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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 간 페미니즘은 한국 사회의 가장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지난해 7월 인터넷 상의 여성혐오 표현들에 대한 미러링을 표방하며 등장한 커뮤니티 ‘메갈리아’의 등장, 12월 국내 최대의 음란물 공유 사이트 ‘소라넷’ 관련 범죄 공론화와 사이트 폐쇄, 지난 5월 강남역 살인사건과 대규모로 주최된 추모행사, 최근 정의당 당원들의 집단 탈당으로까지 비화된 메갈리아 티셔츠 인증사진 사건까지 굵직한 이슈들이 지속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고 있습니다. 8월 둘째 주 알라딘 사회과학 분야 베스트셀러 순위를 살펴보면 10위 내에 7권의 페미니즘 도서들이 올라있습니다. 진보언론들은 ‘페미니즘’ 특집 기사를 연이어 보도하면서 여성인권에 대한 한국 사회의 높은 관심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이 여성우월주의와 같은 개념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각종 여성정책을 통해 여성에게만 특혜를 주는 역차별의 이념적 근거로 비난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많은 유명 남성 진보인사들의 페미니스트 선언과 더불어 ‘페미니즘’이 남성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여성들에게만 책임 지워온, 성차별을 타파하고 더 나은 삶을 향유하기 위한 ‘실천 사항’을 남성들도 보다 적극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남성의 역할갈등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는 매우 오래된 화두입니다. 이 질문에 쉽게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은 가부장적 사회구조에서 나타나는 남성 젠더의 이중적인 위치 때문입니다. 페미니즘은 여성은 물론 남성젠더 역시 가부장적 사회구조의 피해자로 보는 동시에 가부장적 사회구조의 수혜자로 봅니다. 다만 개인적, 혹은 집단적인 목적으로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보다 적극적으로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젠더는 남성이며 오랜 기간 동안 여성은 상대적으로 더 높은 피해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었음을 강조하죠. 따라서 ‘가부장적 남성성’은 페미니즘이 공격하는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가부장제 사회 내부의 남성 개인은 가부장적 사회구조의 피해자인 동시에 어려서부터 가부장적 남성성과 성차별적 편견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체화한 수혜자이자 ‘가해가능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남성젠더가 위치한 페미니즘 내부의 이중적인 위치는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남성에게 일종의 역할갈등을 일으킵니다. 



1. 가부장적 사회구조의 피해자


미국의 교육자이자 사회운동가 토니 포터(Tony Porter)는 ‘남자들에게 고함(A call to men)’이라는 테드 강연을 통해 ‘맨박스(man box)’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그는 남성 역시 어려서부터 남자다움을 강요받으면서 분노 이외의 자연스러운 감정표현을 억압받고 여성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을 학습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남성성의 굴레(맨박스)’에 갇혀있는 이상 남성 역시 가부장적 사회구조가 양산한 성차별의 피해자이며, 따라서 남성에게도 페미니즘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실제로 페미니즘이 목표로 하는 세상이 오면 맨박스에 갇혀 큰 부담을 느끼던 남성들도 혜택을 받습니다. 남성성으로 규정된 삶을 살기위해 개인을 맞춰갈 필요도 없으며 과중한 책임과 경제적 부담을 여성과 분담할 수도 있습니다. 남성을 가부장적 사회구조의 피해자로 볼 경우, 남성은 페미니즘 운동의 적극적인 주체로서 페미니즘을 지향할 당위성을 갖게 됩니다.


2. 가부장적 사회구조 하에서의 상대적으로 높은 가해가능성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남성은 페미니즘이 비판하는 남성상과 자신을 타자화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 이상, 페미니즘이 비판하는 가부장적 남성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남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인지하고 있는 편견뿐만 아니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편견 역시 굉장히 많이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 개인은 어려서부터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 구조와 문화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습니다. 특히 성에 대한 편견은 사람들의 사고과정과 습관 곳곳에 내밀하게 침투합니다. 따라서 남성이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그 모든 과정과 순간은 반드시 어느 정도 자기모순과 위선일 수밖에 없죠. 성찰은 자신의 위선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발화와 행동의 간극을 발견하고 위선을 인식한 이후, 본인의 말에 책임을 지는 실천적인 과정과 노력이 되겠지요.


