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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무지개 굿즈라도 들고 올까요?

    어느 아침, 꿀잠을 자고 있던 당신을 누군가가 세차게 흔들어 깨운다. 그 사람은 당신이 지금 엄청난 위기에 처해있어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당신은 집 밖으로 이끌려 나간다.

    당신은 난민이 되었다. 출국 직전에 들은 바로는, 당신은 이제 어디로든 도착해 난민신청을 받아야 한다. 당연하지만 애석하게도 당신은 당신이 난민으로 인정받을만한 어떠한 증거자료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당신을 도운 사람들은 난민 신분에 대해 짧게 설명해주었다. 국적, 종교, 정치, 인종, 그리고 특정 집단을 이유로 본국에서 박해를 받아 더는 그곳에 있을 수 없게 된 이들이 난민이다. 당신은 특정 집단이기 때문에 살던 곳에서 내몰렸다.

    “당신이 동성 파트너와 키스를 하는 것을 이웃이 봤다고 합니다.”

    당신의 부모나 지인 혹은 국가기관의 누군가가 당신을 쫓아와 당신을 당장 본국으로 끌고 갈 것만 같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당신은 어떤 나라에 도착했다시간이 흘러 이제 당신은 그 나라에서 난민으로 인정받기 위한 심사를 받는다. 심사관은 묻는다

당신이 성소수자임을 입증해보시오.”

    선천적으로 동성애자였는지, 당신의 파트너와 어디서 어떤 체위로 섹스를 하는지, 왜 자신의 성적 지향을 숨기지 않았는지, 왜 한국으로 오게 되었는지, 한국에 일자리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당신이 성소수자임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자료가 왜 하나도 없는지.

    심사가 끝났다. 당신에게 난민 불인정 사유서가 날아온다. 당신의 모국어로 된 서류도 아니었거니와 심지어는 영어로 적혀있지도 않았다. 이게 무슨 나라 말인지 옆 사람에게 물어보니, 한국어란다.

    결론만 말해보자. 당신은 난민이지만 국가로부터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여기까지 이 글을 읽은 당신이 이성애자여도 좋다. 당신이 단 한 번도 자신의 성정체성이나 성지향성 때문에 차별받은 경험이 없어도 좋다. 당신이 살고 있는 국가가 아웃팅을 종용하고 성소수자를 총살하는, 당신이 여기가 거기보단 낫지하며 위안 삼는 미개국이 아니어도 좋다. “당신의 성정체성과 성지향성을 입증해보시오에 답해보길 바란다. 이 글을 읽으면서, 이 책을 덮으면서, 길을 걸으면서, 잠들기 직전까지도.

 

    “당신의 성정체성과 성지향성을 입증해보시오라는 질문이 난민승인 심사장에서 난민을 향하고 있다. 이는 누군가의 섹슈얼리티라는 정체성을 객관적인 증거를 통해 검증하고 그가 특정 신분에 적합한지 아닌지를 판단 후 승인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작 한 문장밖에 안 되는 이 질문은 복잡한 현실을 담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섹슈얼리티를 말하기, 특정 정체성의 진정성판단하기, 그에게 객관적인 증거 팩트를 요구하기, 이를 바탕으로 합/불법을 선 긋기라는 현실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무지개 깃발이라도 들어야 하는가.



법 앞에서의 섹슈얼리티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로 가득한 난민심사장 한복판에서 심사관은 난민에게 그의 자격을 묻는다. “파트너와 어디서 어떤 체위로 성관계를 하십니까?” 일상에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무시하고 지나쳤을 텐데, 이 질문이 합법과 불법을 승인하는 문 바로 앞에서 던져진다. 그가 위협을 피해 도망쳐 온 그곳으로 다시 강제송환될지도 모르는 문 앞에서 말이다.

