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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와서 내가 가장 특출하게 된 것이 있다면 ‘자아분열’과 ‘자의식 과잉’이다. 스스로를 사랑하면서도 혐오하고 특별하다고 믿고 싶어 하면서도 하찮은 사람으로 몰아가고, 이런 사실을 다 알면서도 내면의 평화를 찾지 못하고 계속해서 분열을 만들어왔다. 그저 나 자신을 사랑하기만 하고 싶고 특별하게만 여기고 싶지만, 정신승리를 하기에 나의 성정은 원채 불온했다. 자기애와 자기혐오의 물고 물리는 싸움은 나를 자의식 과잉으로 몰아넣었다. 그런데 이건 비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 반, 딸딸이 치는 마음 반으로 내 이야기를 나누는 바이다.
SCENE 1
중학교 때 친구와 극장에 가는 것은 나에게 특별한 보상과도 같았다. 나의 일상은 대개 학원을 가는 날과 학원 숙제를 하는 날로 나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중간고사 혹은 기말고사가 끝난 마지막 날, 한적한 낮거리를 지나쳐 텅텅 빈 극장에 앉는 것은 퍽 설레는 일이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그날 본 영화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었다. 포스터만 보면 과장되고 부담스러운 영화처럼 보여서 분명 내 취향이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고르게 되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실 영화를 다시 한 번 본 얼마 전까지는 영화의 내용도 잘 기억하지 못했다. 이제는 거의 10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는 시간이 지나도 생생하다. 영화가 끝나갈 때쯤 나는 울음을 꾸역꾸역 속으로 누르고 있었다. 이미 내 얼굴은 콧물과 눈물범벅이었지만 한껏 참고 있는 숨마저 뱉어버리면 왈칵하고 안에 있는 모든 게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영화는 끝날 듯 하면서도 끝나지 않았고,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은 더더욱 혐오스러워져 갔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도 한계에 다다랐다. 마침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나는 드디어 마음 놓고 울 수 있었다. 참았던 만큼 안에 있던 감정들이 물밀 듯 밀려올라왔다. 눈물 콧물이 주체할 수 없이 범람하여 내 목은 끅끅 거렸다. 친구는 내 옆에서 다소 당황했고, 퇴장하는 관객들에겐 구경거리가 되었다.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을까?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슬프다’라는 말 외에 어떻게 표현할 줄 몰랐다. 그저 슬픈 이야기라서 내가 울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었던 나는 그 강렬함만을 오래오래 간직했다.
SCENE 2
오로지 대학을 가기 위해서만 산 6년의 학창시절과 1년의 재수생활을 끝내자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 강렬한 감정은 여전히 내 안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중학생 때와 마찬가지로 무어라 설명할 수 없었다. 분명 내 마음속에는 그 존재감이 강하게 자리하는데, 그 정체를 언어로 풀어낼 능력이 없었다. 그동안 난 그 감정을 돌볼 시간도 여유도 없었기에 그저 가끔씩 불쑥 튀어나오는 그것을 무시하고 지나쳐왔다. 하지만 대학에 와서는 남는 게 시간과 여유였고, 내가 그 감정을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어도 내 의식 전반은 그것으로 꽉 차게 되었다. 그중 처음에 발견한 감정은 자기 혐오였다.
대학에 온 나는 내가 ‘특별’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나는 고작 공부만하다 대학에 와서 특기할만한 정체성이라곤 찾을 수 없는데 주변엔 뛰어난 사람이 너무 많았다. 미모가 빼어나거나, 악기를 잘 다루거나, 박학다식하고 똑똑한 사람들, 그리고 벌써 ‘청춘’이라고 불릴만한 대담한 일을 벌여가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기엔 초라했고, 그런 내 모습을 나조차 사랑할 수 없었다. 스스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충격에 빠져있는 동안 그 격차는 점점 더 커졌다. 그럴수록 나에 대한 미움도 커졌다.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언젠가 특별해질 수 있을 거라 믿었고 그렇게 되는 것에 강하게 집착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그 ‘특별한 외피’에만 지독하게 눈을 번득였을 뿐 정말 내 내면이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다.
