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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지금보다는 덜 더웠을 이맘때 여름, 세간을 뒤흔든 ‘메갈리아 티셔츠’ 사건이 있었다. 한 성우가 메갈리아4에서 제작한 ‘Girls Do Not Need a Prince’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SNS에 사진을 올렸다가 ‘메갈’ 낙인이 찍히고, 만 하루도 되지 않아 출연했던 게임 <클로저스>에서 작업물을 삭제당했다. 많은 이들이 이 사건을 메갈 낙인과 부당해고라는 측면에서 주목했기 때문에, 그 당시 이 사건이 게임업계에서 벌어졌다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 사건이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고 게임업계에 휘몰아칠 어마어마한 페미니즘 백래시의 발단이 되리라곤. 단언컨대 게임업계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심각한 페미니스트 탄압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다.
지난 2년간 게임업계에서 페미니즘 사상 검증은 최악의 형태로 이루어져 왔다. 티셔츠 사건 때는 적어도 ‘일베나 다름없는 사회악 메갈리아’라는 명분이 존재했다. 그래서 가련하긴 해도 ‘진정한’, ‘올바른’ 페미니즘과 그렇지 않은 페미니즘을 구분하려는 노력이 있긴 했었다. 그러나 현재는 그러한 노력조차 없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페미=메갈’이라는 부동의 공식이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불법촬영이나 미투 운동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만 해도 ‘메갈’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메갈로 분류되면 계약이 해지되고, 작업물이 삭제되고, 사과문을 써야 한다. 페미니즘을 떠나서 명백한 사상 검증과 노동권 침해에 해당하는 일들이 2018년 현재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기준에 따르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초특급 메갈이고, 내가 어디에서 일하든 나는 그 직장에서 잘려야 한다.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에 일자리를 잃는다면 이것이 백래시가 아니고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듯 게임업계에서 계속해서 믿기 힘든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게임업계의 이런 세세한 사정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서브컬처의 특성상 한정된 향유층 안에서만 이슈가 공유되기 때문이다. 올해 3월 청와대 국민청원에 게임업계 페미니즘 사상 검증에 대해 조사할 것을 촉구하는 글이 올라왔지만 3만 명을 채우지 못한 채 청원이 종료되었다. 다행히 최근 오마이뉴스와 한겨레에서 각각 시리즈로 연재된 기획 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이들이 페미니즘 백래시로서 게임업계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앞으로의 추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시대를 역행하는 페미니즘 사상 탄압
게임업계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몇 가지 사례들을 소개한다.
<사례 1> : 걸그룹 레드벨벳의 멤버 아이린은 팬미팅에서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밝힌 뒤 악플과 비난에 휩싸였다. <82년생 김지영>이 ‘페미니즘 서적’이기 때문이다. 일러스트레이터 A씨는 개인 SNS 계정에서 이 사건을 다룬 기사를 리트윗했다가 게임 <소녀전선>에 예정되어 있던 작업물의 업데이트가 무기한 연기되었다. 이에 일러스트레이터 B씨가 동료 A씨가 부당한 일을 겪었다는 내용을 리트윗하자, B씨가 작업했던 게임에 B씨가 메갈이니 자르라는 항의 글이 쏟아졌다.
<사례 2> : 게임 <트리 오브 세이비어(이하 TOC)> 원화가 C씨는 개인 SNS 계정에서 ‘여성 민우회’, ‘페미디아’ 등의 계정을 팔로우하고,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내용을 리트윗했다가 메갈로 몰렸다. 메갈로 몰린 C씨는 자신은 메갈을 옹호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올렸다. 그날 밤 TOC 제작사인 IMC게임즈의 김학규 대표가 C씨를 직접 면담한 내용을 담은 공지를 올렸다. 해당 글에는 ‘여성민우회, 페미디아 같은 계정은 왜 팔로우했는지’, ‘한남이란 단어가 들어간 트윗을 리트윗한 이유는 무엇인지’, ‘과격한 메갈 내용이 들어간 글에 마음에 들어요를 찍은 이유는 무엇인지’ 등의 질문과 이에 대한 C씨의 답변이 담겨 있었다. 이에 민우회와 민주노총은 페미니즘 사상 검증을 중단하라는 내용의 규탄 성명을 발표하였다.
