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축제다” 경주 이(李)씨 상서공파 36대손의 장녀인 나. 우리 가족은 제사를 지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삼촌이나 아빠의 복장은 달라져도 꿋꿋하게 한복 바지와 저고리, 겨울에는 두루마기까지 다 꼼꼼하게 입고 절하시는 할아버지의 주도 아래,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 최소 1년에 3번씩은 제사를 지내야했다. 6·25 전쟁 때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이 몹시 그리웠던 할아버지는 한평생을 바쳐 족보를 만들고 선산을 유지하셨다. 아빠는 원래 제사를 지낸 기억이 없다가, 성인이 되고 나서 갑자기 제사를 지내게 됐다며 어디서 족보를 사오신 게 분명하다고 추측하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작년 여름,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으니 바로 할머니 댁에서 지내오던 모든 제사를 이제 우리 집에서 맡으라는 것이었다. 비상이었다. 우..
* “뭐 그래 봐야 저도 일개 한남이겠지만. ‘왜 나한테 반성하라고 해~~!!! 너는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에!!! 이 버팔로 새끼야!!’ 라고 빽빽대며 쿵쾅대지 마세요. 추하니까요. 그거 일일이 받아줄 에너지 없으니 억울하면 메일 보내세요. 답장 꼬박꼬박 보내드립니다. 에타 같은데 올려서 익명 댓글로 자위할 생각하지 마세요. 짜증 납니다. 더 이상 자신을 한심하게 만들지 마세요. 이미 충분하니까.” - 공일오비 10호 中 * 제안과 권유는 사실 질타, 야단과 그리 다르지 않다. 과거의 ‘가’라는 언행이 잘못되었으니 ‘나’라는 언행은 어떠한가에 대한 작업이라는 점에서, 분위기와 어조의 차이만 있을 뿐 사실 둘은 거의 궤를 같이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글은 제안이나 야단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한국 남성’..
일전에 나는 대뜸 수수에게 그랬다. “우리 여행 가자.”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받아 칠 줄 알았던 녀석은 나를 빤히 보다가, 들고 있던 젤리를 입에 휙 던져넣고는 그랬다. “유럽. 겁나 멋있게.”“파리.”“받고 체코.”“콜.” 그 뜬금없는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에펠탑 보면서 와인 마시고 싶다, 와인 마실 줄은 아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뭐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내 자리로 돌아가 앉아 책을 펼치며 방금 한 대화가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단 느낌이 들었지만, 오히려 머릿속 여행은 점점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책을 한 장 넘길 때마다 베르사유 궁전이, 루브르 박물관이, 센강이, ...... 세상에, 이대론 안되겠다. 당장이라도 여행계..
우울의 미덕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런 이야기를 찾을 수 없어서 나라도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우울도 각양각색이라 결국 내 세계의 이야기밖에는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아빠, 초록, 호수. 이들과 나는 딸, 친구, 애인으로서 서로 다른 관계를 맺었지만, 그들과 그들 각자만의 우울을 하나씩 내 삶 안으로 보듬으면서 내 세계는 두터워졌다. 우리 아빠를 사랑한 덕에 초록을 좋아할 수 있었고, 초록에 대한 애정과 내 어설픈 동행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호수를 조금 더 섬세하게 사랑할 수 있었다. 공일오비의 화폭을 빌려 부족한 솜씨로나마 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우울의 이야기를 풀어내본다. 아빠> 엄마아빠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엄마는 단단한 뿌리를 ..
공일오비는 매 학기 신입 편집위원을 모집하고 있어 매 호 편집위원의 구성이 달라집니다. 따라서 편집위원들은 자기가 참여한 호, 그 전 호에 대해서는 알아도 그 이전의 공일오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요. 그건 독자분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준비한 10호 특집! 공일오비의 역사를 훑어보기 위해 1호부터 9호까지 어떤 글들이 실렸나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해보았습니다. 각호에 실린 모든 글을 소개하면 정말 좋겠지만 지면상 어렵겠지요. 대신 공일오비 편집위원들이 1호부터 9호까지 전부 읽고 각 호마다 취향껏 글 하나씩을 뽑아보았습니다. 먼저 각 호마다 후보 글을 3개씩 뽑고, 편집위원들의 투표를 통해 그중 하나를 최종적으로 선정하였습니다. 티스토리에는 웹의 특성을 활용하여, 티스토리에 올라와 있는 ..