‘연애’는 그 공허함을 가장 쉽게 채울 수 있는 것이었다. 항상 조연인 내가 유일하게 한 서사의 주인공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2년 넘게 마치 알콜 중독자처럼 연애에만 그토록 몰입했던 것 같다. 물론 그런 연애가 정상적일리 없다. 내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사귀고 다시 또 그들의 우월한 면에 박탈감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애인들을 마치 나 자신을 대하듯 대했다. 좋아하면서 혐오하고 잘해주면서도 학대했다. 그런데 문득 깨달았다. 이 관계가 어디서 많이 봐온 관계라는 것을. 바로 엄마와 나의 관계였다. 나는 항상 ‘어디 가도 자랑스러운 딸이자 엄마 인생에 빛’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엄마가 지긋지긋하게 살고 있는 이유이자 못되고 음흉한 애’였다. 공부를 잘할 때는 전자였고 공부를 게을리하고 이를 숨기면 후자가 되었다. 엄마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못하듯, 나도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했고, 그 누구의 사랑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학 초년기, 이렇게 나는 마츠코의 서사가 내 삶에서 되풀이 되는 것을 목도하고 있었다. 마츠코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제대로 된 자아를 형성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하며 자란다. 그러한 점은 마츠코의 일생을 진흙탕으로 처넣었다. 그녀는 제대로 사랑받는 법을, 사랑하는 법을 몰랐기에 계속해서 결핍과 불행의 역사를 일생에 걸쳐 반복했다. 마츠코가 피학적이기만 하다면 나는 가학적인 동시에 피학적이었지만, 큰 축에서 마츠코의 서사는 나의 것이기도 했다.
SCENE 3
나는 마츠코처럼 살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러니까, 사랑받기 위해서 결국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웠다. 나는 나 자신을 고치고 말겠노라 다짐하고 필사적인 몸부림을 시작했다. ‘행복’이나 ‘사랑’에 관한 심리학책을 찾아 읽고 수업을 들으며 나 자신을 분석해나갔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마치 점을 보는 듯했다. 난 심리학 이론들이 말하는 ‘불행한 사람’의 전형이었다. 그리고 ‘미성숙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었다. 불행한 성장배경에 대한 분석도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물론 책들은 원인 분석뿐 아니라 항상 해결책도 제시해주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 마음의 핸들을 꺾기엔 너무나도 이상적이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나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야 했다. 불행에 대한 나의 강한 집착이 지속되는 한, 이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처음의 다짐은 온데간데없이 나는 체념하고 있었다.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 “난 이렇게 자랐는걸.” 하고 말이다. 어쩔 땐 자신을 이론 안에 가둬놓고 합리화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계속해서 ‘특별하지’않고 ‘사랑스럽지 않은’ 스스로를 혐오했다.
가끔은 어떻게 해서라도 나의 특별함을 만들어내기 위해 나의 불행이 마치 나의 특별함인 양 생각했다. 아마 정말 그렇게 믿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나의 자기혐오와 불행은 처음으로 ‘언어화’할 수 있게 된 내 안의 강렬한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혐오스런 마츠코를 보면서 쏟아냈던 눈물이 무엇인지 드디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를 들여다보고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그 언어를, 나는 계속해서 반복했다. 어떨 때는 심지어 ‘난 내가 너무 끔찍해!’를 외치며 즐거워하기도 한 것 같다. 마치 처음 말을 배운 아이가 계속해서 같은 단어만 말하듯 말이다. 하지만 그게 순수한 즐거움일리 없다. 나는 나의 그런 모습이 역겨웠다.