<사례 3> : 일러스트레이터 D씨는 ‘메갈’로 몰려 퇴출당한 동료 원화가의 해명 글에 ‘좋아요’를 눌렀다는 이유로 메갈이 되었다. 게임 <벽람항로>의 로그인 화면이 D씨의 그림으로 바뀌자 해당 게임 공식 카페에 항의 글들이 올라왔다. 그리고 1시간 만에 D씨의 그림은 내려졌다. D씨는 사 측으로부터 '난 메갈리아와 관련이 없고, 페미니즘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SNS에 공식적으로 입장표명을 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밝혔다. D씨가 이를 거절하자 D씨의 작업물은 곧바로 삭제되었다.
예시 사례들은 일부에 불과하다. 지난 2년 동안 40개가 넘는 게임들에서 메갈 논란이 들끓었고 수많은 성우, 일러스트레이터, 개발자, 원화가, 가수 등이 피해자가 되었다.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이 메갈의 기준은 모호하고 자의적이다. 직접적인 언급이 아닌 리트윗, 좋아요 등의 간접적인 방식으로도 메갈이 된다. 페미니즘과 관련된 기사글에 ‘좋아요’를 눌러도 메갈, 그들이 메갈로 판단한 사람을 팔로잉하거나 옹호해도 메갈,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으면 메갈이다. 한마디로 그들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거스르면 ‘반사회적인 단체 소속’이 된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이것이 사회적 낙인에 그치지 않고, 일자리를 잃는 실질적인 피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메갈 감별사를 자처하며 메갈에게 심판을 내리려는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페미니즘 하지 마라. 원래 억압받고 살아왔던 것처럼 입 닥치고 그대로 살아라.’ 여성 인권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입을 닫게 하고 탄압하다니, 이보다 완벽한 백래시는 없다.
게임업계의 페미니즘 사상검증은 페미니스트 탄압이라는 점에서도 문제적이지만, 헌법이 보장하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점에서도 문제적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9조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지며, 헌법 제21조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이 같은 권리는 타인의 기본권이나 다른 헌법적 질서와 저촉되는 경우에만 제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여성단체를 팔로우하고, 여성 인권에 관심을 두는 것이 헌법에 저촉될 만큼의 위법한 행동인가? 오히려 한 회사의 대표가 일반 직원을 불러 개인 SNS 계정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검열하는 것이 해당 직원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위법한 행동일 것이다. 2018년에 회사 대표가 자사 직원을 사상 검증하고, 개인 면담을 진행하여 그 녹취록을 자랑스럽게 공지로 올리다니, 이렇게나 시대를 역행할 수는 없는 법이다.
출처 : @havenshark
메갈 낙인을 일삼는 ‘그들’의 심리
얼핏 보면 페미니즘 사상 검증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은 게임 회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배후에서 게임회사들이 사상 검증을 일삼도록 유도하는 세력은 따로 있다. 바로 루리웹, 디씨인사이드, 인벤 등의 남초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활동하는 게이머들이다. 여기에 스스로가 아주 객관적이며 치우침이 없다고 굳게 믿은 채 사관노릇을 하는 나무위키 작성자들도 한 몫 더하고 있다. ‘메갈 검증’은 이들이 주축이 되어 몇 가지 단계를 거쳐 이루어진다.
1) ‘메갈’로 의심이 가는 대상자들의 SNS를 하나하나 사찰한다. 직접 작성한 내용은 물론이고 무엇을 리트윗했는지, 무엇에 ‘좋아요’를 눌렀는지, 누구를 팔로잉하고 있는지 샅샅이 뒤진다. 아무리 옛날 게시글이라도 상관없다.
