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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울의 미덕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런 이야기를 찾을 수 없어서 나라도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우울도 각양각색이라 결국 내 세계의 이야기밖에는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아빠, 초록, 호수. 이들과 나는 딸, 친구, 애인으로서 서로 다른 관계를 맺었지만, 그들과 그들 각자만의 우울을 하나씩 내 삶 안으로 보듬으면서 내 세계는 두터워졌다. 우리 아빠를 사랑한 덕에 초록을 좋아할 수 있었고, 초록에 대한 애정과 내 어설픈 동행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호수를 조금 더 섬세하게 사랑할 수 있었다. 공일오비의 화폭을 빌려 부족한 솜씨로나마 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우울의 이야기를 풀어내본다.



아빠>

     엄마아빠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엄마는 단단한 뿌리를 가진 상록수 같은 사람이라면 아빠는 작고 향기로운 꽃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대체로 엄마를 닮아 유쾌호탕하고 눈물이 없는 나는 크면서 아빠를 보면 아파서 자주 울었다. 아빠는 진심 어린 사랑이 많아서 어린 내 코를 시큰시큰하게 만들었다.

 

     아빠는 딸이 무얼 하고 싶고 갖고 싶다고 했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기억했다. 가족이 단칸방에 살던 시절, 딸이 포켓몬을 좋아하는 걸 보고는 포켓몬 1기 도감 속 100마리의 몬스터를 일일이 손으로 그려주곤 했다. 알음알음 지인들의 중고 디즈니 DVD도 모았다. 큰딸더러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삶의 자랑이라고 말할 줄 아는 좋은 아빠였다. 그런가하면 아빠는 재즈를 포함해 다양한 음악을 즐겨들었는데, 누군가의 멋진 연주를 틀어놓고 그 사람의 삶에 대해 나에게 조곤조곤 설명해주면서 자주 연주자의 상처에 관한 이야기를 아름답게 버무리곤 했다. 우울과 상실의 상처를 아름다운 곡으로 풀어낸 어느 기타리스트의 이야기, 흑인 음악가들이 크면서 겪은 차별, 폭력, 도주의 경험들, 처음엔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때로는 스스로 싸워서, 때로는 양심 있는 동료들의 지지로 결국에는 음반 계약을 따내고 전설적인 음악가가 된 역사… 엘리자베스 코튼의 곡 Freight Train이나 BB King의 덤덤하고 발랄한 연주, 지미 헨드릭스의 날카로운 기타 솔로와 걱정하지 말라고 읊조리는 바비 맥퍼린의 목소리 위에 얹힌 이야기들은 곡이 끝나도 죽 이어졌다. 아빠의 애정 어린 말들로 남의 고난과 살아냄에 대해 듣고 있자면 이미 아름다웠던 음악이 훨씬 다채롭게 느껴져서 어린 나는 음악도 잘 모르는 주제에 소리죽여 울고 그랬다.

 

     그런 아빠는 때때로 길게 불면과 우울에 빠졌다. 가족구성원 누구도 아빠의 상태를 ‘우울’이라는 단어로 설명하지 않았지만 아빠의 상태를 목격하고 그가 들려준 남의 상처에 관한 이야기들을 조합해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를테면 아빠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후,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병마와 싸우시는 중에 자신의 태생적 가족과 오랜만에 자주 만나게 되면서 자꾸만 우울해졌다. 친가 쪽 삼촌들은 아빠가 어린 시절에 ‘남자답지 못하게’ ‘야동’을 쉬이 보지 못했음을 가지고 여자 조카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놀렸다. 그들이 10대 시절의 아빠 흉내를 내며 “형, 엄마와 누나를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어떻게 그런 것들을 봐?”라고 희희낙락 대사를 칠 때마다 나는 이미 사랑해온 아빠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남초인 직장에서도 아빠는 옳은 말을 거듭하는 사람이라서 조금씩 불행하고 외로워질 일이 생겼다. 원래도 우울감은 있었지만 이런 일들을 반복해서 맞닥뜨리는 시기면 아빠는 며칠, 몇 주씩 자기만의 공간에 숨어들어 가만히 음악을 듣고 가족을 포함해 누구와 길게 대화하는 것을 숨 막혀했다. 어렸을 때 나는 평소에 다정한 아빠의 갑작스러운 슬픔이나 날선 짜증이 내 잘못인가 하고 생각했다. 엄마는 그 어느 것도 내 잘못이 아니라고 거듭 말해주었다. 아빠는 내 잘못과 무관한 짜증과 성에는 반드시 늦게라도 진심 어린 사과를 덧붙였다. 그래서 나는 자괴하지 않으며 클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컸을 때, 아빠를 종종 덮치던 우울의 계절이 분명 그의 섬세한 기질과 연관성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엄마아빠는 내 상처를 걱정하면서 이따금 아무 맥락 없이 나더러 “마음이 안정적인 사람”들 사이에 지내며 사랑했으면 좋겠다는 뼈있는 말을 남겼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 슬퍼졌다. 아빠의 불안한 진폭은 나에게 견딜 수 있는 정도의 슬픔과 상처만을 남긴 반면, 그 진폭과 무관하지 않은 그의 세심한 사랑은 내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비료가 되어주었으므로.



