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내에 소문이 자자하다. ‘한국말 완전 잘하는 외국인’이란다. 사과대는 당연지사, 사학과를 거점으로 문과대를 넘어, 이번 학기에는 신과대까지 영역을 확대했다. 내 나이 만 23세, 그중 정확히 18년을 한국에서 살았음에도 나는 아직 ‘외국인’이다. 이쯤 되면 한국말을 못하려야 못할 수도 없는 것을 18년째 한국말을 잘한다는 칭찬을 받고 있다. 그래도 참 다행이지 않은가? 칭찬받을 만큼 잘하는 것이 하나라도 있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의 ‘관심’에 익숙해진 탓에 이제는 누군가가 나를 쳐다본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다.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누가 자꾸 쳐다본다’며 불쾌함을 토로한다. 오히려 나는 1년에 한 번씩 터키공항에 내리는 그 순간의..
그녀가 말했다. “난 둥근 것들이 좋아.” “동그라미는 완벽한 도형이지.” 라고 말하며 나는 그녀를 끌어안아 얼굴을 부비고 그녀의 콧날에 키스했다.“아니, 그런 결백하고 도도한 도형 말고.” 나를 살짝 밀쳐내어 키스를 멈추고는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더니 다시 안기면서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몽실몽실한 둥근 것들... 크림이 가득 차 있지만, 한 쪽에만 차 있는 것 같이 부풀어 오른 단팥크림빵이나, 크고 복슬복슬한 삽살개가 누워서 자고 있는 모습, 그런 모습들...”나는 나에게 안겨있는 그녀를 등부터 손바닥으로 쓸면서 그녀의 척추를 만져 내려갔다. 허리까지 내려가 그녀를 꽉 안자, 손 끝에 그녀의 툭 튀어나온 골반이 만져졌다. 그리고 그대로 내 어깨 밑에서부터 등으로 날 감싼 상태로 내 품 안에 안겨 있..
시간에 떠밀려 얼떨결에 시작하게 된 취준이었다. 대입과 입대가 갑작스럽게 찾아왔던 것처럼, 생애 첫 번째 취업 준비도 그랬다. 슬프게도, 내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들은 늘 이런 방식으로 다가왔다. 언론고시를 한 번 봐보겠다는 핑계로, ‘여봐라 나 신문 본다!’하고 똥폼 잡다가 보니 어느새 공채 시즌이 돌아왔고, 졸업을 앞둔 여느 대학생이 그렇듯 조급한 마음이 번져 벼락같이 자소서를 몇 개 씩 써냈던 것이다. 덕분에 부모님의 사랑과, 술로 개가 된 추억과, 몇 없는 친구들과의 사건을 빼고 나면 빈곤할 대로 빈곤한 나의 대학생활을 꽤 진지하게 돌이켜 볼 기회를 가졌다. 반성시켜주어 고맙다. 나는 그렇게 황량한 과거에서 몇 없는 친기업적 일화를 쥐어 짜 반죽을 냈고, 갓 구운 빵처럼 부풀렸다. 한껏 부푼 빵 속..
1. 러시아의 생리학자 이반 파블로프는 개가 밥을 먹을 때 분비하는 침의 양을 연구했다. 그러다 개가 밥 주는 사람 발소리를 듣거나 빈 밥그릇만 보아도 침을 분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개는 원래 먹이를 보면 침을 흘린다. 하지만 밥을 주러 올 때 들리는 발걸음 소리 그리고 밥을 담는 밥그릇은 밥을 연상시켰다. 개는 그에 대한 반응으로 침을 흘렸다. 그 유명한 파블로프의 조건반응 실험의 시작이다. 셀리그먼은 이 조건 반사를 활용해 새로운 실험을 했다. 그는 다양한 조건 속의 개들에게 미세한 전기 충격을 가했다. 어떤 개는 특정한 행동을 하면 전기 충격이 멈춰지도록 장치를 했다. 그러나 다른 한 마리는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전기 충격을 벗어날 수 없게 우리 안에 가뒀다. 후에 개들을 풀어줬다. 다른 조건의..
졸업을 하루 앞둔 목요일, 화창한 오후였다. 과사무실에서 학사모와 가운을 빌리고는 잠시 연희관 앞의 환풍구 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볼이 빨간 두 여자아이들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그녀들은 대안학교 학생들이며 선생과 함께 캠퍼스를 방문하였다고 밝혔다. 선생은 아이들에게 재학생들과 인터뷰를 해올 것을 요청했고, 그 아이들은 내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먼지와 소음으로 휩싸인 한적한 캠퍼스에서 한가해 보였던 나는 그들에게 꽤 반가운 인터뷰이였는지, 그녀들과 같은 이름표를 목에 건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진지한 그들의 태도는 나로 하여금 담배를 끄고 고쳐 앉게 했다. 그들이 들고 있던 질문지에는 긴 답변이 필요한 짧은 문항들이 적혀있었다. 전공, 전공을 통해 얻은 점들, 생각을 바꾸게 된 사건들..