2) 조사 대상자가 조금이라도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거나 동조하는 것처럼 보이면 커뮤니티에 글을 올린다. ‘ㅇㅇ게임에 메갈 묻은 듯’. 이러한 게시글은 사이트를 막론하고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켜 hot 게시글로 올라가고 댓글도 많이 달린다.
3) 메갈로 판명난 대상자가 참여한 게임의 공식 홈페이지나 카페에 찾아가 ‘너희 게임에 메갈 묻었으니 자르라’며 항의 글을 도배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너희 게임을 하지 않을 것이며 너희의 게임은 도태될 것이라는 협박도 빼놓지 않는다.
4) 게임 회사가 이에 응답하여 ‘메갈’의 작업물을 삭제하거나 대상자에게 사과문을 작성하게 한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메갈 몰이에 혈안이 되는 데에는 두 가지 동력이 있다. 첫 번째는 사냥의 즐거움이다. 일단 목표물이 정해지면 그 목표물 사냥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냥에 성공하면 성취감을 얻는다. 악성 댓글을 단 이용자 70∼80명을 고소했던 웹툰 작가 박지은씨는 “‘메갈 리스트’를 왜 썼냐고 물어보면 99%는 ‘잠깐 재미로, 관심을 좀 얻으려고 그랬다’고 한다.”고 말했다. 즉, 누군가에게는 메갈 낙인찍기가 아주 즐거운 게임과 같은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수단인 것이다. 자신이 메갈로 찍은 상대가 그로 인해 정말로 게임에서 퇴출당한다면 그보다 통쾌한 일은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분노다. 메갈 몰이를 하는 게시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반응은 이런 것이다. ‘툭하면 한남거리면서 남자 욕하는 주제에 그 남자들 지갑에서 돈 빼는 건 좋아하지.’ ‘너네가 그렇게 욕하는 한남충 돈 받아먹으면서 먹고 살려고 하는 것은 기만이다.’ 이들은 성차별적인 사회와 제도에 대해 비판하는 것과 개인에 대한 비난을 구분하지 못한다. 이 둘을 동일시하는 것은 사실상 가부장제에 대해 성찰하지 말고 그대로 순응하라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이들은 ‘한남’이라는 말을 세상에서 가장 모욕적인 말로 받아들이고, ‘한남’이라는 말만 보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표한다. ‘한남’은 그저 가부장제에 찌들어 자신의 젠더권력을 성찰하지 못하는 남성을 가리키는 말일 뿐인데 말이다. ‘한남’이라는 말에 분노하는 것은 사실 그가 ‘한남’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정확한 반증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메갈 낙인찍기를 ‘정당한 소비자의 권리’라고 부르며 ‘기업은 영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집단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소비자가 원하는대로 회사는 따라가는 것이다.’라는 논리를 내세운다. 그러나 혐오는 자본의 논리로 옹호될 수 없다. 만약 게임 작업에 참여한 이가 유색인종이나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작업물을 배제하라고 소비자들이 요구하면 회사는 무조건 그에 따라야하는가? 기업이 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한다해도 기업 역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져야 할 사회적 책임과 지켜야 할 윤리적 의무가 있다. 기업이 효율성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면, 최저임금을 지키고 4대보험을 들어주며 주휴수당과 퇴직금을 챙겨주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혹자는 메갈과 일베는 동급이며 메갈을 게임업계에서 배제하는 것은 일베를 배제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과연 혐오의 원본인 일베와 그 미러링으로 인해 파생된 메갈이 동등하게 취급될 수 있는지를 떠나서, 지금껏 어떤 기업이나 단체에 소속된 일간베스트 유저가 논란이 된 이유는 소속 단체의 작업물에 임의로 일베와 관련된 내용을 집어넣었기 때문이었다. 설사 일베 유저라 할지라도 이처럼 회사의 작업물에 자신의 사상을 멋대로 반영하여 회사에 직접 피해를 준 경우가 아니라, 그저 일베를 이용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를 당한다면 이 또한 사상 검증에 해당한다. 그러나 메갈 논란은? 작업물에 은밀하게 ‘한남충 재기해’같은 말을 적어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임업계에서 페미니즘 백래시가 가장 거세게 일어난 이유
이제는 ‘페미니즘’이나 ‘여성혐오’ 같은 말들은 공중파 방송에서도 나오고 일상적으로 쓰일 정도로 널리 알려진 말들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페미니즘의 부상에 불편함을 느끼고 이를 억제하려는 이들의 움직임은 게임업계에만 한정되어있는 것은 아니다. 모 여자 아아돌도, 라디오 방송작가도 피해를 당한 사례가 있다. 그렇지만 생계를 위협하는 수준으로, 이렇게 많은 피해자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것은 게임업계가 유일하다. 왜 게임업계에서만 유독 페미니스트 사상 검증이 만연한 것일까?
