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정치사회

[승인된 □] 고작 한 개비의 성냥

연희관공일오비 2019. 3. 29. 23:46

 0

피곤하다. 힘들다. 집에 가고 싶다. 자고 싶다. 아주 익숙하고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문장이지 않은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들 대부분은 이 문장들을 하루에도 여러 번 자주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그러니 나보다 더 바쁘고 학교도 다녀야 하는 당신들은 당연히 더 그럴 것이다. 당신이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즈음이 되어서야 이런 말들을 뱉는다면 그나마 낫다. 아침 일찍 집에서 나오자마자 머리의 물기가 채 마르기도 전에 자신의 피곤함과 침대에 대한 사랑을 피력하는 당신들도 많을 테니 말이다. 학교에 다니면 다닐수록, 지치고 힘들고 피곤해진다. 거기에 더해 건강 챙겨야 하는데, 운동해야 하는데, 비타민(때로는 홍삼, 영양제) 먹어야 하는데 같은 말들도 점점 더 자주 튀어나온다. 그런데 그걸로 정말 충분한 것인가. 운동과 영양제와 건강에 대한 염려만으로 이토록 피곤한 일상에서 탈출해 쨔라란! 하고 건강해질 수 있을까.

건강하다는 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학교에 다니는 내내 이 질문에 오래 천착했지만, 여태껏 별다른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사실 건강하다는 말은 단순하고 쉽다. 운동, 영양제, 회복, 규칙적인 생활 등의 단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건강한 사람들은 분명히 이곳저곳에 존재하고 건강해지기 위한 미션들은 단호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다. 건강한 몸에 대한 가장 쉽고 보편적인 뜻은 몸이 원래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반대로 말해 건강하지 않고 피곤하고 아픈 몸은 원래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몸이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원래의 기능이라는 단어가 눈에 밟힌다. 분명 인간의 몸은 가만히 놓여있지 않고 기능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인정받는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건강한 몸의 기능도 분명한 기준과 형태로 설정되어있다. 예를 들어 어떤 노동을 얼마나 오랫동안, 어느 정도의 강도로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기준은 매우 명확하며 대부분의 개인은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한 개인의 몸을 평가, 판단하는 그 기능의 형태, 강도, 유지시간 등은 한 가지 전제를 밑절미 삼을 때에 비로소 가능해진다. 바로 모든 몸은 특정 정도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는 전제다. 앞선 건강에 대한 뜻을 담은 문장 중 원래의라는 단어의 의미도 바로 그 전제를 담고 있다. 어떤 몸은 특정 수준의 에너지를 가진 채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정확히 와닿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친절하게도 그 전제를 귀엽고 쉬운 모양으로 다시 써보았다.

모든 몸은 100% 완충(완전충전)된 배터리여야 한다.”

 

지난 학기 휴학을 하고 흔히 ‘9to6’(나인투식스)라고 불리는 풀타임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알바를 하는 내내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매번 일정한 시간에 침대 밖으로 나오려 아등바등댔고, 퇴근 시간만을 기다리며 허덕대는 일상이 반복됐다. 회복이나 충전 같은 것은 개나 준 채 계속해서 소진되고 지쳐갔다. 지루하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불행 중 다행이게도, 그 경험들은 지난하게 끌어오던 건강과 몸에 대한 생각을 글로 쓸 수 있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피곤할 당신들에게 ‘100% 완충된 배터리라는 말은 어느 정도로 동의할만한 것인가. 먼저 이 사회가 가진 기존의 문법에서 몸이 배터리라는 믿음이 얼마나 일반적이고 강한 것인지 간단히 살펴보자.

