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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영화 <1987>이 개봉했다. 영화가 거둔 상업적 성공과는 별개로, 영화가 6월 민주항쟁을 재현한 방식에 대해 여러 비판이 제기되었다. 우선 독재에 맞서 투쟁하는 캐릭터 대부분이 남성이다. 주인공이라 말할 수 있는 ‘연희’ 역시 운동에는 관심 없는 새내기로 나오는 탓에, 영화를 보며 당시에 거리에서 함께 싸웠던 여성들을 떠올리기는 힘들다. 또 기자와 검찰, 중앙정보부 등 몇몇 조직 내부의 시선으로 6월 항쟁을 다루는 탓에 노동자와 빈민 등 많은 역사의 주역들이 스크린에 등장하지 못했다. 거기에 2018년을 살아가는 ‘학생’으로서 나도 한 가지를 더 보태고 싶다.
80년대를 그린 영화에는 독재에 맞서 싸우는 학생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드는 의문이 있다. 그 당시 학생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치열하게 투쟁했을까? 우리가 사회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라면 정의감, 혹은 지성인으로서의 책임감 같은 것이리라. 하지만 정말 그것뿐이었을까. 1987년이 그저 아름다운 과거로서가 아니라 어떤 현재적인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것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영화 <1987>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는 이한열 열사를 포함한 많은 대학생들의 투쟁을 보여주지만, 그렇게 많은 ‘한열이’들을 만들어낸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1987년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줄 장소를 찾아갔다. 지금도 신촌을 지키고 있는 한식당인 논지당이다. 논지당의 문선경 사장님은 1978년부터 지금까지 신촌에서 장사를 하며 학생들을 만나온 분이다. 학생들로 인해 삶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사장님은, 당시 학생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실까? 그리고 지금 학생들에 대한 사장님의 생각은 어떨까?
“내가 오늘 마음먹고 왔어요.”라며 입을 여신 사장님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메모를 하시며 차분히 입을 여셨다. 신촌에 처음 오던 당시의 기억은 어느새 사장님이 만났던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투쟁했던 학생들을 회상하는 대목에서는 눈물을 훔치기도 하셨다. 그렇게 학생들과 함께 존재해 온 논지당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종이는 금세 빼곡히 채워졌다.
학교 앞 굴다리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가면 논지당의 간판이 보인다.
Q. 안녕하세요. 저희는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교지 ‘연희관 015B’입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인터뷰 요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A. 뭘요, 내가 더 감사하죠. 그리고 내가 인터뷰만 한 사람이에요. 옛날에 신문에서 인터뷰 하러 많이들 오고 그랬어요. 궁금한 건 뭐든 물어보세요. 내가 알고 있는 건 다 말씀드릴게요.
Q. 인터뷰 상대를 잘 고른 거 같아 안심이네요. 우선 논지당에 대해 잘 모르는 학생들을 위해 논지당이 어떤 식당인지부터 말씀해 주세요.
A. 우리 집은 항상 연세대 학생들하고 함께 해왔고요. 그리고 학생들을 생각하는 부모같은 따뜻한 마음이 있어요. 내가 학생들한테 고마운 게 많거든요. 그래서 우리 집을 찾는 손님들에게 유기농, 그리고 좋은 재료로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기 위해 노력하죠.
Q. 신촌에는 언제, 어떻게 오게 되셨어요?
A. 내가 연세대학교 앞에 온 게 1978년도니까, 벌써 40년 전이네요. 여기 어떻게 오게 됐냐면, 그전에는 명동, 광화문 같은 곳에서 경양식집을 했어요. 근데 그런 곳의 손님들이 나이 든 어른들이다 보니까 식당에 와서 술도 드시고, 내가 가정을 가진 주부로서 힘들더라고요. 그러다 연세대학교 앞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사하면 술도 안 팔아도 되고 좋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자리 잡은 게 지금 일심약국 맞은편이었어요. 거기 음식점을 열고 학생들한테 밥을 해줬죠.
1978년부터 신촌에서 장사를 해 오신 문선경 사장님.