성 편견을 발견하고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주는 렌즈이자 지침이 바로 페미니즘입니다. 페미니즘은 남성 개인의 가부장적 남성성과 성 편견을 모두 없애주지는 못합니다. 페미니즘이라는 렌즈가 ‘보여주면’, 치열한 고민과 반성은 남성 개인의 몫이 됩니다. 이처럼 남성을 가부장적 사회구조의 수혜자이자 가해가능자로 볼 경우, 페미니즘은 남성에게 반성과 성찰의 소극적인 수단에 그치게 됩니다.


이처럼 양면적인 남성의 위치는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남성에게 끊임없이 역할갈등을 일으킵니다. 즉, 남성 페미니스트는 ‘비판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비판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순이 남성 페미니스트의 부정으로 흐르지 않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여성 페미니스트’와는 다른 실천 방법과 이를 실천할 때 직면할 수 있는 문제점을 고찰하고 그 대안을 모색해보는 것입니다.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남성의 실천 지침


1. 스스로 ‘여성혐오자(misogynist)’임을 인지하기


‘여성혐오(misogyny)’란,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씌워지는 편견이나 부당하게 가중되는 비난, 멸시, 조롱, 대상화의 총체를 의미합니다. 개인의 다른 특성과 경험적 가능성을 지워버리는 사고방식으로, 언어로 발현되기도 하고 직접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여성혐오자가 아니기 위해서 반드시 먼저 해야 할 것은 자신이 여성혐오자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성혐오자라고 불리는 것을 극도로 거부하는 이들의 가장 큰 착각은 '여성혐오=일베'라는 등식이 성립한다고 믿는 것이죠. 그들은 자신이 스스로를 여성혐오자라고 인정할 경우 '사회적으로 매도당해 마땅한 인간 말종'으로 취급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가 '나는 여성혐오 안하는데?'라고 발화하는 순간 그가 여성에 대한 편견과 오해, 혐오가 가득한 사회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말하고 행동하는 여성혐오는 정당화되고 맙니다. 개인은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사회의 기본 값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누구나 관람 가능한 공개적인 공간에서 여성의 외모를 칭찬(=평가)하는 것조차도 여성혐오임을 알아야 합니다. 얼마 전 리우 올림픽을 중계한 공중파 방송에서 해설진이 대회에 출전한 여성 선수들의 외모를 평가하는 발언을 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유독 여성에게만 외모와 몸매를 평가하는 등 무례와 하대를 하는 사람은 당연히 '여성혐오자'입니다. 이것은 '낙인'이 아니라, '정의(definition)에 적용한 것' 뿐이죠. 여성혐오가 만연한 사회 속에서 개인이 여성혐오자라고 해서 이상하거나 특별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성혐오자가 아니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여성혐오자임을 자인하는 것과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것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자는 후자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이죠.


2. 사소한 습관이나 유희에도 ‘왜?’라는 질문하기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남성이기 위하여 특히 제가 지키고자 하는 원칙은 모든 문화콘텐츠를 접할 때 제가 그것을 즐기는 이유를 자문해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희를 위해 콘텐츠를 소비할 때 쉽게 ‘왜’라는 질문을 생략합니다. ‘왜’라는 질문은 가장 까다롭고 피곤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혐오가 유희로 변질되지 않기 위해서는, 심지어 나의 웃음코드에조차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작년 가을에 방영된 SBS 개그 프로그램 ‘웃찾사’의 인기코너 <남자끼리>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여성혐오코드를 갖고 있는 것으로 지적받은 개그코너 '남자끼리'는 매우 오랜 기간 동안 방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려 웃찾사의 대표코너로 자리 잡았습니다. 당시 수많은 광고배너에는 '줴훈줴훈'이라는 글과 여자친구역 희극인분의 뚱한 표정캡처가 활용되었습니다. 심지어 '남자끼리' 코너가 방영된 이후 네티즌들이 여성혐오성 댓글을 달면서 여자희극인분의 과장된 표정을 첨부하는 광경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웃찾사의 대표코너라는 '남자끼리'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내용 측면에서의 웃음코드(여자친구역 희극인분의 과장된 표정연기와 말투는 제외하기로 합니다)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데이트 중 많은 것을 요구하는 여성을 남성들이 합심하여 조롱하는 장면을 보고 느끼는 통쾌감이며, 다른 하나는 여자 친구에게 아무 말도 못하는 한 남성에게 괜한 오지랖을 부리고 거기서 알량한 연대감을 느끼는 남자들의 과장된 모습을 보며 짓는 조소(嘲笑) 혹은 비소(鼻笑)입니다. 웃찾사의 '남자끼리' 코너는 어떤 웃음코드의 자극을 목표로 하고 있었을까요?


