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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제다

 

경주 이()씨 상서공파 36대손의 장녀인 나. 우리 가족은 제사를 지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삼촌이나 아빠의 복장은 달라져도 꿋꿋하게 한복 바지와 저고리, 겨울에는 두루마기까지 다 꼼꼼하게 입고 절하시는 할아버지의 주도 아래,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 최소 1년에 3번씩은 제사를 지내야했다. 6·25 전쟁 때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이 몹시 그리웠던 할아버지는 한평생을 바쳐 족보를 만들고 선산을 유지하셨다. 아빠는 원래 제사를 지낸 기억이 없다가, 성인이 되고 나서 갑자기 제사를 지내게 됐다며 어디서 족보를 사오신 게 분명하다고 추측하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작년 여름,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으니 바로 할머니 댁에서 지내오던 모든 제사를 이제 우리 집에서 맡으라는 것이었다.

 

비상이었다. 우리 집은 대책회의를 했다.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비단 우리 집에서 제사상을 차린다는 뜻만이 아니었다. 음식부터, 장소, 가족모임 및 선산 관리 등 할머니 할아버지가 책임지고 관리하던 모든 것들이 엄마와 아빠에게 고스란히 내려온다는 것을 의미했다. 엄마는 스무 명의 사람들이 먹을 음식 준비부터, 집 청소, 제기 준비와 관리 등 여러모로 신경 쓸 일이 많다며 걱정했다. 아빠는 제사상에 올릴 음식은 최대한 간소화해서 전 두어 종류랑 탕국만 준비하고 식사는 배달음식으로 시켜 먹으면 된다고, 뭘 그렇게 걱정하느냐고 했다. “제사를 핑계로 사람들이 우리 집에 놀러오는거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또 모여서 보겠어.” 작은할머니가 요리에서 손을 뗀다면 작은집 사람들도 굳이 일하러 일찍 오지 않을거라며 엄마가 걱정하니, 아빠는 쓸데없는 소리라는 듯 덧붙였다. “에이. 먼저 당신이 동서들한테 전화해서 맛있는 음식 시켜 먹으면서 설렁설렁 준비하자고 잘 말해봐.”

 

20206. 처음으로 우리 집에서 기제사를 지내는 날이었다. 꼬박 이틀에 걸쳐 상에 올릴 제사 음식과 스무 명의 가족들이 먹을 음식들을 만들었다. 제사를 준비하는 동안 어느 누구도 함께하러 오지 않았다. 오로지 나와 엄마, 동생의 일이었다. 당숙모 한 분만 제사 당일 오후 4시쯤 오셨다. 철없는 육촌동생들은 마치 내가 부모라도 되는 것처럼 주변을 뱅뱅 돌며 쫑알대고 칭얼거렸다. 그림그려줘. 게임하자. 목말라. 이거 먹을래. 이제 뱉을래. 심심해. 업어줘. 당숙모는 누나를 그만 괴롭히라고 타이르더니, 내게 어제 오늘 엄마 일 도와드리느라 힘들겠다. 그래도 딸이 이럴 때 좋지. 엄마도 도와주고. 요즘은 아들 필요없지 뭐. 엄마가 힘들든 말든 폰만 보잖아.” 하며 칭얼대다 폰을 쥐어주니 얌전히 앉아있는 아들을 가리키며 웃었다.

 

제사는 밤 9시부터였지만 이제 제사의 부담에서 해방된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일찍이 4시 반부터 우리 집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술판을 벌이셨다. 의자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곤 화장실을 갈 때 뿐이었다. 수많은 음식을 차례로 가져다 드리고, 다 드신 그릇을 가지고 오고, 떨어진 술을 사러 마트에 다녀오고, 쌓인 그릇을 설거지하러 부단히 움직이는 사람은 나와 엄마, 당숙모였다.

 

와 축제다저녁 7시쯤 아빠와 함께 들어온 막내 삼촌은 막걸리를 두어 병 건네며 인사말을 건네기보다 먼저 음식을 보고 감탄했다. 작은할머니는 갈비를 좀 더 가져오라고 시키며 접시를 가지러 간 내게 앞치마를 입으니 새색시같고 예쁘다너도 이제 시집갈 나이가 되었으니 요리할 줄 알아야지. 잘 배워둬라. 나중에 시집가서 요리 못하면 욕먹어라고 하셨다. 내 앞치마는 계란물과 밀가루, 기름 얼룩으로 더러웠다.