훌륭하게 기능하는 몸, 다른 몸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뛰어나고 아름답게 기능하는 몸들이 있다. 아름다운 음악을 자유자재로 만들어내는 피아니스트의 손, 눈부신 얼음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져 한 마리 새처럼 뛰어오르는 김연아의 다리, 두 개의 심장이라 불릴 정도로 지칠 줄 모르고 그라운드를 휘젓는 박지성, 10년이고 20년이고 같은 시간에 출근해 업무를 수행해온 만근의 회사원까지. 그들의 몸은 감탄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 감탄에는 그들의 노력에 대한 존경과 인정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1%의 재능과 99%의 노력 따위의 식상하고 고리타분한 경구를 덧붙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노력에 부여하는 중요성과 그 무게는 매우 크다. 그리고 그 노력은 필연적으로 훈련이나 연습에 들이는 시간과 체력이 필요하다. 앞서 나열한 것과 같은 훌륭한 몸들에는 노력, 나아가 체력이 필수적이다. 그 체력이란 단어는 그들과 당신의 몸을 채우고 있는 에너지와 다르지 않다. 엄청나고 훌륭하게 기능할 수 있는 장치가 있더라도, 그 하드웨어가 아무리 최신식의 부품을 탑재하고 있더라도 기름, 전기, 또는 에너지가 없이는 작동할 수 없다. 충전과 소진의 메커니즘, 회복과 사용의 과정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1

이 글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간단하다. 먼저 앞서 언급한 건강한 몸, ‘원래의몸이라는 인식을 위한 전제, ‘100% 완충된 배터리로서의 몸이라는 전제에 대해 살펴본다. 나아가 그것이 얼마나 가능한지 혹은 가능하지 않은지, 그 전제가 만들어내는 결과물로서의 세계를 소심하지만 분명하게 짚어본다. 만약 나의 몸과 당신의 몸이 배터리일 때 우리의 삶이 팍팍하다면,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몸을 상상할 때 그 팍팍함이 조금이라도 해소될 수 있다면 한 번 해볼 만한 일이 아닐까. 스스로의 몸이 네모난 배터리라는 전제에 어느 정도 동의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배터리로서의 몸, 완충되었다가 80%, 50% 점점 소모되는 배터리인 스스로를 천천히 뜯어보자.

배터리 자체를 다루기 전 먼저 장치와 배터리의 작동이라는 측면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사례들로 돌아가 보자. 당신이나 김연아, 박지성이라는 배터리를 채우고 있는 에너지 단위를 임시로 이라고 부르겠다. (절대 필자의 필명이 재찬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지은 것이 아니다. 의미가 분명히 있는 기준인데 사정이 있어 설명은 힘들다. 믿거나 말거나.) 이곳은 스케이트장이다. 당신에게는 50찬의 에너지가 있고, 김연아 선수에게는 40찬의 에너지가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김연아 선수보다 더 훌륭한 점프를 할 수 있는가. 당연히 아니다. 박지성 선수와의 그라운드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같은 용량의 찬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기능의 양과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유전적, 사회적인 요인에 의해 개개인은 다른 장치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1찬에 대한 효율이 다른 것이다.

효율에 있어서 개인 간의 차이는 분명하다. 하지만 인식의 차원에서 그 차이는 계속해서 지워진다. 만성질환을 가진 개인, 장애를 가진 개인, 우울증을 앓고 있는 개인, 심폐 지구력이 떨어지거나 체력이 떨어지는 개인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도 그 개인들은 효율 따위는 고려하지 못한 채 강고하게 설정되어있는 수준의 결과물을 토해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그 개인들이 가진 1찬 대비 에너지 효율은 철저하게 숨겨질 뿐이다.

배터리 자체에만 집중해보더라도 그 차이는 분명하다. 효율 이전 배터리 각각의 용량은 매우 큰 차이를 지닌다. 유전적, 사회적인 요인에 의해 누군가는 5000찬 정도의 용량을 가지지만, 누군가의 용량은 300찬에 불과하다. 그러니 효율과는 상관없이 같은 정도의 기능을 하는데 각각의 배터리가 소모되는 시간은 모두 다르다. 바닥이 난 배터리를 채우는데 필요한 시간과 노력도 다양하다. 어떤 배터리는 소모되고 난 찬을 금방 채울 수 있지만 어떤 배터리는 아무리 콘센트에 오래 꽂아두더라도 쉽게 충전되지 않는다. 배터리의 제조사부터 문제다. 배터리는 모두 다른 제조사에서 만들어진다. 어떤 제조사는 효율, 용량, 충전 시간 등을 섬세하게 고려해 배터리를 생산하고 관리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제조사는 그렇지 못하다. 배터리들은 충전을 하거나 자신의 효율과 용량을 늘리기 위해 잠을 자거나 운동을 하고, 건강하다는 걸 먹는다. 하지만 배터리로서의 몸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 사회를 배터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이 금수저, 흙수저라는 단어를 만들거나 차이와 평등에 대한 이슈와 의제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루저, 무임승차러, 복지 기생충, 불쌍한 사람, 게으른 베짱이라는 인식이 점점 더 개인을 압박하고 옥죄는 요즘이다. 그처럼 자신의 몫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개인에 대한 강력한 믿음에 배터리로서의 몸이라는 사유는 훌륭한 연료로 제공된다. 배터리로 살아가는 것이 하루하루 확연히 더 힘들어지고 있다. 배터리의 효율에 차이가 있다는 걸 지적하면 노력하지 않고 핑계만 대는 사람이 되기 일쑤고, 개인은 자신의 효율을 훨씬 웃도는 일상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특정 기준에 맞춰진 업무를 수행하고 자신이 가진 용량 이상의 찬을 과용하며 개인은 점점 망가져 간다. 배터리를 채우기 위해 필요한 시간 따위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배터리 칸이 간당간당한 빨간 색으로 눈을 떠 하루를 겨우 버티고 방전되기 직전 잠자리에 드는 배터리들만이 넘쳐난다.

