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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애만이 정상이라고 말하는 사회에 퀴어커플이 내는 균열들
이상한 나라의 호모연애
몇 년 전, A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나는 하나 이상의 성별에 성적, 감정적 끌림을 느껴요. A는 많은 것을 물었다. 그냥 남자만 좋아하면 안 되겠니. 동성애인과 동성친구를 어떻게 구분하니. 그 당시에 나는 이 모든 질문에 어떻게든 논리적으로 답하기 위해 애썼다. 이것을 증명해내고 그래서 A를 설득해야만 내 존재가 인정받을 것 같았다. 그러나 혼란스러웠다. 선뜻 정의할 수 없는 것들을 당장 뱉어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나를 부정당하지 않기 위해 확신 없는 것들에 대해 마치 그것이 정답인 체했다.
그리고 올해, 남자친구가 생겼냐고 묻는 A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말했다. "여자사람친구 말고 ‘여자친구’요. 애인이요. 연애상대요." 손도 잡고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하는 그런 사람이요. 아마 이 말까지 했으면 A는 기절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나는 친구와 애인이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 확신도 없으면서 여자친구의 정의를 구구절절 내려야 했다. 또 수많은 질문들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너 그 남자애한테 감정이 있었던 게 아니니. 남녀 사이에 친구가 가능하니. 네 여자사람친구들과 네 여자친구는 뭐가 다르니. 네 여자친구가 다른 여자애와 둘이 여행 가는 건 어떻게 생각하니. 답답했다. 지겨웠다. 내가 이 질문들에 대해 명료한 대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A는 내가 이성과 연애를 했을 때 단 한 번도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없었다. 잠자리를 쉽게 하지 말 것, 내 몸을 잘 지킬 것을 충고했을 뿐이었다. 그런 A가 친구와 연인을 구분해보라고 동성연애를 하는 나에게 말했다. 화가 났다. 왜 내가 어떻게든 나의 감정을 해명하고 제3자를 납득시켜야 하는가. 왜 나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을, 나의 사랑을, 나의 연애를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없는가. 나는 왜 이 사회에서 이상한 것이어야 하는가.
이성에게만 성적, 감정적 끌림을 느끼는 것이 기본값인 사회에서 내가 느끼는 끌림은 이상한 것이다. 그런 나에게 질문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조건적인 배제나 거부보다 훨씬 긍정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나의 성지향성을 그저 ‘특이하고 이상한 것’ 정도로 넘겨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의 성지향성이 왜 이 사회에서 특이하고 이상하고 낯선지를 질문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단 하나만의 성정체성과 성지향성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처럼 성별을 칼처럼 두 개로 철저하게 분리하는 사고와 서로 낯선 두 외계인인 남녀가 만나 로맨틱한 사랑을 할 것이라는 사고. 이 두 개의 사고관이 강하게 결합하여 현재의 젠더 관념을 만들어내었다. 이성애중심주의, 더 나아가 성별이분법이 나를 퀴어(queer)로 만들고 있다.
이런 사회 구조 혹은 분위기가 나만을 이상한 놈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나와 애인의 관계 또한 이상한 것으로 취급한다. 넓게 이야기하자면, 퀴어가 맺는 수많은 관계를 이상하게 여긴다. 퀴어가 살아가면서 겪을 우정, 가족애, 연애, 사제애 등등 수많은 사랑 그 자체를. 한 사람의 삶 자체가 희한한 것이 된다.
동성커플은 이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성애중심주의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우리’를 보지 못한다. 이 글에서는 나와 내 애인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는 이 이야기들이 단 한 종류의 사랑을 강요하는 현재 이 사회에 수많은 질문을 만들어내길 바란다. 이성애중심적인 사고나 법제도, 문화, 관습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끔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것이다. 현실에서 동성커플의 비가시화가 어떤 힘으로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그래서 그에 대해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반응하며 살아가는지를 보려고 한다.
‘자연의 섭리’ 하에서 보이지 않는 퀴어의 관계들
어느 날, 밖에서 데이트를 하다가 신호등을 건너며
애인: 헉 아까 봤어?
나: 엥 뭐를?
애인: 아까 자기가 내 뺨에 뽀뽀하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엄청 눈이 똥그래져서 우리 계속 쳐다봤다? 호모커플 처음 봤나봐.
