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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밖] 문화는 중립적 언어인가?

연희관공일오비 2017. 1. 17. 13:32

“문화적 가치", "규범", "복종", "어른에 대한 존중", "서양과는 다르게", "한국인.” 



위는 한 외신이 세월호 사건을 보도하며 반복적으로 언급한 단어들이다. 왜 학생들이 가라앉는 배에서 탈출하지 않았냐는 앵커의 질문에, 기자는 ‘서양, 특히 미국에선 도저히 상상도 못할’ 행동이라는 말까지 덧붙여가며 어른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과 존중이라는 한국 문화가 이와 같은 비극을 초래했다는 답변을 내놓았다(Lha, 2014). 위 사건을 철저히 ‘문화’의 틀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 설명은 타당하지도 않을뿐더러, 문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보니 사건을 발생시킨 구조적 문제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위험시에 질서를 지키는 것이 모두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는 걸 배웠다면, ‘한국’ 아이들이 아닌 그 누구였더라도 선장의 명령을 따랐을 것이다. 이렇게 당연한 사실을 기자도 몰랐을 리 없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너무도 쉽게 오류를 저질러 버렸다. 이는 문제의 핵심을 보기 전에 이미 ‘한국’, ‘동양’(서구의 기준에서 ‘다름’)이라는 정보가 그에게 먼저 다가왔기 때문이다. 만약 세월호 사건이 서구 사회에서 발생했다면, 그 때에도 선박을 뛰쳐나가지 않은 아이들을 문제 삼는 보도를 했을까? 이 사건이 한국, 동양에서 발생한 이상, 문화는 현상을 설명하는 가장 용이한 수단이 되었다.


‘문화’는 다양성이 증가하고 있는 사회에서 상대방을 바라보는 중요한 인식의 틀이 되었다. 개별 집단이 자생적으로 형성시켜온 것이라는 믿음, 그러한 특수성과 차이를 말하는 것이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식이라는 믿음으로부터, 문화는 정치적 언어이기보단 중립적 언어로 이해되어왔다. 누구나 쉽게 문화를 이야기하고, 쉽게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문화가 타인의 시각에서 재구성될 때 이는 다른 문제가 된다. 다문화 사회를 맞이하는 우리는, 문화를 말하는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문화는 과연 중립적 언어인가?    

다문화사회 그리고 문화  


국가 간 이동이 편리해지고 미디어가 발달함에 따라 나와 다른 인간을 마주하는 것은 일상적 일이 되었다. 이러한 사회 변화의 흐름 속에서 ‘문화’는 사회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우리가, 그들을, 해석해야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는 특히 세계가 다문화 사회에 진입함에 따라 좀 더 복잡한 문제가 된다. 다문화 사회의 의미는 넓게는 다원화된 사회를 뜻하는데, 주로 한 사회 내 다양한 민족과 인종 그리고 국적을 가진 구성원으로 이루어지는 사회를 뜻한다. 하나의 국가 내에서 다양한 인간이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필요해졌고, 문화는 다름을 해석하는 방법이자 상대방을 파악하는 기본적 정보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문화일까? 문화의 정의는 여전히 학자마다 그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럼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핵심적 의미는 ‘공유’에 있다. 즉, 공유된 상징체계로써 문화는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삶을 가능하도록 하는 기본적 전제조건인 셈이다. 이러한 문화는 보편적이기 보단 개별 집단에 따라 특수하게 나타난다. 이로부터 다문화 사회에서 문화는 양가적 의미를 갖게 된다. 특수성으로부터 문화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인식 틀로 작용함과 동시에, 그것은 언제든 ‘공유된 것’의 차이로 인하여 충돌 가능한 잠재된 갈등으로써 인식되는 것이다. 