 

    섹슈얼리티는 말하기 자체가 터부시되는 소재이다. 동시에 섹슈얼리티, 특히 섹스는 남성 동성사회(homo-social)에서만 여성의 대상화를 전제로, 그 집단을 공고하게 하는 소재이다. 남성 동성사회에서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찰을 풍부하게 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들은 여성을 보지나 가슴, 짧은 치마 등 특정한 기호로만 여기며 동시에 서로를 향한 성적 대상화를 피하고자 호모포빅(homophobic)한 언행을 일삼는다. 결국 섹슈얼리티는 남성 동성사회에서도 특정한 말하기 방식을 제외하고는 이야기될 수 없다. 이때 직장 내 성폭력, 업계 내 성폭력, 미성년자 의제 강간 등 성을 둘러싼 위계폭력, 그리고 성적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은 쉽게 개인의 잠자리 문제, 남녀의 사랑 문제로 치환된다.

    섹슈얼리티 말하기를 사적 영역에서만 수행하라는 사회의 요구는 사람들 사이의 복합적인 위계를 지우고, 그 위계로 인한 폭력을 사소한 것으로 취급하게 한다. 가부장제 아래에서 이성애규범에 맞지 않는 것들은 음지로 내몰리고, 남성의 비()남성에 대한 착취와 가해는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다. 강제된 이성애규범을 전제한 섹슈얼리티를 사적인 문제로 취급하는 통념은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피해자도 가해자에게 마음이 없진 않았겠지”, “둘이서 알아서 잘 합의해보라고 하는 이는 자신이 공적 영역에서의 성폭력 말하기를 가로막고, 강간문화를 공고히 하는데 한몫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또 성소수자를 둘러싼 논의에서 네가 누구랑 사귀고 섹스하든 신경 쓰지 않아. 다만 나에게 보이지 않게 하라는 말이 쉽게 나온다. 이렇게 말하는 이는 자신이 성별이분법과 이성애중심주의를 재생산한다고, 호모포비아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섹슈얼리티는 좁게는 내가 누구와 섹스할 것인지, 넓게는 내가 누구를/무엇을 욕망하는지를 뜻한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이 누군가를 억압하는 데 일조한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몰이해는 곧 성소수자에 대한 몰이해와도 맞닿아 있다. 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이 선천적일 것이라는 믿음, 성소수자의 특이한 성적 지향이 특정한 결함으로부터 기인했을 것이라는 믿음, 게이는 분홍색을 좋아하고 말투가 나긋나긋하며 모두 항문섹스를 할 거라는 식의 성소수자다움에 대한 믿음이 법의 언어에 담겨버린다. 심사관은 출산기록이 있는 바이섹슈얼 여성에게 묻는다. “당신이 왜 성소수자입니까? 이성애자 아니고요?” 이는 질문 받는 이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섬세하게 살펴보지 못하는, 자격 미달의 언어이다. 이성애규범을 당연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성애/동성애만을 안다. 그 나태함은 질문받는 이로 하여금 성소수자다움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게끔 하는 폭력이 된다. 강제된 이성애규범 아래에서 살아왔을 그에게 다시 한번 이성애규범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들이미는 폭력이 된다. 어째서 이 사회가 이성애 질서를 중심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는지, 그랬을 때 이성애 질서에 맞지 않은 이들이 어떤 공포에 노출되어 살아왔는지, 그 공포가 실제로 어떻게 그의 삶을 위협했기에 그가 이곳까지 도망쳐왔는지를 이 질문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애초에 알고자 하지도, 듣고자 하지도 않는다.

    실은 이 풍경, 낯설지 않다. 이 사회가 피해자에게 요구하는 피해자다움과 똑 닮았다. 최근 안희정 성폭력 사건에서 성폭력 피해자가 충분히 저항하지 않았다”, “사건 이후에도 가해자와 어울려 다녔다는 이유로 1심 재판부는 무죄 판결을 내렸다.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법정이든, 난민 자격을 판단하는 심사장이든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렌즈로써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능력이 너무나 부족하다. 법이 작동하는 최중심부에서 난무하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몰이해, 피해자다움과 성소수자다움은 사건과 삶을 다각도로 살펴보는데 걸림돌이 된다. 그리고 이미 법정과 심사장 밖에서 나다니는 폭력을 재생산한다.