 

몇 친척분들이 늦게 도착해 생각보다 제사가 늦어졌다. 940분부터 절을 하기 시작했고, 상을 치우고 과일과 식혜를 먹는 후식 시간까지 지나니 11시가 되어갔다. 할아버지는 새삼 각자 자신의 가족을 꾸린 자식들과 조카들이 감격스러운지 한참을 바라보시다가 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는 엄마에게 덕분에 조상님들이 배부르게 드셨겠다. 고생했다하셨다. 그리고 엄마가 채 답하기 전에 할머니가 말을 이어나갔다. “근데 이렇게 힘들게 제사를 이어 받아도 아들이 없으니 너 상은 누가 차려주냐. 아들 하나만 낳지. 아들이 없어 허전하다.”

 

12시 반. 모두 다 돌아가고 집안 바닥 가득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를 치우고 설거지를 하니 거의 새벽이 되었다. 아무리 손을 닦고 핸드크림을 발라도 손톱 밑에서 징하게 올라오는 계란 비린내는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배웅할 때 내 정신도 같이 떠나보냈던건지, 피곤함도 느끼지 못한 채 멍한 상태로 쇼파에 앉아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는데 아빠 말이 들려왔다. “그래도 이렇게 시끌벅적하고, 다 같이 모여서 얼굴도 보고 그러니 마음이 좋네. 이렇게 부대껴 사는 게 가족이지

 

아 가족. 이런 게 가족인가.

 



내게 가족은

 

가족의 의미는 저마다 다르다. 내게 가족은 한 단어로 정의내릴 수 없는, 참 복잡한 공동체다. 분명 지금까지 내게 가족은 함께 하는 기쁨과 행복, 편안하고 안정적인 기분를 느끼게 해주기도 하였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마치 사라진 것 같았던 가부장제는 여전히 끊기지 않은 채 나의 몸 어딘가를 옭아매는 거미줄처럼 우리 집 안에 존재해왔다. 가족이 내게 고통과 아픔을 안겨주는 순간들은 뿌리 깊게 박혀있는 가부장제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글을 시작하며 언급했지만, 나는 맏딸이다. 요즘에는 맏딸보다 ‘K-장녀라는 말이 내 경험을 더 살려주는 말일지 모르겠다. 코리아(Korea)의 앞글자 ‘K’와 맏딸을 뜻하는 장녀의 합성어인 ‘K-장녀는 주로 지옥의 가부장제를 견디며 살아온 여성들이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지칭할 때 쓰인다. ‘맏딸은 살림 밑천이란 옛말처럼 부모의 조력자로 희생하는 여성의 상징이던 장녀는, 이제 그 존재만으로 가부장제의 모순을 드러내는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가 되었다.[각주:1]

 

나의 성격과 습관, 작은 일상의 부분들까지 가부장제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없을테다. 가부장제라는 거미줄에서 떨어져나오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몸 어딘가가 칭칭 감긴 채 살아가는 평범한 K-장녀의 가족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기집애가 미쳤나. 지금이 몇 신데 어딜 싸돌아다녀

 

3살 때까지 온 가족의 예쁨을 가득 받던 나는 여동생이 태어나면서 장녀가 되었다. 언니가 된 나는 동생에게 모범을 보였어야 했다. 말을 잘 들어야 했고, ‘애기들이나하는 실수는 하면 안됐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어른스러운 첫째 딸의 역할을 당부받았고, 혼나는 이유는 항상 나의 잘못을 넘어섰다. 내가 먼저 잘못하지 않아도 혼났고, 똑같이 잘못해도 더 크게 혼났으며 항상 더 먼저 맞았다. 모든 건 너 동생이 보고 배우면 어떡할래?”라는 말로 시작했다. 그 이유로 혼나는 것이 싫었지만 동생이 나를 보고 배울까봐 걱정됐고, 한편으로는 난 언니니까타당하다고 생각했다. 동생한테 모범을 보여야 하는, 의젓한 장녀라는 기표가 어느덧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각주:2]

 

부모님이 바라는 어른같은 장녀의 모습은 수동적이고 정숙한 여성의 모습이었다. 이 역할은 말 그대로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태도가 전부라 항상 수행하고 있는 게 당연했고, 만약 이를 어길 시에는 사람 취급을 못 받았다. 우선 부모님이 정한 규칙들을 어기면 혼났고, 그게 싫어 부모님께 대들면 일단 소리 높였다는 이유로 두 배는 크게 혼났다. 그중에서 가장 지독하게, 지금까지도 나를 옥죄는 규칙은 통금이다.