 

문화프레임_너를 향하는 “시선” 


위와 같이 다문화 사회에서 문화가 가지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특정 집단을 문화의 틀로만 이해하는 것[각주:1]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문화가 중립적 언어로써 이해되고 강조됨에 따라, 개별 집단이 가진 계급적, 정치적, 사회적 맥락을 은폐하고 나아가 소수 집단을 억압하는 효과를 가지기 때문이다. 즉, 문화라는 언어가 “시선”의 권력 효과를 비가시화 한다는 것이다. “시선”은 권력의 주체가 대상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시선은 언제나 남성에서 여성에게로, 서양에서 동양으로, 정상에서 비정상으로 향해 있었다. 시선이 향하고 있는 대상은 시선의 존재 없이는 자립적 주체가 될 수 없다. 스스로 주체를 형성할 수 없는 불완전태로써 대상은 끊임없이 해석과 분석의 잣대 앞에 불려나온다. 


과거의 오리엔탈리즘, 나아가 현재의 문화프레임 또한 이러한 ‘시선’의 연장선이다. 그러나 과거의 오리엔탈리즘과는 달리 문화프레임은 무조건적으로 상대방의 문화를 미개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화’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관용의 언어가 된다.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 예시에서 언급한 단어들은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서구에서 한국의 발전을 분석할 때 빼놓지 않고 사용된 것들이었다. 물론 협동, 가족중심, 근면이라는 잘 포장된 언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서양에 비해 타인을 더 고려하는 문화를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당사자인 우리 또한 그런 문화를 민족의 우월성으로 환원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다문화 사회에 접어들며 좀 더 복잡한 문제가 된다. 한 사회가 다원화 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권력을 가진 주류집단과 권력을 가지지 못한 비주류 소수 집단으로의 분화가 발생하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백인은 전자를 유색인종을 후자를 형성한다. 그리고 시선은 권력을 가진 주류집단에서 권력을 가지지 못한 소수집단에게로 향한다. 다문화 사회는 인종/민족/국적이 다양한 집단으로 이루어지기에,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으리라는 기대는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문화프레임이 쉽게 적용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문화 사회에서 소수집단을 향하는 시선의 권력 작용은 문화프레임을 통해 비가시화 된다. 문화프레임은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넓은 의미의 문화를 단순히 음식, 의상 전통 공연과 같은 표면적인 문화로 한정짓고 그 내에서만 다양성을 경축하고 전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된 다양성의 강조는 개별 집단이 겪은 구조적 차별을 묵인하고 정당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김선규, 2015). 따라서 소수 집단은 문화라는 이름 아래 계급적, 정치적, 역사적 맥락은 거세당한 채 타자의 위치에서 차별과 억압을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된다. 문화라는 포장이 권력의 작용을 은닉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는 모든 걸 설명하는 만능열쇠?_미국 한인 사례


8, 90년대 들어 미국 사회는 동양인 이민자들의 사회적 성공을 부각하고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한인 또한 그러한 집단 중 하나였다[각주:2] (Lee, 2007). 이들의 성공은 유교문화-근면 성실, 가족애, 교육에 대한 강조-에 기반 한 것으로 해석되었는데, 이는 정부의 어떤 도움 없이도 성공을 해낼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을 강조하는 것 이었다[각주:3](ibid). 그러나 이런 주장과는 달리 한인들이 정부의 도움 없이 다른 인종에 비해 성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문화적 이유보다는 계급적 요인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들은 이민 당시 다양한 경제, 사회적 자본을 보유하고 있는데, 대학교 이상의 학위를 소지한 경우가 많았고, 작은 소매점을 열 수 있는 정도의 자본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인들은 그들이 보유한 자본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더 나아가 2세 교육에도 투자 할 수 있었다. 미국 정부는 자신들이 경제적으로 보조해야할 필요가 없는, 그리고 자본금 유입을 통해 미국 경제에 활력을 줄 수 있는 이들을 선별적으로 택한 것이었다. 반면, 한인과 비교될 때 ‘덜’ 성공한 것으로 여겨지는 흑인의 경우, 이민을 오게 된 역사적 계기가 노예였다. 이들은 오랜 차별적 정책 아래 하층계급을 형성하였으며 차별 정책이 법적으로 폐지된 이후에도 누적된 효과로 인해 정부의 도움 없이 계급 이동이 거의 불가능 하였다. 따라서 미국 사회 내 성공은 평등한 사회라는 가정 하에 집단 별 문화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닌, 계급적 요인과 정책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문화의 강조는 이러한 사실을 은폐해 왔다.  