1987년, 연세대의 학생들
Q. 그러면 6월 민주항쟁이 있었던 1987년에도 여기 계셨겠네요. 그 당시에 신촌이나 대학가 분위기는 어땠나요?
A. 1979년에 10.26이 났으니까 내가 신촌에 왔을 때가 박정희 정권 말년이었죠. 신촌에 와서 보니까 데모가 엄청 심했어요. 우리 식당이 학교 앞에 있으니까 학생들이 많이 왔는데, 얼마 있으니까 서로 친해졌어요. 저는 학생들이 동생 같고, 학생들은 날더러 이모, 고모라 부르고요. 학생들하고 친해지니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그때는 대화를 하면 주제가 보통 시국 문제였어요. 그리고 특히 우리 집에 오는 학생들 중에 데모를 열심히 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Q. 그렇게 데모하는 학생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A. 처음엔 학생들이 걱정되니까 말렸어요. 그땐 독재 시대니까 데모하다 걸린 사람은 감옥에 가고, 취직이 안 됐어요. 그래서 데모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다고 안 하나요. 나중에는 왜 데모를 해야 하는지 제가 먼저 물어봤어요. 학생들 말을 들어보니까 제가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때만 해도 정부가 언론을 검열해서 신문을 봐도 진실을 알 수가 없었어요. 근데 학생들은 외신을 찾아서 읽고 진실을 안 거죠.
그런데 동네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학생들이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한다고 욕했어요. 그게 안타까워서 제가 학생들한테 말해줬어요. 그냥 시위만 하지 말고, 사람들한테 데모를 하는 이유를 납득시킬 수 있도록 전단지를 만들어서 나눠주라고요. 그래서 학생들이 종이에 연필로 쓴 걸 복사해서 길에다 뿌리니까, 그걸 보고 사람들이 이해를 하더라구요.
Q. 그 당시의 학생들에 대해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더 있다면 들려주세요.
A. 에피소드가 너무 많죠. 시위가 있는 날에는 거기 참여한 학생들에게 무료 식사를 제공했어요. 시위 날이면 수업도 없고, 식당들도 다 문을 닫았거든요. 그래서 밥 못 먹은 학생들은 와서 먹고 가라고 했죠. 그런데 학생들이 밥을 편히 먹지를 못해요. 시위하다 잡혀간 동료들이 잘못 되지는 않을까, 앞으로 시국이 어떻게 될까 이런 걱정을 하면 밥이 안 넘어가는 거예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 나라의 희망은 학생들한테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때 학생들의 용기는 대단했어요. 지금같이 인터넷이나 핸드폰도 없을 때인데, 경찰이 연대에서 집결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든 사발통문을 돌려서 한양대로 가고, 경찰하고 숨바꼭질하면서 시위를 했으니까요. 그 생각을 하면 나는 지금도 눈물이 나요.
Q. 80년대 내내 학생들을 바로 옆에서 보셨잖아요. 이번에 영화 <1987>이 나왔잖아요. 혹시 보셨나요?
A. 제가 영화는 아직 못 봤어요. 보려고는 했는데, 시간이 잘 안 나서.
Q. 바빠서 못 보셨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1987>이 6월 민주항쟁이라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담은 영화잖아요. 영화에 담긴 내용을 사장님께서 직접 경험하신 기억과 비교해 보고 싶었어요. 저희가 특히 궁금했던 부분은 학생들이 왜 그렇게 데모에 참여했냐거든요. 아까 말씀 중에 학생들이 대단한 용기를 냈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A. 학생들의 용기가 대단했죠. 영화에서는 그걸 어떻게 묘사하나요?
Q. 영화에서는 잘 묘사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하나 나왔던 게 광주 5.18, 그 진실을 알게 되서 자기가 이렇게 변했다고 말하거든요.
A. 그건 일부분이죠. 지금도 그렇지만 학생들이 얼마나 똑똑하고 약은데요. 나랑 정말 상관없는 일이었으면 그렇게 나서지 않았을 거예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감옥 가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싸운 거잖아요. 제가 영화를 안 봐서 말하기가 좀 조심스럽지만, 정말 그렇다면 문제네요. 그 기억이 나한테 진짜 와 닿아야 기억에 남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 변화가 없는 거잖아요. 영화가 학생들이 그렇게 투쟁했던 이유를 밀도 있게 표현했다면 훨씬 더 공감대를 끌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Q. 이 영화가 6월 민주항쟁을 다뤘다는 의의를 떠나서, 저희도 그 점이 아쉬웠어요. 사장님이 보시기에는 그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A. 저도 처음에는 학생들이니까 독재에 반대하나 보다, 이렇게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데모를 하지 말라고 해도 듣지를 않길래, 왜 데모를 하냐고 물어봤어요. 이 친구들이 고등학교 때까지는 사회에 대해 잘 몰랐겠죠. 그런데 대학에 오니까 사회의 문제를 알게 된 거에요. 단적으로 군대를 보면 그랬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학생들은 군대 가기 싫잖아요. 예전에는 ‘빽’ 있는 사람은 군대를 빠지거나 편한 곳으로 가는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그러니까 과외, 알바 해서 근근이 학비 버는 보통 학생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거죠. 요즘도 흙수저, 금수저 그런 이야기 하잖아요. 그 당시는 군대 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그런 부조리가 만연했어요.