나: 에 뭐 레즈는 야동에서 말고는 처음 봤나보지~
애인: 아닌데. 바이커플인데.
나: ㅋㅋㅋㅋㅋㅋ뭐 세상에 호모커플이 진짜 있다는 걸 배웠으니 저 사람한테 잘 됐네~
또 다른 어느 날, 커플링을 구경하려고 함께 가게에 들어서면서
나와 애인: 커플링을 맞추러 왔어요.
점원: 아 어느 쪽이요?
나와 애인: (서로 시선을 교환한다) ????????
점원: 둘 중에 어느 쪽 커플분이 맞추실 건가요?
나와 애인: 저희가 커플인데요. 얘가 제 애인이에요.
점원: (매우 당황하며) 아, 아 그러시구나, 제가 처음 봐서요.
여자와 남자가 사랑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아름답다고 세상은 말한다. 나는 어딜 가나 이성연애를 낭만화하며 이성연애를 하라고 부추기는 것들을 접한다. 썸녀의 마음을 저격하는 남친룩, 남자친구가 다시 또 반할 청순 메이크업 뭐 이런 상품과 마케팅. 인기 있는 남녀 연예인이 나와 연애수행을 하는 예능 프로그램,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여주와 남주가 행복하게 연애 및 결혼에 골인하는 드라마, 웹툰, 소설, 영화, 게임. 이성연애는 이제 남녀가 일대일로 만나 교감을 쌓고 로맨틱한 수행을 하는 관계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성애중심사회에서 이성연애는 사람들의 소비 욕구를 자극하는 하나의 상품이 되었고, 꼭 해야만 하는, 그래서 하지 않으면 나에게 결함이 있는 것처럼 만드는 하나의 의무가 되었다.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지금 이곳은 이성애 과잉이다.
동시에 동성연애는 이성연애의 반대말로서만, 타자로서만 존재한다. 동성연애를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이성연애는 존속한다. 그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동성연애를 허구의 공간에서만 취급한다, 2) 현실 속의 동성연애를 위축되게 한다, 3) 동성연애를 나쁜 것, 오염되는 것, 더러운 것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상호작용한다.
동성연애는 브로맨스(brother+romance), 워맨스(woman+romance)로 치환되어 하나의 장르로서만, 하나의 허구로서만 용인된다. 드라마에서 남주와 남조연은 은근슬쩍 로맨틱한 수행을 하지만 결국 남주와 연애라는 명시적 계약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여주이다. 서브컬처에서의 1Boy’s Love나 Girl’s Love도 동성애를 현실이 아닌 허구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위와 비슷하다. BL/GL에서는 현실에서 동성연애를 하며 겪을 법한 수많은 차별과 혐오가 삭제되거나 희석된다. 또한 호모포빅한 사회구조를 역경을 딛고 사랑을 쟁취하는 어떤 도구적·일회적인 해프닝으로 치부한다. 그 사회구조는 사소한 것, 가벼운 것이 된다. 이 장르는 로맨스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포르노 사이트에서 레즈비언 카테고리가 인기를 끈다는 사실도 연상된다. 레즈비언 포르노는 여성의 욕망을 그린다기보다는 두 여성을 관음하는 관찰자의 욕망을 그려낸다. 이성애중심주의 사회에서 동성애는 상상과 허구의 영역에서만, 유희로서 즐길 수 있는 형태로만 용서받는다. 현실에서도 이들이 이성애자들과 함께 숨 쉬며 살아갈 것이라는 상상력이 차단된다.