당연히 전자입니다. 이는 '멀쩡한' 남자친구와 어딘지 '모자라 보이는' 여자 친구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 '요즘은 남성이 약자인 시대잖아요.'라는 가게주인의 득의양양한 시대평, 최근 '김치녀'라는 프레임을 씌워 비난받고 있는 다양한 행동을 개그의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 등에서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문제는 '남자끼리'가 동성끼리의 연대에 집중되어 있기보다는, 그 자체가 혐오와 배척 코드를 갖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남자끼리' 코너에서는 남녀의 연애관계에서 여성의 지극히 사적인 요구도 남성 공동의 문제로 환원되고, 같이 비난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인지과정에 의해 피해를 받는 것은 당연하게도 여성들이죠. 여성들은 자신의 모든 선호를 표출함에 있어 '김치녀'라는 악의적인 기준에 맞추어 일단 자기검열을 거쳐야만 합니다. 여성은 남성이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해서는 안 되며 항상 욕구를 절제해야만 합니다. 만약 그러지 않으면 사회적인 비난과 조롱을 듣게 되지요. 이것은 비단 '남자끼리' 코너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수많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심지어 연애관계에서 요구와 반응은 당사자 상호간에 이루어질 일이지, 사회적으로 계몽하고 강제할 일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남자끼리'를 여성혐오를 조장하는 콘텐츠로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코너가 사적인 연애관계에서 여성이 개인적인 선호를 자유롭게 표출할 수 없도록 하며, 이러한 억압을 사회적 억압으로 확대하고, 그것을 '연대'로 포장하여 권장하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과정에서 여성의 (부당한) 요구만이 부각되며, 남성의 거절 능력, 혹은 그 가능성은 무시된다는 점입니다. 여성은 대화 상대로서의 자격이 박탈되며, 동시에 남성은 대화 주체로서의 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남자끼리'에서 남성이 약자인 상황은 곧 '남성이 쩔쩔매는 상황'이며, 이를 해결할 방법은 무려 사적인 연애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비참하게도) 다른 남성들의 도움을 받거나 함께 조롱하는 것뿐이죠. 이건 굳이 페미니즘 관점에서 보지 않아도 충분히 남성들 입장에서도 불편하고 불쾌할만한 내용입니다. 연애관계에서 발생한 문제를 남성 개인이 애인과의 대화로 해결하지 못하고, '남성들의 집단적인 조롱과 단죄'로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웃찾사' 안의 개그 코너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화 주체로서의 능력을 잃은 남성들은 함께 '개념녀의 기준'을 세우고 강제하자며 다른 남성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이거야말로 '남성 약자의 시대'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처럼 잠시 ‘재미있다’ 혹은 ‘웃기다’는 판단을 멈추고 ‘왜 재미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많은 경우 자신이 갖고 있던 편견과 고정관념을 발견하게 됩니다. 개그코너 뿐만이 아니라 예능이나 대중가요, 광고매체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페미니스트로서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에 맞서기 위한 정당성과 필요성을 스스로 찾도록 만들어줍니다. 


