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 폭력의 문제 : 2016년 겨울의 광장

2016년 12월 사상 초유의 국정 농단 사태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분노한 시민들은 광장에 모였다. 봉건시대에나 가능할 것 같았던 전횡이 벌어졌다는 것만큼이나 놀라웠던 것은 100만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는데도, 예측하지 못한 돌발사태나 공권력과의 폭력적인 대치, 혹은 진압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시민들은 시위 도중 경찰기동대에 붙인 항의 메시지 스티커를 스스로 떼기까지 했고, 경찰청장이 이를 ‘평화시위의 상징’이라며 만류하는 훈훈한(?) 광경도 연출되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이를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와 비교하며, ‘폭력을 유도하는 전문시위꾼’들이 없었다며 이번 시위의 순수성을 나름대로 추켜세웠다.

집회가 거듭될수록 사람들은 불안했던 것 같다. 100만, 200만이 모였는데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면 어떡하냐는 우려였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진지하게 청와대로 진격해 말 그대로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싶어 했다. 누군가는 그런 생각이 오히려 ‘일반’ 국민의 반감만 살 뿐이라며, 틀에 박힌 청와대 행진 대신에 광화문에서 여의도까지 대로로 행진하며 시민들의 요구를 널리 알리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집회 중에도 사람들은 자그마한 충돌조차 우려해서, 경찰버스에 억지로 올라가려는 사람들을 향해 “비폭력”을 외쳤다. (뉴스에는 아름답게 “비폭력”을 한목소리로 외치는 모습만 보도되었나, 실은 사람들은 “내려와 이 개새끼야!”, “저 새끼 저거 프락치 아냐?” 같은 말도 했다) 집회를 마치고 누군가는 더 큰 폭력이 없었음을 아쉬워하며 사람들의 규율된 태도에 혀를 찼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런 생각이 구시대적이라며 맞섰다.

탄핵안은 가결되었고 (이 글이 독자들에게 전해질 즈음에는 어떤 결론이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만족스럽든 아니든 시민들은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지만, 우리가 2016년 12월 광장에서 맞닥뜨렸던 곤혹스러운 문제는 아직 풀리지 않았다. 물론 모든 문제가 풀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혹시 우리가 그때 실제로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청와대를 ‘occupy’했다면, 우리는 그 이후에 최순실 일당과 대통령의 후안무치한 법정공방을 더는 지켜볼 필요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 오히려 촛불집회에 유례없이 많은 사람이 모여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건, 이 집회가 폭력 없는 순수한 비폭력 저항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요컨대 시민들은 폭력과 비폭력, 합법과 비합법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했을까? 우리는 이른바 ‘폭력의 문제’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실은 폭력의 문제 자체가 혹시 무언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잘못 제기된 문제는 늘 선택할 수 없는 답을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비폭력은 때때로 비굴한 굴종이지만, 어떤 순간에는 그 무엇보다 강력한 폭력이기도 하다. 어떻게 동일한 행동을 우리는 폭력이면서 비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대화편 『크리톤』에서 탈옥을 권유하는 동료에게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국법에 대해서 폭력을 가하듯이 법을 어기는 것은 옳지 않다며 그 제안을 거부하지만, 『변명』이 전하는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국가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자신의 정당함을 입증한다. 이러한 태도는 전적인 불복종의 태도로도, 그렇다고 ‘악법도 법’이라는 신념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상황이 이렇다면, 폭력과 비폭력은 그 자체로는 어떤 것도 선택할 만한 답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이 양자택일의 문제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위와 같은 모순은 이 문제가 잘못 제기되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큰 증거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문제 제기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2. 폭력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이란 파괴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폭력은 형이상학적인 개념일 수 있겠다) 모든 것은 지속할 것이냐 파괴될 것이냐의 갈림길에 매 순간 놓여있다. 하지만 이기는 쪽은 늘 파괴이고, 좀 더 오래 지속하는 것도 있지만, 시간문제일 뿐이다. 따라서 살아있는 동안, 자기 자신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모든 것에 폭력에 맞서 자신을 지켜야만 한다. 이는 인간 개체도, 그리고 인간이 이루고 있는 사회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폭력을 불가능한 것, 즉 ‘금기’로 생각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지키며 삶을 지속할 수 있다. 가장 큰 폭력은 죽음이고 그래서 죽음은 가장 큰 금기이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타인에 대한 살해, 혹은 죽음의 흔적과 상징은 모두 금기의 대상이므로, 이런 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불가능한 것, 예외적인 것으로 느끼고 생각하게 된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인간이 단지 법이 두려워서 타인을 살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 시신의 매장이 인간다움을 조건 짓는 행동양식이라는 것은 죽음에 대한 금기를 확인시켜주는 증거이다.

