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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돌멩이는 팽이버섯을 좋아한다. 내 친구 이파리도 팽이버섯을 좋아한다. 이 두 문장은 돌멩이와 이파리라는 두 친구만이 다를 뿐 팽이버섯을 좋아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의미의 문장이다. 그런데 과연 정말 두 문장은 항상 같은 의미일까. 그것이 모두 같다고 말하는 건 어떤 의미와 효과를 가지는 것일까. 능이와 싸운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기분이 너무 안 좋다. 모르겠다. 머리가 아프다.’
- 양송이의 일기 中 발췌
옛날 옛적에 버섯 한 송이가 살았어요. 아쉽지만 앞서 돌멩이와 이파리가 좋아한다고 했던 팽이버섯은 아니에요^^. 어느 깊은 숲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이 아니라 깡총 깡총 뛰어서 어디를 가느냐~도... 아니군요. 죄송해요. 여하튼 그 정도로 깊고 나무가 울창하게 드리운 숲속 버섯 마을에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김박양송이가 살았어요. 네 그래요. 앞선 일기의 주인이기도 한 양송이가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랍니다. 오늘은 우리가 직접 양송이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천천히 그리고 보람차게 양송이의 하루를 함께해보려고 해요. 그렇다면 이제 양송이를 만나 볼까요? 모두 출발~
구름이 잔뜩 낀 흐린 아침이네요. 김박양송이가 학교에 가고 있군요. 김박양송이는 학교에 가는 것과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하고 맛있는 걸 먹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걸 세상에서 가장 좋아했어요. 우와! 저길 봐요. 양송이와 친구들이 해맑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네요.
“양송이야. 너 오늘 버섯권 축제하는 거 안 까먹었지?” 능이가 말했어요. 능이는 양송이가 가장 애정하는 친구 중 한 명이에요.
“아 그거? 알지. 오늘은 무슨 강연도 한대.”
“무슨 강연이 뭐냐. 주제도 모르고 강연 들으러 가기나 하고 어휴.” 양송이가 강연 주제를 생각해내느라 고개를 갸우뚱하자 능이가 핀잔을 주는군요. 참 화목한 친구들이에요.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학교에 온 양송이는 지루한 수업을 견디며 강연에 갈 시간만을 기다렸어요. 다양한 부스 행사와 공연, 강연 등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버섯권 축제는 양송이가 몇 주 전부터 한껏 기대해온 시간이었어요. 더구나 축제의 일환으로 강연도 한다고 하니 양송이가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게 당연했죠. 양송이는 수업 시간 내내 친구들과 함께 강연들을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렸어요.
“아 배고프다. 양송아, 강연 전에 뭐 좀 먹자. 양송아... 양송아... 야 김박양송이!!!” 배고픔에 힘들어하는 능이의 푸념에도 불구하고 양송이가 휴대폰에서 눈을 못 떼는군요. 대체 무슨 일일까요?
“버섯신 모양 딜도? 능이야, 딜도면 그 섹스토이 중에 기다랗게 생긴 그거 말하는 거 맞지?”
“아 딜도가 뭐. 배고프다는데 갑자기 딜도 얘기가 왜 나오냐.” 능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어요.
“이번에 강연하기로 한 강연자가 옛날에 자기 SNS에 이런 사진을 올렸었대.”
“근데 그게 왜. 나는 버섯교가 아니라서 버섯신 잘 몰라.” 양송이가 보여주는 휴대폰을 슬쩍 본 능이가 말했어요.
“우리 학교 사람들이 이거랑 옛날에 있었던 다른 일들 때문에 이 사람 강연 오는 걸 반대하는 포자 서명 1 하고 있대.” 양송이가 주변을 둘러보며 속삭이듯 말했어요. 왠지 모를 조심스러움에 목소리를 작게 해야만 할 것 같았거든요.
“그거랑 강연이랑 무슨 상관이야? 난 잘 모르겠는데.”
“상관있을 수 있지. 버섯교 사람들은 기분 나쁠 수 있잖아.”
“그래도 그렇지. 그거 가지고 강연까지 반대하는 건 좀 아니지. 자기들이 강연에 안 오면 되잖아.” 양송이와 능이는 둘이서 한참을 이야기해 보았지만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어요.