초록>

     딸의 평안한 인간관계에 대한 부모님의 소망은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무너졌다. 나는 3년 내내 수많은 소문에 휩싸였다. 그 와중에 나를 살아남게끔 도와준 건 대부분 우울증을 가진 친구들이었다. 설명은커녕 이해도 하기 어려운 고립과 뒤틀림의 감각을 아직 언어화할 수 없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우울의 언어로 나를 이해하고 보듬었다. 그 구원자 중 하나가 초록이었다.

 

     고3의 어느 날에 내가 “와 나 작년부터 우울증이었나 봐!”라고 탄식하자 초록을 포함한 친구들이 죄다 어이없어했다. “몰랐어?” “이제 안 거야?” 등의 답변이 돌아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내 우울증 증세는 셧다운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수업시간에 졸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그땐 시도 때도 없이 수업 시간에든 쉬는 시간에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9시간을 자도 피곤하고 축 처졌다. 건망증도 아주 심해서 말하는 도중에도 하던 생각을 완전히 잊고, 방금 들은 수업 내용을 쉬는 시간에 당장 잊어버리는 지경이었다. 붙잡으려 발버둥 쳐도 피부 틈으로 모든 기운이 흘러나가는 것 같은 순간들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잠시 컨디션이 안 좋아진 것뿐이라고 믿었는데 머지않아 스트레스성 위염, 장염, 십이지장염, 식도염이 연달아 생겼다. 온 장기가 차례로 상하고서야 사실 괜찮지 않다는 걸 알았다. 언제나 바쁘고 에너지 넘치게 살았던 나는 이 경험 이후로 고통과 생산성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게 되었다. 정신과 몸을 분리하는 플라톤식 이분법 따위는 때려치우고, 정신이 아프면 몸이 아파지고 몸이 아프면 정신이 더욱 힘들어지는 순환고리를 체감했다.


     고등학교 마지막 반 배정을 받던 날 나는 정말이지 남은 1년이 너무 숨 막히고 두려워서 강당 한가운데에서 펑펑 울어버렸다. 같잖은 말로 나를 위로하던 사람들보다 “씨발 나도 너무 무서워!”라고 욕하며 함께 펑펑 울어준 초록의 존재가 더 위안이 되었다. 이따금 사람에 대해 한 줌 남은 희망이나 두려움마저 사라지는 때가 있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애들 전부를 한 번쯤 갈궈버려야겠다고 생각하는 날마다 초록은 귀신같이 “정말 소중한 노랑!”으로 시작하는 짧은 쪽지를 내 교과서나 필통 속에 끼워놓고는 “이런 유치한 것들이 사는 데에 생각보다 도움이 되더라고”라는 따뜻한 말을 덧붙였다. 그럼 나는 별수 없이 마음이 녹아내려 초콜렛 따위를 우물거리며 또다시 하루를 견뎠다.

 

     초록은 처음으로 나에게 진심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표현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위안이 되었고 끈끈하게 연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초록에게 많은 잘못을 지었다. 그때의 나는 내 우울부터가 너무 새로워 다른 우울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나와 초록의 우울은 형태가 매우 달랐다. 나는 오랫동안 스스로의 우울증을 잘 인지하지 못했고 안 후로도 남에게 쉽게 말하지 못했다. 내 몸과 우울을 통제하지 못하면서도 스스로가 이걸 ‘이겨낼 수 있는’ ‘강한 사람’이라고 믿었고, 이 상태를 살아내고 벗어날 것이라고 단언했다. 때로는 이런 생각을 했다: ‘에잇 누가 좀 적극적으로 나더러 살라고 해주고 힘들겠다고 먼저 말 좀 해주지. 아무도 날 잡아주지 않으니 별수 없이 약한 척 한 번 못하고 알아서 살아남아야겠네.’ 별수 없이 살기로 다짐한다고 해서 정말로 살아남을 수 있는 나 자신이 너무 어이없고도 다행스러워서 혼자 빵 터진 적도 있다. 나의 우울은 단기적이었고 이유가 명확했다. 나는 “우리 학교 애들” 이라는 미워할 사람이 있었고 고등학교가 끝나 이 밀폐된 사회에서 해방되면 ‘다시’ 행복해질 거라는 막연한 믿음과 의지가 있었다. 예상대로 나의 우울은 대학교 1학년 때까지 내게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다가 2학년 때 주변인들에게 트라우마를 거듭 진술하면서 사그라들었다.