첫 번째로 메갈 검증은 주로 SNS를 샅샅이 뒤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게임업계 종사자 중에 공개적으로 SNS를 운영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는 SNS가 일종의 포트폴리오로 기능하고 SNS를 통해서 외주를 받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SNS 계정 운영이 사실상 필수적이다. 그래서 대부분 본인의 SNS에서 어떤 게임의 작업을 맡았는지 밝히고 있기 때문에 누가 메갈인지, 그리고 메갈이 어떤 게임에 참여했는지 알아내기가 용이하다.
두 번째로 게임업계에는 프리랜서 노동자들이 많은 편인데, 이들은 노동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어 사상 검증의 피해자가 되기 쉬웠기 때문이다. 피해자 중 대다수는 일러스트레이터나 성우들이었고 이들은 보통 프리랜서로서 회사와 일회성 계약을 맺어 외주 작업을 한다. 그래서 작업물에 대한 대가만 제대로 지불했다면 완성된 작업물을 사 측에서 일방적으로 삭제하거나 사용하지 않아도 노동법 위반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번 사측에서 ‘메갈 논란’을 이유로 작업물을 파기하면 업계의 다른 회사들도 해당 작가와 작업하기를 꺼리기 때문에, 이는 사실상 해고이며, 더 나아가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여성혐오주의자들이 승리의 경험을 맛봤고, 그 경험이 누적되고 있기 때문이다. 2016년 티셔츠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불똥은 웹툰계에도 떨어졌었다. 피해자 성우를 지지한다고 밝힌 이들 중에 웹툰 작가가 다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들의 지지 선언에 분노한 이들은 ‘메갈 웹툰 작가 리스트’를 만들어 해당 작가들의 개인 SNS와 작품 댓글 창에 찾아가 무차별적인 욕설과 비방을 남기거나 별점 테러를 가했다. 급기야는 ‘예스컷 운동’을 진행하기까지 이르렀다. 이들은 게임회사에 했던 것처럼 웹툰 회사들에도 ‘메갈을 자르라’며 열심히 항의했지만 정말로 작가를 자른(작품을 연재 중단했다) 곳은 ‘탑툰’ 딱 한 곳뿐이었다. 메갈 논란이 있던 작가들이 소속되어있던 회사는 네이버, 레진코믹스 등 고르게 있었지만, 게임회사들처럼 메갈 논란에 부리나케 대응하여 작가를 사실상 해고해버린 것은 탑툰이 유일무이했다.