 

12시 땡치면 마법이 풀리는 신데렐라도 무도회장이 재밌어서 늦게까지 놀다가 집 가는 길에 마법이 풀리는 마당에 나는 풀릴 마법도 없는데 통금시간을 필히 지켜야 했다. 억울한 건, 통금시간보다 10분쯤 일찍 들어와도 어떻게 넌 꼭 통금시간에 맞춰 들어오냐고 싫은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통금시간을 조금이라도 넘겨 들어가게 되면 나는 아빠한테 쌍욕을 들어야 했다. 아빠는 평소에 무서운 사람이 아니었지만, 전화기 너머로 기집애가 미쳤나. 지금이 몇 신데 어딜 싸돌아다녀로 시작하는 아빠의 말들을 들으면 온 심장이 콩알만하게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조금 더 놀다가 들어가고 싶다고 떼쓰는순간, 나는 미친년”, “정신 나간 년이 되었고 아빠 말이 우스운천하의 불효녀가 되어있었다. 외박을 하려면 동아리 MT나 학교 조모임같은 공적인 이유를 대야 했고, 그마저도 한두 시간에 한번씩 친구들과 있는 사진을 찍어 보내야 했다. 사진이 안 오면 누구랑 뭐하냐는 카톡이 왔다. 카톡 답을 안 하면 전화가 왔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그래도 받을 때까지 전화와 카톡이 왔다.

 

한번은 연락이 아니라 아빠가 온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도 친구들은 더 놀다 가라고 말하려다, 이때의 일을 기억하고 붙잡기를 포기한다. 스물둘, 신촌, 동아리 친구들과의 학기 말 뒤풀이 자리였다. 경기도에 사는 나는 통금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1시간 10분 전에는 술집에서 나가야 했다. 혼자만 일찍 나서기 억울하고 아쉬운 마음에 같이 있는 언니네 자취방에서 자고 첫차를 타고 가겠다고 전화했는데, 아빠는 여느 때와 같이 화를 내며 당장 들어오라고 외친 뒤 전화를 끊었다. 술도 마셨겠다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 주체하지 못하고 신촌 길바닥에서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는데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아빠가 차를 끌고 집에서부터 신촌으로 나를 찾으러 가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아빠의 심기를 심하게 거스르는 (통금을 어기거나 어기려는) 행동을 하면 그 뒤 며칠은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 정말 말 그대로 투명인간 취급이라 엄마랑 아빠 그 누구도 내게 말을 걸거나 대답하지 않았고,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애인이 생기면 통제는 더욱 심해져 폭력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통금시간에 대한 압박은 더욱 심해졌고 외출은 더 철저히 통제되었다. 단순히 시간만 옭아맨 게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 잠에서 막 깨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스킨십 여부와 그 정도를 직접적으로 질문받은 순간들이나, 책상을 뒤져 내 일기장을 찾아 매일 한 장 한 장 읽어오다가 애인과의 일화에서 거슬리는 게 있으면 너 일기장에 적혀져 있던 거 뭐야하면서 혼내던 것, 짧은 치마나 바지를 입고 외출하려다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은 기억들이 스친다.

 

물론 그렇다고 부모님이 내가 말 잘 듣는 여성일 때만 칭찬해주고 나머지 순간들에 관심을 안 보인 것은 아니었다. 무언가 성취하거나 당찬 모습을 보였을 때,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에도 정말 기뻐하며 칭찬해주셨다. 그렇지만 그 당참은 허용된 범위를 벗어나면 안됐다. 통금시간을 없애거나 늘려달라고 패기 넘치게 제안했다가 번번이 그래도 우리가 동아리 MT나 친구들끼리 가는 여행은 보내주잖아’”라는 대답이 돌아오는 걸 보면 확실하다. 분명히 내게 요구되는 역할을 충실히 해낼 때 나는 칭찬받았고, 해내지 못할 때 꾸지람을 듣거나 맞거나 혼나거나 가족 내에서 지워졌다. 그 서늘한 순간들이 아직도 끔찍하고 무서워 나는 여태 술자리에서 떠날 시간으로 알람을 맞춰두고,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해가며 사진을 찍고, 통금 시간이 다가오면 나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보내 성실히 가고 있음을 어필하며 울면서도 꾸역꾸역 통금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동생이 스무 살이 되던 해. 동생은 친구들이랑 있는 사진도 찍어 보내지 않은 채 통금을 훌쩍 넘기고 집에 왔다. 집에 또 한번 피바람이 불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아빠는 허허 웃었다. 그게 끝이었다. 그 다음 날도 동생은 여전히 귀여운 우리 집 막둥이었다. 연락 뜸하게 나가있다가 통금을 어긴 다음 날이 이렇게 평화로웠던 적이 있었나. 외박과 통금에 이토록 부드러운 모습은, 당시 내 23년 인생 처음이었다.