     반면 초록은 나와 친해졌을 때 이미 본인의 우울과 불행의 형태에 대해 아주 정확하게 설명할 줄 알았다. 작은 것에 기뻐하고 잘 웃으며 일상을 보내면서도 그는 항상 미래를 두렵고 버거워했다. 추진력과 포부 빼면 시체였던 나는 초록의 무거운 무기력과 영원하게 느껴지는 우울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고, 다만 그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만이 확실했다. 그래서 내게 미래가 희망이 되는 만큼 초록에게도 자꾸만 희망적인 미래를 상상하게끔 하려고 했다. 고등학교를 벗어나면 모든 게 해결될 것처럼 말했다. 나의 단기적 우울과 초록의 장기적 우울을 같은 선상에서 바라본 것이다. 한편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죽고 싶어 하는 초록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초록과 나는 우리가 얼마나 가족을 사랑하는지와 가족구성원에 대한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자주 나누었고,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살아야지"라는 믿음이 아주 강했기 때문에, 초록의 사랑은 왜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직결되지 않는지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초록의 삶에 가장 처절하게 매달리는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초록의 우울에 나름대로 반응하는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줏대 없는 인간인지를 온몸으로 느꼈다. 나는 언제나 피씨함의 절정에 있고 싶어 했고 타협이 없었다. 그런데 초록이 자괴하거나 윤리적이지 못한 자기 모습을 혐오하며 붕괴하는 순간이면 나는 "너부터 살아야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를 진심으로, 그것도 아주 거듭해서 말했다. 결국 내 피씨함의 수행도 다 사람이 살만했으면 좋겠다는 욕구에서 시작되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당장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죽겠다는데 이론이고 정확한 언어가 다 무슨 소용이야!


     초록으로 시작해 다양한 친구들의 우울과 만나면서 ‘삶의 의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종종 우울, 불행, 자살은 동일 선상의 개념들처럼 연결된다. 그런데 ‘자살 욕구’는 우울증의 증상이지만 모두에게 찾아오지는 않는다. 나는 어느 날 찾아온 우울증 때문에 몇 년간 힘들었지만 자살을 생각한 적은 없었고, 지금 내 주변을 보아도 만성 우울증을 겪는 친구들이 무조건 자살을 고려하지는 않는다. 자살하겠다는 친구들 중에도 진심으로 오로지 죽음만을 원하는 경우는 없었다. 나는 때때로 우울을 오래 겪은 친구들에게서도 다른 사람과 다름없는, 아니 오히려 더욱 강렬한 삶의 의지와 욕구를 목격하곤 한다. 이를테면 우울을 겪는 내 친구들은 남의 위험을 누구보다 빨리 포착하며 다른 친구를 위해서 자주 위안과 보살핌의 방법을 고민하고 실행한다. 초록이 나에게 정기적으로 건넨 따뜻한 포스팃이나 심한 우울증과 자살 욕구를 느끼는 친구들이 서로에게 생존 신고 전화를 정기적으로 거는 것, 자신의 상태가 상대적으로 좋은 날엔 다른 지인들에게도 요즘 살만하냐며 연락하는 등의 의례가 그 의지를 증명한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내 친구들이 남의 고통과 죽음의 위기를 대하는 다정하고 필사적인 모습에서 생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발견한다. 한편, 그들은 죽음을 단언하면서도 삶의 아름다운 구석들을 너무나 잘 포착한다. 여전히 초록과 나는 힘들고 비참했던 고등학생 시절의 행복했던 순간들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우리가 즐겨먹던 떡볶이나 선생님들을 피해 무단외출을 하던 오후의 자유에 대해 회고한다. 초록은 내가 좋아했던 자잘한 것들이나 내가 했던 웃긴 행동을 나보다도 잘 기억하고 말한다. 그래서 이런 보살핌과 의지, 기쁨이 완전히 소멸한 상태가 될 때도, 나는 우울한 주변인들의 무기력이나 자살 욕구가 삶을 잊게 할 만큼 괴롭고 허무한 마음에 대한 증명일 뿐, 그들이 삶의 아름다움을 모른다는 증명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초록과 훨씬 드문드문 만나게 되면서 오히려 초록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이 많아졌다. 시간이 지나 내 우울에서 탈피하고 나서는 우울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우울의 언어에 능숙해질수록 다양한 농도의 우울증을 겪는 소중한 지인이 점점 많아졌다. 초록에게 참 많은 잘못을 하고 동시에 그를 여전히 참 사랑해서, 나는 다른 우울들에 훨씬 나은 다가섬을 할 수 있었다. 그때 호수가 내 인생에 들어섰다.