그러나 게임회사들은 어떠했는가. 게임업계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가장 처음으로 메갈 논란을 마주했던 기업 ‘넥슨’은 게임을 해보지 않은 사람도 알만한 대기업이다. 그런데 그런 대기업이 함께 작업했던 성우를 보호해주지는 못할망정, 너무나도 발 빠르게 작업물을 삭제함으로써 사실상 해당 성우를 내쳐버렸다. 이러한 넥슨의 대응은 다른 회사들에도, 메갈 몰이를 주도하는 게이머들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게임사들은 외적으로는 메갈 논란이 터졌을 때 신속히 작업물 삭제로 대처하게 되었고, 내적으로는 사내직원의 SNS를 검열하거나 SNS 이용에 주의를 주는 등 사상검증을 일삼기 시작했다. 게이머들은 ‘메갈을 자르라’는 응답에 화답한 게임사를 보며 메갈 낙인이 유효하다는 것을 체득하고, 더더욱 신이 나서 메갈 몰이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이들은 또 다른 게임에서 ‘메갈의 징후’가 발견되면 ‘메갈 논란을 무시한 다른 게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고 잘 판단하라’며 협박을 일삼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게임업계에서 유독 페미니즘 백래시가 거세게 일었던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메갈 논란에 발 빠르게 부당해고로 대응한 게임사들의 게임은 남성 유저들을 주요 타깃으로 하는 남성향 게임들이었다. 이런 게임들은 여성 캐릭터만 과도하게 성적 대상화 하고, 성폭력에 대한 성찰 없이 오히려 성폭력을 셀링 포인트로 삼는 경우가 많다. 메갈 논란의 시발점에 있었던 ‘클로저스’를 비롯하여 메갈 논란에 칼같이 대응한 ‘데스티니 차일드’, ‘소녀전선’, ‘언리쉬드’ 등은 전부 이런 남성향 게임들이다. 이런 게임들은 유저 대부분이 남성이고, 메갈 퇴치에 매우 적극적이며, 메갈 몰이에 대한 이견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메갈 논란이 터지고 그들을 쫓아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될 때, 그것은 잘못됐다고 목소리를 내고 싸우거나 불매할 만한 이들은 애초에 이런 남성향 게임을 잘 하지 않는다.
좌) <클로저스> : 13살인데 성인 여성의 몸을 한 캐릭터가 노출 의상을 입고 ‘당신만의 도구가 되겠어요’ ‘복종할게요’라는 대사를 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우) <언리쉬드> : 어린이날 이벤트로 어린 여자아이들을 성적 대상화 하거나, 포르노 속 아동 강간범을 ‘어린이를 어른으로 만들어줄 전문가를 초빙해보았습니다’라며 등장시켰다.
좌) <소녀전선> : 총기 모에화(총기를 여성캐릭터로 의인화)를 테마로 한 게임이다, ‘중상’을 입으면 옷이 찢어지면서 노출도가 높아지는 연출이 있다.
우) <데스티니 차일드> : 코피노를 성적대상화한 일러스트를 ‘그림이 훌륭하다’며 공모전 대상작으로 수상했다. 본게임 자체도 19세로 여성 캐릭터 성적 대상화가 노골적이다.
게임업계에 내일이 존재하기 위해서
게임업계 페미니즘 사상검증은 현재진행형이다. 주변의 게임업계 종사자들에게서 요즘 게임 회사 면접에서 SNS, 특히 트위터를 하는지를 묻는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또 언제 어떤 게임에서 누군가가 ‘메갈’로 몰려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 이러한 게임업계가 바뀌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인 혐오주의자들이 페미니즘 탄압을 멈추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생각은 쉽사리 바뀌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할 가능성이 0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백래시는 앞으로도 더욱 세차게 몰아칠 것이고 여성들의 목소리를 짓밟으려는 움직임은 더욱더 거세질 것이다. 물론 아주 드물게 희망이 보이기도 한다. 게임 TOC의 사상검증에 대해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넣어 ‘재발 방지 권고’를 받아낸 것은 제삼자였던 20대 남성 김 아무개씨였다. 평소 게임을 즐겼던 보통의 게임 유저 1이었던 김씨는 ‘또래 집단의 여성혐오 문화를 보면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진정을 넣었다고 밝혔다. 이처럼 성찰할 수 있는 남성연대가 늘어난다면 매우 희망적이겠지만 이것은 낙관론적인 전망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외에 무엇이 가능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법적 제도가 마련되는 것이다. 