혹시 아이폰이나 맥 등의 애플 제품을 사용하는 당신은 가로수길에 위치한 애플 스토어에 가본 적이 있을지 모른다. 애플 제품을 구매한 고객들은 보증 기간 동안 그곳에서 배터리를 교환 받을 수 있다. 현재 배터리들은 그 애플 제품처럼 언젠가 자신의 몸도 새롭게 교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배터리는 교환 가능하지 않다. 중간에 휴가를 몇 년씩 다녀온다고 해서, 혹은 은퇴를 하고 새로운 생활을 한다고 해서 배터리는 교체되지 않는다. 교환까지는 아니더라도, 배터리를 사용하지 않거나 쉬게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분명 강고하다. 은퇴를 위해 충분한 경제력을 갖추려 노력하고, 노후 준비에 열중하며, 인생 설계를 통해 100세 시대를 준비하는 것이 그 믿음의 적나라한 예다. 하지만 마치 배터리가 두 개, 세 개나 된다는 듯 개인의 삶에 대한 절대적 매뉴얼을 제공하는 숱한 목소리들은 유효하지 않다. 배터리를 교환하거나 사용하지 않게 될 시기는 오지 않는다. 배터리로서의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당신은 계속해서 마모되고 충전주기나 성능은 떨어진다. 그러니 이제 찬이니, 배터리니 하는 이야기에서 벗어나자. 당신은, 그리고 당신의 몸은 배터리가 아니다.

 

2

이제껏 몸을 배터리로 설정하고 살아갈 때 맞닥뜨리게 되는 여러 문제를 뜯어보았다. 그렇다면 효율, 용량, 충전 시간, 교환 불가능 등 수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는 배터리로서의 몸이 아닌 어떤 다른 몸이 가능할 것인가. 이제껏 배터리는 안돼요!’라고 노래를 불러온 너는 그럼 건강과 에너지를 어떤 식으로 생각하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르지 않는가. 잠시 화를 참고 아래의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자.

네모난 상자가 하나 있다. 얼핏 네모난 배터리랑 비슷해 보이는 그 상자의 정체는 성냥갑이다. 성냥갑에는 당신의 이름이 쓰여 있다. 00. 00. 00. 00. 당신의 이름이 새겨진 이 성냥갑은 바로 당신의 몸이다. 성냥갑을 열어보자. 성냥갑을 열면 뭉덩한 성냥 다발이 들어있다. 몇 개인지는 셀 수 없다. 성냥갑을 열어 성냥개비 하나를 꺼낸다. 하루가 시작될 때마다 당신은 한 개비의 성냥에 불을 켠다. 하루의 시간이 흐르는 만큼, 성냥의 길이는 짧아지고 당신의 하루가 끝날 때 비로소 성냥은 꺼진다. 성냥갑은 당신의 몸이고, 성냥은 당신의 에너지다.

성냥갑이 배터리보다 아날로그한 감성이 있고 성냥이 전기 에너지보다 정감 있어 보이기 때문에 이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배터리가 아닌 성냥갑으로 당신의 몸을 사유할 때 기대되는 새로운 가능성과 틔게 될 당신의 숨통을 위해 감히 당신의 몸이 성냥갑이라고 쓴다.