호수>

     호수는 대학교에 들어오자마자부터 몇 년을 알고 있던 선배였다. 누구나 호수를 보면 무게감 있으면서 따뜻하다고 했다. 나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귀납적 추론으로 “모두와 문제없이 잘 지내는 사람”에 대한 거부감과 싫증을 느끼고 있었는데 호수만은 모두가 좋아해도 마음에 드는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몇 년간 한결같이 거기에 있던 그는 어느 때부턴가 인스타, 페북, 단체톡방에서 점차 사라지더니 이윽고 집단에서 그와 비교적 친하다고 생각되던 사람들도 거의 그의 행방을 모르는 날이 왔다. 무던하고 성숙해 보이는 사람의 침묵에 사람들은 얼마나 무딘가. 나는 그의 침묵을 남들보다 빨리 알아챘다. 그의 우울증을 확신하게 되고 나서는 호수와 별것 아닌 주제로 톡을 시작했다. 호수에게 다짜고짜 괜찮냐고 묻지는 않았다. 고등학생 때의 나는 안 괜찮은 걸 몰라서 항상 괜찮다고 했고, 우리 아빠도 누가 봐도 가장 아픈 날들엔 괜찮다고 하고 조용히 자신만의 방에 들어가 있었으며, 초록도 다행스레 자살 시도에 실패하기 전날엔 친구들에게 괜찮다는 말 하나밖에 남기지 않고 침묵했다. 상대방의 깊은 우울을 인지한 지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 그저 거리두기 혹은 적극적으로 파고들기. 파고들기를 선택한 내게 호수는 결국 적나라한 아픔과 죽음의 결심을 도려내어 보여주었다. 그는 실수로라도 ‘내일’과 ‘내년’의 미래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과 과거에만 머문 대화들이 무섭게 느껴졌다.

 

     호수는 나를 포함해 단 세 명의 친구에게만 죽고 싶다는 진지한 마음을 고백했다. 그런데 나머지 둘은 놀랍게도 호수에게 “네가 언제 죽어도 놀라지 않겠다,” “네 선택을 존중한다”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호수도 그런 반응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했다. 화가 났다. “죽을 힘으로 살아야지!” 등의 ‘조언’과 마찬가지로 이런 일련의 발언들은 정말이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대방의 경험을 존중하는 것도 아니고 상태를 나아지게 하지도 않는다. 힘든 너와 그렇지 않은 나 사이에 두꺼운 선을 그을 뿐이다. 나도 안락사를 지지하고, 가끔은 영화를 보고나서 “주인공의 자살은 죽음을 통한 폭력에의 저항... 진정한 해방...” 이라는 해석을 내놓곤 했지만... 이건 다른 문제였다. 호수의 자살 선언 앞에서 나는 도무지 선택의 존중 따위는 할 수 없었다. 그런 선택권 따위 내다버려도 좋았다. 죽어야겠는, 오로지 죽음만이 선택지로 느껴지는 상태와 책 제목처럼 “죽고 싶지만” 좋아하는 건 하고 싶은 상태는 비슷하게 들려도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그가 살만하다고 느끼게 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정신과와 상담소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정신과 진료나 심리상담을 받아본 경험이 있는 친구들에게 수소문해서 지인피셜 리스트를 만들었다. 나와 초록은 모두 주변인에 의해 억지로 상담을 받게 된 적이 있었는데, 우리 둘 다 가기 전까지는 무지 못마땅해했지만 예상치 못한 위안을 얻고 왔다. 그래서 호수에게 빌어서라도 그를 어디에 보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괜찮은 정신과와 상담소는 죄다 예약이 꽉 찬 게 문제였다. 그 상황에서 호수가 당장 오늘과 내일을 살게끔 하는 것이 시급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오랫동안 관계 맺어 왔기에 아는 것들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여행 가고 싶은 장소도 없고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고 말했지만 멀고 큰 일 말고 일상의 자잘한 부분에서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고 만드는 사람이었다. 구체적으론 그가 아직 뿌빳뽕커리를 먹어보지 못했고, 괜찮은 분짜나 똠얌꿍 등의 해외 음식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한 게 생각났다. 나는 유명한 베트남음식점 태국음식점을 몇 개씩이나 뒤적이고 자꾸만 그의 취향에 맞는 장소들을 찾아내며 뻔뻔할 정도로 계속 그와 약속을 잡았다. 일부러 하루 안에 모든 걸 다하지 않고 한 번에 하나씩 충당하며 가까운 미래에 할 일을 남겨두었다. 그가 학교, 일터, 집 바깥으로 나왔으면 했기 때문에 서울 이곳저곳에서 약속을 잡아 함께 밤새 걷곤 했다. 해산할 때는 집 도착할 때까지 전화를 걸었고, 한밤중에도 뭐하냐고 물어보곤 했다. 운 좋게도 코드가 맞아서 밤새 이야기해도 재밌었다. 남에게 우울을 방사하지 않고 스스로 침잠하는 사람 중엔 타인의 감정에 예민한 사람이 많고, 그래서 책임감과 배려심도 뛰어난 경우가 많은데, 나는 어찌 보면 그의 책임감과 배려심, 애정을 적극적으로 이용해먹었다. 호수가 이따금 자기도 모르게 다음 주와 내년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희망을 얻었다. 내 악착같은 노력을 보며 호수는 미안해하면서도 고마워했고, 자신의 성격을 너무도 잘 이용하는 내 모습에 놀라움과 당혹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그런데 연말이 다가올수록 호수는 새로운 해를 맞이할 자신이 없다며 매우 힘들어하기 시작했다. 나는 쩔쩔매다가 새해에 출발하는 오키나와행 항공편 두 장을 끊어버렸다. 너를 위해서 살 수가 없다면 나를 위해서라도 살아주라고 말했다. 네가 살아준다면 무지 기쁠 거라고 했고, 우리가 앞으로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주었다. 어느 날 문득 살고 싶어지면 제발 말해달라고, 우스워하지도 허무해하지도 않을 거고, 변화로 인해 네가 혼란스러워진다면 내가 전혀 혼란스러워하지 않고 옆에 있겠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절했다.