Q. 말씀 듣고 보니 요즘이랑 비슷한데요?
A. 지금 흙수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금수저가 될 수 없다고 하잖아요. 그때도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오니까 기득권 세력이 많은 거예요. 그래서 그걸 느낀 학생들이 이대로는 안 된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반대로, 아버지가 장관이고 국회의원인데도 데모를 한 학생들도 있었어요. 지금 나는 잘 살지만, 그래도 사회가 이렇게 돌아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던 거죠. 세상을 바로 읽은 거예요. 그때는 그렇게 대학생의 팔, 구십 퍼센트가 데모에 참여했어요. 그런 걸 영화에 담아야 하는데. 학생들이 왜 데모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나. 학생들의 그 투철한 의식이 어디서 왔겠냐고요. 어느날 갑자기 생긴 게 아니거든요.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살아온 삶이 부끄럽더라구요. 학생들은 이렇게 젊은 시절에 나라를 위해 한 몸을 바치려고 하고, 어떠한 고난과 고통에도 맞선 거 아니에요. 그래서 학생들하고 같이 집회에 나가고, 지금도 시민운동을 하고 있어요. 학생들 덕분에 내 삶이 바뀌었죠.
Q. 그 말씀을 들으니까 생각난 건데, 예전에 논지당에 와서 밥을 먹을 때 저한테 “운동권 아줌마”라고 하셨잖아요. 그게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아직까지도 시민운동에 참여하시고, 꾸준히 그런 삶을 사시는 게 멋있어요.
A. 학생들이 다 가르쳐준 거예요. 학생들이 제 스승이에요. 그리고 저는 시대가 불러낸 아줌마예요. 그래도 세상에 눈을 뜨고 참여하고 행동하고 살았다는 것이 제 자부심이예요. 인생을 어떻게 살았냐고 누가 물어보면, 그 한마디는 남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장님이 본 지금의 우리
Q. 그 이후로 30년이 지났잖아요. 학생들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요즘 학생들은 어떻게 보고 계신지 궁금해요.
A. 노태우 정권 들어서면서는 완전히 유화정책을 폈어요. 그래서 시국을 바라보는 눈을 흐리게 하면서 데모를 눌렀는데 그런 정책이 먹혀들어갔어요. 그리고 김영삼 정권, 그 다음에 김대중 정권, 노무현 정권 가면서 완전히 시국 쪽에 대한 관심은 없어졌죠.
요즘은 사회에 대한 관심이 많이 약해진 것 같아요. 예전에는 정부가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비판을 했는데, 이제는 개인의 진로나 취업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휴학을 해야겠다, 1년을 쉬어야 겠다, 그동안에 어학연수를 갔다와야 되겠다, 같은 실질적인 고민들. 그래서 저하고 깊이 대화를 할 수가 없어요.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니까요. 또 그런 문제는 학생들이 저보다 잘 아니까, 제가 뭔가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것도 없구요. 그래서 주로 학생들 얘기를 들어요.
Q. 예전과 다르다는 걸 단적으로 느끼실 때가 언제인가요?
A. 언제냐면 음식 값을 계산할 때, 다 각자 계산해요. 옛날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에요. 이 차이가 어디서 온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보기엔 송도에 가는 것 때문이에요. 송도에서 단체로 합숙하면서 교육받는 거 있죠. 그곳의 문화가 깊숙이 서구화돼있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거기서 일찌감치 습득을 하고 나온 것이 자연스레 그대로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그걸 어떻게 아냐면, 신학기에 올라온 학생한테서 뚜렷이 나타나요. 그리고 이제는 한 해가 다르게 뚜렷하게 차이가 나요.