배터리로서의 몸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배터리로 살아가면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던 문제도 있다. 그것들은 한 개인이 스스로의 몸을 다르게 사유한다고 해서 해결될 만큼 단순하지도 쉽지도 않다. 하지만 네모나고 차가운 배터리와 전기 에너지가 아닌 시시각각 불꽃의 모습이 바뀌는 성냥과 성냥갑으로 스스로의 몸을 상상할 때, 분명하게 다른 틈이 벌어진다. 태어날 때부터 배터리였던 한 사람이 자신의 몸을 달리 상상해보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생겨나는 작지만 단단한 바닥이 있다. 그렇기에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순간은 너무나 소중하다. 전기 에너지는 장치의 기능과 작동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진다. 그것과는 다른 조금 쓸데없고 조잡한 목적과 용도를 가진 성냥의 불꽃을 상상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 성냥들이 한두 개씩 켜질 때 경쟁과 성과, 노력 같은 단어들만으로 범벅된 과거와는 다른 내일이 따뜻하게 밝아올지도 모른다. 성냥이 아닌 다른 어떤 것도 괜찮다. 인내심과 시간을 가지고 당신의 몸을 요리조리 뒤집어 보고, 오늘과는 다른 내일을 상상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배터리를 대체하기 위해 성냥이 아닌 다른 것들도 괜찮다는 말과 성냥갑으로서의 몸을 상상하는 것이 가지는 분명한 장점은 양립할 수 있다. 성냥갑으로서의 몸은 배터리와는 달리 세상을 조금 더 복잡하고 물렁하게 비틀고 늘려볼 수 있다. 당신이라는 성냥갑과 나라는 성냥갑은 다른 크기와 모양을 가지고 있다. 채울 수 있는 성냥의 개수도 모두 다르다. 혹시 배터리도 모두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그러한 의문을 가졌다면 이 글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었다. 배터리이든, 성냥갑이든 당신의 몸을 다르게 사유해보려는 목적 말이다. 성냥갑을 채우고 있는 성냥은 길이도 모두 다르다. 성냥개비 끝에 묻어있는 인료의 양도 천차만별이다. 성냥불은 성냥갑마다, 하루하루마다 모두 다른 온도와 크기의 불꽃으로 그만의 길이만큼 타오른다. 당신의 하루가 천천히 기지개를 켤 때마다 성냥갑에 그어져 피어오르는 성냥은 대체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성냥이다. 여기까지 성냥갑에 대해 상상해보았다. 반드시 성냥갑이 아니더라도 된다. 당신이 배터리로서의 몸에 질문을 가지게 된다면, 성냥갑과 배터리를 비교하며 당신의 하루를 되돌아보게 된다면 그것만으로 꽤 기쁠 것 같다.

당신은 성냥갑 안의 성냥이 몇 개비 남아있는지 알 수 없다. 매번 70%, 50% 확인할 수 있는 배터리와는 달리 남은 성냥의 양은 셀 수 없다. 배터리 안의 전기에너지와는 달리 각각의 성냥개비가 피워낼 불꽃은 연속되지 않는다. 딱 하나일 뿐이다. 다음 날은 다음 날의 성냥개비에 맡긴 채 당신은 오늘의 성냥개비에 집중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일의 불꽃은 어쨌든 피어오를 테니 오늘의 성냥개비를 마구 태우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몸을 전기 에너지 따위로 채워 그것을 관리, 조절해 활용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자는 말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평생 운동을 할 필요도 없고, 보양식이나 영양제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또한 아니다. 당신은 배터리를 채워 다음 날, 그리고 또 다음 날을 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날 당신이 뽑을 성냥개비를 좀 더 아름답고 따뜻하게 피우기 위해 운동을 하고 그날을 풍성하게 만들 음식을 먹으면 된다.