 

     이러한 악착같은 노력이 무슨 희생정신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나는 호수라는 사람이 좋았다. 게다가 그 정도로 말이 잘 통하고 편안한 관계가 흔치 않으니, 함께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호수가 더더욱 소중해져서 그의 삶을 소망할 수밖에 없었다. 타인의 적극적인 위로를 바랐던 내 고등학생 시절이나 내가 오랫동안 측은해한 공상 속의 젊은 우리 아빠를 생각해서라도 호수의 우울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초록을 포함해 몇 친구들은 꼭 내가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자살 시도를 하거나 극악의 상황을 맞았기 때문에 내가 늦지 않게 그의 위험의 순간에 알아채고 도울 수 있었다는 점에 감사할 지경이었다.


     한편 나는 비판과 ‘객관’의 언어에 능한 사람이었는데 호수를 설득하기 위해 나를 살게 하는 것들과 내 삶의 의지, 긍정적인 감각들을 자꾸만 구체적으로 언어화해보려고 노력하면서 감각의 지평이 많이 넓어졌다. 호수와 함께 삶과 우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계속 내 과거 경험과 트라우마를 언급하게 되었다. 그때마다 호수는 내가 지금까지 받아본 적이 없었던 마음에 쏙 맞는 위로를 건네주고는 해서 나는 더 이상 힘들지도 않은데 매번 깊이 위로받고 이해받는 느낌이었다. 호수의 언어와 온도와 속도가 꼭 마음에 들었다. 호수는 자주 “내가 너를 위로하는 건지 네가 나를 위로하는 건지 알 수 없게 된”것 같다고 말하며 웃었는데, 나도 그랬던 것이다.

 

     너랑 함께 있으면 재밌다-고만 말하던 호수가 네가 함께 있어만 준다면 살아보겠다-고 말해준 어느 날 밤, 나는 오랜만에 울었다. 캄캄하기만 했던 밤이 무한하게 넓고 길어진 그때, 우리는 서로 감사와 희망과 사과의 말들을 잔뜩 나누었고, 얼마간의 긴 밤들이 더욱 소복소복 쌓이는 동안 우리는 자연스레 연인이 되었다.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평안하게 잘 풀린 것은 아니었다. 깊고 오랜 우울을 가진 사람과 연애하고 가장 친밀하게 붙어있는 것은 분명 속상하고 힘든 일이기도 했다. 연애한지 세 달쯤 되었을 무렵, 나는 다시 한 달간의 우울증을 겪었다. 자연과학적인 법칙은 정말 세상 모든 데에 적용되는 게 맞는지, 내 마음은 중력처럼 호수의 무거운 마음이 흐르는 쪽으로 기우뚱했다. 우울은 자주 논리적이지 못하고 급작스럽다. 호수가 아무리 힘든 걸 감추려고 해도 그가 뜬금없이 침잠하고 침묵할 때면 내가 송두리째 뒤흔들려 내 감정의 주도권을 갖지 못하고 부서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또 힘들었던 것은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점이었다. 잠을 자고 푹 쉬어야 나을 것 같은데 호수의 오랜 우울은 불면을 낳았고 불면의 스트레스는 우울을 심화시키는 것 같았다. 정량적으로 쉴 시간이 많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그는 수업을 들은 후에 늦게까지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둘 모두를 위해서라도 각자 따로 쉬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사랑과 안정을 위한 거리감을 조정해보는 경험은 새롭고도 좋았다.

