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나는 통학러였다. 밤낮으로 신촌역 1번 출구에서 내려 연희관까지 오고 가는 일상이 몇 개월간 이어졌다. 신촌역에서 연대 앞 횡단보도까지 매일 걷던 나는 지나는 사람들에게는 별 시선이 가지 않았다. 이미 인간들끼리는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 매너, 어차피 다들 피곤한 상태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뭐하러 눈을 맞추겠는가. 나는 오히려 항상 그곳에서 기다리는 비둘기를 바라보았다. 바쁜 발걸음을 내딛는 사람들 옆에서 종종 냉대의 시선을 받는, 검게 찌들어 버린 도시 비둘기. 조금이지만 비둘기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생긴 걸까? 비둘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비교적 한결같다. 비둘기 날갯짓 한 번에 셀 수 없는 세균이 떨어진다는 낭설이 돈다. 겉모습만 봐도 알 수 없는 검은색 물질에 물들어버린 비둘기들을 좋아해 ..
0. 회색 도시 어느 날 회색 양복을 빼입은 신사들이 도시에 등장한다. 매일 숫자가 불어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들의 노골적인 침투를 알아채지 못한다. 회색 신사들은 “시간 절약. 나날이 윤택해지는 삶!”과 같은 포스터들을 사방에 붙이고, 도시 사람들을 하나둘 꼬드겨 시간 절약 거래를 체결하더니, 이윽고 도시를 장악해버린다. “대도시의 모습도 차츰 변해갔다. 옛 구역은 철거되고,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모두 생략하고 꼭 필요한 부분만 살린 새로운 집들이 지어졌다. 그 안에 살 사람들에 맞추어 집을 짓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자면 제각기 다른 모양의 집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똑같은 모양의 집을 지으면 돈이 훨씬 적게 드는 데다 무엇보다 시간을 절약하는 이점이 있었다. (...) 다른 점이..
서울의 하루는 바쁘게 흘러간다. 바쁠 수밖에 없다. 서울은 긴 시간 동안 한반도 내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굳히며 형성된 한국의 심장과 같은 공간이다. 그리 넓지 않은 땅을 가진 서울에는 약 1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우리나라 총인구의 약 20%에 달하는 숫자다. 그리고 동시에 약 1500여 개의 공공청사 및 복지시설이 존재한다. 국회의원들은 저 멀리 바닷가의 공기 좋은 마을이 아닌 ‘서울’에 모여 열띤 토론을 나눈다. 대통령의 집무실과 거주공간 또한 당연하게도 서울에 있다. 만일 영화나 소설 속에 흔히 등장하는 재난 사태가 서울까지 퍼지게 된다면, 우리나라의 모든 기능은 마비될 테다. 이런 특수한 상황조차도 서울이 배경이라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한국의 심장이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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