최선은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서 사상을 이유로 페미니스트들이 탄압받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법적 보호망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제도를 통해 혐오주의자들에게 그네들이 하는 그것이 바로 혐오라는 것을 일깨워 줄 필요가 있다. TOC의 사상검증에 대해 ‘재발 방지 권고’ 처분이 내려진 것은 현재의 근로기준법에는 사상의 자유가 침해당했을 때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의 게임업계에서처럼 페미니즘을 이유로 부당하게 노동권을 침해당했을 때 법적 대응이 가능하도록 근로기준법이 개정되어야 한다. 특히 전속 계약을 맺지 않는다는 이유로 노동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프리랜서들도 그 대상에 포함할 수 있는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게임 회사가 최소한의 상식적인 대응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 1인 개발자가 제작한 인디 게임 <마녀의 샘> 시리즈가 그 좋은 예시이다. 참여 일러스트레이터가 메갈 논란에 휩싸이자 개발자는 ‘직원의 행동이 불법이 아닌 이상 회사 밖 개인의 행동과 사생활에 대해 책임을 물을 권한은 없으며, 만약 이를 무시하고 직원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계약을 해지할 경우 이는 근로계약 위반이며 엄연한 부당해고에 해당합니다.’라고 견해를 밝혔다.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대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내용의 입장 표명을 한 게임사가 전무했기 때문에, 입장 발표 후 <마녀의 샘> 시리즈는 매출 순위가 급상승했고 리뷰란에는 ‘상식적인 입장 발표를 해줘서 고맙다’는 글들이 줄을 이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무조건 메갈이기 때문에 <마녀의 샘> 역시 메갈 게임 리스트에 올랐다. ‘사상검증을 하지 않겠다’는 말조차 메갈 옹호로 오독되는 상황에서 <마녀의 샘>과 같은 대응이 부담스러울 수는 있겠으나, 유저들의 불합리한 요구에 말려들지 않고 게임사가 강단 있게 대처하는 것도 분명 필요하다.
필자도 이때 구매했는데 마샘 재밌어요. 다들 마샘합시다!!
또 한 가지는 부당한 처분에 함께 목소리를 내고 맞서 싸울 연대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이미 이러한 움직임은 시작되었다. 지난 6월, 여성프리랜서일러스트레이터연대(WFIU)가 출범했다. 그간 지속하여온 게임업계 사상 검증에 맞서 뭉친 연대는, 게임업계 여성혐오 타파와 부당계약, 계약금 미지급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현안에 대하여 공동 대응할 계획이다. 또한 서브컬처 업계에서 페미니즘 발언으로 커리어 불이익, 사이버불링 등 반페미니즘 공격을 받은 작가들이 모여 ‘팀 내일’을 꾸리고, 이들과 연대하는 작가들이 모여 전시 기록 프로젝트 <내일을 위한 일러스트레이션>을 진행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텀블벅에서 애초 목표 모금액의 10배인 약 9400만 원을 달성하며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내일을 위한 일러스트레이션>에서 전시되었던 한 작품 아래에는 이러한 글귀가 적혀있었다.
‘나는 페미니즘과 전혀 관계없는(오히려 성 상품화를 조장하는데 어느 정도 일조한) 그림을 그려왔지만 페미니스트 티셔츠를 입은 성우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메갈 작가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내 주위와 내 안의 여성혐오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올바른 길을 걸어오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었다.’
차별금지법은 하루아침에 제정되지 않을 것이고, <마녀의 샘>과 같이 상식적인 대처를 내놓을 회사가 얼마나 될지도 회의적이며, 메갈 사냥을 일삼는 유저들이 집단적인 자아 성찰을 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처럼, 우리는 순순히 입막음당하지 않을 것이고 계속해서 목소리를 낼 것이다. 우리가 더 크게 외치는 만큼 백래시의 파도도 거세지겠지만, 또 누군가는 그 파도에 맞서 한 발짝 앞으로 더 나아갈 것이다.
글 편집위원 오늘 (onimacneub49@gmail.com)
*이 글은 한국여성민우회의 연속특강 <미디어씨, 여성혐오 없이는 뭘 못해요? 시즌2> 중 2018년 7월 10일에 진행되었던 3강 위근우씨의 웹툰편 강의를 참고하고, 그에 영향을 받았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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