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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

[서사] 총녀 분투기

연희관공일오비 2017. 2. 12. 16:32

지난여름은 내내 지독하게 더웠다. 지도로 보니 남인도는 적도와 닿을 듯한 곳에 있었다. 열 몇 살의 아이들과 아이를 벌써 셋 정도는 둔 내 또래의 여성에게 성교육을 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성교육이라고는 받아본 적조차 얼마 안 되는데도 주먹구구식으로 맡겨진 그 역할이 나는 퍽 마음에 들었다. 기세등등한 더위는 숨을 막히게 했지만 아이들의 머루 같은 눈망울과 통역을 채 할 새가 없게 열변을 토하다 울먹이는 여성들이 오히려 숨통을 터 주었기 때문이었다. 월요일마다의 성교육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에 타면, 마음에 알 수 없는 불길이 일었다. 앞으로 이 불길에 끌려 다니며 살게 될 것만 같았다.


학교도 학번도 전공도, 2인 1실의 방 배정을 위해 두 번 뽑았던 제비도, 심지어 이름까지 같은 친구와 교육을 끝낸 어느 날 나란히 침대에 누워 이야기했다. 우리가 사는 곳에는 취업 서류를 쓰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할 여학생이 어찌나 많아서, 웬만한 자리에 채용되는 것만도 어찌나 어려운지. 하지만 이렇게 조금만 더 적도로 내려와 보니 대학 교육을 마친 여성이 어찌나 희귀하며, 그 여성이 받은 대학 교육은 또 얼마나 적재적소에 쓰이게 되는지. 이미 스스로를 여성주의자라고 정체화한 것은 오랜 일이나, 울먹이는 여성들을 위해 적재적소에 쓰이겠다고 결심한 직접적인 계기는 바로 그 방에서였다. 가만히 누워, 천장에 달린 프로펠러 같은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만 들릴 때쯤이면 제법 시원하다고도 느낄 만했던 민경이와 나의 방.

 

사진 인스타그램

 


 

중학생 때, 영화도 영어도 좋아할 무렵 영화를 번역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금세 잊혀졌지만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다는 일념으로 외고에 갔고 불문학과까지 오다 보니 희망하는 진로에 통번역 일이 꼭 끼어 있게 됐다. 그러나 막상 통번역대학원을 진로로 삼고 시험 대비 학원을 다녀 보니 마음이 갑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디든 시험을 위한 시험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학원과 학교를 병행하던 무렵, 하릴없이 커리어연세의 채용공고를 뒤적이다 여성정책연구원의 공고에 적힌 여성학/젠더 전공자라는 요건이 눈에 들어왔다. 아, 석사 공부를 이걸로 하면 정말 잘 할 수 있을 텐데. 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문득 그러면 그걸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물음이 생겼다. 득달같이 우리나라의 젠더 석사과정을 찾아보니 우리 학교에 문화학 협동과정이 있었다. 영문명은 문화와 젠더 연구 과정이었다. 전부터 좋아하던 선생님께서 주임교수 중 한 분으로 계셨다. 이리로 가야겠다, 라고 마음을 먹고 얼마 있다 또 커리어연세에서 ‘마을 공동체 만들기’라는 두 달 간의 인도 봉사활동을 발견했고, 그리로 갔던 것이다.

그러나 돌아오니 곧 원서철이었고 인도에서 막 돌아온 터라 열정은 가득했으나 깜냥이 없었다. 사전 면담에서 만난 교수님께선 가벼운 몇 가지 질문에 이은 조언을 하셨다. 속도보다는 농도가 중요한 것이라는 완곡한 말에도 나는 멀리 튕겨져 나갔다. 제아무리 열정적으로 여름을 났고 공부하고 싶은 곳을 발견했다지만 기반이 부실한 것을 영 감출 수 없었다. 속도보다는 농도라는 교수님의 말을 되새기며, 주임교수님 두 분께 손편지를 쓰는 것으로 오랜 방황을 마무리했다.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 반드시 다시 오겠다, 당장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으나 분명히 다시 오고 싶다. 등등. 절절하고 정중하게 편지를 드리고 나니 마음이 후련했다. 유예기간을 3년으로 잡았다. 그 동안은 통번역대학원에서 공부하자고 다시 마음을 먹었다. 어릴 때부터 하고 싶던 일에 다가가는 동시에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준비도 병행하는 기간이라고 다짐하니 수험생 신세도 참을 만하게 여겨졌다. 도로 원점인 것 같지만 0도와 360도는 다른 법이다. 결국 그렇게 마음이 굳어졌다. 11월이었다.