나는 점점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고 해낼 수 없었다. 이제는 특별하지 않더라도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둘 다 불가능 했다. 우울감, 열등감, 무기력함은 나를 더욱더 끔찍하게 만들었다.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싫고 또 하루를 의미 없이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숨이 막혔다. 하지만 나는 소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사람이었다. 스스로 알고 있었다. 건강하고, 4년제 명문대에 다니고 있고, 어리고,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였다. 문제는 그런 것들이 나에게 소용없게 느껴질 때가 더욱 많았다는 점이다. 때문에 나는 내가 스스로 불행을 제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모든 것은 내가 정신분열자이기 때문이라 믿었다. 나는 나를 절대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없었다. 영화 내용은 비록 희미하지만,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며 나는 자신을 점점 마츠코와 동일시했다. 하지만 혐오스런 마츠코는 정말로 혐오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는데, 나는 그걸 몰랐다.
SCENE 4
불행에 대한 나의 오랜 집착은 영화 하나에 의해서 깨졌다. 단 하나의 영화가 그토록 임팩트 있을 수 있는지 나 또한 몰랐다. 아마 그만큼 영화에 담긴 고민들이 내 고민들과 겹쳐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이 영화는 공감의 차원을 넘어서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 영화는 처음으로 나에게 특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특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것은 내가 얻게 된 새로운 언어였다.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비프는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변변찮은 직업 하나 구하지 못해서 매번 구직하며 돌아다니는 신세다. 그럼에도 그의 아버지는 '넌 꼭 대단하게 될 녀석이야'라고 자부심과 기대감을 잔뜩 주려 한다. 하지만 그는 사실상 하나도 대단하지 않은 아들에게 매번 분개하고 만다. 비프는 그저 촌에 가서 소들이나 돌보며 살고 싶지만, 아버지의 기대감 그리고 더 넓게는 사회의 시선이 그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한 강박으로 그는 도벽 습관마저 갖게 된다. 미식축구 선수를 지망하던 때에는 공을 훔치고, 취업을 준비할 때는 양복을 훔치게 된다. 탐나는 그 '이미지'들에 홀린 듯 자기도 모르게 말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비프는 동업을 부탁하려던 사장의 만년필을 훔치게 된다. 그리고 건물에서 막 뛰어나오던 중 그는 문뜩 멈춰 선다. 자신이 도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에게 외친다. "아빠 제발 저 좀 놓아주세요. 난 특별한 놈이 아니에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난 나일 뿐이고, 그게 다라고요!" 1
이토록 특별함을 거부하는 외침은 처음 들었다. 부모님도, 학교도, 사회도 모두들 ‘특별함’을 찬양하고 강조하는 가운데서 말이다. 그동안 나는 내가 특별하지 않다는 생각에 그토록 불행했었는데, 그래서 나를 혐오하고 미워했는데, 그래서 나 자신을 비롯한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했는데. 비프의 울부짖음은 나에게 에피파니로 현현하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내가 불행한 이유가 내가 끔찍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을, 진심으로 하게 되었다. 비록 내가 정말 끔찍한 존재일지라도 그건 내 탓만이 아니었다. 나에게 그 ‘특별함’을 강조해온 이 사회, 그래서 전혀 ‘특별’하지 않은 나의 현실을 미워할 수밖에 없게 한 사회 탓이 크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그러자 그동안 스스로 학대해온 나 자신이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영화를 보면서 비프에게 동정심과 애정이 생기듯, 처음으로 나의 하찮은 모습에 동정심이 생기고 사랑을 느꼈다. 여신 같지 않은 얼굴도, 두꺼운 허벅지도, 휜 종아리도, 작은 가슴도. 먹고살 만한 능력 하나 없는 것도. 취직에 써먹을 스펙 하나 없는 것도. 요즘엔 스토리 시대라는데 대단한 스토리가 없는 것도. 좀 못났지만, 그냥 그런대로 괜찮다. 하찮은 모습 그대로 괜찮다. 바로 그 하찮은 부분을 사랑해야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도대체 그 ‘특별함’이란 것의 실체는 무엇이기에 나는 나를 그토록 미워했단 말인가. 나는 이제 스스로 보호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내 신경증을 분석하며 스스로 정신병자 취급하는 일은 그동안 너무 많이 했다. 이제는 사회의 신경증을 바라보는 일이 내 행복을 위해 중요함을 깨닫고 있다. 내 탓이 아니라 남 탓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과연 그 특별함이란 기준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는지 알아야 할 노릇이었다. 자본주의적 환상이 조장하는 허위의식과 가부장주의가 호명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나를 불행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상에 미치지 못하는 나의 현실을 지각하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그 이상을 좇았다. ‘노오력’하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 마치 7년의 삶을 입시에만 바쳤듯이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행복은 거기에 없음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너도나도 그랬고 또 그러고 있다.
