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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기억] 예술 앞에서 나를 응시하다

연희관공일오비 2017. 1. 14. 22:28

잃어버린 OO/를 찾아서


뒤뜰 Backyard, Avish khebrehzadeh, 2005


누구에게나 한번쯤, 책장 서랍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어떤 물건을 보다가 오랫동안 생각에 사로잡힌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한 번 시선을 뺏기는 순간 그것과 연결된 무수한 기억의 고리들이 머릿 속에 영화 장면처럼 떠오르게 된다. 그때 그랬었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과거의 나를 마주하게 되면서 그 시간을 둘러싼 행복, 슬픔, 그리움, 그리고 때론 놀라움에 휩싸인다. 그렇게 우리는 과거를 경험하며 현재와 과거의 구분이 희미해지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존재가 된다.



프루스트의 시간여행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어느날 추운 겨울날, 집에 돌아온 그에게 어머니는 홍차와 마들렌을 건넸다. 그리고 그는 잊혀졌던 심연의 기억으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 도대체 이 강렬한 기쁨은 어디서 온 것일까? …… 그러다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그 맛은 내가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아주머니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갈 때면, 아주머니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서 주던 마들렌 과자 조각의 맛이었다. …… 일본 사람들의 놀이에서처럼 물을 가득 담은 도자기 그릇에 작은 종잇조각들을 적시면, 그때까지 형체가 없던 종이들이 물속에 잠기자마자 곧 펴지고 뒤틀리고 채색되고 구별되면서 꽃이 되고, 집이 되고, 단단하고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이제 우리 집 정원의 모든 꽃들과 스완 씨 정원의 꽃들이, 비본 냇가의 수련과 선량한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작은 집들과 성당이, 온 콩브레와 근방이, 마을과 정원이, 이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내 찻잔에서 솟아 나왔다.[각주:1]

 

그는 후에 그가 경험했던 이 신기한 체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기억이 천상의 구원처럼 내게 내려와, 혼자서는 빠져나올 수 없는 허무로부터 나를 건져주었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에서 마들렌을 먹고 그의 놀라운 과거를 알게 되는 주인공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실벵 쇼메 감독의 작품으로, 우리나라에서는 2013년 개봉했다. 필자가 매우매우 애정하는 영화 중 하나지만,  프루스트 특유의 감각적인 시간 여행을 온전히 경험하고 싶다면, 책을 추천한다.


그에게 기억은 우연적이고 무의지적이었다. 미각의 달콤함은 천상의 손길처럼 나타나 그를 무의식적 기억으로 인도했다. 그는 마들렌을 맛보는 순간 강렬한 기쁨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가 그토록 기억하고 싶었던, 그러나 잊고 있던 유년시절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에게 마들렌은 그의 아름다운 유년의 기억을 되찾아주는 하나의 자극제였던 것이다. 프루스트에게 예술 그 자체는 사실 마들렌과 같은 존재였다. 무의식의 저편으로 침잠해가는 기억을 끌어내는 작업. 그의 예술의 중심에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있었다.



기억에서 탄생한 예술


기억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숱한 예술가들의 뮤즈가 되어왔다. 뮤즈라는 말의 기원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로 거슬러 올라간다. 므네모시네는 제우스와 아홉밤을 동침해 클레이오, 우라니아, 멜포메네, 탈레이아, 테릅시코레, 폴리휨니아, 에라토, 에우테르페, 칼리오페의 아홉 자매를 낳았고, 이들은 시, 음악, 무용 등 예술의 수호신으로서 그리스어로는 무사이(Mousai), 영어로는 뮤즈(Muse)이다. 그렇게 기억의 여신은 예술의 어머니가 되었다. 기억에서 예술이 나온 셈이다.

 

므네모시네 여신은 하데스의 지하세계 길목에 있는 기억의 샘물을 관장하기도 했다. 망자는 지하세계로 향할 때 반드시 망각의 샘물과 기억의 샘물을 지나쳐야 했는데, 망각의 샘물을 마시면 전생의 기억을 모두 잃고 기억의 샘물을 마시면 기억이 되살아난다. 꼭 망자만이 망각의 샘물, 즉 레테 강의 샘물을 마시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유아 기억상실을 겪으며 한번쯤 레테의 강을 건넜다. 그래서 기억을 잃는 것은 어쩐지 낯설지 않다.