배터리에 대한 믿음과는 달리 은퇴를 하거나 여행을 다녀온다고 해서 당신이라는 성냥갑을 교환할 수는 없다. 이후 성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있는 시기도 오지 않는다. 언젠가 성냥갑을 열었을 때 더 이상 성냥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만이 덩그러니 당신을 맞을 것이다. 당신이 배터리이든 성냥갑이든 그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배터리로서의 몸은 당신이 그 사실에서 도망칠 수 있는 핑곗거리를 줄 뿐이다. YOLO나 하루살이와 같은 단어처럼 극단적으로 당신의 생활양식을 바꿀 필요는 없다. 그저 당신의 몸이 언젠가 성냥개비를 꺼내주지 않아 불을 피우지 못하는 날이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계기로 삼는 정도면 충분하다. 그 사실이 당신의 팍팍한 삶에 조금의 여유를 가져온다면 그것만으로 괜찮지 않을까.

 

3

하루하루 힘들고 버거운 시간을 겨우 버텨내느라 몸이 배터리든, 성냥갑이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이 글이 떠들어대는 말들이 이 사회를 바꾸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지적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 글은 새로운 대안과 해결책을 통해 사회를 새롭게 직조하는 것에는 크게 이바지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 글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으며 한 자, 한 자 글을 눌러 담는 이유는 당연한 듯 숨겨지고 막혀있는 생각을 향한 길을 내고 싶어서다. 구조적인 해결책이 아닌 개인 차원의 변화만을 강조해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몸을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려는 시도들을 모으려 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다른 세계와 가능성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인식과 사유의 전환을 도모하자는 제안이 개인적 차원의 무책임하고 연약한 대응이라는 비판에는 동의할 수 없다.

배터리와 성냥갑, 전기 에너지와 성냥. 이 같은 비유는 단순히 흥미를 유도하고 글 쓰는 재미를 충족시키는 것 이상의 목적을 가진다. 사회적으로 빈번히 사용되는 언어는 조금씩, 하지만 확실한 속도로 개인이 자신과 세계를 사유하는 방식을 물들인다. 켜켜이 쌓인 침전물들은 쌓이고 쌓여 단단하게 굳어진다. 그리고 그 침전물 아래에서는 더는 그와 다르고 새로운 무언가를 상상할 수 없다. 매번 비슷한 이야기를 듣고 유사한 형태의 개념을 사용하는 나는 이전의 것을 이전처럼,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만 생각하고 말하게 된다. 물론 새로운 비유 혹은 은유도 그 퇴적의 과정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손택이 결핵과 암, 에이즈가 연약함, 감수성, 슬픔, 무력함을 나타내는 것, 냉혹하고 무자비하고 타인의 희생을 초래하는 것, 일종의 심판이자 인과응보, 영적이고 타락한 이들을 속죄하게 만드는 것[각주:1]으로 은유 되어온 맥락을 지적하고 은유의 중단을 촉구한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손택이 제안한 것처럼 종전에는 질병에 대한 은유, 건강과 몸에 대한 비유 자체에서 탈주하는 걸 목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먼저 그 퇴적의 과정에 새로운 틈을 벌리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바래고 바래 새로운 확장과 전환의 가능성이 사라져 버린, 매번 그 말이 그 말 같고 좋은 게 좋은 것 같다는 말만이 남아 버린 지금을 비틀어야 하지 않을까. 성냥갑이나 배터리라는 비유가 기존의 논의를 뒤집어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천천히 스며들어 언젠가는 분명한 균열로, 또 언젠가는 은유 자체로부터의 탈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며 지금 가능한 징검다리를 놓는다.

당신이 매일 소진되고 있다는 감각을 배터리라는 비유로 포착해 다르게 상상하는 것은 분명한 효과가 있다. 식상한 것을 새롭게 보려는 시도와 노력은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배터리로서의 삶에서 곧바로 탈출하자는 말이 아니다. 또한 당신의 몸을 성냥갑으로 상상하자는 이 글이 하루하루를 즐겨라따위의 자기계발서로 읽히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서로 다른 길이와 형태로 나름의 빛을 내는 성냥이 아른거린다. 고작 한 개비의 성냥을 상상하는 그 시간이 당신에게 어떤 틈을 벌릴 잠시 잠깐의 핑계 정도만 된다면 그것으로 다행일 것 같다. 성냥이 아닌 라이터, 형광등, 양초, 당신이 떠올리는 어떤 다르고 새롭고 쓸데없는 무언가가 그 핑계로 유효하기를 기대한다.



글 편집위원 재찬 paperlifer@naver.com

  1. 수전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2002), p68, p95 [본문으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