동성연애가 허구 세계의 밖에 있다는 것이 드러날 경우, 성적 소수자들은 쉽게 폭력에 노출된다. 한국에서의 성소수자 혐오범죄 중 언론에 보도된 것으로는 2011년 서울 종로구에서 애인과 손을 잡고 길을 걷던 게이가 행인에게 폭행을 당한 사례가 있다 2. 그러나 대개 성소수자 혐오범죄는 공론화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성소수자들은 폭력을 당해도 아웃팅의 위험 때문에 ‘내가 잘못해서, 내가 나를 드러내서 이런 일을 당했다’고 자책하며 신고나 공론화를 꺼리기” 때문이다. 3 이러한 물리적 폭력만이 아니라 자신의 성정체성 및 성지향성이 드러난 뒤 직장이나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등 공동체 내에서 배제되는 문제, 가정에서 쫓겨나거나 이성애자로 전환할 것을 강요받는 등의 문제도 공공연하다. 이것은 퀴어들이 타인과의 관계를 맺어가면서 함부로 자신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들이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퀴어가 타인과 맺어나가는 관계를 이상한 것 혹은 오염된 것으로 취급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퀴어를 향한 폭력들은 대개 가치관의 차이 혹은 교육, 애정의 이름으로 지워진다. 반동성애 ‘인권’운동이라는 이름이 바로 사랑의 이름으로 애써 폭력과 차별을 지우려는 시도가 아니겠는가. ‘더러운 항문섹스’로부터 ‘소중한 아들딸들’을 지키려는 ‘사랑’의 시도들. 퀴어혐오를 어떻게든 지워보려는 시도들이 퀴어들을, 퀴어들이 살아가며 맺는 관계들을 그늘로 밀어넣는다.
동성연애는 사회의 안정에 위협을 가할 것만 같은 오염된 존재로 여겨진다. 기존의 가부장제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수많은 광장들 한 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동성애는 행복한 가정을 파괴합니다.”, “아빠, 엄마 사랑해요.”, “생명·사랑·가족” 아주 흥미롭다. 행복한 가정을 파괴하는 것은 동성애가 아니다. 그 주범은 정상가족에 대한 환상이다. 가정폭력이다. 저출생을 조장하는, 이젠 먹고 살기 팍팍해진 현재의 경제구조이다. 육아휴직을 내는 여성을 자르고 육아휴직을 내는 남성을 따가운 눈초리로 쏘아보는 사내 분위기이다. 반(反)동성애 혹은 반동성결혼을 외치는 집단에게는 외부의 적이 필요한 것이다. 내부를 더욱 결속시키기 위한 외부의 적. 슬픈 것은 이로 인해 배제되는 것은 퀴어들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상’ 범주의 밖에 있는 모두가 그 공고한 테두리 밖으로 밀려나간다.
남녀의 결합이 자연의 섭리라고 외치는 세상에서 동성연애자들은 스스로 그늘 속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춘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엔 이곳이 그들에게 너무 가혹하다. 이성애가 정상이고 전제인 사회에서 동성애는 다양한 방식으로 타자화되며, 보이지 않는 것이 되고, 눈에 뜨일 경우 깜짝 놀랄만한 것, 비난받고 삭제되어야 하는 것이 된다.
누가 여자역이고 누가 남자역이야?
누가 부치고 펨이야? 누가 탑이고 바텀이야? 나나 내 퀴어친구들이 연애를 하면서 자주 맞닥뜨리는 질문은 주로 저런 것들이다. 이야... 이런 게 왜 궁금할까. 뭐 궁금할 수도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질문이 생기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만 그러고 나서, 결국 동성연애도 이성연애랑 다를 바 없는 거 아냐? 라고 물으면 사실 웃고 있지만 화가 뻗친다. 동성연애 내에서의 남녀역할이 있을 것이라는 상상, 그리고 그것이 이성연애의 답습이라고 여기는 것. 이것은 다분히 이성애를 전제로 하는 사고가 아니겠는가. 남녀 구분과 이성애는 자연의 섭리가 아니다. 다만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법제도, 언어제도, 생활습관, 실증과학 등을 걸쳐 ‘자연스러운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을 뿐이다.
이번엔 내가 질문을 쏟아내보고자 한다. 남자역이나 여자역이란 무엇인가. 섹스를 할 때 페니스를 삽입하는 쪽이 남자역이고 페니스를 삽입당하는 쪽이 여자역인가? 그렇다면 페니스 없는 성관계는 기이한 것이 되어 설명할 수 없다. 페니스를 박고 페니스에 박히는 섹스만을 상상하는 것은 성기중심적인, 이성애중심적인 사고이다. 이를 통해 현 사회에서 권력이 이미 페니스가 있는 사람 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남녀의 결합만이 정상으로 취급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누구든 페니스 없이도 섹스할 수 있다. 또한 남자가 곧 페니스의 주체인, 그런 섹스만이 전부가 아니다. 여자가 모조 페니스를 차고 남자의 항문에 그것을 삽입하는 섹스를 이성애 규범은 해명할 수 없다. 여성동성애 성관계에서 하루는 딜도를 사용하고 또 어떤 날은 사용하지 않는, 그래서 페니스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 또한 이성애 규범은 해명할 수 없다.