이게 진짜 내 내면이 원하는 바인지는 충분히 고민해보지 못했다. 정신없이 떠밀려왔고 또 어느 정도는 그들의 환상이 나의 환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행복하지 못했던 기나긴 시절은 그것이 내 욕망이 아니었음을 무엇보다 더 직접적으로 말해준다. 사람들은 무척이나 다양하여 획일적 규범에 따라 함부로 재단될 수 없다. 그러나 사회는 그렇게 함부로 사람들을 일자 줄에 세우고 있고 정말 ‘특별한’ 몇몇을 빼놓고 우리 대부분은 소외되어간다. 삶 구석구석이 이러한 이데올로기로 이루어져 있다면 어떻게 사람이 안 미치겠는가. 그런데 나에게, 우리에게 정신건강까지 바란다면 그게 바로 부조리극이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정상’/‘정신적 건강’과 ‘신경증’이 기능적인 사회의 입장에서 어떻게 정의 내려지는지 기술했다. 어떤 사회에서 이행해야 할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면 그는 정상적이며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신경증’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역할들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즉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가치 없는 인간이다. 하지만 프롬은 이어서 기술한다. 잘 적응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정상적인 인간은 ‘인간적인 가치’에 대해 종종 신경증적인 인간보다 더 건강하지 않을 수 있다고. 당신이 나와 같다면, 우리는 그저 그 누구보다 일상에 폭행당하는 내면의 비명을 잘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표시가 아닐까. 그러니 이제 그만 스스로 자학하는 일은 멈추자. 우리 탓이 아니다. 우리가 못나서가 아니다. 2
SCENE 5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의 한 장면. Fuck the beauty contest!
난 더 이상 사회가 바라는 어떠한 ‘역할’로 살아가고 싶지 않다. 학생으로서, 딸로서, 여자로서, 청춘으로서, 나중엔 직장인으로서 아내로서 부모로서.. 그게 무엇이든 관습적으로 규정된 그 이름들에 나를 끼워 맞추고 싶지 않다. 나는 역할극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내 삶을 살고 있다. 그 이름들이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면 그 이름의 정의를 바꾸어 나가는 삶을 살고 싶다. 물론 초인이 아니고서야 완전히 모든 관습에서 자유로울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하고 싶다. 나를 불행하게 하는 관습에 휘말려 나 자신을 혐오하진 않을 것이다. 혐오스런 마츠코는 사실 착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고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자아를 형성하지 못한 탓에 너무나도 바보 같았다. 바보같이 착했다. 그래서 이용당하고 착취당하고 학대당하면서 살기만 했다. 정확히 그 모습이 10년 전 극장에서 나를 뒤흔들어 놓았다. 당시 나는 무엇이 잘못된 건지 말할 수 없었으나 내 감수성만은 제대로 느끼고 있었다. 그 당시에도 이미 나는 획일화된 틀 안에 나 자신을 우겨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마츠코처럼 살지 않고 싶다. 그리고 다른 이가 나로 인해 마츠코처럼 살게 하지도 않고 싶다. 조금씩 혐오스러운 우리는 사실 모두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 특별할 것 없고 하찮은 사람들이 행복해야 그 사회는 정말 행복한 사회가 아닐까.
글 편집위원 한가지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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