폭풍을 한 차례 겪고 나니 캠퍼스에서는 학생회 선거운동이 한창이었다. 내가 지향하는 바를 기조로 담고 있는 총여학생회가 오랜만에 출범했기에 반가웠다. 단선이던 총여학생회는 이내 당선되었다. 마음에 들었다. 종강을 했다.


크리스마스 날, 인권법동아리에서 만났고 사회학 수업을 함께 들었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민경씨 메리크리스마스!!!는 인사고.. 총여학생회 집행부 안할래여ㅋㅋ??” 인사가 신속하게 마무리된 단도직입적인 제안이었다. 통번역대학원은 10월에 있는 시험이 중요해서 시험 공부 하느라 도움이 못 될 텐데, 했더니 괜찮단다. 마침 사전면담 때 “학교 다니면서 총여라던가, 뭐 해 본 적 있니?”라던 교수님의 질문이 불현듯 떠올랐다. 나를 튕겨냈던 질문. 그러게 총여를 해 볼걸. 그러면 튕겨나가지 않았을까? 시험 공부에 몸을 바쳐도 모자란 와중에 덥석 하겠다고 했다. 마음에 든다고만 생각한 총여에 몸담은 과정은 생각보다 싱겁다.


싱거울 정도로 쉽게 들어온 총여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니 처음부터 동질감을 느꼈던 것은 아니다. 벌써 꽤 까마득한 2010년, 대학에 들어온 첫 해에 백양로를 지나다 열매나 곡식 같은 이름으로 스스로를 부르는 사람들이 플랑을 걸었다. 이상해. 왜 굳이 저래야 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당시의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여성주의를 알아가면서, 낯설고 괴이하게만 보였던 것들의 의도와 그것이 낯설 수밖에 없는 특성을 알게 되었다. 남자친구 있니?라는 물음을 애인 있니?로 묻는 것처럼, 익숙한 것이 익숙하게 담고 있는 폭력과 차별과 강요를 다시 보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그래도 저렇게 시도해야 바뀌지 않을까? 당시 나와 백양로를 걷던 남자친구가 한 대답이었다. 그래도 이상해, 라는 나의 말로 당시의 대화는 끊어졌으나 그의 대답은 오래 뒤에야 유효해졌다.


남자친구 대신 애인이라는 말을, 오빠나 언니 대신 이름이나 활동명으로 대신하는 호칭을, 그 의도를 이해하고 지지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나는 그들과 선을 그었다. 스스로를 여성주의자라고 여기기는 했으나 입장을 가지는 데에 확신이 드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이질감이 드는 사람으로 분류되는 건 서글플 것 같았던 탓에. 학교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고 되도록 잘 섞여 들고 싶은 욕망이 컸다. 나는 점점 바이링구얼이 되어갔다. 낯설던 언어는 점점 귀에 익었으나 그것을 전면으로 구사하지는 않았다. 여성주의가 점점 좋아지고 전면에서 활동을 하는 이들과 나 사이의 선긋기는 옅어져 갔다. 그러다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알기 전부터 페미니스트이던 때를 기억해 냈다. 아홉 살 설날, 세 살 남동생이 장손이란 이유로 나보다 세뱃돈을 더 받았음에 참지 못하고 화를 냈을 때였다. 모든 며느리가 첫째 자식의 이름으로 불릴 때(며느리는 며느리의 이름으로 불려야 하지만 차치하고) 우리 엄마만 관호 엄마로 불리던, 내 존재가 부정되는 듯한 상황에 부당해할 때도 그랬다. 기억해 냈음에도 여성영화제를 찾고 책을 읽고 조발표에서 젠더와 양성평등을 주제로 삼고 가끔 친구와의 대화에서 열변을 토하는 데 그쳤다. 어쩐지 입장에 당당하지 못한 내가 때로 부끄러웠다. 


2012년, ‘성과 문화’ 수업에서 오랜만에 경선으로 출마한 총여의 두 선본을 조발표 주제로 삼았다. 총여학생회의 발생배경과 기조 등을 살피다 보니 총여가 점점 친숙해졌다. 페미니즘 수업을 통해 입장에도 확신이 생겼다. 조원으로부터 다음해 총여 출마 생각이 없느냐는 말을 들었으나 이것이야말로 꿈에도 생각이 없었다. 학생회 대표라니 번거롭고, 여전히 전면으로 입장을 드러냈을 때 이상하게 여겨질 것 같은 두려움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년 뒤엔, 남인도에서 했던 결심과, 소극적으로 머무르는 데에 갖던 오랜 불만족과, 대표가 아닌 집행부원이라는 적절한 역할과, 무엇보다도 불현듯 떠오른 교수님의 질문이 숨어들던 나를 거의 꺼내었으니 나는 대답만 하면 되었다.