소위 벽쿵이라고 불리는 수행을 능숙하게 잘하는 쪽이 남자역인가? 벽쿵을 당한 뒤 수줍어하며 시선을 내리까는 것이 여자역인가? 남성의 영역이라고 믿어져왔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적극적으로 꼬시고 쟁취하는 것은 여성도 할 수 있다. 애초에 끌림을 느끼는 상대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만 있는 일도 아니다. 이성연애에서 ‘낮져밤이’는 결국 여성성/남성성이 고정불변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지고 이기는 것의 주체를 이성연애를 하는 남자로 설정해보자. 낮에는 남자는 여자가 하자는 대로 다 져주고, 밤에 남자는 침대 위에서 자신의 주도로 섹스를 이끌어가며 여자를 이긴다. 낮과 밤에 따라 그 남자의 행동과 태도가 바뀐다. 이 남자는 낮에 여성적이고 밤에는 남성적이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싶은가. 수많은 수행들이 있고 거기에 성별이분법의 논리에 따라 여성성/남성성의 이름이 부여된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 고정된 남성성과 여성성은 없다.
동성연애는 이성연애의 아류일 뿐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성애가 사고관의 중심이 되었는지를 질문하고자 한다. 동성연애는 우리가 뿌리 깊게 ‘여자’ 혹은 ‘남자’의 영역이라고 믿어왔던 모든 것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나와 애인의 TMI를 나열하자면, 나는 키나 체구가 작고 살이 말랑거린다. 내 애인은 나보다 키와 체구가 크고 근육질이다. 나보다 애인이 물리적인 힘이 훨씬 세다. 둘이서 침대를 딩굴거리며 장난을 치면 내가 꼭 힘에서 밀려 엉망진창으로 괴롭힘 당한다. 그렇다면 내 애인은 남성적인가? 나는 여성적인가? 질문 자체가 웃기지 않은가. 나는 사회에서 내게 부여한 성과 나 스스로 생각하는 성이 일치하는 시스젠더이다. 내 애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우리의 관계를 이성연애 관계에서의 여자/남자 이분법으로 읽어내는 것이 아니 웃기지 않냐고. 나는 여자역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애인 또한 남자역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동성연애는 이성애 연애 수행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침 튀겨가며 말한 것처럼, 수행에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가치가 부여된 것이다.
젠더역할 및 수행은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 퀴어의 존재와 그가 맺는 사회적 관계들은 현재의 성별이분법과 이성애규범으로, 다시 말해 이 사회의 규범으로 언어화 할 수 없다. 당장 내 경우만 해도 그렇다. 남자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누군가에게 섹슈얼, 로맨틱 끌림을 느끼는 나에게 ‘친구’란 가능한가? 이성애규범 관점에서 보자면 나는 문란한 인간인 셈이다.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어야 하며 마찬가지로 연인 또한 있을 수 없다. 스스로를 남녀 그 어떠한 성별에도 두지 않는 젠더퀴어의 관계는 이성관계, 심지어 동성관계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언어가 없다는 것은 즉, 이 사회에서의 그 어떠한 제도도 그들을 충실히 대변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퀴어는 이 사회에서 들어맞는 자리 없이 떠돌아다니거나 스스로를 주류의 입맛에 맞게 재단하는 수밖에 없다.
이제 사람들은 게이, 레즈비언, 조금 더 나아가 양성애자라는 단어 정도는 안다. 그나마 좋은 일이려나.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진 일이려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별이분법과 이성애중심주의는 여전히 뿌리가 깊다. 동성애 관계에서 누가 여자역/남자역이냐는 질문에서 살펴볼 수 있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성별이분법과 이성애의 시각에서 그 이외의 외부자, 타자를 바라보고 읽어내고 판단하는데 지나치게 익숙하다. 이성연애 안에서의 여자/남자 역할수행이 다른 관계에서도 똑같이 통용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믿음들이 어떤 이들의 삶을 퀴어한 것으로 낙인찍는다.
