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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시아의 생리학자 이반 파블로프는 개가 밥을 먹을 때 분비하는 침의 양을 연구했다. 그러다 개가 밥 주는 사람 발소리를 듣거나 빈 밥그릇만 보아도 침을 분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개는 원래 먹이를 보면 침을 흘린다. 하지만 밥을 주러 올 때 들리는 발걸음 소리 그리고 밥을 담는 밥그릇은 밥을 연상시켰다. 개는 그에 대한 반응으로 침을 흘렸다. 그 유명한 파블로프의 조건반응 실험의 시작이다. 셀리그먼은 이 조건 반사를 활용해 새로운 실험을 했다. 그는 다양한 조건 속의 개들에게 미세한 전기 충격을 가했다. 어떤 개는 특정한 행동을 하면 전기 충격이 멈춰지도록 장치를 했다. 그러나 다른 한 마리는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전기 충격을 벗어날 수 없게 우리 안에 가뒀다. 후에 개들을 풀어줬다. 다른 조건의 개들은 우리 밖으로 도망가버렸다. 하지만 계속해서 전기 충격을 받았던 그 개는 도망가지 않은 채 전기 충격의 고통을 씹어 삼켰다.
2.
조씨는 아이를 노려보았다. 그러곤 나무회초리로 손을 세게 내려쳤다. 회초리가 두 손의 살과 뼈를 강타하자 날카로운 고통이 뼈를 타고 솟구쳤다. 아이는 너무 아팠지만 울지 않으려 노력했다. 반 아이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공포 속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회초리질을 멈추지 않고 계속 때렸다. 그렇게 한참 때리다 회초리가 부러졌다. 그 때까지도 아이는 새나오려는 눈물을 겨우 부둥켜안고 있었다. 이제 매질이 멈출 것이란 생각에 안도했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가 뺨을 쳤다. 아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어버렸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의 엉덩이를 세게 때렸다. 분풀이를 하듯이 쉴 새 없이 매질이 이어졌고, 아이가 맞은 횟수는 세기 힘들 정도였다. 정적 속의 서울 ㄴ초등학교 5학년 9반은 울부짖는 아이의 절규 소리로 가득 찼다. 그 정적을 깬 건 하교 종소리였다. 구타가 멈췄고, 반 아이들은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너무 울어 숨을 못 쉬고 헐떡였다. 아이는 평소 억울한 일로 울 때 숨을 제대로 쉬질 못했다. 결국 발작이 일었다. 아이는 기름 먹은 더러운 나무 바닥에 누운 채 몸을 떨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조씨는 그제서야 아이를 진정시켰다. 아이를 잡아두고 2시간 동안 명상을 시켰다. 아이가 울었던 흔적이 없어진 후에야 집에 보냈다. 하지만 부어버린 손과 엉덩이는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 때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당시 겨우 12살이었다. 아이는 너무 아프고 힘겨워했다. 부어버려 연필도 잡을 수 없는 그 손을 부모에게 숨겼다. 그 일이 있었던 다음 날에도 학교에 가야 했다. 아파트 베란다 난간 위까진 올라섰지만 진정으로 자살할 용기는 없었다.
매일 밤 눈물이 났지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도움을 청하는 법을 몰랐다. 정확히는 도움을 청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조씨를 신고하더라도 어느 누가 자신을 도와줄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매일 가슴이 조여오고 밤마다 눈물이 나왔지만 아이는 그게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아무에게도 말을 못한 채 아이는 그렇게 매일 스스로를 가뒀다. 방에서 홀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이른 사춘기가 시작됐다. 아이는 그렇게 무기력함과 절망을 스스로 학습했다.
아이는 달라졌다. 일단 그 선생의 말을 더 잘 들었다. 아니 듣는 척이라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본 조씨는 아이에게 “그 때 맞길 잘했지?”라고 말했다.