로제티, 므네모시네(‘기억의 등불’로도 알려져 있음), 1875-1881, 델라웨어 아트 뮤지엄, 월밍턴.



우리는 가끔 무엇을 망각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살아가지만, 많은 예술가들은 그 지점에서 예술을 탄생시켰다. 기억을 재료로 무의식의 세계를 무한대로 확장했다. 그리스 문학에서 호메로스는 근원적인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해 뮤즈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인상주의의 화가 클로드 모네는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있는 희미한 인상을 회화작품으로 이미지화했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영향을 받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본인들이 무언가 부재와 결핍이 가득한 존재들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자신의 기억과 욕망(라캉)을 되찾아줄 오브제를 찾는 것에 집착하기도 했다. 프루스트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예술이 새로운 기억을 만든다

 

예술은 형체없는 기억과 감정을 포착하여 형체 있는 무엇으로 재탄생시킨다.[각주:2] 그래서 과거의 것은 기억되고 지속된다. 그러나 예술은, 그리고 예술가는 기억전달자가 되고자 한 게 아니다. 예술의 더 큰 위대함은 기억을 형상화하여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관람자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데 있다. 기억에서 탄생한 예술은 응시하는 자의 새로운 기억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앞에 서 있다고 상상해보자. 400여년 전 레오나르도 손끝에서 특정한 순간이 포착되었고 그 속에 모나 리자(Mona Lisa)’가 영원히 그림 속에서 기억되고 있다. 바로 옆에서 작품해설가가 설명을 시작한다. “여러분은 지금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있습니다. 희미하게 미소짓는 여인을 그린 아주 유명한 초상화죠.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하여 엷은 안개가 덮인 듯한 효과를 주고 있어요. 이 모델이 누군가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의견이 있는데, 다빈치의 동성연인이었다는 설도, 그의 어머니였다는 설도 있답니다…….”


사실 위의 정보는 일명 외재적 기억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사회적으로 작품에 부여한, 그래서 지난 400여년동안 집단적으로 기억되었을 것들을 뜻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일까? 지금까지도 이 작품의 실제 인물, 눈썹,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것을 보면 그렇다고 보기도 어렵다. 해설가의 시각에서 조금 벗어나면 오히려 다음과 같은 것들이 보인다. 초등학교 미술시간, <모나리자>에게 눈썹을 만들어주면서 친구들과 뿌듯해(?)했던 추억들, <모나리자>를 패러디한 수많은 그림들, 혹은 모나리자를 닮았다고 놀림받았던 한 친구의 모습. 어느 순간 그림 속 여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를 바라보지 말고 너 자신을 바라보라고.

 

예술작품을 바라볼 때 우리 각자의 기억을 투영해 서로 다른 지각을 한다는 사실은 인지심리학적, 생물심리학적 관점에서 뒷받침되고 있다. 우리는 예술이 주는 시각 자극 뿐 아니라 기억에서 이끌어낸 자극에도 반응한다. 그래서 방금 본 무언가에서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고, 처음 보는 낯선 그림에서도 익숙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자극은 내면의 기억, 감정들과 상호작용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의 뇌가 재창조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화가가 창작한 이미지는 우리의 뇌에 새로이 심어진다. 소설이나 연극도 마찬가지다. 가상의 소설에서 철수와 이러저러한 이유로 헤어진 영희의 스토리는 나의 머릿속에 내재되고, 이와 유사한 본인의 무의식이 새로 자극된 스토리 영역과 맞물려 현재의 기억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리하여 예술작품의 관람자는 작품 응시를 통해 새로운 경험과 기억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감정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예술가가 작품에 부여한 감정은 나의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 감정의 상호 교환은 인간만이 지닌 위대한 소통능력이다. 예술가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달리 공감능력과 감정이입능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 공감능력을 일으키는 뇌 속의 거울뉴런은 인간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는 생물학적 구조다. 그래서 우리는 슬픈 영화를 보고 울고, 행복한 영화를 보고 웃는다. 더 나아가 예술가의 메시지가 마치 내가 하려던 말, 내가 느끼는 이 기분을 대변해준다고 느낄 때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다빈치가 <모나리자>의 얼굴에 불어넣은 오묘한 감정이 관람자에게 이상야릇한 기분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작품을 매개로 우리의 내면세계와 바깥 세계는 언제나 느낌을 주고받는다.