죽음과 관련된 금기가 인간에게 원초적인 것이라면 사회에서는 이 금기란 법이다. 법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규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금기의 목록이기도 하다. 어떤 법은 더할 수 없이 촘촘하고 어떤 법은 손에 꼽을 만큼의 조항만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면 법은 그 사회에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끊임없이 나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능한 것들을 규정함으로써 법으로 규정된 세계, 합법적인 세계는 예측 가능성이라는 큰 힘을 얻는다. 예측 가능성이란 곧 그 사회가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즉 사회가 지속하기 위해서는 법이 지켜져야만 한다. 따라서 가능한 것들만이 가능하고,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금기가 가진 힘이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이 영원하게 지속할 수는 없다. 인간이 금기를 아무리 잘 지킨다고 해서 영원히 죽음을 피할 수는 없듯이 말이다. 그래서 자연은 ‘동일한 것’을 지속시키는 것보다 하나를 파괴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영원하게 지속하기를 선택한다. 오직 영원히 지속하는 것은 폭력에 의한 파괴에 이은 새로운 것의 창조의 순환뿐이다. 그런 점에서 생명이란 본질적으로 삶을 지속하기 위한 합리적 노동이라기보다는 낭비와 방탕이다. 모든 생명체의 다양함과 아름다움은 오직 그다음 세대를 낳기 위한 목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공작새의 화려하기 그지없는 깃털이나 사슴의 웅장한 뿔은 삶을 유지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으나, 새로운 것을 낳기 위한 사치이다. 가장 극단적으로 우리는 생식 이후에 암컷에게 자기 몸을 양분으로 내어주는 수컷 사마귀의 경우를 본다. 창조에 결부된 폭력을 이만큼이나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는 없다. 

인간 역시 새로운 것을 위해서는 작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인간이 성(性)에 대한 금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범해야만 하는 것은, 그것이 유한한 인간이 불멸에 다가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성은 - 도덕적 엄숙주의와는 무관하게 - 우리의 일상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를 성적인 행위를 향해 이끄는 욕망만큼 폭력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사회 역시 이런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 사회는 법을 통해서 끊임없이 가능한 것만이 가능하고,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쉽사리 이 선을 넘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하나의 확립된 질서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스스로 폭력을 끌어들여 파괴된 자리 위에 새로운 질서를 낳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사회가 더는 지속할 힘을 잃기 전에, 새로운 모습으로 이어져 나가도록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최후의 장벽이 있다. 바로 금기가 ‘위반’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폭력이 그 자체로 옳지 못하다는 사고방식이 그렇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각각의 폭력에 대해, 이러한 사고방식 또한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욕망이 우리에게는 더없는 폭력이기 때문에, 그 욕망 때문에 온몸이 불타고 한동안의 시간을 단 한 사람에게 바친 뒤 좌절을 반복하는, 이 무시무시한 욕망의 강제(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그로 인한 전적인 욕망에 대한 거부가, 합의하면 몇 명이든 사랑할 수 있다는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에 대한 환상을 낳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보면 정치혐오 또한 이와 같은 식이다. 나에게 내가 살아왔던 방식, 내가 생각해왔던 것과는 다른 방식을 보여주고 그것을 지지할 것을 호소하는 모든 설득은 폭력이다. 심지어 그것은 누군가가 더 큰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하는 것이므로, 그러한 정치적 시도는 탐욕적인 것에 불과하다. 나는 오직 순수하게 ‘내 생각대로만’ 결정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 동의를 구하는’ 모든 말과 행위를 근본적으로 탐욕적인 폭력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여기에는 ‘선동’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따라서 오직 ‘팩트’에 근거한 폭력, 즉 ‘팩트폭력’만이 정당한 폭력일 수 있다. 

이처럼 폭력에 대한 전적인 거부는 오히려 그것 자체가 죽음이자 불임(不妊)이며 정체(停滯)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비폭력만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결국 폭력과 창조의 연관성을 무시한 채 새로운 것의 도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해버리는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오히려 ‘어떤 폭력이 필요한가?’ ‘언제 폭력이 필요한가?’와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실은 우리는 곳곳에서 이 질문과 마주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바로 성전의 예수가 그랬고, 또한 광장의 세월호가 그랬듯이 말이다.