 


 

이럴 때 딸이 참 좋지

 

20대 중반이 된 지금은 어린 시절부터 내게 요구되던 어른이 어떤 모습의 어른이었나 되짚어보게 된다. 나는 다른 모습의 어른 보다, ‘수동적인 여성과 함께 가정적인 여성’, ‘웃어른에게 상냥하고 다정한 여성의 역할을 착실히 수행할 때 특히 칭찬받았다. 예를 들어, 나는 우리 집에서도 장녀였지만 고조부모님의 장남이 낳은 첫째 아들의 첫 번째 자식이었기 때문에 친척들이 다 모이는 명절 때도 항상 맏이였다. 언젠가 갓 태어난 육촌동생을 보고 있자, “예쁘지? 큰언니가 기저귀 갈아볼래?”는 말이 들려왔다. 똥기저귀 위에 누워 베실베실 웃는 육촌동생은 예쁘지 않았지만 명절 때마다 하나둘 늘어가는 동생들의 밥을 먹이거나, 울지 않도록 잘 놀아주거나, 다치지 않도록 챙기는 모든 일은 자연스러운 나의 역할이었다. 그러면서도 언젠가부터는 요리도 해야 했다. 주방에서 자연스럽게 내 이름이 나오면 나는 주방으로 갔다. 엄마가 시키는 작은 심부름만 하다가 우연히 산적 꼬치를 만들며 들은 칭찬이 어린 내 마음을 콩콩거리게 만들었다. “엄마 도와 요리를 하는거야? 이야 대단하다. 시집 가도 되겠어.” 칭찬에 힘입어 명절 때마다 나는 꼬마 엄마가 되었다.

 

그러다가 중학생 때, 엄마가 큰 수술을 받게 되었다. 엄마가 병원에서 지내는 사이에 우리 집에 찾아왔던 할머니는 내게 동생 밥도 해주고, 숙제도 봐주고 엄마 걱정 안 되게 너가 잘 해야한다.” 라고 당부하셨다. “이럴 때 딸이 참 좋다. 할머니께서 한 번 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할머니 댁에서 아직 제사를 지내던 시절 할머니께서 갑작스레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해 계셨을 때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입원하셨는데도 그 중요한 제사를 거를 수 없다고 고집하셨다. 병문안을 온 엄마한테 할머니께서는 대신 제사 준비를 부탁하며 그 옆에 있던 나를 두고 정확하게 똑같은 이야기를 하셨다. 그래도 넌 딸이 있지 않느냐고, 이럴 때 딸이 참 좋다고.

 

그런 할머니에게도 딸이 있다. 딸과 조금 멀리 떨어져 살지만, ‘이럴 때딸이 없어도 괜찮다. 우리 집이 할머니 댁에서 가장 가까우니까. 걸어서 10분 거리로 이사한 이후, 매일마다 할머니는 딸 대신 며느리에게 전화를 거신다. 매 주말마다 갖은 이유로 엄마를 부르고, 엄마와 산책을 하고, 엄마가 해가는 음식으로 함께 밥을 먹는다. 어느 날은 엄마와 동네 한 바퀴를 산책하고 있었는데 할머니 옆집에 사는 이웃 할머니가 며느리가 딸 같다고 하자, 할머니는 딸보다 더 딸 같다고 이렇게 가까이 살아 참 좋다며 웃으셨다고 한다.