이런 맥락에서 한인의 문화를 고양시키는 듯 보이는 문화프레임은 한인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문화와 성공의 강조로 인해 여전히 ‘백인’에 비해 열악한 위치에 놓여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못 한다[각주:4] (Kim, 2015). 한인들은 다른 인종 그리고 다른 아시아인들에 비해서도 압도적으로 높은 자영업 비율을 보이는데, 이는 그들의 인적자본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 내에서 이를 적절히 이용할 수 없는, 자국민/외국인 차별 대우에서 근거하는 것이다 (Lee, 2007). 뿐만 아니라, 미국 주요 은행은 이민자들에게 제한적인 대출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그들은 상대적으로 값싼 지역을 찾아 가게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 마저도 일주일에 일곱 번, 하루 열여섯 시간 이상을 일해야만 삶의 유지가 가능하였다 (ibid). LA폭동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LA 폭동 당시 한인들이 흑인 하층 지역에 많이 진출해 있었던 이유는 자영업을 생계 수단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며 은행 자본에 대한 접근성이 낮아 값싼 지역을 찾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흑인들이 모여 살던 지역은 '게토(ghetto)'[각주:5]를 형성하여 다른 지역에 비해 임대료가 훨씬 싼 편이었는데, 이는 과거 차별적 주거정책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지역에서 자라나 학교를 다니는 자녀들은 그들끼리 하위문화를 형성하고 응집함으로써 이 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빈의 악순환을 겪게 된다[각주:6] (Goyotte & Scheller, 2014).  이 뿐 아니라, 당시(1990년대) 연방 정부는 공공 영역에 있어 빈곤에 대한 투자를 중단하여, 흑인들의 거주 지역에 있던 병원, 은행 등의 주요 기관들이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위와 같은 지역엔 소매점을 포함한 다양한 시설들이 부족하였고, 한인들은 제한된 소규모 자본을 가지고 이들 지역에 소매점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Park, 1996). 한인 마트 여사장이 흑인 소녀를 총으로 쏘아 죽인 비극적 사건은 위와 같은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92년 4월 29일 끔찍한 악몽과도 같은 LA 폭동이 발생하게 된다. LA 폭동으로 인해 52명이 사망하고 2300명이 다쳤으며 4억 달러 이상의 금전적 손해가 발생하였다 (Lee, 2007). 


LA폭동이 발생한 삼일이 넘도록 경찰은 오지 않았다. 당시 경찰은 한인 타운 주변의 백인 부촌 거주지역에 상주하고 있었다. 한인들은 공권력의 보호 없이 그들 스스로를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국 사회는 위 사건을 즉각적으로 ‘인종갈등’으로 규정하고 사건의 배경을 흑인과 한국인 간의 ‘문화 충돌’로 부각, 설명하였다. 한국인들이 흑인을 착취한다는 인터뷰, 한인마트 여사장이 흑인소녀에 총을 쏘는 CCTV 장면, 한인과 흑인들이 손님을 대하는 매너가 달라 생긴 오해가 폭동이라는 끔찍한 결말까지 이어졌다는 기자의 인터뷰까지. 오로지 ‘인종’과 ‘문화’갈등에만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것이다. 이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흑인과 한인의 서로 간 반목과 갈등을 고조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위 문제를 근본적으로 초래한 소수집단에 대한 차별, 빈곤과 같은 문제는 수면 아래 남아있게 되었다.  