3. 남성 집단에 균열 내기


미국의 반(反)성차별 사회운동가 잭슨 카츠(Jackson Katz)는 테드 강연을 통해 성인 남성이 다른 남성의 성적 대상화에 용감히 맞설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남성 집단이 향유하는 '성적 대상화', '편견', '여성혐오' 등 부당한 유희를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은 성인 남성이 갖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부당한 것에 반대하는 주체가 꼭 그 부당함의 피해를 보는 대상일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부당함을 행하는 내부에서 자정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서울 소재의 대학교들에서 ‘메신저 단체 채팅방 성희롱 사건’이 부각된 바 있습니다. 인터넷은 물론 현실 관계에서 유희로 나타나는 여성혐오는 기본적으로 가부장적 남성 집단으로부터의 인정에 대한 욕망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성혐오에 대한 반대를 여성과 남성 간의 대결구도로 파악하는 여성혐오자들은 조롱하고 대상화하기 쉬운 여성들을 적극적으로 적으로 돌리는 대가로, 여성혐오를 생산, 향유, 묵인, 방조하는 남성 집단의 지지와 공감을 갈구합니다.


특히 그들은 '페미니스트'들을 관계 맺기 껄끄럽고 피곤한 여성으로 간주하고 오히려 페미니스트들을 공격하는 남성 집단의 뒤에 숨어 비난합니다. 그들은 여성 페미니스트들을 그들이 상정한 주류 남성 집단의 '잠재적 연애대상'에서 배제함으로써, 마치 자신에게 간택되지 않은(못하는) 자를 상대하는 것 같은 우월감을 공유하려 합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페미니스트들을 '메오후', '메퇘지' 등 못생기고 뚱뚱한 여성으로 이미지화하고 조롱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우월감을 공유하는 남성 집단으로부터의 인정과 공감,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애초에 여성들의 지지와 공감을 희생(?)한 이 여성혐오자들이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가능성은 거의 없겠죠.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자신을 비판하는 남성들의 목소리에 더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여성과 남성의 대결구도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에게 공감과 지지를 보내줄 것으로 생각한 남성들이 자신을 비판하는 상황을 접하면 여성혐오자들은 당혹감과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들이 여성들이 자신을 비판할 때와 달리, 남성의 비판을 수용하거나 최소한 경청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은, 남성의 발언이 남성 집단에 균열을 내는 것에 더욱 효과적일 수 있음을 드러냅니다.


물론 이것이 여성들의 목소리가 효과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변화하는 남성들도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죠. 다만 ‘페미니즘은 여성들만의 것’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강고한 호모소셜 내부에서 부당한 여성혐오를 막기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남성이 직면하는 문제들 ― 소외와 시혜의 함정


문제는 그처럼 적극적인 행동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기존 동성 친구들과의 관계에 대한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문제이죠. 특히 '성적 대상화', '편견', 심지어 '여성혐오'까지도 남성 집단 내에서 가장 즐겨 회자되는 유희로서 자리 잡고 있는 현실에서, 그 뜨거운(?) 분위기를 깨고, 그 부당함을 직접 이야기하고, 불편함을 공유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남성 집단 내에서 남성 개인은 사실 굉장히 나약하고 불안정하기 때문입니다. 정서적이고 일상적인 만남일수록 '진지충', '설명충', '노잼충'은 집단으로부터 쉽게 배제될 수 있습니다. 집단의 입장에서도 편견이 강력할수록, 즉 부당한 유희가 당연시되고 체화되어 있을수록 균열을 일으키는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그 누군가를 배제하는 것이 '더욱 편한' 방법일 것입니다. 익숙한 집단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생각보다 강력하죠. 관계는 다면적이고 다차원적으로 매듭지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소외의 함정’은 앞서 제시한 ‘가부장적 사회구조의 피해자’ 측면과 밀접하게 관련됩니다. 남성 집단 호모소셜에 적응하지 못한 예외적 남성은 적극적으로 배제하는 방식으로 가부장적 문화는 굳건하게 자신을 방어해왔습니다.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것이 분위기를 깬다는 이유로 배제된다면, 또래집단으로부터 소외된 남성은 다시 ‘맨박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 개인적으로 느낄 소외감도 문제이지만, 또래집단의 여성혐오 문제를 직접 지적하고 교정할 기회를 잃는다는 점도 큰 문제이죠.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남성이 직면할 수 있는 또 다른 문제는 페미니즘 운동방식에 지나치게 간섭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남성들은 여성의 페미니즘 운동방식에 대해서 매우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간섭하는 반면, ‘남성의 페미니즘은 어때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쉽게 생략합니다. 인권운동을 일종의 거래로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는 대가로 여성들의 페미니즘 운동 내용과 방식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변화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자신의 이득이나 만족을 위해 여성 젠더문제에 관심을 ‘가져준다’는 다소 시혜적인 생각을 갖고 있을 때 쉽게 빠질 수 있는 태도입니다.