양송이와 능이는 결국 강연을 직접 들어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강연을 반대하는 포자 서명이 벌써 상당히 진행되어 1000여 송이나 되는 버섯들이 참여했다는 소식에, 배고픔도 싹 달아나버려 양송이와 능이는 바로 강연장으로 가기로 했죠. 하지만 배고픔을 벌써 잊기에는 강연장 앞에 도착한 양송이와 능이 앞에 펼쳐진 광경은 훨씬 놀라웠어요.
“능이야. 저거 봐! 사람들이 버섯신 모독 어쩌고, 날치기 저쩌고, 독재 거시기 쓰여 있는 팻말을 들고 모여서 구호 외치고 있어!” 놀란 양송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능이에게 소리쳤어요.
“날치기 강연 반대! 독재하는 버섯권 축제 기획단 물러나라! 버섯교 미션 스쿨인 우리 학교에서 버섯신 모독하는 강연자 안된다! 반대! 반대! 물러나라! 물러나라! 안된다!”
십수 송이의 버섯들이 각각 피켓을 손에 들고 외치는 소리는 강연장 앞 강당을 쩌렁쩌렁 울렸어요. 그 소리는 마치 꽝꽝 언 고드름이 떨어져 깨질 때 나는 소리처럼 차갑고 날카롭게 양송이의 마음을 찔러댔답니다.
“능이야. 나 무서워. 저기 갔다가 뭐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힝. 난 못 가겠어.”
“야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그냥 돌아가. 일단은 들어가기라도 하자.”
양송이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능이에게 애원의 눈길을 보냈지만 능이는 단호했어요.
“아 나 진짜 무섭단 말이야. 후엥~” 어머! 양송이가 정말 울상이네요.
“그래. 나도 저 소리 계속 들으니까 무섭고 불안해서 못 들어가겠다. 아쉽지만 돌아가자.”
양송이의 표정 때문인지, 강연이 시작되고도 점점 더 커져만 가는 구호 소리 때문인지 능이도 결국 마음을 바꾸었어요. 강연이 보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강연장 앞의 버섯들의 위압감과 공포감도 그에 못지않았거든요. 저길 봐요. 양송이와 능이가 발걸음을 돌리고 마네요. 양송이는 학교 앞에서 능이와 헤어지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강연장에서 목격한 장면은 양송이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답니다.
1.
힘없이 집으로 돌아온 앙송이는 늦은 저녁밥을 먹으면서 습관적으로 매일시간 2 어플을 켰어요. 손가락을 무심히 움직이며 화면을 훑던 양송이는 얼마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밥그릇을 바닥에 떨어트릴 뻔했어요. 무슨 일일까요? 양송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네요.
이 댓글들은 모두 소위 ‘버섯포자입으로불어날리기과학대학 단톡방 사건’으로 이름 붙여져 핫한 이슈로 떠오른 일에 대한 것이었어요. 양송이가 속한 단과 대학이기도 한 일명 ‘버불대’는 순식간에 얼굴책과 매일시간 커뮤니티에서 폭발적인 관심을 받고 있었어요. 도대체 ‘버불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버불대 학생회의 대표자 중 한 명이 학생회 단톡방에 집회에 참여한 까만 버섯의 사진을 올렸고, 그에 덧붙인 발언이 학생회 집행부에 의해 공개된 것이었어요. 일명 ‘버불대 단톡방 사건’이라 불리는 사건은 양송이를 더욱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어요. 양송이는 버불대 대표자의 발화가 분명 거부감이 들만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 이외에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 더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거든요. 양송이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싸매고 이 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고민해보았어요.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이리저리 뒹굴거리기만 하던 양송이는 그만 까무룩 잠이 들었어요.
‘(길을 걸어가는 양송이. 안개로 가득 찬 길은 채 1m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옇다. 양송이는 앞으로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뒤에서 들릴 듯 말 듯 하게 들리던 주구구궁하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목소리들이 메아리친다.) 우리도 피해자야... 뭐가 올바름이냐... 피해자가 하는 말대로 해라... 까만 버섯이 피해자되니까 말 바꾸는 것 봐라...’