12년이 흘렀다. 그 동안 공소시효가 마감됐고, 학교 건물들은 새 건물로 탈바꿈됐다. 조씨가 아이를 때렸던 그 교실도 사라졌다. 조씨를 처벌할 법적 수단은 소멸됐고, 그녀의 죄를 입증할 증거도 거의 다 없어졌다. 그 동안 아이는 조씨를 죽일 방법 수 만 가지를 구상하고, 수 천 가지를 계획했다. 지난 12년 동안 아이는 하루도 그 일을 잊질 못했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하면서 달라졌다. 대학에서 권리와 자유를 배웠고 사회 구조를 보기 시작했다. 개인에게 사회가 자행하는 폭력을 볼 수 있었고 자신 역시 그 속에서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때서야 지난 10여 년 간 학습해온 무기력함을 마주하고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다. 12년 전 일을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
나는 셀리그먼의 개였다.
3.
우리 사회에서 폭력은 ‘훈육’을 이유로 너무나 쉽게 자행된다.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육체적 처벌을 가하여 잘못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를 되돌아 볼 줄 모르는 아이들에게 폭력은 가장 쉬운 가르침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크레파스로 벽에 낙서를 하니 부모가 손을 들고 서있게 한다. 그 때 아이는 자신이 잘못한 이유는 모른 채 그저 벽에 낙서하면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을 학습한다. 그 후로 아이는 크레파스와 벽을 볼 때 육체적 고통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어른들에게 체벌은 너무 쉽다.
여기서 더 나아가보자. 우리 사회는 아이가 잘못을 할 때마다 체벌을 행했다. 특히 부모나 선생과 같은 사회적으로 부여된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행하는 폭력은 사랑으로 미화됐다. 아이는 부모와 선생이 아이를 때릴 때 가슴으로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 등을 학습한다. 어릴 때부터 체벌을 학습해온 아이는 체벌에 무감각해진다. 어른과 선생이 가하는 체벌의 부당함을 묻지 않게 된 것이다. 특히 착하고 소극적인 아이일수록 심각하다. 자신이 잘못된 행동을 할 때마다 받는 체벌에 익숙해지면서, 사회적 권위를 지닌 인물이 가하는 폭력을 인내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이 겪는 육체적 고통의 원인을 자기 스스로에게서 찾을 뿐 폭력 그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한다. 마치 셀리그먼의 개가 우리 밖을 아예 나가지 못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사회적 권위라는 우리 안에서 아이들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그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게 오래 이어지면 훗날 우리의 문이 열려도 도망칠 수 없게 된다.
내가 12년 전에 나를 때렸던 담임선생을 고발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선생님이 때렸으니까. 내가 그렇게 맞을만한 행동을 했겠지. 아무도 그런 나를 도와주지 않을 테야. 심지어 엄마라도 나를 혼낼 거야. 선생님이 나를 때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하겠지. 선생이라는 사회적 권위 속에서 나는 그 권위 자체를 도전하는 법을 몰랐다. 너무 어렸고 착했다.
나를 가뒀던 그 우리는 사회에 널리 퍼져있다. 한 때 사람들은 가정에서 누군가 맞는 소리가 들려도 가정 일이라는 이유로 방치하는 걸 ‘미덕’이라 여겼다. 그래서 가정폭력 신고를 가족이 아닌 자가 할 경우 쉽게 무시돼왔다. 누군가 관심을 갖더라도 신고할 법적 권한이 없었다. 그 결과 학대 받는 아이들, 여성들은 외면되고 죽어갔다. 인천에선 11살짜리 아이가 친부에게 학대를 받다 겨우 탈출했고, 부천에선 여중생이 아버지에게 맞아 죽어 미라가 된 채 발견됐다. 11살짜리 아이가 몸무게가 16kg가 될 때까지 막아선 건 바로 사회였다. 아이가 그 지옥 같은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던 건 경찰도, 제도도 아닌 그 아이의 강인한 의지였다.
