'며 비판한다. 수업을 거부하며 항의하는 학생들에게 아도르노는 정치적 운동은 또 다른 타자를 생산하고 그들을 동일화하거나 배제한다며 비판한다. 그가 야만에 대항하는 방법은 정치적 움직임이 아니라 존재의 아름다움을 보전하기 위한 내재적이고 자율적인 힘, 즉 심미적 가상의 회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야유와 조롱이었다. 1969년 4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한 강의실, 아도르노는 여느 날처럼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여학생 두 명이 강단 앞으로 또각또각 걸어왔다. 아도르노 앞에 선 그녀들은 입고 있던 외투를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자 그녀들의 젖가슴이 아도르노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고, 그녀들은 이 충격적 무기를 쉐킷쉐킷×2 해보였다. 아……, 이 얼마나 쇼킹했을지 상상해보아라. 무지막지하게 충격을 받은 아도르노는 대학을 떠나 스위스를 여행하며 멘탈을 보듬으려 했지만 이내 심장 마비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다.


내가 보기에 이 젊은이들은 쿤데라가 말하는 또 하나의 전체주의의 키치왕국을 세우고 있지 않았나 싶다. 증오의 축제에 경도된 젊은이들에게, 아도르노의 비판은 자신들의 연대감에 침을 뱉는 변명에 불과했을 테다. 더군다나 그가 말하는 심미적 가상 같은 것이 그들의 귀에 들어왔을 리가 없다. 그것은 전혀 정치적이지도 그리고 현실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2015년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린다. 하지만 나는 이 뜬 구름을 그저 현학적인 말로 취급하여 가볍게 지나치고 싶지 않다. 이성의 본질적 기능이 부재한 채 만들어지는 정치 혹은 현실이 아름다울 거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 가슴에서 나오는 울림 없이, 우리 스스로의 판단과 의지 하에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건 키치적 연극일 뿐이다. 우리 모두 이 가벼움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무게가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좀 더 인내하고 노력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것이 마르크스주의적 무대든 신자유주의적 무대든 혹은 다른 무엇이더라도, 내 삶을 한 낱 가면의 연극으로 만들기 싫다면 말이다.





 

 

 

 

글 편집위원 한조연

 

  1. 변명을 위해 나름 이것저것 읽었는데 밀란 쿤데라의 소설 두 편(『농담』,『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알랭 드 보통의 『뉴스의 시대』, 에리히 프롬의『자유로부터의 도피』이다. 이 책들을 20대의 실존에 대한 고민아래 내 방식대로 재조립하였으므로 텍스트에 대한 자의적 선택과 해석이 존재한다. 따라서 아직 이 책들을 읽지 않은 독자들이 내 글을 통해 이 책들에 대한 인상을 결정하지 않았으면 한다. [본문으로]
  2. 가벼움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의 ‘가벼움’을 차용한 표현이며, 이 소설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모순을 통해 존재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따라서 필자가 빌려서 쓰고 있는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표현에도 역시 모순이 존재하는 것을 유념하며 읽기를 바란다. [본문으로]
  3. 김동훈, 「키치 개념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 키치와 숭고의 변증법을 중심으로」, 『철학논총』제65집 2011·제3권, p107. 이 논문에는 쿤데라의 키치 개념에 대한 설명이 잘 풀어져있을 뿐 아니라 하이데거의 ‘숭고’ 개념과의 연계적 설명을 통한 현대인의 실존에 관한 고찰이 흥미롭게 나타난다. [본문으로]
  4. 소설 속 토마시, 사비나, 테레자, 프란츠의 삶은 모두 이 격정적 시대 속에서 벌어지는 키치와의 줄다리기다. 특히 토마시와 사비나 두 인물은 키치를 그들의 삶에서 추방하려 분투하며, 그 결과 당시 체코의 독립운동 세력을 배반할 수밖에 없었다. [본문으로]
  5. 에리히 프롬, 원창화 역, 『자유로부터의 도피』, (홍신문화사, 2009), p33, 115 참고 에리히 프롬은 인간 존재와 자유는 그 발단부터 분리될 수 없다고 보며, 여기에서 자유란 적극적 의미의 ’……에 대한 자유(freedom to)와 소극적 의미의 ‘……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로 나뉜다. 그는 현대인들이 개인주의 사회에 접어들어서 느끼는 당혹스러운 고립감과 두려움을 설명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오래도록 견딜 수 없다. 그들은 소극적인 자유에서 적극적인 자유로 나아갈 수 없는 한, 결국 자유로부터 도피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도피의 중요한 사회적 통로는 파시스트 국가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지도자에의 예속이며, 민주주의 국가에 널리 보급되고 있는 강제적인 순응이다. [본문으로]
  6. 에리히 프롬, 원창화 역, 『자유로부터의 도피』, (홍신문화사, 2009), p210 [본문으로]
  7. 에리히 프롬, 원창화 역, 『자유로부터의 도피』, (홍신문화사, 2009), p208 [본문으로]
  8. 알랭 드 보통, 최민우 역, 『뉴스의 시대』, (문학동네, 2014) p288 [본문으로]
  9. 알랭 드 보통, 최민우 역, 『뉴스의 시대』, (문학동네, 2014), p289~292 [본문으로]
  10. "프랑크푸르트 학파"라는 용어는 단지 프랑크푸르트 사회 연구소에서 일했거나 관련이 있었던 사상가를 가리킨데서부터 출발했다. 이 용어는 어떤 특별한 사상적 위치나 기관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으며, 이런 사상가들 중 자신을 "프랑크푸르트 학파"라고 칭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연구소는 카를 그륀베르크가 1923년에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대학교와 연계해 설립했으며, 이는 최초로 주요 독일 대학교와 연계된 마르크스주의 편향적 연구소였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지칭되는 사상적 전통은 1930년대 이 연구소의 소장이었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사회 심리학자인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각별히 연관되어 있다. 호르크하이머는 테오도어 아도르노(철학자, 사회학자, 음악학자), 에리히 프롬 (정신분석학자), 허버트 마르쿠제 (철학자)와 같은 이 학파의 가장 뛰어난 이론가들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이 연구소의 모든 사상가들이 항상 밀접하게 연관되거나 보완적인 연구들을 한 것은 아니기에 "학파"라는 이름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따라서 몇몇 학자들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뢰벤탈, 폴로크로 한정하기도 한다.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프랑크푸르트_학파, (2015.4.4)) [본문으로]
  11. 도구적 이성이란 호르크하이머의 『도구적 이성 비판』에 따르면 자기보전을 위해 목적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고 오로지 주어진 목적에 적합한 수단을 계산하는 것에만 몰두하는 이성을 의미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구적 이성은 모든 질적 가치를 ‘화폐로 환원 가능한’ 양적 가치로 바꾸는 역할을 해왔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이와 같이 이성이 본연의 기능인 ‘존재와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는 본질적 기능을 상실하고 도구적 이성이 만연하는 현실을 비판하였다. [본문으로]

'서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사] 일탈의 봄  (0) 2017.03.04
[서사] 총녀 분투기  (0) 2017.02.12
[서사] 인도여행기: 잃어버린 힌두스탄을 찾아서  (0) 2017.02.10
[서사] ‘別’ 일 없이, 사람  (0) 2017.02.08
[소설] 그녀가 말했다  (0) 2017.02.0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