아침에 눈을 뜨는 게 무서웠다. 눈을 뜨면 취업준비생이란 신분이 주는 부담감과 마주해야 하고, 오늘도 취업하지 못하면 대출이자처럼 오늘치의 자괴감, 무기력함 그리고 사람들의 눈치가 늘어날 일이 뻔하기 때문이다. 단군 이래 최대의 스펙을 자랑하면서도 제 앞가림하기가 가장 어려운 지금의 청년 세대는 그야말로 처연하다. 그중 내 처지가 가장 슬플 때는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내 집을 마련하는 너무도 평범하고 당연하(게 보고 자라며 컸던)다고 여겼던 꿈들을 포기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 때다. 이 이야기는 대한민국에서 취업준비생으로 살면서 내가 아파하고 고민했던 시간의 흔적, 그 일부다.동생 친구의 누나는 삼성에 입사‘했다고 한다.’ 건너 아는 07학번 선배는 오랜 취업준비 기간 끝에 현대로템에 입사‘했다고 한다..
일명 ‘피냐 콜라다 송’으로 유명한 Rupert Holmes의 ‘Escape’라는 노래는 오래 사귄 여자친구에게 싫증을 느끼던 한 남자가 신문에서 한 개인 광고를 발견하는 것을 시작됩니다. If you like Pina Coladas, and getting caught in the rain If you’re not into yoga, if you have a half-a-brain If you like making love at midnight, in the dunes of the cape I’m the love that you’ve looked for, write to me, and escape 당신이 피냐콜라다를 좋아한다면, 갑자기 비를 만나는 걸 좋아한다면요가에는 관심이 없고, 단순한 사람이라면바닷..
지난여름은 내내 지독하게 더웠다. 지도로 보니 남인도는 적도와 닿을 듯한 곳에 있었다. 열 몇 살의 아이들과 아이를 벌써 셋 정도는 둔 내 또래의 여성에게 성교육을 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성교육이라고는 받아본 적조차 얼마 안 되는데도 주먹구구식으로 맡겨진 그 역할이 나는 퍽 마음에 들었다. 기세등등한 더위는 숨을 막히게 했지만 아이들의 머루 같은 눈망울과 통역을 채 할 새가 없게 열변을 토하다 울먹이는 여성들이 오히려 숨통을 터 주었기 때문이었다. 월요일마다의 성교육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에 타면, 마음에 알 수 없는 불길이 일었다. 앞으로 이 불길에 끌려 다니며 살게 될 것만 같았다. 학교도 학번도 전공도, 2인 1실의 방 배정을 위해 두 번 뽑았던 제비도, 심지어 이름까지 같은 친구와 교육을 끝..
※ 이 글은 3호에 실린 글로, 2015년 초에 쓰여졌습니다. 대학에 들어온 후 항상 내 머릿속을 차지한 고민은 다름 아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철학자들이나 던질법한 심오한 질문이지만 대부분 20대들이 이런 생각을 달고 살지 않을까. 대학에 들어올 때만 해도 뭔가 특별한 삶이 시작될 줄 알았는데 대학생1이 된 느낌만큼 괴로운 것이 없었고, ‘여긴 어디, 나는 누구’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 흘러가는 시간의 압박을 견디며, 이제는 직장인1이 되는 걸 두려워한다. 하지만 선뜻 다른 방향을 향해 과감하게 움직이진 못한다. 항상 특별함에 집착하지만 사실 그게 뭔지도 잘 모르겠으니까. 이런 참을 수 없는 감정들을 꾹꾹 눌러 담은 채 오늘도 나는 스마트폰을 보며 학교 가는 버스에 올라탄다. 페이스북에 고충을..
* 힌두스탄: 인도 북부 지역. 히말라야 산맥과 데칸고원 북쪽의 인도 반도지역. 인도 최대의 농업 지대로 인구밀도가 높고 도시와 교통이 발달. 힌디어가 널리 쓰인다. ※지명은 ‘힌두의 땅’이라는 뜻. 필자가 여행한 지역. 공항에 내려 처음 들이킨 델리의 공기는 습습했지만 어쩐지 메마른 냄새가 났다. 안개를 잔뜩 먹은 주황색 대기는 애써 흥분하지도 않고 굳이 주눅 들지도 않은 사람의 표정 같았다. 여행이 시작된 첫날의 일도 아니었건만, 인도에서 처음 마주했다고 느낀 ‘얼굴’은 델리에서 바라나시로 향하는 기차 안에 있었다. 나는 어머니와 동행하여 패키지 여행으로 인도에 왔고, 사람들은 일행이라는 무리로 움직였다. 모든 구성원이 같은 칸에 배정되지 않았지만 기차가 출발하기 전에 일행은 한 데 모여 있었고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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