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나는 대뜸 수수에게 그랬다. “우리 여행 가자.”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받아 칠 줄 알았던 녀석은 나를 빤히 보다가, 들고 있던 젤리를 입에 휙 던져넣고는 그랬다. “유럽. 겁나 멋있게.”“파리.”“받고 체코.”“콜.” 그 뜬금없는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에펠탑 보면서 와인 마시고 싶다, 와인 마실 줄은 아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뭐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내 자리로 돌아가 앉아 책을 펼치며 방금 한 대화가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단 느낌이 들었지만, 오히려 머릿속 여행은 점점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책을 한 장 넘길 때마다 베르사유 궁전이, 루브르 박물관이, 센강이, ...... 세상에, 이대론 안되겠다. 당장이라도 여행계..
우울의 미덕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런 이야기를 찾을 수 없어서 나라도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우울도 각양각색이라 결국 내 세계의 이야기밖에는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아빠, 초록, 호수. 이들과 나는 딸, 친구, 애인으로서 서로 다른 관계를 맺었지만, 그들과 그들 각자만의 우울을 하나씩 내 삶 안으로 보듬으면서 내 세계는 두터워졌다. 우리 아빠를 사랑한 덕에 초록을 좋아할 수 있었고, 초록에 대한 애정과 내 어설픈 동행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호수를 조금 더 섬세하게 사랑할 수 있었다. 공일오비의 화폭을 빌려 부족한 솜씨로나마 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우울의 이야기를 풀어내본다. 아빠> 엄마아빠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엄마는 단단한 뿌리를 ..
들어가며: 과정이 아닌 존재의 청소년에 대하여 ‘한국 영화’를 떠올린다. 깡패나 조폭은 꼭 있을 것 같고, 정의감에 불타는 형사도 한 명쯤 나올 것 같고, 돈에 눈이 멀어 윤리의식 따위 개나 줘버린 기업 총수도 나올 법하고, 무모하게 사건을 파헤치는 기자 캐릭터도 그려지고…. 줄거리와 인물 소개, 출연 배우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훤히 보이는 틀에 박힌 영화들이 계속해서 쏟아지는 것이 웃긴다고 생각할 때쯤, 문득 이러한 영화와 그 등장인물들의 공통점을 생각하게 되었다. 정의롭거나 악덕하거나 비열하거나 순수하거나, 그들은 모두 성인 남성이라는 사실. 그러고 보니 이제 나에게는 ‘성인 남성’이라는 주인공 디폴트값이 너무 깊게 박혀버려 더 이상 다른 인물들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일부러 시선..
짧은 영상이 있다. “나오라고 씨발년아.” 사람을 밀쳐 바닥에 쓰러뜨린다. 막으려는 사람들을 밀고 짓누른다. 그렇게 넘어진 사람들을 발로 밟는다. 깨진 유리가 바닥에 나뒹군다. 머리에서 피가 쏟아지고 비명소리가 가득하다. “야 사람 죽는다. 사람 죽어.”, “그만 때리란 말이야.”, “경찰, 경찰”. 도움을 호소하지만 경찰은 그저 지켜볼 뿐이다. 영화 속 이야기일까? 아니, 7월 12일 노량진수산시장 신시장 이전을 거부하는 구시장 상인들에게 가해졌던 폭력을 담은 영상이다. 노량진역 7번 출구로 나오면 깨끗하고 세련된 시장 건물이 보인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 온갖 계고장이 덕지덕지 붙은 노량진수산시장 구시장(이하 구시장)이 있다. “출입 시 형사 고소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위협은 구시장을 외부와 분..
0. 나는 통학러였다. 밤낮으로 신촌역 1번 출구에서 내려 연희관까지 오고 가는 일상이 몇 개월간 이어졌다. 신촌역에서 연대 앞 횡단보도까지 매일 걷던 나는 지나는 사람들에게는 별 시선이 가지 않았다. 이미 인간들끼리는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 매너, 어차피 다들 피곤한 상태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뭐하러 눈을 맞추겠는가. 나는 오히려 항상 그곳에서 기다리는 비둘기를 바라보았다. 바쁜 발걸음을 내딛는 사람들 옆에서 종종 냉대의 시선을 받는, 검게 찌들어 버린 도시 비둘기. 조금이지만 비둘기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생긴 걸까? 비둘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비교적 한결같다. 비둘기 날갯짓 한 번에 셀 수 없는 세균이 떨어진다는 낭설이 돈다. 겉모습만 봐도 알 수 없는 검은색 물질에 물들어버린 비둘기들을 좋아해 ..
0. 회색 도시 어느 날 회색 양복을 빼입은 신사들이 도시에 등장한다. 매일 숫자가 불어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들의 노골적인 침투를 알아채지 못한다. 회색 신사들은 “시간 절약. 나날이 윤택해지는 삶!”과 같은 포스터들을 사방에 붙이고, 도시 사람들을 하나둘 꼬드겨 시간 절약 거래를 체결하더니, 이윽고 도시를 장악해버린다. “대도시의 모습도 차츰 변해갔다. 옛 구역은 철거되고,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모두 생략하고 꼭 필요한 부분만 살린 새로운 집들이 지어졌다. 그 안에 살 사람들에 맞추어 집을 짓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자면 제각기 다른 모양의 집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똑같은 모양의 집을 지으면 돈이 훨씬 적게 드는 데다 무엇보다 시간을 절약하는 이점이 있었다. (...) 다른 점이..
서울의 하루는 바쁘게 흘러간다. 바쁠 수밖에 없다. 서울은 긴 시간 동안 한반도 내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굳히며 형성된 한국의 심장과 같은 공간이다. 그리 넓지 않은 땅을 가진 서울에는 약 1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우리나라 총인구의 약 20%에 달하는 숫자다. 그리고 동시에 약 1500여 개의 공공청사 및 복지시설이 존재한다. 국회의원들은 저 멀리 바닷가의 공기 좋은 마을이 아닌 ‘서울’에 모여 열띤 토론을 나눈다. 대통령의 집무실과 거주공간 또한 당연하게도 서울에 있다. 만일 영화나 소설 속에 흔히 등장하는 재난 사태가 서울까지 퍼지게 된다면, 우리나라의 모든 기능은 마비될 테다. 이런 특수한 상황조차도 서울이 배경이라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한국의 심장이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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