 

     이 모든 것보다도 가장 힘들었던 건 그가 나를 사랑하면서도 죽을 듯이 괴로워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아빠의 우울을 나에게서 분리하던 어린 시절처럼 계속 호수의 우울이 나와 무관하다고 되뇌어야 했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이해해도 섭섭한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만성적인 우울에 대해서 내가 생각보다 무던하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호수가 나와 관계를 쌓으며 이전보다 ‘살 만한’ 상태가 되자,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우울이 점차 소멸할 것이라고 기대했었나 보다. 호수의 입장에서도 나와 친밀해질수록 나에게 조금이라도 날선 우울이나 “바닥을 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자괴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에게는 우울을 다른 부정적인 감정과 비교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가 세상에 분노하고 비관하면서도 이 세상과 그 안의 사람들을 사랑하듯이, 혹은 억울하고 화나는 사건에 대해서도 우습고 가볍게 이야기나눌 수 있듯이, 우울도 환희나 사랑과 분명 공존할 수 있다. 이 생각을 거듭하고, 말하고, 정말로 믿게 되면서 마음이 아주 평화로워졌다. 호수도 어느 날 내게 말했다: “나는 내 상태가 완전히 바뀌기 전에는 행복해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노랑과 함께하면서 이대로도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요.”

 

     그때의 고난을 견뎌낼 수 있었던 또 다른 큰 이유는 주황의 존재였다. 내 가장 오랜 친구인 주황은 내가 호수로 인해 한참 고민이 많을 무렵 처음으로 내게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주황 어머니의 우울증도 깊게 축적된 것이었다. 주황은 휴학까지 해서 어머니를 모시고 주 2~3회씩 영화관을 갔고, 나랑 만날 땐 도무지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는 집순이인 애가 어머니와는 서울숲이나 북서울꿈의숲까지 다녔다. 알고보니 주황과 나는 각자의 세계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비슷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마음의 중력과 고민의 시간에 대해 공감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황에게만큼은 내 연애의 아프고 힘든 부분들에 대해서 숨김없이 말할 수 있었다. 우리 둘 다 남에게 자신의 힘든 상황에 대해 잘 말하지 않는 성격이었는데, 친밀한 남들의 상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그들의 어려움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우리들의 아픔에 대해서도 더욱 솔직하고 관대해진 듯했다. 우리는 점차 함께 “내가 살고 봐야지”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랑하는 이의 우울에 대해 나무라지 않듯 우리 자신에게도 상대가 느끼는 아픔의 책임을 전가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서로를 토닥였다. 그래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래 동행할 수 있을 것임을 깨달았다. 주황은 항상 덤덤하고 큰 욕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중학생 때부터 빨리 독립을 해서 영원히 혼자 살겠다는 포부 하나만은 끈질기게 보여왔다. 그런데 올해 초의 어느 날, 그는 독립해서 어머니와 함께 살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며 내게 자신의 계획들을 찬찬히 말해주었다.



우울과 함께>

     올봄에는 초록과 함께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숙소로 돌아가던 중에 경치가 아름답고 밤바람이 따스해서 발길을 멈추었다. 오래된 도시의 정돈되지 않은 강가에 앉았다. 우리는 요즘 사는 이야기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미워하는 사람들, 소중한 누군가의 죽음, 옛날이야기 등에 대해 두서없이 이야기했다. 문득 초록과 둘만의 시간을 보장받은 이 여행 기간 동안에 내 예전의 미숙함에 대해 사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레 초록에게 내가 연애를 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초록은 상대가 좋은 사람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가 요리를 잘하고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남을 잘 먹이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고, 작은 것들을 재밌고 예쁘게 기억하는 재주가 있다고 했다. 호수의 사진과 호수가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자 초록은 이 정도라면 친구의 애인으로 허락할 수 있다는 듯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나와 그의 사람 느낌이 닮았다고 말하면서 대뜸 초록은 호수가 “우리 세계 사람 같다”고 했다. 다른 몇몇 친구에게서도 들은 그 말을 조금 곱씹어보다가 나는 호수가 만성적인 우울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초록이 그의 정확한 상태에 관해 물어서 앞서 적은 이야기들을 풀어내었다.