본격적인 활동에는 2월부터 참여했다. 한창 오티와 새터의 성 인지교육으로 빽빽한 일정을 소화하던 차였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이런 일을 해본 적 없는 난 계속 머쓱했다. 회의에는 안건지를 만들고 회의록을 쓰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떠올리지도 못하는 무지함이 부끄러울 때마다 총여실을 쓸고 닦았다. 쓸고 닦느라 여기저기 손이 닿으니 괜히 이 곳에 정이 갔다. 달이 바뀌어도 여전히 일에 손을 못 대고 청소만 늘던 와중에 여성의 날 문화제를 치렀다. 공사판인 백양로에서 부스를 지키느라 먼지를 한 움큼씩 먹으며 전우애가 생겼고 금세 친해졌다. 스스로를 과일이나 곡식 같은 이름으로 칭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게 중요했다. 나는 어느새 일머리를 약간 익힌 정책국원이자 생활복지국장이 되었다.


총여에는 사람이 많지 않다. 내가 국장이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일손이 많다면 아무래도 더 잘 할 수 있을 텐데, 가까스로 해내는 사업이 대부분이다. 체력이 모자라 나도 벌써 두어 번 나가떨어졌다. 끊임없이 주소록을 뒤지며 함께 할 사람을 모색하지만 쉽지 않다. 아쉽게도 총여학생회란 학생의 대표기구라는 제도권의 성격과 여성주의라는 비제도적인 성격의 접점에 위치하는 애매한 특성 때문이리라. 총여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총여의 존재 자체에 적개심을 가지거나 순수하게 왜 총여가 있어야 하느냐는 궁금증을 갖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주변에 없으니 잊고 있었는데, 총여를 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면 나를 혐오할 사람이 있단 사실을 문득 깨닫곤 다시금 두려워졌다. 혐오하는 사람은 실제로 본 적이 없으나 총여를 가차없이 지적하는 사람은 주변에 많다. 어제만 해도 가장 친한 동생에게 총여가 그런 사람만 대변하니까 문제인 거야 언니,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사람이 뭔데, 하니 성소수자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일반 여학우가 아닌 성소수자 ‘같은’ 사람만을 대변하니까 총여에 거부감을 느낀다고 했다. 성소수자 ‘같은’ 사람은 뭘까. 아마 성을 두 개씩 쓰고 열매의 이름으로 자신을 칭하던 이들을 마주할 때 내가 오래 전에 느꼈던 거부감을 느낀다는 것일까. ‘총여를 낯설게 여기는 이들이 많다’는 말과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누구보다 우리가 그것을 고민하지 않겠는가. 그 누가 낯설게 여겨짐을 원하겠는가. 


그러나 여성주의란 것이 남성중심주의적 시각에 낯섦을 제시하는 시도이기에 태생적으로 낯설 수밖에 없다. 익숙한 기존의 관습에 균열을 내고자 하니 필연적으로 낯선 와중에 학내의 대표기구인 까닭에 그것을 낯설지 않게 내놓아야 하는 모순적인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총여마다 기조가 달라서 여성주의의 낯섦을 날것으로 드러내거나 아예 다른 노선을 추구하던 선본이 있었다. 본 선본은 여성주의를 전면에 내놓지 않으면서 여성주의 선본의 기조를 이어가기를 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소수자와 이질적인 것에 대한 날선 혐오를 알고 있다. 우리 역시 거부되지 않고 싶다.


총여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커져 가는 가운데 그것을 적극적으로 설명해 내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 남학우와 여학우 중 왜 여학우를 위한 기구만 존재하는가, 적개심은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하지만 총여는 학내 성폭력이 공공연하던 1980년대의 반성폭력 운동의 결과로 생겨난 기구이다. 학생의 대표기구로서 성폭력 피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기 위함이었다. 남성중심적이던 대학 문화에 대한 대항이기도 했다. 이 설립배경과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의 총여는 성폭력의 피해를 입은 남성을 위해서도 같은 대처를 하고 있다. 그리고 잔존하는 남성중심적 문화에도 문제제기를 이어간다. 남성중심주의는 여학우에게 피해를 줄뿐 아니라 남학우 개인에게도 때로 부당함을 안긴다. 남성이 성폭력 피해를 언급하면 그저 남성성을 의심당하고 조롱당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그러하다. 총여는 남학우 개인의 위상을 여학우 개인의 위상보다 떨어뜨리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중심적인 시각과 문화에 균열을 내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별에 국한되지 않는 소수자를 대변하는 기구이기도 하다. 타고 태어난 요소로 차별을 받는 상황에 문제제기를 하는 학생대표기구가 있다는 것은 학교 주관의 성폭력위원회와는 또 다른 힘과 영향력을 갖는다. 총여의 배경과 존재 이유에 대해 커져가는 궁금증을 적극적으로 해소하고 싶다. 미움 받지 않고 싶다.