Q. 학생들을 보시면서 그런 점들이 아쉬우신 거죠?
A. 아쉽죠. 요즘 남북 평화 무드가 조성되잖아요. 지금 대학생들이 있었으면, 평화협정 맺고 핵무기 폐기하자고 단체를 결성해서 성명서도 발표하고 행동에 옮기면 좋지 않았을까. 근데 지금 대학가는 너무 조용하잖아요. 그리고 그 주도권은 완전히 시민한테로 넘어간 거 같아요. 촛불혁명때도 그렇고, 학생들은 부분으로 참가하지, 예전같이 주도적인 역할을 못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젊은 사람들의 생각이 그때보다 뭐라 그럴까, 좀 흐려졌다 그럴까, 시대를 보는 눈이 투철하지 못한 것이, 앞으로의 세상을 이 대학생들이나 지식인들이 어떻게 이끌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돼요.
저는 지금 대통령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긍정적으로 평가를 하고 싶거든요? 그래도 학생들이 비판적인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잘하고 있더라도 왜 못하는 게 없겠어요. 잘 하는 건 잘하는 대로 평가하지만, 못하는 건 못하는거대로 이야기를 해야죠. 자기 의사를 발표할 수 있는 세상이잖아요. 정치라든가 세상을 한 차원 더 높게 만드는 데 젊은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Q. 그렇죠. 학생들이 정치 참여 면에서 예전보다 적극적이지 못하죠.
A.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죠. 취업 같은 경제적 문제가 걸려 있으니까 힘들죠. 그럴 수밖에 없어요. 예전에는 학생들이 과외를 맡았는데, 이제는 학원이 그 역할을 대신하잖아요. 예전에 비해 학생들이 돈을 벌기가 너무나 어려워졌어요. 그런데 그런 문제는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이거든요.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나서는 게 더 빨리 바뀌는 길인데, 그러려고 하지는 않아요. 저는 취업방식을 바꾸라든가, 공평한 제도를 만들라든가 하는 걸 학생들이 나서서 정부에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Q. 그래도 시국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에요. 이번 촛불집회 때 학생들이 많이 참여했거든요. 제 주변에 물어보면 웬만한 친구들은 한 번씩은 다 가봤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문제에는 학생, 청년들도 나서는 것 같아요.
A. 그땐 사회 전체가 함께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주류가 되지는 못하죠. 이번 촛불집회도 학생들이 아니라 기존 운동 세력들이 기획을 한 거잖아요. 저도 여러 번 갔는데, 거기서 30년 전에 학생운동하던 사람들을 다 만났어요. 연락도 안 돌렸는데, 저기 먼 데서도 다들 와요. 그때 경험이 불러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주류고, 학생들은 참여자였죠.
Q. 그런데 꼭 학생들이 주류가 되어야 할까요? 사회 전체가 함께 할 때, 부분으로서 같이 참여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역할을 다한 것 같은데요.
A. 예전에는 학생이 주류였거든요. 80년대에는 소위 넥타이부대라든가 이런 시민 참여는 거의 없고 오로지 학생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주류가 되지는 못하죠.
Q. 그러니까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란 말씀이신 거 같네요. 그런데 지금 학생들이 꼭 소극적인 것만은 아니에요. 요즘 사회적으로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하잖아요. 거기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 여성들이에요.
A. 그건 내가 잘 몰랐어요. 그런데 강남역 살인사건때 포스트잇이 붙었을 때를 생각해 보니까 학생, 청년, 젊은 여성들이 주축이 되었던 것 같네요. 그러고 보면 예전에 2008년 촛불집회때도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여성들이 많았어요. 유모차를 가지고 행진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내 아이에게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일념이었던 거죠. 그렇게 나하고 직접 이해관계가 있는 문제에는 참여도가 높은 것 같아요.
학생들과 함께해 온 곳, 논지당
Q. 제가 처음에 사장님께 인터뷰 요청을 드리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밥을 먹고 계산하는데 밀양에 가신다고 해서였어요.
A. 밀양이 아니고 소성리, 성주. 거기 사드 심어놨잖아요 그것 때문에 거기 갔다왔죠. 운동하는 사람들은 현장에 있어야 해요. 현장을 떠나면 감각이 떨어져요. 학생들 덕분에 시민운동에 눈 뜬 이후로 쉼 없이 계속 참여해 온 일이예요.