주구구구구구궁. 주구구구구구궁. 점점 커지던 소리는 이제 양송이 고막에서 나오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깝고 크게 울렸어요. 으으, 하는 앓는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린 양송이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이 모두 꿈이었고, 벼락처럼 울려대던 소리는 자신의 귀 바로 옆에 놓인 휴대폰의 진동 소리라는 걸 깨달았어요. 식은땀을 닦으며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쉰 양송이는 전화를 받았어요. 천둥소리의 주인공은 능이였어요.
“야 김박양송이. 너 얼굴책 봤냐. 그 버불대 학생회 사건!!” 전화를 받자마자 능이는 거의 소리치듯 말을 쏟아냈어요.
“어... 봤어...” 양송이는 목이 까끌거리는 모래로 가득 차 버린 것처럼 턱턱 막혔지만 겨우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너도 알잖아, 내가 버불대 학생회 집행부인 거. 어떻게 생각하냐고!”
“아니. 그게... 대표자가 잘못한 것도 맞고. 매일시간에서 이야기하는 게 올바르지 않은 것도 맞긴 한거 같은데.. 그게...” 그래요. 능이는 작년부터 버불대 학생회를 2년이나 해오고 있는 버불대 집행부였어요. 양송이는 능이가 평소 버불대 학생회를 얼마나 애정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조심스러워질 수 밖에 없었어요.
아까 댓글들을 보고 그렇게나 크게 놀라고 심각했던 것도 그런 능이의 영향이 컸죠. 양송이는 능이가 얼마나 실망하고 크게 슬퍼했을지도 잘 알았기 때문에 쉽게 입을 뗄 수 없었어요.
“나도 알아. 그가 잘못했고, 이후 개인적인 대응도 문제가 많았다는 거. 하지만 평소에는 폭력에 관해 관심도 없었던 까만 버섯들이, 아니 하얀 버섯들이 피해자인 폭력 사건이나 피해자 중심주의, 폭력적인 문화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하지도 공감하지도 않았던 이들이 이때다 하면서 피해자니 폭력이니 뭐니 운운하는 것을 난 참을 수가 없어. 그건 잘못되었어. 그들이 입은 피해를 부정하는 게 아니야. 누군가가 폭력을 입고 고통을 겪었다면 당연히 잘못된 일이지. 하지만 난 지금 까만 버섯들이나 하얀 버섯 혐오세력들이 그 피해를 활용하고 논점을 희석시키는 방식은 분명히 백래시(Backlash) 4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능이의 목소리에서 큰 분노와 슬픔을 동시에 느낀 양송이는 너무나 혼란스러웠어요.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잘 모르겠어. 그게 과연 우리가 공부했던, 책에서 읽었던 백래시일까. 피해자가 까만 버섯이라고 그가 이용되고 있다고 말하는 게 과연 올바를까...”
“...김박양송이. 너 생각 잘 해봐. 올바른가 아닌가에 사로잡혀서 스스로가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잘 생각해보라구...” 능이는 아주 살짝이라도 찌르면 엉엉하고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어요.
“모르겠어. 분명히 나도 그런 일이 버불대 학생회에 내에서 일어난 것은 유감이라 생각...”
“너도 똑같아! 하얀 버섯 혐오세력의 논리를 그대로 옮겨 떠벌리고 있을 뿐이면서 무슨 유감은 유감이야!” 능이의 가시 돋친 말이 날카로운 창이 되어 양송이의 마음에 날아와 박혔어요. 가뜩이나 방금 꾼 꿈과 오늘 있었던 일들로 예민하고 지쳐있던 양송이는 능이의 말에 욱하고 화가 났어요.
“떠벌리는 건 너야. 너도 잘 생각해봐. 정말로 이 사건이 그렇게 생각되어야 할 만한 것인지 생각하고 나를 욕하라구.”
“... ...” “...”
2.
띠로로로로로롤. 띠로로로로롤. 양송이는 등교 시간을 알리는 알람 소리에 놀라 화들짝 일어났다가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생각에 안심하고 다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어요. 하지만 금방 어제 학교에서의 일들과 버불대 사건, 관련된 글에 달린 댓글들, 능이와의 다툼에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양송이의 얼굴엔 그림자가 드리웠어요. 능이와 싸운 것이 정말로 오랜만이었던 양송이는 꿀꿀하고 슬픈 마음에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아득해졌어요. 그때 양송이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팽이였어요. 양송이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이야기에 귀담아들으며 어려운 일에 실마리를 열어주던 팽이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죠.