    현재의 섹슈얼리티를 말하는 방식은 잘못되었다. 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터부시하는 태도, 섹슈얼리티를 개인 간의 사적인 문제로 단순하게, 평면적으로 받아들이고, 남녀의 사랑문제로만 생각하는 태도, 이성애 밖에 있는 것들을 이상한 것, 병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태도, 전부 문제다. 피해자와 난민의 목숨을 쥐고 흔들 수 있는 힘이 누구에게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봤을 때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무지와 편견이 사람들이 발 딛고 사는 현실을 위태롭게 한다.

 

 

법 앞에서의 정체성

    “당신이 진짜 성소수자임을 조작 불가능한 서류를 통해 입증하시오.” 일상에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넌 언제부터 진짜 이성애자였냐고 욕하고 돌아섰을 텐데, 이 질문은 결국 합법과 불법을 가르는 문 앞에서 던져진다.

    위의 질문은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의 진정성을 객관적인 물증으로 판단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정체성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평가하겠다는 의미이며, 평가의 기준은 칼같이 똑같은 것, 요즘 말로 다시 하자면 공정한 것이어야 한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본국에서 내몰린 난민도 진짜 난민과 가짜 난민 판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진짜와 가짜 찾기에 매몰되다>

    현재 사회에서는 모두가 수평적으로 같은 출발선상에 놓여있다고 생각된다. 사람들 사이의 다양한 문화, 계급, 젠더 차이는 지워지고 되려 평평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사회적 소수자가 요구해왔던 권리가 조금씩이나마 갖춰지고 있는 현시점에서 그 권리를 위한 제도나 몫은 특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나는 충분히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를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약자라고 부르지 마세요.”라고 외치는 여자들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약함과 약자성을 부정하게 되었다. 사회적 소수자라는 꼬리표가 역설적이게도 그를 나약한 사람, 특권을 누리는 사람으로 낙인찍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개 이러한 낙인은 한국 사회에서 치명적인 결함으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사회적 소수자가 특권을 누린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특권은 공평한 사회를 위한 저항과 타파의 대상이 되었다. 오히려 내가 그 특권을 누리고 있지 못하니 내가 약자라는 말들, 즉 역차별 담론이 힘을 얻는다. 수많은 정체성들을 만들어내는 사회의 근본적인 구조, 문화, 계급은 전혀 바뀌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사회적 소수자에게 네가 정말로 그 특권을 누릴 자격이 되느냐?”고 묻는다. 충분히 가난한지, 충분히 차별당하고 있는지, 충분히 아픈지를 따지게 되었다. 정리하자면, 사람들은 진정성에 탐닉하게 되었다. 후원 아동이 값비싼 의류를 요구한다는 이유로 후원을 중단했다는 사람, 고가 브랜드 패딩을 입은 민중 총궐기 집회 참가자를 비난하는 사람 등. 진짜와 가짜 논쟁에 휘말려 사회적 소수자가, 혹은 이 사회의 모두가 처해있는 위태로운 현실은 지워진다.

    이는 한국으로 떠밀려온 성소수자 난민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진정성 있는 성소수자인지가 심사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심사관이 성소수자 난민에게 묻는다. “한국의 유명 LGBT 활동가의 이름을 아나요?”, “한국에서 LGBT 모임에 참가하거나 활동하고 있나요?” 혹은 한국은 본국보다 경제적 기회가 많을 것으로 생각되어 한국에 왔나요?”, “부모는 당신이 경제적으로 독립하기를 원하나요?” 성소수자 난민이 난민제도를 본국에서부터 알고 지위를 신청하기 위해 한국에 온 경우도 있으나, 난민제도를 전혀 모르고 오게 되는 경우도 태반이다. 그가 혹시 한국에 일자리를 노리고 오지는 않았는지, 혹시 동성애자인 척을 하는 건지에 매몰되어 수단이 목적을 역전한다. 그가 한국까지 오게 되어버린 상황은 법 앞에서 제대로 고려되지 못한다. 그가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맥락은 그 누구의 관심사도 아니게 된다.