고양이에게 말을 건다. 그 고양이는 아마도 굉장히 귀엽다. 그저 얌전히 내 말을 들어주는 놈이다. 인생이란 가끔은 참으로 좆같은 거 같애. “괴융.” 고양이는 고개를 끄덕끄덕해준다. 동의를 표해주는 놈의 친절함에 나는 조금 웃는다. 무더운 날의 찐득거리는 땀이라거나 상사에게 듣는 호통이라거나 누구를 만나도 무덤덤한 마음이라던가. 그렇게 두서없이 몇 마디를 지껄이다보면 밤이 된다. 밤이 되면 눈꺼풀이 눈을 반쯤 감긴다. 그래도 정신은 또렷하다. 가만히 녀석의 눈을 들여다본다. 녀석도 내 눈에 호기심을 보이며 마주 바라본다. 고양이 눈을 바라보는 내 눈에 담긴 고양이 눈에 담긴 내 눈에 담긴 고양이와… 한참을 그렇게 서로 바라보다가 시시하다는 듯 녀석은 자리를 옮긴다. 나는 생각에 잠긴다. 아무 일도 없는데..
미얀마에서 얻은 깨달음, 새 학기를 준비하며나는 올해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말하기 민망한 수준이지만 처음으로 사회과학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공부하게 되었다. 아직 사회과학을 공부한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짧은 시간동안 초보 사회과학대 학생으로서 느꼈던 고민들과 그것을 해결하려던 나의 노력을 적어보려 한다.고등학교 때에는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에 신경을 끄고 당장의 내 일에만 집중하는 게 편했던 적이 많았다. 이다음에 세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지금은 내게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면서 사회문제를 고민하고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일단 대학교에만 들어가면 나는 사회를 탐구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사회에 보탬이 될 만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자기합리화를 했다.그리..
#들어가며페이스북은 자신의 일상을 나누며 소소한 재미를 추구하던 친목 공간에서 여러 페이지에 올라오는 텍스트 기사나 동영상 클립을 소비하는 공간으로 변했다. 페이스북뿐만이 아니다. SNS는 이제 젊은 세대들이 세상을 접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이에 발맞춰 기업들은 각종 뉴미디어를 통해 자기네들 사업을 홍보하는데 열을 올려가며 SNS 관리자나 뉴미디어 개발 엔지니어와 같은 직업을 탄생시켰다. 일반 기업들이 이런 상황인데, 언론사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SNS에서 자사의 기사 혹은 클립이 얼마나 노출되었는가가 네이버나 다음과 같은 포털 노출도만큼 중요해졌다. 또한, 언론사마다 신문이나 방송 외에SNS 플랫폼만을 위한 자체 콘텐츠를 개발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카드뉴스나 클립영상 형태의 뉴스가 ..
무작정 크라쿠프로 *크라쿠프 : 폴란드 남부에 위치한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고도 왜 하필 동유럽, 그중에서도 크라쿠프로 떠났나? 특별한 환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름에 여행하기에 덥지 않고(아시아 탈락), 내 비루한 통장 잔고가 감당할 수 있어야 하며(소위 ‘잘사는 동네’ 모조리 탈락) 동시에 무언가 새롭고 구미가 당기는 것들을 볼 수 있는 곳이 어딜까 생각하다 보니 나온 대안이 동유럽이었을 뿐이다. 동유럽은 막상 여행지로 결정해 놓고도 너무나 생경한 지역이라 여행을 준비하는 내내 막연한 궁금증을 끊임없이 유발하는 곳이었다. 가이드북에서 하라는 대로 따라 하면 몸과 마음이 편했겠지만, 남들 하는대로 따라 하기는 싫은 괜한 고집이 생겨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작정 동유럽 지도를 펴 놓고 생소한 나라들의..
대학에 와서 내가 가장 특출하게 된 것이 있다면 ‘자아분열’과 ‘자의식 과잉’이다. 스스로를 사랑하면서도 혐오하고 특별하다고 믿고 싶어 하면서도 하찮은 사람으로 몰아가고, 이런 사실을 다 알면서도 내면의 평화를 찾지 못하고 계속해서 분열을 만들어왔다. 그저 나 자신을 사랑하기만 하고 싶고 특별하게만 여기고 싶지만, 정신승리를 하기에 나의 성정은 원채 불온했다. 자기애와 자기혐오의 물고 물리는 싸움은 나를 자의식 과잉으로 몰아넣었다. 그런데 이건 비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 반, 딸딸이 치는 마음 반으로 내 이야기를 나누는 바이다. SCENE 1 중학교 때 친구와 극장에 가는 것은 나에게 특별한 보상과도 같았다. 나의 일상은 대개 학원을 가는 날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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