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문예학자인 가야트리 스피박은 물었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공고한 사회 내 위계 속에서 지배계급에 종속되는 하층민을 통칭하는 용어인 서발턴(Subaltern)은 스피박에 의해 계급, 계층, 인종, 젠더를 아울러 사용될 수 있는 개념이 될 수 있었다. 서발턴, 즉 사회 하층민이 ‘말할 수 있냐’는 물음은 그저 그들이 혀를 굴려 입 밖으로 언어를 소리 낼 수 있는가를 가늠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창작하는 자기 서사가 진정 사회에 반영되는가를 의심하는 물음이다. 한 개인이 서발턴일 수 있는지, 없는지는 그를 둘러싼 수많은 정체성과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따라서 ‘서발턴이 말할 수 있는 존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누가 서발턴이고, 누가 서발턴이 아닌지를 판단하는 일은 불가능하고..
몸 그리고 마음. 사람들은 종종 이 둘을 구분하여 생각한다. 마음과 생각이 진정한 ‘나’라고 믿기도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몸은 내가 세계를 만나는 가장 기본적인 틀, 나를 규정하는 첫 외곽이자 내가 감각하는 오롯한 현실이 된다. ‘나’를 이해한다는 것에는 내 몸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을 알아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는 내 몸을 관찰하고 받아들이면서 몸과 친해지는 시간 또한 포함된다. 월경 기간에는 잠을 얼마나 자야 그나마 평소와 비슷한 수준의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지, 얼마나 매운 것까지 탈이 나지 않고 먹을 수 있는지, 여행을 다닐 때는 얼마나 걸어야 지치지 않고 적당히 좋은지는 모두 ‘나’의 특성과 한계에 대한 중요한 앎이다. ‘습관’이랄 것은 거의 모두 몸의 영역이며, 친구의 발소리와 말투..
*추행과 폭력에 대한 발화가 등장합니다.*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등장합니다. 경보 문자가 하루에도 수십 통씩 쏟아진다.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짐에 따라 실질적으로 3단계나 다름없는 2.5단계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가 선포되었다. 마스크의 습한 이물감 정도는 어느덧 일상이 되었지만, 사람들과의 물리적 단절에는 도통 적응되지를 않는다.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가장 미워하는 것도 사람. 그 괴리 속에서 평생을 살아왔지만, 코로나의 시대가 되면서 추악한 사람들은 여전히 뉴스와 SNS 속에서 적나라하게 마주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도통 만나기 힘들어진, 그 강제적인 불균형의 틈에 자주 매몰되었다. 그 와중에 정신 차릴 새도 없이 텔레그램 내 성폭력 사건이 덮쳐왔다. “그 방에 입장한 너흰 모두 살인자다.” 2019..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펼쳤다. 대상작부터 차례로 읽어나가는데 유독 결이 튀는 글이 있었다. 김봉곤 작가의 「그런 생활」이었다.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의 삶에 실존하는 사람인 것처럼 살아 숨 쉬고 있었고, 그들의 언행과 감정 묘사는 내밀함을 넘어 극도로 ‘현실적’이었다. 소설에 등장한 한 인물이 화자를 “봉곤아”라고 부르고 나서야 나는 책을 덮고 포털사이트에 ‘김봉곤’을 검색했다. 곧 김봉곤의 글쓰기가 대부분 오토픽션(Auto-Fiction)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 「그런 생활」 역시 그의 다른 소설들처럼 오토픽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토픽션과의 첫 조우였다.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어원의 ‘auto’와 허구를 뜻하는 ‘fiction’을 조합한 단어인 오토픽션은 문..
“걘 나에 대해 대체 뭘 알고 좋아하는 거야?” 뻔하게 연기하는 사람이, 함부로 가늠하는 사랑이 좀 별로다. 친구들은 연애를 시작할 때면 감탄형보다도 빈번하게 의문형의 문장을 뿌렸다. 분명 아직 그만큼 친밀해지지 않았는데 사귀기 시작하는 순간 ‘애인’이라면 수행해야 할 역할들을 연기하며 설렘을 쥐어 짜내는 사람을 보면 설득력이 없고 의아해졌다. 우리는 그 투명한 대본을 느꼈을 때 우리 안에 곧바로 생겨나는 엄청난 객관화 능력과 놀랍도록 차분해지는 마음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이 관계에 집중하고 너의 마음이 진심이라고 믿기 위해서, 잡생각을 하지 않고 설레기 위해서는 무언가 더 섬세한 디테일이 필요했다. 네가 갈구하는 ‘로맨스’라는 고정된 의례의 대본집 속에 내가 그저 대체 가능한 연기자로서 배치된 것이..