 

여전히 이럴 때딸은 좋다. 딸은 그중에서도 엄마의 일을 나누어 대신하고 훗날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부모에게 친구처럼 다정하게 대해주며 보살펴줄 때 가족 내에서 인정받는다. 내게도 다 컸네. 시집가도 되겠다라는 말이, “너는 부모님 말씀을 어쩜 이리 잘 듣니. 너네도 언니/누나 좀 보고 배워라. 언제 철들래라는 소리가 그토록 달콤했다. 착한 딸이라고 칭찬받고 싶었고, 부모님이 힘든 순간에 도움이 되는 철든 아이로 바라봐 주는 게 좋았다. 그럴 때면 나는 필요한 존재로 인정받는 것 같았다. 혼나지 않기 위해 부모님의 말을 어기지 않으려 애썼던 나의 모습과, 칭찬을 받기 위해 부모님이 시킨 이상을 해내려 했던 나의 모습이 스스로를 이럴 때 필요한 딸로 만들고 있었다. 그 말들이 나를 어떻게 통제하였고, 어떤 여성으로 살게 만들었으며, 내게 어떤 습관을 갖게 만들었는지를 깨달으며 생각이 바뀌기 전까지는 말이다.

 

딸의 유용성이 입증되는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며 내게 과연 가족이란 어떤 공동체인가, 나는 가족 안에서 어떤 역할을 계속 떠맡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 내가 장녀로서 겪은 것들은 내가 며느리가 되고, 엄마가 되었을 때도 여전히 겪을 일들일 것만 같았다. 가사노동과 돌봄, 섬세함과 다정함을 겸비한 감정 대응은 엄마, , 며느리를 관통하는 공통의 무언가였다. 엄마같은 딸로 컸다가 결혼을 하면 딸 같은 며느리가 되고, 가정에 충실한 엄마가 되고, 그러면서 동시에 부모에게 먼저 전화를 걸 줄 아는 상냥한 딸이어야 할 것 같았다. 그게 너무 뻔하게 그려져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가 자라오며 경험한 가족이라면 꾸리고 싶지 않아졌다. 내가 쓸모있는 존재라고 인정받으려면 계속 성실히 그 역할을 해나가야 할 텐데 나는 다른 때에도, 다른 모습으로도 여전히 가족 안에서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었으니까.

 

 


K-장녀가 꿈꾸는 가족 밖의 가족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받은 상처들은 가족 안에서 치유 받기 어려웠다. 그럴 때 나의 마음을 다독여준 이들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해온 다른 여성 친구들이었다. 고등학생때부터 한 동네에 살며 각자의 집안 사정을 알고 있는 친구들과는 못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성인인 지금도 가해지는 통제는 학생 때 더욱 직접적이고 강압적이었다. 그런 폭력적인 상황 속에서 상처받았던 K-장녀들은 야자를 하며, 학원 셔틀버스에서, 학원가 패스트푸드점에서, 독서실 계단에서 서로 마음을 털어놓았다. “야 우리 집도 그래로 시작하는 이야기들은 가부장제도에 대한 나의 반감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안전함을 느끼게끔 만들어주었다.

 

그중에서도 나와 가장 친한 친구 M과 했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나와 M의 이름을 한글자씩 따서 만든 M 하우스는 고등학생때부터 우리가 줄곧 그려오던 미래이자 가슴 속에서 꿈꿔온 가족의 모습이었다. 룸메이트와의 동거 형태지만 정말 법적 가족으로 인정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우리는 우리가 경험해온 형태에서 벗어난 가족을 갈망했다. 지금도 나와 M은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연M 하우스에 준하는 가족 형태를 꾸리고 싶어 한다. 각자 잘하는 집안일을 맡아 나눈다. 결혼한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의 가족을 부양할 의무는 전혀 없고, 반복적으로 행해야하는 번거로운 의례들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 생활하는 방이 하나씩 있고, 주방과 거실은 공유한다. 서로 퇴근하고 들어오면 시간이 맞을 때 식사를 함께 하거나, 종종 우리가 좋아하는 맥주캔을 부딪힌다. 주말에는 각자 약속을 나가거나 집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여유를 즐긴다. 그때나 지금이나 못하는 이야기는 없으니, 언제든 어떤 이야기든 시끌시끌 나누는 그런 가족이다. 의무나 역할은 없고, 함께 사는 사람의 개성과 취향이 존중되는 집이다.