‘시혜의 함정’은 ‘가부장적 사회구조의 가해가능자’ 측면과 관련이 있습니다. 남성이 성평등에 관하여 관심을 갖고 발언을 하거나 그것을 실천할 경우, 여성이 그것을 말하거나 실천할 때에 비해 훨씬 많은 박수를 받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소외의 원인과 마찬가지로 시혜적 위치에 놓일 수 있는 것도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남성이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취하다보면 페미니즘이 비판하는 가부장적 남성성에 비추어 자신을 성찰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페미니즘을 운동에 간섭하기 위한 일종의 자격조건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남성이 페미니즘 운동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은, 성역할을 적극적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가부장적 남성성의 폭력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전복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의 내용 자체에 불만이 있는 보수적인 남성 집단은, 페미니즘의 내용이 아닌 수단이 불편하다는 근거로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 기준에서 자신의 주장이 여성들의 운동을 통제하고 제약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신중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소외와 시혜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페미니스트 앨라이 간 연대의 필요성


‘앨라이(ally)’는 소외되고 억압받는 자들을 지지하지만 그들 집단에 속하지 않는 외부자를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예컨대 흑인 인권운동을 지지하는 백인이라든지, 성소수자의 인권운동을 지지하는 시스젠더 헤테로를 지칭합니다. 따라서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남성을 ‘페미니스트 앨라이(feminist ally)’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의 인권운동을 지지하면서도 인권운동이 비판하는 집단에 속해있는 ‘앨라이’는 이 모순적인 상황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타자화하는 동시에, 비판대상을 자신에게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특히 ‘페미니스트 앨라이’는 강고한 호모소셜 문화로 인해 쉽게 ‘소외와 시혜의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반성과 성찰을 위한 내외적인 동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호모소셜로부터 소외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불안감, 그리고 스스로 우쭐해져서 페미니즘의 목적을 망각하는 오만과 나태를 완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저는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남성, 즉 ‘페미니스트 앨라이’ 간의 연대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남성은 사회 내에서 지극히 예외적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죠. 스스로 남성이면서도 남성성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고,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면서도 남성이기에 여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의 고민과 생각은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남성이 아니면 역시 온전히 공유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현실적으로 많은 상황에서 이들 개인은 남성 집단 내에서 약자의 입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옳은 것을 흔들림 없이 추구하려면, 지속적으로 '나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하는데, 배제의 공포와 경험을 지속적으로 마주하다보면 아무리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지칠 수 있죠.


간섭을 즐기는 '자칭'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면,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남성은 많은 여성들의 격려를 받습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이들'간'의 연대가 필요한 것은, 남성의 페미니즘이 절대로 시혜적인 것이나 잘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며, 예외적인 것도 아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남성 페미니스트 간 연대가 좀 더 표면화되고 확대된다면, 소위 '보빨러'와 같은 비난도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남성이 더 많이 발견되어야 합니다. 편견과 혐오에 대한 저항이 유희보다 더욱 일상적인 것, 상식적인 것이 될 정도로 이들 간 연대의 규모는 꾸준히 확장될 필요가 있습니다. 구체적인 연대의 방안역시 지속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이러한 고민을 하는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남성에게 좀 더 많은 남성들이 지지와 연대의사를 쉽게 표현하고, ‘여성의 페미니즘’이 아닌, ‘남성의 페미니즘’에 대해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길 바랍니다.




글 성필(기고)




참고자료

http://www.ted.com/talks/jackson_katz_violence_against_women_it_s_a_men_s_issue?language=ko

잭슨 카츠의 테드 강연 – 여성 폭력은 결국 남성의 문제

https://www.ted.com/talks/tony_porter_a_call_to_men?language=ko

토니 포터의 테드 강연 – 남자들에게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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