“너 걔네 좋아해?” 중학생 시절부터 고등학생을 지나 지금까지, 나는 오랫동안 ‘빠순이’였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당시의 빅뱅을 시작으로 수많은 ‘오빠들’과 ‘언니들’을 좋아했다. 화면 없는 mp3로 거북이의 와 할아버지의 트로트를 듣던 초등학생은 음악 방송으로 처음 마주한 화려한 비주얼의 댄스 음악에 푹 빠졌다. 그맘때는 작은 유리구슬 같은 마음도 반짝거리는 수백 개의 조각으로 나누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나는 열 손가락을 모두 접고도 모자랄 만큼의 아이돌을 사랑했다. 포토샵을 배운 것도, SNS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인터넷의 낯선 사람과 처음 만난 것도 모두 ‘오빠(언니)’라는 교집합 아래에서였다. 하나씩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내 ‘덕질’의 역사는 길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빠질 수 ..
0. 소설 읽기소설을 읽는다.소설을 왜 읽나.불안하고 답답하다. 그래서 소설을 읽나.내 세계는 얼마나 좁나. 나는 얼마나 무지한가.아무리 애를 써도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면, 절망하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소설을 읽는다. 동료와 함께 연어크림치즈 샌드위치와 감자튀김을 먹던 중이었다. 그는 며칠 전 다녀온 제주도 여행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제주도를 상상했다. 내가 상상한 제주도와 그가 다녀온 제주도는 같을 수 없고, 그의 여행에 대해 내가 알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어쩌면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애인과 다음 학기 수강 신청에 대해 얘기했다. 어떤 선생의 어느 수업을 들으면 좋을지 대화를 나눴다. 카페에 앉아 딸기 프라푸치노를 마시면서였다. 강의계획서를 들여다보고, 강의 평가를 살피..
0.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합리와 이성을 맹신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마치 모든 문제에 해답이 있는 것처럼 교육받는다. 과거 현재 미래. 원인과 결과. 가해 피해. 온갖 논리적인 언어로 구획된 인생은 명료해 보인다. 논리의 언어들은 삶이 필연적으로 흘러가게 되어있으며, 의지와 선택을 통해 그것을 원하는 모습으로 조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세계의 규칙에 따르면 우리는 논리를 통해 남과 평등하게 대화할 수 있고, 오로지 자신이 한 잘못에 대해서만 정당한 책임을 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그렇지 않다. 이런 언어는 통제할 수 없는 세상의 변수들과 그 변수에 휘둘리기도 하는 취약한 인간들이 설 자리를 주지 않는다. 현실에선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매일같이 벌어진다. ..
- 데칼코마니 모양 나비가, 아니 나비, 아니 나방 모양 데칼코마니가 날아온다. 날아와 앉는다. 황정은의 소설 위에. 0. 좋아하는 마음보다 좋아한다는 말 먼저 좋아한다는 문장만이 만들어내는 파동이 있다. 그 파동을 떠올리면 잔잔한 수면, 작은 돌멩이 하나가 떨어져 마음의 물에 닿는 순간, 원뿔 모양으로 움푹 파였다 뛰어오르는 물방울, 퍼져가는 파문과 떨림이 떠오른다. 기호나 취미, 사물이나 사람, 나아가 이야기나 감각에 대해서도 그 존재를 좋아한다는 문장은 분명한 무게의 울림을 만들어낸다. 좋아한다는 문장을 ‘잘’ 설명할 방법에 대해 질문받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그 존재를 소개하고 싶나요? 당신 주변의 이들도 그 존재를 좋아하길 바라나요? 만약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
▷Now playing Psychotic beats, Pati Amor- (킬링이브 OST) 대한민국을 강타한 OTT 서비스에 남들보다 빨리 눈 떠 넷플릭스, 왓챠에서 꼭 봐야 한다는 드라마, 영화들은 일찌감치 정복한 상태였다. 이제 드라마를 5분만 봐도 나와 맞는지 안 맞는지 판단할 수 있는 ‘짬’이 생겼고 웬만한 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각종 SNS 광고에서 접하게 된 것이 였다. 두 여성 주연에 청불 범죄 스릴러라니, 이제까지 없던 조합에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는 빈, 베를린, 런던 등 세계 각지를 배경으로, 그리고 영국 정보국 요원 이브(산드라 오)와 사이코패스 킬러 빌라넬(조디 코머), 두 주인공을 축으로 진행된다. 이브는 보안국 M15에서 일하다가 무능한 상사에게 욕을 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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