알게 모르게 거부되는 공간이지만, 그런 총여실은 모순되게도 안온하다. 문 밖의 공간과는 묘하게 분리가 된다. 내가 오롯이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느낌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총여하는 사람을 ‘그런 사람’으로 칭하는 것은 일견 타당하기도 하다. 총여 특유의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나이, 외모, 성 정체성, 출신, 지위에 얽매이지 않고 서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공동체를 지향하는 바가 같기에 자연스레 생긴 관습이다. 화장을 하지 않고 아무 옷이나 입고 나와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고, 서로의 나이를 잘 몰라 이름으로 부른다. 나이는 몰라도 최근의 고민이나 관심은 잘 알고 있다. 페미니스트, 혹은 총여 하는 사람들을 호전적이고 신경질적이리라고 예상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총여실은 생각보다 상냥하고 유쾌하며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곳이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의 이 안온한 기분만으로도 사서 고생할 만하다, 고 말할 수 있다.

 

 

연세대 총여실의 모습

 

 


 

머쓱할 때마다 청소를 하던 게 습관이 되어 총여의 집요정을 자처하고 있는 나는 토요일인 어제도 총여실에 와서 혼자 두 시간 반 동안 청소를 했다. 집을 이렇게 치운다면 엄마가 얼마나 좋아할까…하는 죄책감이 잠깐. 내 구역인 테이블만 치울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구조도 바꾸고 물걸레질까지 했다. 총여가 요즘 나의 가장 큰 활력소라 이렇게 총여실을 쓸고 닦는 데 열심인가 보다. 이제야 봄날씨 같으니 봄맞이 대청소를 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봄맞이를 끝낸 총여실은 산뜻하다. 교내에서는 찾기 힘든 향긋한 드립커피가 있다는 것도 큰 매력이다. 아직 커피를 내리는 법은 익히질 못했다. 연희관 B015처럼 신발 벗고 편히 앉아 책을 볼 수 있는 도서관인 페미너리도 있다! 마루가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자치도서관을 열심히 들락거렸던 터라 총여실 내에서도 페미너리를 제일 좋아한다. 총여를 하며 기쁜 순간이 이미 많았지만, 산뜻해진 총여실의 문을 열고 놀러 오고 싶어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역시 그것이 가장 기쁜 순간이 아닐까.


총여에 갖는 거부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총여에 익숙해진 탓에 쉬이 기억해내지 못했지만 나에게도 역시 그런 순간이 있었다. 심지어 돌이켜 보니 내가 보았던 플랑은 2010년의 총여가 쓴 것이었다. 낯선 존재에게 거부감과 반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낯선 것을 싫어해 버리는 일은 손쉽기까지 하다. 낯선 것을 완전히 인정하기까지 학부 생활을 전부 보냈으니 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성마른 혐오가 상처를 남기는 반면, 낯선 것을 이해하려 공을 들이면 새로운 지평으로 들어설 수 있다. 나의 경우 그 낯선 것이 바로 나임을 발견하는 꽤 큰 소득을 얻었다. 경계심이란 덜컥 들어서고 또 쉬이 허물어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에서 발견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이지만, 생각보다 다를 게 없는 사람들이다.


총여를 한다고 하니 앞으로 총여가 계속될지 내게 묻는 이들이 있다. 모르겠다. 계속된다면 좋겠는데 계속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도 적잖이 하는 와중이다. 그래서 나는 산뜻해진 총여실을 보며 집행부원 아닌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선다면 좋겠다, 하는 기대로 더 열심히 쓸고 닦았더랬다. 나 역시 문을 열고 나가 우리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고 지지를 얻고자 임기 말까지 노력하겠지만, 누군가 우리를 찾아와 준다면 정말로 기쁠 것만 같다. 어서 드립커피 내리는 법을 익히려 한다. 상대를 몰라서 가지는 반감은 쉬이, 나 혹은 우리가 궁금해 찾아주는 이에게 대접하는 커피 한 잔에도 걷힐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글 민경(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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