- 내가 애인에게 한 말이 있는데, 네 죽고 싶은 마음을 존중하겠단 말, 비겁해. 그 마음을 그저 이해한다는 말, 죽기 전에 알려달라는 말도 치졸해. 같잖은 말은 하지 않으려고 백 번 고민해봐도 난 우선 네가 살면 좋겠다는 말밖엔 못하겠어. 발버둥 쳐서라도 살아남아야지. 뻔뻔하게라도 살아남았으면 좋겠어, 우리 모두.


초록은 울었다.


- (...) 참 다행스러워. 난 네가 가장 불안할 땐 언제나 한발 늦었는데, 호수와는 속도와 언어가 잘 맞아서 내가 제때 포착할 수 있는 게 참 다행이었어. 그 타이밍이 다행스러울 때마다 네게 미안한 마음이 솟았고.


초록은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하냐며 웃음이 터뜨리고는 코를 퀭하고 풀었다. 짧은 침묵 후에 그는 지난달에도 너무 힘들어서 죽으려고 하다가 상담소에 다시 한번 찾아갔다고 했다. 지금도 숨이 막힌다고 했다. 


- 무조건 살라는 말들, 뻔하고 화나거든. 근데 네가 가볍지 않게, 단호하게 그런 말을 하는 걸 들을 때면 놀랍게도 위안을 받아. 머리로는 알고 주변 다른 사람들도 은연중에 암시하는 그런 위로들, 네가 새삼스럽고 구체적으로 말로 해줄 때 심장에 무겁게 내려앉는 포근함이 있어. 신기해.


초록은 나와 호수가 완벽한 시기에, 다행스럽게 만난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몇 방울의 눈물을 더 흘리고 우리는 일어서서 근처 술집으로 갔다. 맥주를 먹으며 다른 친구들에 대한 오지랖 넓은 걱정을 나누었다. 나와서는 편의점에 들러 군것질거리를 몇 개 더 주섬주섬 챙겼고, 오랜 골목과 닫힌 가게들 사이사이를 지났다. 길고양이가 예뻐서 미소 짓고 놀랍도록 정갈한 일본식 정원을 보고선 감탄사를 내뱉으며 조용한 밤을 걸었다.


     사르트르와 같은 글쟁이들이 미묘한 언어로 풀어내었듯이 결국 존재란 별것 없고 삶이란 덧없다. 어느 뇌과학자는 보통의 사람들이 이 허망함을 외면하고 자신에 대한 긍정적 환상, 현실과 미래에 대한 모호한 예측을 통해 행복해진다고 했다. 그런데 우울은 자신감, 자존감, 현재의 무게나 미래에 대한 고민과 전부 얽혀있는 만큼 외로운 고통을 수반하면서도 존재에 대한 통찰을 준다. 반대로 누군가는 존재론적 통찰 때문에 우울해질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우울한 사람들은 낮고 깊은 최저점으로 그저 침잠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칭하는 아름다운 정점의 시선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느덧 쌓인 내 우울증 동지들은 세밀하고 아름다운 환희나 감사, 사랑을 경험하고 표현한다는 지점에서 서로 가장 닮아있다. 고흐, 피카소, 버지니아 울프, 도스토옙스키, 헤밍웨이처럼 전설적인 예술과 언어를 낳은 천재들 상당수가 우울증을 경험했다는 점을 떠올려보더라도 우울, 예민한 통찰, 세심한 환희는 꽤나 쉽게 버무려지는 성질들이 아닐까.