 

<‘없다는 사실만이 그의 존재를 증명한다>

    법 밖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법 밖에 있다고 해서 그의 존재가 불법인 것은 아니다. 그가 법과 접촉하고 갈등하는 순간은 그가 타인 혹은 그 집합인 사회와 관계를 맺을 때이다. 주소가 있어야 행정상 등록이 가능한데, 거리의 홈리스는 주소가 없기 때문에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의 주민등록이 말소되었다. 국가라는 권위가 그의 신분을 보증해주지 않는 것이다. 거리에 산다는 그의 정체성이 가장 도드라질 때는 바로 신분증 보여주세요라는 법의 요청 앞에서이다. 그는 없는데 있는 사람이다. 그의 삶은 합법도 아니지만 불법도 아니다.

    성소수자 또한 합법의 외부에 있다. 성소수자에 대한 박해가 심한 국가일수록 그는 자신의 성적 지향, 성적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게 아니라고 해서 다르겠는가. 한국에서 성소수자라고 커밍아웃했을 때 나를 화형대에 끌고 갈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사회는 철저하게 이성애만을 합법이라고 말한다. 적법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성소수자는 홈리스나 미혼모와 같이 법적 처벌대상은 아니나 그렇다고 합법은 아닌 위치에 있다.

    한국에서는 주민등록상 남자와 여자로 되어 있는 두 사람만이 혼인 신고를 할 수 있다. 이 혼인 신고라고 하는, 이제는 구시대의 로맨스 같은 별거 아닌 일이 수많은 부분에서 권리를 보장한다. 임대주택에서 우선순위에 놓이는 것,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것, 병원에서 보호자로 인정받는 것, 시신을 책임질 수 있는 것, 장례를 치러줄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은 법 테두리 안의 사람들에게만 당연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법 밖의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존재와 권리, 삶을 현재의 법 안에서는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이 그가 소수자인 증거이며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진정성 있는 물증을 제시할 수 없는 이유이다.

    성소수자 난민도 마찬가지이다. 법 밖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가 본국에서 처할 수밖에 없었던 폭력은 그가 떠밀려온 이곳에서도 또다시 작동한다. “한국에서도 성소수자들은 사회적인 편견 등이 두려워 성정체성을 감추고 살고 있는데, 당신은 왜 한국에 왔나요?” 그에게 난민 지위를 부여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로 심사관이 한국 성소수자 인권에 문제가 있음을 들먹이는 것은 결국 그에게 법의 문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재확인시킬 뿐이다. 그것은 그를 쫓아내기 위한 질문이다. 합법도 불법도 아닌 이들을 지우겠다는 압박이다.

 

    현재의 난민심사는 누가 더 진정성 있게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는지를 전시하는 꼴이다. 누가 더 성소수자다운 고통을 겪었는지 앞다투어 아우성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위협했던,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그 땅으로 다시 강제송환 된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데 시선이 쏠려 난민인 그가, 난민이 아닌 내가 어떤 곳에 발 딛고 서있는지 보지 못한다. 법 밖에 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입증할 수 없는 이에게 증거를 요구하며 다시 한번 법의 외부를 차갑게 실감하도록 하는 이곳. 실은 나와 그가 서있는 땅이 똑같다.

 

 