퀴어한 삶에도 햇볕이 나른하게 내려앉길
이 글을 쓰기 시작한 7월의 어느 날. 나와 애인은 애인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애인네 세면대에 문제가 있어서 철물점에 들러 수리공과 함께 집에 들어갔다. 그의 앞에서 나는 애인의 손을 잡아도 될지 말지 고민했다. 결국 잡지 않았다. 이상해보이니까. 내 애인은 앞으로도 이 동네에서 몇 년 더 살 테니까. 손을 잡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사랑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나 그 애가 서로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속상했다. 어쩔 줄을 몰랐다. 이런 일은 그래도 몇 번 있었다. 애인의 알바 동료들을 길 가다 마주친 때 우리는 황급히 깍지를 풀었다. 나는 내가 일하는 학원의 원장 선생님에게 내 애인을 남자친구라고 소개할 때마다 속이 뒤틀린다.
나나 애인이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서로를 떳떳하게 남들 앞에 소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한없이 슬퍼졌다. 서로가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나 자신과 서로를 지키기 위해. 밖으로 우리의 존재가 드러났을 때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으니까.
어느 날 애인이 농담으로 “동성애 해서 벌 받는 거야”라고 말했다. 무슨 맥락이고 상황이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애는 정말로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다만 그 말이 너무 자조적이고 절망스러워서 나는 울었다. 나는 나나 내 애인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서로를 “내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드러낼 수 없는 삶을 앞으로 몇십 년이고 더 살아야 할 것을 생각하면 괴롭다. 나는 나나 내 애인이 다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말하고 싶다. 한참 같이 울고 나서. 애인이 “내가 노벨상을 받게 되면, 수상 소감 말할 때 ‘이 영광을 제 아내에게 돌립니다.’라고 말할게”라고 했다. 나는 그 애를 꽉 안아줬다. 그 말이 위로가 되었다.
퀴어커플은 자신이 발 딛고 살아가는 이곳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이성애규범의 타자로, 낯설고 위험한 것으로 낙인찍힐 때에만 이성애중심주의적 사고를 통해 잠시 드러날 뿐이다. 환상의 차원에서 마냥 낭만적이고 행복한 것으로, 혹은 계속해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현실에서는 “행복하고 질서 있는 ‘우리’ 사회”를 파괴하는 적으로. 또한 이성애중심적인 사고는 동성연애라는 관계를 이성연애의 잣대로 읽어내며, 여성/남성역할을 강화하고 재생산하는 열등한 것으로 취급한다. 이성애를 말하고 독해하는 언어는 차고 넘치는 데 비해 퀴어의 삶을 말하고 읽어낼 언어는 너무나 빈약하다.
퀴어 본인의 존재, 퀴어 본인과 타인의 관계맺음, 다시 말해 퀴어한 삶 그 자체가 수면 위로 떠올라 아우성 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곳에 있다. 우리에게 익숙해져라” 동성애를 병 취급하던 시절의 미국 사회를 향해 어떤 동성애인권운동가들이 외친 슬로건이다. 퀴어 또한 ‘정상인’들처럼 살아간다는 주장에서 더 나아가, 나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라는 말이었다. 이성애만을 정상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동성애 또한 정상으로 여겨달라는 말이 아니었다. 애초에 정상이란 무엇이냐는 외침이자 이성애규범에 균열을 내는 외침이었다. 문제제기가 향할 곳은 두 개의 성별만으로 사람을 읽어내기를 강요하는 관점과 남녀의 사랑만이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관점이다. 또한 이러한 관점들을 고정불변하고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관점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누가 혹은 무엇이 나를 퀴어로 만드는가.
글 편집위원 김뀨뀨(shimmer4100@yonsei.ac.kr)
- subculture 혹은 하위문화. 한 사회에서 정통적・전통적인 위상을 지닌 문화에 대해, 그 사회의 일부 집단에 한정하여 일정한 위상을 지닌 문화를 가리킨다. 주류 문화와의 상대 개념으로 사용되며, 주로 소수파에 속하고 취미성이 강한 문화를 일컫는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발달한 오타쿠 문화가 ‘서브컬처’로 통용되어 쓰이기도 한다. [본문으로]
- 갈홍식, 「서울 한복판에서 욕설, 폭행 당한 성소수자... ‘성소수자 혐오 범죄’」, 『참세상』, 2016.08.26.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1432 (2018년 08월 23일 검색) [본문으로]
- 나랑,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폭행... 혐오범죄 대책은?」, 『미디어 일다』, 2016.08.31.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7&aid=0000005367&sid1=001 (2018년 08월 23일 검색)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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