팽이의 집으로 가기 위해 그늘 숲에 들어선 양송이도 금세 그늘 숲이 평소랑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평소와 달리 땅이 푹푹 파이는 듯한 기분 나쁜 감촉이 느껴졌거든요. 오솔길이 점점 좁아지는 것만 같은 느낌도 들었고요. 뭔가 이상하고 불길한 예감은 날개가 달린 것처럼 달려가던 양송이의 걸음을 점점 느리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오솔길이 좁아지다 못해 사라져버리자 양송이의 발도 우뚝 멈추었답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 길은 항상 이어져 있었는데 오늘은 왜 이런 흙무더기로 막혀 있는 거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양송이는 고개를 틀어 흙무더기 옆을 살폈어요. 바로 그 순간!
“우워어어어어억!! 이게 뭐야!!! 아이고야 나 죽네!” 양송이는 땅귀신이 잡아당긴 것 마냥 아래로 푹 가라앉았어요. 흙무더기 옆에 있던 큰 구덩이로 빠진 것이었죠. 떼굴떼굴 쿵 쾅쾅 우르르. 마치 공처럼 이리저리 부딪치며 구덩이 아래로 굴러떨어진 양송이는 다행히도 푹신한 양탄자 위로 떨어진 덕에 다치지 않았어요. 어? 양탄자라니? 구덩이 아래에 왠 양탄자죠?
“누군지 모르겠지만 인제 그만 내려와 줄래? 좀 무겁거든.”
“우오오오오아아악!! 놀래라.” 양탄자의 목소리에 양송이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어요.
“어? 이 목소리는 김박양송이? 양송이구나. 되게 오랜만이다.” 양송이는 양탄자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기억을 더듬었어요.
“혹시 넌... 뚜뚜?! 진짜 뚜뚜 구나. 진짜 오랜만이다! 이 구덩이는 네가 파놓은 거였구나.” 푹신한 양탄자의 실체는 바로 회색 두더지 뚜뚜였어요. 어린 시절 친하게 지냈던 양송이와 뚜뚜는 아직까지도 꾸준히 서로의 집을 오가거나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였죠.
“에구. 뚜뚜 너 아니었으면 딱딱한 바닥에 떨어져서 엄청 다쳤을 텐데 정말 다행이다. 고마워 뚜뚜야.”
“별말씀을. 나야 뭐, 가죽이 두꺼우니까 하나도 안 아팠어.”
“어? 근데 뚜뚜 네가 여기 땅굴을 파놓은 거야? 너희 집은 원래 그늘 숲이 아니잖아? 그늘 숲 분위기가 이상했던 것도 오솔길이 흙무더기로 막혀있던 것도 다 뚜뚜 네가 한 거였어?”
“아니 사실은...” 반가움도 잠시, 뚜뚜가 사는 동네가 그늘 숲에서 꽤 떨어져 있다는 걸 생각해낸 양송이는 의아함에 뚜뚜에게 물었어요. 그리고 그 질문에 뚜뚜의 표정도 갑작스레 어두워졌어요.
“... 그래서 그렇게 된거야” 참을성을 갖고 뚜뚜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양송이는 놀라움과 걱정스러움에 말문이 막혀버렸어요. 뚜뚜가 그늘 숲에 흙무더기와 구덩이까지 만들어가며 땅굴을 파 숨어 있게 된 것도 모두 이해가 되었고요. 실상은 이렇게 된 것이었어요. 회색 두더지 뚜뚜는 예전부터 두더지 동네에서 큰 입김을 가지고 회색 두더지들을 차별하던 검정 두더지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어요. 회색 두더지는 땅굴을 파지 않고 땅굴 방에서 식량이나 지키고 아기 두더지들이나 키워야 한다거나, 외모를 가꾸고 조신해야 한다거나, 검정 두더지들이 회색 두더지들에게 하는 말들이 모욕이나 비하가 아닌 농담이라거나 하는 생각들에 대해 뚜뚜가 꾸준히 반대해왔기 때문이었죠. 검정 두더지들에게 뚜뚜는 이상하고 유별난 존재였어요. 그러다 며칠 전 그 일이 벌어졌어요.