결혼하지 않고 친구 M과 살 것이다”, “결혼은 마음 맞는 사람이 생겨 하더라도 아이는 낳지 않을 것이다와 같은 말을 할 때면 부모님은 에이 왜 안 해?”,“그래도 너 닮은 아이는 낳아야지라며 웃으신다. 종종 철없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코웃음만 치실 때도 있다. 그러나 나와 M이 꿈꾸는 가족은 철없는 상상이 아니다. 가부장제에 대한 반기고, 실존하는 공동체다. 이처럼 현재의 가족 형태나 가부장제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이들은 이미 꽤 많다. 사회가 정상적으로 규정하는 가족을 꾸리기 위한 필수적 선행요소인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지만, 다양한 모습과 약속들로 서로가 바라는 새로운 모습의 가족을 꾸리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비혼 1인가구와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 사이에 새로운 얼굴의 가족들이 움트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가족’”

 

성인이 되며, 나는 옳고 그름이 분명하게 존재했던 나의 작은 세상 밖으로 조금씩 눈을 돌렸다. 무지개가 사실 일곱 빛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빨강부터 보라까지 형용할 수 없는 다양한 빛의 스펙트럼인 것처럼, 세상에는 저마다의 모양과 빛깔을 지닌 이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책과 기사를 통해, 때로는 논문과 영상을 통해 새로운 가족의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럴 때면 공통적으로 풍기는 그 자유롭고 따뜻한 분위기에 매료된 채 더욱 상세하게 나의 가족을 상상하곤 했다. 최근에 읽은 기사에서는 부부와 친구가 함께 사는 가족을 만났다. “단순히 친해서 같이 살고 싶어진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결이나 살아가고 싶은 방향이 비슷해서 함께 살자고 프러포즈하게 되었다는 인터뷰 내용을 보고 라이프스타일로서의 가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나온 말도 꽤나 인상깊었다. “꼭 이성애적인 결혼 관계가 아니어도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함께 살며 가족이 되는 다양하고 너그러운 사회가 오면 좋겠거든요. (...) 그럴수록 우리가 가족이라고 더 말해야 가족의 경계가 더 넓어질 거라 생각해요. (...)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저는 여기, 이 사람들 떠올리면 가슴이 뭉클해요.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사람들인데 왜 뭐라고 할까? 앞으로도 저흰 따뜻하게 등 두드려 주면서 삶을 나누는 그런 사이로 지낼 거예요.”[각주:3]

요즘도 고등학교 때 친했던 여성 친구들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결혼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살고 싶다고 말하는 친구도 있고, 결혼은 하되 아이는 낳지 않고 살 것이라는 친구도 있다. 누구는 평생 연애만 하고 살 것이라 하고, 또 연애같은 거 관심 없고 스스로를 보듬으며 살겠노라 하는 이도 있다. 친구 넷만 모여도 각자 꿈꾸는 미래는 이토록 다르다. 실제로 서로 생활동반자가 되어 살아가는 일명 비친족 가족의 가구 수는 2018년 통계청 자료를 기준으로 진작 34만 호를 훌쩍 넘었다.[각주:4] 이때의 생활동반자는 개인간 자유로운 합의로 맺어지고 결합되는 관계를 뜻한다. 다양한 관계들을 위한 생활동반자법[각주:5]과 같이, 각기 다른 모양의 가족들이 사회 속에서 인정되고 보호받게 하기 위한 움직임들이 꿈틀대고 있다. ‘미혼이라는 단어 속에 감추어진 이들을 드러내는 비혼이라는 단어가 생기고, 기존의 가족에 포함되지 못하던 이들이 우리가 가족’”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럴수록 내가 M과 하던 이야기가 진짜로 실현될 수 있겠다는 기분 좋은 확신이 더욱 생생해진다. 자유롭고 싶어서, 혼자가 편해서, 함께하고 싶은 상대가 없어서, 현재의 결혼 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저에는 가부장제의 잔해들 속에 얽매이기 싫다는 강한 바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부장제도 속에서 존재가 희미해지기 싫어서. 가정 안에서 살게끔 만드는 수동적인 역할들로부터 탈피하고 싶어서, 가부장제도에 기반해 희생을 당연한 미덕으로 여기며 유지되어 가는 지금의 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에 위치하고 싶지 않아서.