     그런데 사람들은 우울의 부산물이나 결과물로 탄생한 작품들을 즐겁게 소비하고 그 안에 담긴 아름다운 삶의 의지와 통찰에 찬탄하면서도 지금 숨 쉬는 우리들의 우울증은 쉬쉬한다. 서점에선 죽은 사람들에 대한 책만이 깊은 우울과 혼란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살아있는 사람들의 베스트셀러는 어둠이 없는 행복이나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의 고난과 울적함만을 다룬다. 그래서 이 글이 내가 호수와 연애하면서 그의 우울을 남에게 말하는 고작 다섯 번째 순간이 되었다. 나는 호수와 함께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만족스럽고 충만한 우정과 연애를 구축해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인들에게 우리의 연애 이야기를 설명하기로 마음먹는 것도, 실제로 설명하는 것도 어려웠다. 더 듣지 않아도 뻔한 걱정의 말들과는 달리 내 주위의 우울은 무거우면서도 다정하고, 나를 고립시키지 않고 연결해주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우리 아빠가 있어서 초록과 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초록을 지독하게 좋아해서 호수와 연애할 수 있었다. 호수와 가장 친밀한 사람이 되어 그와 우울에 대해 속속들이 이야기하고 조율하면서는 점차 아빠와 초록의 우울도 더욱 성숙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말은 생소하겠지만, 우울을 통해 내 사랑은 점점 확장되고 다듬어졌다. 이제 난 우울을 반드시 해결해야 할 상태, 제거할 수 있는 현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아빠, 초록, 호수, 그리고 그 밖의 내 여러 친구들이 가진 우울증은 맥락도, 깊이도, 빈도와 형태도 다르다. 하지만 어쨌든 이들을 포함해 여러 사람에게 있어 우울은 삶 끝까지 지니고 가는 일상의 한 부분, 계절처럼 반복하여 찾아오는 한 시기와 상태로 남는다.


     여전히 초록은 가끔씩 다른 할 말을 전부 잃고 체인점 카페에서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아프게 늘어놓는다. 호수는 힘든 날이면 잠을 설치며, 야밤중에 레시피를 찾아서 빵을 잔뜩 굽곤 한다. 아빠가 혼자 보내는 침묵의 시간은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맑고 느린 기타 소리가 채운다. 그러다가도 다른 날에 나와 만날 때, 초록은 뻔뻔하고 짓궂어져서 동선짜기와 같은 잡일을 전부 내게 떠맡기고는 자신의 반려동물과 단짝 친구들에 대한 사랑스러운 묘사를 거듭한다. 우리는 이것저것을 치열하게 욕하고 세상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별것도 아닌 일에 고등학생처럼 웃는다. 아빠는 나와 엄마와 동생을 놀리는 재미에 살고 가끔은 엄마와 함께 랜덤한 음악에 막춤을 춘다. 호수는 잔뜩 구워둔 빵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칵테일바에서 혼자 책을 읽으면서 아늑한 밤들도 보낸다.


     우울에는 분명히 특유의 미덕이 있다. 그것은 삶을 선택하고 내일을 상상하고 살아갈 이유를 깊이 반문하는 진심의 미덕이다. 우리는 모두 다시 힘들어질 수도 있지만 또다시 나아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곱씹으며 산다. 당장의 암흑에 매몰되어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을 땐 다른 사람의 목소리와 포옹으로 바깥을 기억해낸다. 그러다가 타인에게 침묵의 시간이 오면 눈치 빠르게 혼자만의 방문을 닫아주거나 때론 꽉 닫힌 동굴 입구를 뚫고 적극적으로 붙잡기도 한다. 충분히 바라보다보면 언제 다가서고 언제 한 발 떨어져도 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나는 지금 나를 둘러싼 다정한 사람들 틈에서 행복하며, 자신의 삶이 아니더라도 서로의 삶을 최선을 다해 부둥켜안는 우리의 일상을 사랑한다. 그러면서 우울이 행복과 대척점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미국 우울증 연구의 고전 「한낮의 우울」을 훑어보다가 글쓴이의 맺음말에 뼈저리게 공감했다:


우울증의 반대는 행복이 아니라 활력이며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삶은 슬플 때조차도 생기에 차 있다. 어쩌면 내년쯤 나는 다시 무너질 수도 있으며 우울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 지긋지긋하지만 그것들로 인해 삶을 더 깊숙이 들여다보게 되었고 살아야 할 이유들을 발견하고 그 이유들에 매달리게 되었음을 안다. 나는 지금까지의 내 삶을 한탄하지는 않는다. 나는 날마다 살아있기로 선택한다. 그것이야말로 드문 기쁨이 아닐까?[각주:1]


     그래, 그래도 우울은 분명 아프고 슬프다. 그에 대해선 다만 이 정도의 말을 남기고 싶다. 상자 안의 악몽들을 힐긋, 무던하게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당장 당신의 눈을 채우는 건 깊고 묵은 어둠일지라도 네가 서있는 곳은 따뜻한 햇빛이 내리쬐는 나 그리고 우리들 옆이라고. 버거운 미래와 숨 막히는 과거들 대신 소소하고 마땅한 현재의 우리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무서운 게 일렁일 때마다 삼키지 않고 아프게 뱉어서라도 보여주면, 너의 손을 놓지 않고 계속 잡고 있을 거야. 이런 마음들을 안고서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우리는 우울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편집위원 노랑 (raryoo613@gmail.com)



  1. 솔로몬, 앤드류. 민승남, 「한낮의 우울」, 민음사, 2004. p. 65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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