정부에서 장기결석 학생 전수조사를 실시하면서 가정 폭력 사례들이 점점 많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잊혀지고 방치됐던 아이들을 뒤늦게 찾은 것이다. 하지만 이도 사망한 아이들을 찾아냈을 뿐, 가정과 학교에서 폭력을 당하는 아이들을 지켜내진 못했다. 수많은 아이들이 훈육과 교육을 이유로 폭행당하고 있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난 11살 소녀처럼 강인하지 못했다. 내가 겪는 고통을 얘기하지 못했고 그저 순응했다. 그렇게 12년을 버텼다가 이젠 성인이 되면서 마주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아동 폭력은 쉽게 자행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행동을 취하기로 했다. 시간이 너무 흘러버렸지만, 지금이라도 그 동안 내가 외면해왔던 그 우리를 벗어 던지고자 했다. 그 첫 시작으로 나는 초등학교 담임선생을 고발했다. 내가 이 용기를 갖는 데 12년이나 걸렸다.
4.
시작은 Wee 센터였다. Wee센터는 학교 폭력, 가정 폭력 피해 학생들에게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이트다. 그러나 12년 전의 나를 떠올리며 한 자 한 자 글을 쓰다 보니 그 때의 아픔이 다시 떠올랐다. 그 때 느꼈던 고독, 외로움, 무기력함이 다시 한 번 나를 감쌌다. 하지만 12년 전의 아픔은 날 성장시켰다. 이젠 폭력에 순응하지 않고 맞설 수 있었다. 그래서 상담 신청 내용을 그대로 복사해 서울시 신문고에 민원을 넣게 되었다. 다음 날 민원으로 인정됐다는 메일이 왔고 곧 전화가 울렸다. 서울시 교육청 선생님 찾기 서비스였다. 담당자는 조씨의 근무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아마 기간제 교사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서울시 교육청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직접 학교에 문의하라고 얘기했다. 민원을 시간 내에 제 때 처리할 수가 없으니 취소해주면 고맙겠다는 말을 덧붙이는 친절함도 보였다.
어이가 없네.
기간제 교사는 찾을 방도도 없다니. 그렇다면 그런 불안정한 기간제 교사를 임용한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할까? 학교? 아님 기간제 교사 제도를 운영하는 교육청? 답답한 마음에 ㄴ초등학교를 직접 찾아갔다. 교감선생님에게 사연을 얘기하고, 조씨의 연락처를 구할 수 있는 지, 구할 수 없다면 전근 간 학교명을 알 수 있는 지 등을 물었다. 교감은 서울시 교육청 선생님 찾기 서비스를 이용하라고 답했다. 이쯤 되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짜증을 꾹 참고 서울시 교육청에서 있었던 일을 다 설명했다. 그제서야 조씨의 근무 기록을 찾았다. 그녀의 번호, 주소도 다 바뀌었지만 한 가지 사실은 명확했다. 조씨는 정규직이었다. 이젠 짜증날 정도로 익숙한 서울시 교육청 담당자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에게 정규직이란 사실을 알렸다. 그는 당황하며 분명 시스템에선 나오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그러곤 다시 알아보고 오늘 내로 답을 주겠다 답했다.
하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왜 이렇게 힘들지? 내가 조씨를 쫓으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12년'이었다. 12년 전 기록이 지금 있을까요? 12년 전이라서 정보가 없네요, 12년 전 정보라서 정확하지 않을 거에요. 하지만 12년이란 세월이 흐르기 전에 내가 용기를 냈다면 달랐을까? 인천의 11세 소녀는 친부 학대에 시달려 몸무게가 16kg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 소녀는 수차례 도망치고 도움을 요청한 끝에야 겨우 그 지옥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가 스스로 도망치기 전까지 어느 누구도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 학대의 끄트머리에 매달린 피해자들은 스스로를 구제할 수밖에 없다. 내가 인터넷을 뒤지고, 서울시 교육청을 수차례 연락하며 학생기록부를 인쇄하고, 학교를 방문했지만 조씨의 흔적도 안 보인다. 이건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시스템의 문제다.
ㄴ초등학교 교감이 내게 물었다. 조씨를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나는 ‘설마 죽이기라도 하겠냐’고 했다. 아주 재미없고 서늘한 농담이었다. 어쩌면 이 글을 그녀에게 보여줄 수도 있다. 그녀가 이 글을 보고 어떻게 반응할까? 미안해할까?
이 싸움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글 익명(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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