 


나의 가족은

 

내가 가족 안에서 마주하던 숨 막히는 순간들, 너무나 정상적이라 여겨져서 가족 구성원 그 누구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한 모습들을 풀어놓았지만, 이 기이한 모습들 속에서 어느 누구를 콕 집어 당신 정말 나쁘다고 손가락질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고 싶지 않기도 하지만 그럴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안에서 상처받고 불만을 느낀 개인에게 다시 그 안에서 자리를 잡고 자신이 들었던 말들을 내뱉으며 살아가게 하는 것은 결국 사회이고 구조라는 생각을 한다. 가부장제의 모순을 드러낸다는 K-장녀인 나도 가부장제를 끔찍해 하면서도 은연중에 답습하기도 하니까. 그렇지만 말하고 싶었다.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흔해 빠졌을 꿉꿉한 이야기들을 굳이 다시 펼쳐 그 안에 거미줄처럼 엉켜있는 가부장제도의 실재함을 보이고 싶었다. 지금의 가족 형태 안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만들었을 가부장제와 그의 언행이 다시 딸, 며느리, 엄마, 즉 여성에게 어떤 역할을 지게 하는지를 문제 삼고자 했다.

 

잊고 있었는데 그날 제사에서 꽤 여러 번 내 나이가 주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벌써 그렇게 됐냐, 곧 대학 졸업하겠다, 어디에 취직하고 싶냐 와 같은 질문들 뒤에는 남자친구는 있냐, 슬슬 결혼할만한 사람인지 잘 살펴보며 만나야한다로 마무리되는 전형적인 이야기들이었다. 여자는 25살 넘어가면 꺾인다는 말과 함께 손자 손녀들 중에서는 내가 제일 먼저 결혼하겠다고 이야기는 끝났다. “그런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아요”, “아이도 낳고 싶지 않아요가 목구멍을 간질였지만 말하지 않았다. 부모님도 한철 지나면 까먹을 철없는 소리 정도로 생각하는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뭐라 하실지는 뻔했다.


폭풍같은 시간들이 지나고 방에 들어와 언젠가 만날 나의 가족을 상상해보았다. 최근에는 더욱 상세하고 자세하게 그려본다. 결혼을 하거나 하지 않더라도, 성애적 감정이 없는 이와 동반자가 되더라도, 인간이 아닌 이와 함께하게 되더라도, 내가 꾸릴 가족은 칭찬이나 윽박지름에 의해 굴절되며 역할 속에 갇혀 반듯하게 유지되는 가족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중되고 사랑받는 둥그스름한 방사형 가족이기를 꿈꾼다. 그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공간에서 함께하고 부대끼며살 필요는 없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지내면 또 아쉬우니까, 그 언저리에서 적당히 겹쳐지며 살테다. 우리는 시끌시끌 이야기를 나누며 깔깔대고 때론 같이 슬퍼하고 분노하며 살겠지. 위계나 역할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곳. 누군가가 이야기를 하면 조언이나 평가를 하기보다 고요한 시선으로 바라봐주며 들어주는 곳. 이곳에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은 없기에 마음 깊이 신뢰와 애정으로 서로를 계속 물어봐주며. 설령 같은 집에 들어간다 해도 각자의 방을 본거지 삼아 공통의 영역에서 우리 우연히 만나는 느낌으로, 그렇게 그렇게.

 

아 가족. 이런 게 가족일지도.



글 편집위원 연자 (candella96@naver.com)


  1. “온라인에서 뜨는 ‘K-장녀’...”여성차별을 조목조목 말할 때 속이 다 시원”, 경향신문, 2020.04.05, http://news.khMn.co.kr/kh_news/khMn_Mrt_view.html?Mrt_id=202004052137005#csidxf70ff1M2fMc959cM4bMM92cM1bd9e30 [본문으로]
  2. 「장녀됨에 관한 자문화교육기술지; 모녀의 일기를 중심으로」, 『교육인류학연구』 20(4), 2017, p.326 [본문으로]
  3. “부부랑 여사친 같이 살기 가능??”, 스브스뉴스, 2020.07.27, https://1boon.dMum.net/subusunews/5f1eM7edb605d45fe30f4403 [본문으로]
  4. 통계청, 2018 [본문으로]
  5.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이하 생활동반자법)은 2014년 더불어민주당 소속 진선미 의원이 발의했다. 공일오비 9호에 실렸던 <또 다른 가족개념으로서 ‘생활동반자’>글에 따르면, 생활동반자법은 기존의 결혼제도가 지나치게 특권화되어 불평등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문제 삼고, 개인과 개인의 결합이 제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끔 그 관계를 보장한다. 법률적 보호 속에서 수술 동의 등 의료과정에서 보호자의 의무를 지고 권리를 인정받는다거나, 가족 관계만이 누릴 수 있었던 복지 혜택을 받는 등의 일들이 가능해질 수 있다. 더 궁금한 분들은 당장 공일오비 9호를 꺼내드시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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