응시의 미학 ― 너가 나를 바라보고 내가 너를 바라보는 소리없는 소통

 

감정의 커뮤니케이션은 응시의 양방향성에서 비롯된다. 쉽게 생각해보면, 우리는 서로서로의 눈을 잘 바라보아야 상호간에 진솔한 소통을 할 수 있다. 이 매우 원초적이고 간단한 원칙은 예술작품을 접할 때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문제는 대화 상황에서 바라보는 (생물학적) ‘이 예술에는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결책은 예술 속에 자기 자신을 투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작품 속에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개입해서 능동적으로 스스로를 바라보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는 많은 이미지를 소비하고 응시한다. 책 대신 드라마를, 연극 대신 영화를, 회화 대신 수많은 미디어 이미지를 보는 것이 더 익숙한 이러한 모습을 가리켜 이미지가 지배하는 사회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때 우리의 능동적인 응시는 이미지의 압도적이고 일방적인 시선에 의해 뒤로 밀려나는 경향이 있다. 기 드보르는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이러한 점을 경고했다. 이미지로 가득찬 사회 속의 인간 존재는 주체성을 잃고 이미지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 그렇게 개개인은 이미지에 종속된 관객spectator’(혹은 구경꾼)이 된다. 그래서 관객이 된다는 것, 응시가 수동적으로 변하는 것, ‘관객이 되는 것의 비인간화는 위험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상상력, 기억, 감정, 생각 등등이 개입될 여지는 적기 때문이다. 바라보고 있는 것과의 쌍방향적 소통은 거의 불가능하다. 마치 한 광고를 볼 때 우리의 눈을 대놓고 바라보는 배우의 시선에 이끌려 광고의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 예를 들자면 최근에 이런 광고가 있다. 점액안 '눈아'의 광고.



바라보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다(To gaze is to think).살바도르 달리

 

윗 구절에는 개개인의 응시gaze’의 시선이 궁극적으로 바깥이 아닌 내면을 향해야 한다는 달리의 심오한 메시지가 녹아있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모델을 볼 때 혹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볼 때 그 내면을 바라보았다. 작가 자신의 내면에는 더욱더 민감했다. 이 역할이 이제 응시하는 우리로 옮겨져야 한다. 무언가를 바라보거나 혹은 발견하게 되는 것, 이 모든 것은 결국 본인의 마음을 보는 것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 응시 과정에서 기억의 개입은 매우 중요하다. 기억은 우리 마음 속에 내재되어 있으면서 특정한 감정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다시 프루스트로

 

프루스트가 마들렌을 보면서(혹은 먹으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이렇게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진정한 응시하는 주체였기에 가능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았다. 기억은 매우 우연하게 나타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그 무엇을 떠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주변의 모든 것을 응시했다.

 

구름, 삼각형, 종탑, , 조약돌 같은 것들의 심상을 나는 응시하면서, 그 형상 뒤에, 내가 애써 발견해야 할 전혀 다른 그 무엇이 있음이 틀림없다, 언뜻 보기에 구체적인 것의 형태만 나타낸 것 같은 저 상형문자처럼, 아마도 그 형상 뒤에는 거기에서 번역될 어떤 사념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느꼈던 것이다.[각주: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가장 잘 읽는 방법은 바로 응시하는 것이다. 프루스트의 서술은 내면과 무의식을 자유자재로 오가면서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우리를 그저 놓아준다. 그래서 이 소설은 프루스트에 대한 것이 아닌, 나에 관한 책으로 탈바꿈된다.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았다면, 우리 또한 나를 나로 만드는 기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7권으로 이루어진 장편소설이지만, 한 페이지씩 넘어가면서 읽는 주체의 내면을 응시할 수 있다면, 프루스트가 작품을 만들 때의 의도와 어느정도 맞닿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러분은 이제 프루스트의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가?





글 편집위원 George





  1.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정 역, 민음사, 2012. [본문으로]
  2. 음악이라는 예술 형태는 형체가 있는것인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기억이나 감정보다는 형체가 있지 않은가? [본문으로]
  3.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정 역, 민음사, 2012,, p 681, 68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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