“뚜뚜 얘기 들었니. 그렇게 검정 두더지들 욕을 하더니 이번에 검정 두더지에게 검댕이 묻은 것처럼 까맣고 못생겼다고 욕을 했다지 뭐야. 한검충 5이니 하는 말까지 했대.”
“정말? 그렇게 안 봤는데. 역시 회색 두더지 권리니 뭐니 떠들어대는 것들도 다 똑같아 보이더니. 그것도 폭력 아니야?”
최근 검정 두더지의 행동들에 대해 뚜뚜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한 검정 두더지에 대한 나쁜 말을 친구들에게 해버리고 말았던 거에요. 친구 중 한 명을 통해 두더지 동네에 퍼져 나간 그 말들은 금세 두더지 동네에 다 퍼져 버렸어요. 여러 두더지들이 뚜뚜가 그렇게나 나쁜 말을 했다는 것에 놀랐고 상당수의 두더지는 회색 두더지들 모두를 한데 묶어 비난하기까지 했죠. 회색 두더지 중 뚜뚜에게 동의하던 두더지들도 쉽사리 나설 수 없었고요.
특히 두더지 중 몇몇은 두더지들끼리의 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두더지권 센터에 사건을 접수해 뚜뚜가 동네를 떠나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었어요. 그 주장의 강도는 점점 커졌고 물리적인 괴롭힘의 징조까지 보이자 뚜뚜는 결국 잠시 몸을 피하고자 그늘 숲으로 온 것이었죠.
“그런데 뚜뚜 야. 네가 잘못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행동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야...” 양송이는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끼며 조심스레 말했어요.
“그렇긴 하지만...”
양송이는 어깨가 축 늘어진 채 웅얼거리는 뚜뚜 위로 능이가 겹쳐 보였어요. 그러자 분명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뚜뚜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의 잘못과 네가 이때까지 검정 두더지들에게 차별받고 괴로워하던 회색 두더지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회색 두더지의 권리를 위해 노력해온 것들은 별개의 문제야. 정확하게 분리해서 생각해야 해!” 양송이는 뚜뚜에게 이야기하면서 복잡하던 자신의 머리도 조금씩 정리되는 것 같았어요.
“... 그래. 양송아. 네 덕분에 좀 더 정확하게 생각할 수 있었어. 난 내가 정말로 쫓겨날만 하다고 생각했었고, 이제 회색 두더지들과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양송이 네 말대로 내가 잘못한 것과 지금까지 회색 두더지들이 겪어온 일들은 달리 생각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 양송이의 이야기에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뚜뚜가 말했어요.
“그래. 뚜뚜야. 잘 생각했어. 그래도 네가 잘못한 게 있다는 거 알지?”
“그래. 잘 알고 있어. 고마움의 표시로 내가 출구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게 도와줄게. 자! 내 등에 올라타서 꽉 붙잡아. 너무 세게 붙잡으면 내 털 뜯어지니까 조심하고.”
뚜뚜의 도움으로 굴에서 나온 양송이 앞에 그늘 숲의 출구가 나타났어요. 마치 양송이를 위해 미리 준비해둔 것처럼 말이에요.
3.
그늘 숲을 나와 작은 개울을 건너자 금방 팽이의 집이 보였어요. 팽이는 집의 창문과 문을 모두 활짝 열어젖힌 채 마당에 핀 꽃에 물을 주고 있었어요. 개울의 징검다리를 폴짝폴짝 건너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양송이를 보며 팽이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어요.
“반가운 양송이가 왔네.” 팽이의 따뜻한 목소리에 양송이는 자기도 모르게 어제, 오늘 자신이 겪은 일들을 쏟아냈어요. 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팽이는 그동안 단 한 번의 참견도 없이 양송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죠. 양송이는 팽이가 온 관심과 정성을 다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 그래서 뚜뚜에게는 그런 일들이 있었고 결국 이렇게 하기로 했어요.” 양송이는 긴 이야기를 끝낸 후 편안해진 기분으로 팽이 옆에 털썩 앉았어요. 정신없이 이야기를 하느라 계속 서 있었던 것도 잊었나 보군요.