LA폭동이 발생한지도 벌써 20년이 흘렀다. 그렇다면 시간이 흐름 지금, 미국 사회는 진정한 의미의 다문화 사회를 이루었을까? 미국 최대의 스포츠 축제인 슈퍼볼에서 올해 비욘세 공연은 단연 화제였다. 그녀는 흑인 인권 인권단체를 떠올리게 하는 의상을 입고 등장하였으며 새로 공개한 뮤직 비디오에서는 뉴올리언스(흑인이 대다수인 지역)의 홍수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을 구성하여 당시 정부의 미흡한 대응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또한 춤동작(우리를 쏘지 말라(Stop shooting us))을 통해 흑인에 대한 경찰의 강경대응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여전히 미국 내 인종차별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과거와는 다른 방식의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엔 눈에 띄는 차별이었다면 현재는 눈에 띄지 않는 차별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문화이다. 문화는 중립성을 획득하고 구조의 문제를 은폐한다. 모든 동양계 미국인에게 ‘니하오’를 말하는 것, ‘불교’를 말하는 것은, 인종이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타인에게 끊임없이 증명해야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즉, 미국인은 백인(미국인=백인)이라는 정상성의 기준 아래 유색인종은 그에 벗어난 ‘다른’ 것으로 치부되고 언제나 해석의 위치에 놓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니하오, 불교라는 문화의 중립적 언어를 통해, 나쁜 의도를 가지고 않다는 이유로, 너에 다가가는 노력이라는 이유로, 가장 근본적 문제인 정상성을 만들어내는 ‘시선’에 대한 의문을 차단한다.   


비욘세와 백댄서팀은 1960~70년대 게릴라 활동을 한 흑인 인권단체 흑표당을 상징하는 검정 반바지와 배꼽티를 입고 무대에 섰다.


한 year book에서 성이 같은 친구들끼리 “우리는 친척이 아니다(We're not related)"라는 문구를 실었다.


결론


미국 사례를 통해 문화프레임의 위험성을 지적하였지만 이는 비단 미국에만 한정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문화 사회로 이행하고 있는 여러 국가에서 이미 문화 프레임은 위험한 함정이 되었다. 유럽 국가에서 발생하는 테러의 초점은 늘 ‘이슬람’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 볼 때, 문제의 원인은 이슬람보다는 (LA 폭동과 비슷한 맥락으로) 사회에 제대로 편입되지 못하고 사각지대에 방치된 이민자, 즉 계층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각주:7] (이재훈 ,2015). 이 글의 의도는 문화적 특수성을 부정하려는 것도, 그로 인해 갈등이 존재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문화프레임이 어떻게 문화라는 외피로 계급, 정치, 역사의 문제를 감싸고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하는지를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갈등’, ‘인종갈등’의 이름을 한 수많은 문제들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접근되어야하는지 고민하고자 하였다. 다문화 사회는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세계적 흐름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인류에게 새로운 시험이자 도전이기도 하다. 답이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와 태도로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여야 할까?    





글 편집위원 H


필자 주) 미국 사회 내 인종문제에 관심 있으신 분은 아래 영상을 확인해보세요.

Buzz feed: If Asians Said The Stuff White People Say

Color of Fear - Just Be American 









  1. 이를 문화프레임이라는 단어로 지칭하고자 한다. [본문으로]
  2. J. Lee에 따르면 한인의 성공은 유대인의 성공과 자주 비교 대상이 된다고 하였다. 자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점과 2대, 3대로 넘어갈수록 화이트 컬러 직업으로의 진출이 많다는 점에서 유사점을 갖는다고 본 것이다. [본문으로]
  3. 그녀는 또한 한국 이민자들은 아메리칸 드림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상징이 되었다고 하였다(Korean immigrants have become symbols that American dream is alive). [본문으로]
  4. 단적인 임금 지표를 보면, (남성기준) 백인들이 1달러를 벌 때 흑인은 75센트, 아시아인은 89센트를 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5. 소수민족집단이 모여 형성한 거주 구역인 enclave 중 좀 더 낙후하여 슬럼가를 형성한 지역을 지칭 [본문으로]
  6. 80%의 히스패닉 학생들이 격리된(segregated) 학교에, 74%의 흑인 학생들이 격리된 학교에 다니고 있다. [본문으로]
  7. 2014년 1월 발생한 <샤를리 에브도> 관련 테러는 ‘이슬람’의 문제로 규정지어졌다. 그러나 테러범은 종교만 이슬람인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프랑스인이었다. 동시에 사회에서 방치된 하층 이민계급이었다. 따라서 바우디와 이택광은 위 테러를 ‘종교’ 문제가 아닌 ‘계층’문제로 바라보아야 함을 지적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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