각기 다른, 서로의 말을 들어주는 법

    사회문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사용하는 역지사지 전략에는 맹점이 있다. 모든 정체성이 의 것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모든 정체성을 체험해보고 경험해보려고 하는 태도가 당사자에게 더 큰 상처를 안길 수 있으며, 자신이 경험해본 것만이 완전무결하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 예로는 육아 체험이 있다. 육아체험을 통해 독박육아를 하는 여성이 얼마나 힘든지를 경험해보자는 것이다. 이때 내가 아기 몸무게만큼의 짐을 들어봤는데, 별 거 아니던데?” 식의 생각은 타인의 경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역지사지가 전혀 되지 않는, 기대되었던 효과에 완전히 엇나간 경우이다. 한편 아기가 참 무거웠었지도 독박육아의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결국 누군가의 삶과 일상을 단순히 일회성으로 이해하는데 그칠 뿐 아니라 그 힘든 육아를 왜 여성에게만 책임 지우는지 물어보지 않는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휠체어, 옥탑방 체험기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체험기를 향한 타자의 목소리를 인용한다. “서울 살면서 휠체어를 타며 출퇴근을 하는 장애인인 제 경험을 들어보시면 될 텐데, 박원순 시장님은 왜 굳이 당신이 휠체어 체험을 하십니까? 저의 이야기는 한 번도 안 들어주셨잖아요.” 무엇이든 체험해보고 나의 경험을 기반으로 사회 문제를 인식하는 것만이 문제해결법이 아니다. 타자의 말을 듣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곳에는 편견과 몰이해, 진정성 찾기에 대한 집착이 팽배하다.

 

    다시 성소수자 난민 문제로 돌아와, 나는 엄연히 이 한국 땅에서는 난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국으로 떠밀려온 난민 문제를 사유할 수 없는가. 아니, 오히려 나와 그는 같은 지반을 공유하고 있다. 이 글의 목표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나의 위치에서 난민이라는 타자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가 서있는 곳이 동떨어진 공간이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만일 그와 내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한다면, 이곳은 아직 여전히 타자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2016년 대전고등법원의 재판부는 동성애자 탄압을 이유로 난민 인정을 요청한 A씨에 대해 “(박해에 대한) A씨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 하더라도 가족들과 떨어진 본국 내 다른 곳에 정착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며 이게 A씨에게 지나치게 불합리하고 가혹하다고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다시 말하자면, “숨기고 살아라는 요구이다. 이미 성소수자라면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수 백 번은 들었을 그 말이다. 이곳에서의 숨기고 살라는 요구는 너무나 투명하다. 이성애규범, 가부장제, 정상성에 대한 집착 등을 결코 문제 삼지 않겠다는 폭력이다.

    성소수자나 난민, 성소수자 난민만이 숨기고 살라는 권위의 요구에 맞닥뜨리는 게 아니다. “당신이 성소수자임을 입증하시오.” 고작 한 문장밖에 안 되는 이 질문은 난민이 아닌 사람조차도 그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이 얼마나 무너지기 쉬울지를 함축하고 있다. 이미 만연한 성소수자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이 난민을 쫓아내고 배척하는데 일조하고 있으며, 난민이라는 타자에 대한 혐오가 끊임없이 또 다른 집단에 대한 혐오의 모습으로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타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듣는 법조차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법 앞에 놓인 약자는 권위의 입맛에 맞는 말을 늘어놓아야 한다. 그마저도 진정성 있는 피해자다움이 아니라고 하여 쉽게 문 밖으로 쫓겨난다. 성폭력의 굴레를 찢어내려는 성폭력 피해자, 이동권을 외치는 장애인, 혼인평등을 말하는 성소수자, 생존할 공간을 외치는 철거민. 이 모두가 겪어야 했던 쫓겨남과 닮았다. 한편 한국의 내부적 난민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있다. 국가가 그를 보호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정상과 합법의 영역에서 내쫓는 이들이 있다. 탈가정 청소년, 젠더 디스포리아를 겪는 사람들, 주민등록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 현재 이곳은 성별이분법, 이성애규범, 가부장제, 정상성에 대한 집착, 적과 아군을 구분하고 배척하는 시스템에 문제제기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도 당신도 이런 곳에서 살고 있다.

    이제는 타자의 언어에 귀 기울여야 한다. 동질감에 치우치지 않고 이질감을 차별의 핑계로 삼지 않는 마음이 절실하다. 먼 이국에서 온 그와 이곳의 나는 같은 토양에서 무지개 깃발 아래 서있다. 그것 말고도 형형색색의 깃발 아래 서있다.  




 글 편집위원 김뀨뀨 (shimmer4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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