”능이랑 다퉜다니 힘들었겠다. 하지만 능이가 한 말이 틀리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 능이가 강조했듯이 그들이 입은 피해가 피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도, 그들이 경험한 폭력이 폭력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야. 그들도 힘들고 고통스럽겠지. 하지만 그 피해와 고통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이들 이외에 그들을 써먹으려 하는 이들도 있다고 생각해.” 팽이가 짓던 옅은 미소는 어느새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어있었어요.
“네. 앞서 말씀드린 뚜뚜도 분명 검정 두더지를 향해 나쁜 말을 했고 곧바로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뚜뚜가 이제껏 해왔던 말과 행동들이 모두 힘을 잃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뚜뚜에 대한 소문을 내고 회색 두더지들을 향해 비난과 비하를 내뱉는 것엔 ‘분명한’ 의도가 있다고도 생각하고요.” 양송이는 팽이와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점점 자신의 생각이 정리되고 분명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몇몇 단어들이 가져다준 높은 효능감에 취해버리면, 그 단어들이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들마저 희석되어버린다.’는 문구를 최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어요. 버섯들과 두더지들이 입은 피해를 설명하고 해결하는 데 쓰이던 단어나 개념들이 점점 더 정작 필요한 문제들에 접근할 수 없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거기다가 문제를 희석하고 왜곡하려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피해자 중심주의 같은 개념들을 오용하는 버섯들도 있는 것 같고요. 그렇지 않나요?”
“그럴 수도 있겠다.” 팽이는 양송이의 말에 가타부타하지 않고 두루뭉술한 반응만을 보였어요. 이후 대화에서도 팽이는 양송이에게 구체적인 답이 될만한 말들을 해주지 않았고 양송이는 기대했던 해답을 얻지 못한 채 팽이의 집을 나서야 했어요.
집으로 향하는 양송이의 발걸음은 아직 무거웠지만 분명 그늘 숲을 지나 뚜뚜와 팽이를 만나기 전보다 훨씬 가벼웠어요. 아직 많은 질문이 해결되지 않은 채 산적해 있고, 앞으로도 명쾌하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에요. 양송이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 능이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완벽하고 정확한 답을 찾기 위해 혼자 아등바등하는 것보다, 함께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오늘 하루를 통해 알게 되었거든요, 집으로 향해 달려가는 양송이는 어디선가 불러오는 시원한 바람에 점점 더 기분이 좋아졌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에요. 어땠나요 모두들? 김박양송이의 하루를 함께 보내며 무언가 얻은 것이 있나요. 설령 얻은 것이 없다고 해도 괜찮아요. 가끔은 잠시 판단을 미룬 채 누군가의 고민을 함께 지켜보고 겪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테니까요. 혹시 앞으로 여러분이 김박양송이와 비슷한 일을 겪게 되신다면 오늘의 이야기를 한 번쯤 떠올려보아요. 그때 문득 어떤 힌트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럼 모두 안녕~~~!
글 편집위원 재찬 (paperlifer@naver.com)
- 버섯 대학생들이 자신의 포자를 하늘로 날려 포자 주머니에 넣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단체 연서명. [본문으로]
- 시간표를 짤 수 있는 어플로 ‘버섯얼굴책’과 함께 버섯 대학교 학생들이 즐겨 활용하는 SNS. [본문으로]
- 한국까만버섯충의 줄임말. [본문으로]
- 백래시(Backlash)는 사회나 정치적 변화로 인해 자신의 중요도/영향력/권력이 줄어든다고 느끼는 불특정 다수가 강한 정서적 반응과 함께 변화에 반발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사회학 용어이다. 수잔 팔루디는 자신의 저서 <백래시>에서 여성의 권리 신장을 저지하려는 반동의 메커니즘을 백래시라는 단어로 표현하였다. 아르테, 2017. 12. 13. 「누가 페미니즘을 두려워하는가? 『백래시(BACKLASH)』"」. 네이버 포스트. https://post.naver.com(2018년 8월 22일 검색) [본문으로]
- 한국검정두더지충의 줄임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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