3. 불가능성에 맞섰던 폭력 : 성전의 예수와 광장의 세월호

확립된 질서를 지키려는 쪽에 맞서 그것을 깨고 새로운 것을 상상하며 폭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절박함은 늘 반복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난 예수와 2014년 세월호 유가족과 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는 비록 이천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같다. 먼저 예수 이야기를 해보자. 마르코 사가에 따르면 예수는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날 성전을 둘러보았고, 이튿날 성전으로 가 곧장 그곳에서 장사하는 환전상들과 비둘기 장수들을 쫓아내고 그들의 탁자와 의자를 둘러 엎었다. 요한에 따르면 예수는 끈으로 된 채찍까지도 들고 있었다. 이는 명백한 소요(騷擾) 사태였다. 심지어 마르코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나타나, 이 사태에 대해 ‘현재형’으로(“했던 것이오?”가 아닌 “하는 것이오(poieis)?”) 예수에게 따지고 드는 것으로 서술해놓았다. 이때 예수가 받은 질문,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하느냐”는 질문은 당시 여당 국회의원들이 유가족들에게 했던 질문과 놀랄 만큼 닮았다. “대체 유가족들이 무슨 자격이 있어서 수사권과 기소권을 요구하느냐”는 것. 예수에게는 어떤 권한도 없었지만 그런 성전의 모습이 옳지 않다는 확신은 있었다. 당시의 성전은 유대 사회 속 ‘확립된 질서’의 결정체였다. 종교와 정치지도자들은 로마와 적당한 타협을 맺으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았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은 성전에 가서 기도드릴 심적/물적 여유조차 없었다. 환전상과 비둘기 장수는 오직 돈 있는 사람들에게만 쓸모 있었다. 예수는 그런 성전을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향해 열어젖히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가 그들을 위해 조용히 기도만 했더라면 예수는 기득권 세력의 미움을 사 처형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예수는 폭력과 비폭력의 프레임에 갇히지 않았다. 예수의 확신은 ‘그래도 폭력은 좀 아니잖아요?’라는 숱한 의문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세월호 참사 역시 우리 사회의 모든 부조리가 집약된 사건임이 속속 드러났다. 세월호 참사를 필사적으로 그저 평범한 ‘여객선사고’로 만들려고 했던 사람들은 이 사고로 인해 ‘기존의 질서’ 속 그 무엇도 바뀌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가만히 있으라!) 만약 아니었다면 그들은 그들이 전례 없고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수사권과 기소권을 특조위에 부여해야만 했다. 법리적 논쟁이나 정치적 맥락을 다 떠나서, 이것은 금기였기 때문에 위반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기존의 질서가 세월호라는 무시무시한 참극으로 그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결국 실패했고, 이제 더 큰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이 사회는 반응했다. 손석희의 말처럼 “시작은 태블릿PC가 아니라 2014년 4월 16일”이었고, 그랬어야 마땅했다. 나는 304명의 밝혀지지 않은 죽음보다 ‘저런 걸 대통령으로 뽑아놨다.’, ‘강남 아줌마가 나라를 쥐고 흔들었다’는 분노가 더 큰 것이, 아직 우리 사회의 확립된 질서가 철저히 무너지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4. 폭력이 열어주는 불가능성의 세계

다시 2016년 겨울,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나는 폭력이 어떻게 불가능성을 넘어서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더민주당 표창원 의원이 ‘탄핵 반대 국회의원’의 명단을 정리해서 페이스북에 게시함과 동시에, 인터넷에 한 네티즌이 국회의원들의 개인 휴대폰 번호를 정리해서 인터넷에 공개해 버렸고, 탄핵반대 의원들의 휴대폰에는 문자 폭탄이 쏟아졌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폭력의 강도는 그것이 겉보기에 ‘얼마나 폭력적인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의 일탈, 그것이 단지 국회의원에게 날리는 육두문자 섞인 SMS 한 통에 불과할지라도, 사람들은 그 이전까지는 가능하지 않던 일을 행한 것이다. 무엇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늘 오직 해야만 할 때 할 수 있느냐이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핸드폰 사용을 통 할 수가 없다며 하소연했다. 이에 맞서 유시민은 ‘국회의원 각각이 헌법기관이기 때문에 그들의 개인 핸드폰 번호는 공개될 수도 있다’는 주장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정당화는 오히려 폭력을 합법적인 것으로 이해해보려는 시도로서, 그것이 폭력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도록 만든다. ‘문자 폭탄’은 누구도 부당하게 죽이거나 상처입히지 않았지만, 그 자신이 폭력이라는 바로 그 사실을 즐겼다. 나는 이것을 ‘발랄한 폭력’이라고 부르고 싶다.

‘문자 폭탄’은 그 자신이 폭력이라는 사실을 즐겼다. 네티즌들의 ‘드립’이 이어졌다.

※출처 : JTBC 《정치부회의》 12월 5일 자 방송, 아래는 박영선 의원의 카톡방 캡처(한겨레 12월 8일 자 기사)

그리고 마침내 DC 인사이드의 주식 갤러리 네티즌이 국정조사 청문회 증인을 심문하던 박영선 의원에게 김기춘 전 실장의 거짓말을 잡아낼 증거를 카톡으로 보냈고, 결국 그의 거짓말이 들통났다. 언론에서 이제는 이것이 첨단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한 직접민주주의의 새로운 소통 방식이 아니겠냐며 추켜세웠다. 우리가 무질서, 혹은 불법, 혼란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미지의 질서를 만났을 때뿐이다.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이 미지의 질서는 폭력이 만들어낸 혼돈, 무질서로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새로운 질서이다.

앞에서 말했듯 우리는 폭력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기로 하였다. 기존의 질서는 우리에게 가능한 것만을 가능하다고 믿게 한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경우 답은 어쩌면 늘 비폭력으로 정해져 있는 셈이다. 그러나 폭력과 비폭력은 실은 거짓 문제였다. 우리는 이 질문 대신에 우리가 사는 이 질서가 아직 유효한지에 대한 유일하게 올바른 문제를 던져야만 한다. 그러면 폭력 자체는 불가능성의 세계를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로 만들어주는 신비롭고 발랄한 통로가 될 것이다.




글 철학과 석사과정 노경호 (기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