환경운동을 하면서 잡지나 신문에 글을 싣고, 환경운동가를 취재해서 책도 내고, 이것저것 많이 했어요. 내가 아까 인터뷰만 한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요즘은 음식점 일이 바빠서 글 쓰는 건 못 해요. 요즘은 너무 시간이 부족해요. 메뉴 개발도 하고, 인문학 책도 읽고, 배우러도 다니고. 음식점을 한다는 게 정말 보통 일이 아니예요.
Q. 그러고 보니 논지당에 대해서도 궁금한 게 있었어요. 논지당은 유기농과 채식 메뉴를 파는 식당이잖아요. 혹시 사장님께서 시민운동을 하시는 것과 관련이 있나요?
A. 그럼요. 원래는 대학약국 옆에 지금 누들박스 자리에서 카페를 했는데, 전두환 정권때 하루아침에 문을 닫았어요. 그때 내가 데모하다가 지명수배된 학생들을 우리 집 사랑방이나 소파에서 재워줬어요. 그런데 어느 날 느낌이 이상해서 카페 문을 닫고 블라인드 틈으로 내다봤는데, 경찰이 우리 집을 감시하고 있는 거예요. 불을 끄니까 영업이 끝난 줄 알고 가더라구요. 하마터면 꼬리를 잡힐 뻔한 거죠. 너무 무서워서 그날로 카페를 바로 처분해 버렸어요.
이제 새로 시작해야 하잖아요. 학생들을 계속 만나야 하니까 신촌을 떠나기는 싫더라구요. 내가 제일 고민했던 게 무엇으로 학생들을 만날까였어요. 그런데 내가 환경운동을 하다 보니까 건강한 음식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할 일은 좋은 음식을 해서 학생들의 건강을 좋게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에 지금의 논지당을 열게 된 거죠.
Q. 그렇군요. 옛날에 운동하던 학생들 중에 지금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논지당에서만큼은 그 정신이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아요.
A. 옛날에 데모꾼들 중에서 좋은 직장 간 사람, 심지어는 안기부에 간 사람도 있어요. 나하고 친했으니까 그 이후에도 많이 찾아왔어요. 그런 사람들은 내 앞에서 학생운동 때 기억을 꺼내는 자체를 미안하게 생각해요. 자기가 그런 직장에 갔으니까. 그리고 “그땐 왜 그렇게 치열하게 그랬는지 몰라요.” 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 안타깝죠. 젊을 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왜 그런 생각들이 없어졌을까.
Q. 논지당은 사장님께 어떤 공간이고, 또 학생들에게는 어떤 공간이 되길 바라시나요?
A. 논지당에는 제가 예전에 연세대 학생들과 함께 했던 기억이 담겨 있어요. 그 기억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예전 학생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좋은 음식을 차리려고 노력해요. 또 지금 여기를 찾아주는 학생들과 나누는 이야기들이 저에게는 기쁨이고, 그런 만큼 정성을 담은 행복한 밥상을 차리고 싶어요.
나는 정말 부모처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해요. 배고프지 않을까, 우리 집 음식 맛에 만족할까. 그게 늘 걱정돼서 시선이 밥상에서 떠나지를 않아요. 무슨 반찬을 좋아하나, 어떤 걸 더 갖다줘야 되나 지켜보죠. 그것도 웬만한 학생들은 불편해서 더 달라고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내가 더 챙겨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항상 밥상을 지켜보죠. 내가 이익이 많이 안 남더라도 건강하고 좋은 음식을 해주고 싶고, 앞으로도 학생들과 계속 만났으면 좋겠네요.
한 시간 가량의 인터뷰가 끝나고, 영화를 보며 풀리지 않았던 의문에 대해 조금은 해답을 얻은 것 같았다. 논지당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것은 또 다른 수확이다.
80년대와 지금을 비교하며, 학생운동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인터뷰를 통해서 그 당시 학생들이 우리와 마냥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학생들은 독재 권력의 부당함을 자기의 삶 속에서 느꼈기에 거리로 나갔다. 종류는 달라졌을지언정, 우리의 일상에 차별과 폭력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 역시 학내외의 성폭력 사건, 청소노동자 해고 등에 문제를 제기하고 싸워나가고 있다. 그 시절의 ‘민주화 투사’들은 자기의 삶을 바꾸는 것이 사회의 변화로 이어진다는 것을 먼저 깨달은 학생들이었다는 것. 1987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그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글 편집위원 단단, 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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