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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를 열면 브이로그가 쏟아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너도, 나도 자신의 일상을 영상과 소리로 담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올리는, 그런 시대 말이죠. 그에 반해 글로 자신의 일상을 편히 담아 빠르게 공유하는 일은 좀처럼 힘든 것 같습니다. 연희관 015B가 내놓는 한 학기에 한 번, 1년에 두 번 발간되는 긴 호흡의 글이라면 더욱 그러하겠지요. 그래서 이번에는 015B 편집위원들이 브이로그를 찍듯이, 블로그에 포스팅 하듯이 글을 써보았습니다. 자신의 가벼운 일상과 설익은 고민들을 조금은 편하게 드러내 보이고 싶었달까요. 과거 한 독자 모임에서 나온 후 잠깐이었지만, 015B 내의 유행어가 되었던 “이 글은 블로그에나 싣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라는 발언과 완전히 대치되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 결과, 공일오B-로그는 무작위로 선택한 네 개의 단어를 마치 송편에 든 팥알처럼 여기저기 끼워 넣은 편집위원들의 짧은 글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네 개의 단어는 정말 아무런 의도 없이 단어들을 빈 종이에 가득 적고, 눈을 감은 채 볼펜을 돌리다 ‘멈춰!’를 외쳐 뽑았습니다. 8명의 편집위원들은 같은 단어를 어떻게 달리 썼을까요. 산뜻한 마음으로 그 다름을 확인해보면서, 저희의 일상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읽은 네 개의 단어를 당신의 일상에서 발견하고 피식 웃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구요. 그럼, 시작합니다.
나루
75만원. 청년기본소득이라는 걸로 그만큼을 받았다. 서울로 향하는 버스 정류장 앞에는 한 카페가 있는데, 거기서 커피를 시키면 식빵이 공짜다. 식빵에는 땅콩버터와 딸기잼, 둘 중 하나를 바를 수 있다. 둘 중에 뭐가 더 칼로리가 높은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나는 살찌는 것과 배곯는 것 중에 뭘 걱정한 걸까. 커피는 항상 가장 저렴한 2,000원짜리 따뜻한 아메리카노다. 내가 아메리카노를 좋아하는 것과 아메리카노가 저렴하다는 것이 떼어지지 않는다. 나는 75만 원 중 얼마를 카페에서 썼을까. 공짜 돈을 받아서 이렇게 커피를 마시는 데에 쓰면 한심하다고 말할까? 더이상 보고 싶지 않은 586이나 동아리 선배들, 태극기 할아버지, 우리 학교 교수님, 면접관, 아마 마르크스도 그렇게 말하려나.
어딘가를 나가기 전에 일찍 도착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선지, 카페에 미리 나가 버스를 기다리는 것도 습관이 됐다. 어떤 날에는 서울에 나가지 않아도 이 카페에 온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와 이 카페에 와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여기는 내게 터미널이다. 내 한쪽의 세상은 여기서 끝이 난다. 75만원이 떨어져 가니 앞으로 여기에 자주 올 일은 없을 것 같다. 75만 원이 마치 내 유년기의 터미널처럼 느껴진다.
지난여름, 한 친구는 내게
“힘들어 보이네. 하지만 위로할 수가 없다. 앞으로 네 삶은 힘들어지기만 할 것 같거든”
라고 말해줬다. 확실히 그래 보인다. 다들 그때가 제일 좋았다고 말하지 않나. 그래도 버스 옆자리에도 승객이 있고, 저편 승강장에도 횡단보도는 있으니까 버스를 기다리는 걸까?
카페에는 가족들이 많다. 지금 내 옆에도 두 쌍의 부부, 그리고 그들의 가족인 아이들이 앉아 있다. 이런 사람들은 피자와 누렁소 이야기를 한다. 이런 대화는 너무 일상적이고 정상적이라서 평온하고, 그래서 낯설다. 내가 너무 삐뚤어졌나 싶다. 이 카페의 조명은 밝다. 하지만 서울행 광역버스 안의 조명은 칙칙하다. 얼마 전에 마지막 남은 동네 친구가 이사하면서 여기 남은 내 마지막 화창한 공간은 사라졌다. 동네를 돌며 시를 써 내려가는, 영화 같은 일상은 여기에 없다. 화창한 영화를 보려면 이 버스를 타고 화창한 곳으로 나가야 한다. 화창한 공간을 찾아 나는 30분 뒤에 버스를 탈 예정이다. 왕복 버스 요금은 아메리카노 3잔보다는 비싸지만, 최저시급보다는 싸다. 작년에 버스 요금이 500원이 올랐다. 그전에는 약속도 목적지도 없는데 그냥 버스에 몸을 싣고 서울로 향한 적이 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러지 않는다.
양화대교까지 뻗은 올림픽대로는 반듯하다. 모두가 같은 속도로 달리면 차가 막힐 리 없다고들 하는데, 출근 시간의 도로는 항상 꽉 막혀 있다. 아마 누군가가 제 속도로 달리지 못하고 있나 보다. 도로의 진입로와 출구는 정해져 있고, 길은 쭉 뻗어 있으니까 느리게 달리는 차는 잘못된 차다. 사고라도 나서 차가 막히면, 모두 누가 또 사고를 냈나 짜증을 내겠지. 어쩔 수 없다. 우리의 길은 화창한 곳을 향한다. 밤이 지지 않는 화창한 곳으로.
노랑
살짝 구운 빵에 딸기잼을 펴 발랐다. 떨어진 부스러기를 새끼손가락으로 콕콕 찍어 싱크대에 털었다. 사람이 변하는 게 재밌다. 어렸을 때는 딸기잼이 싫어서 엄마가 샌드위치에 딸기잼을 얇게 바르고 그 위를 피넛 버터로 두텁게 덮어도 귀신같이 알아채고 칭얼댔다. 자두와 천도복숭아를 먹으면 인상이 팍 찌푸려지고 콧구멍이 커지는 느낌이었다. 아빠는 신 음식을 싫어하는 게 꼭 할머니를 닮았다고 했다. 커피에 맛 들인 후로 갑자기 산미에 빠져버리면서, 유럽 여행을 가서도 신 맥주를 즐겨 찾았고 라임을 곁들이는 요리에는 그 즙을 듬뿍 짜서 먹었다. 언젠가는 정육점에 진열된 새빨간 육고기만 봐도 군침을 흘려서 친구들이 전생에 늑대였냐고 물을 정도였지만 전 애인을 따라 비건 지향으로 살아본 뒤로는 사랑이 식은 후에도 죄책감은 남아 핏빛 나는 육고기에만은 거의 손을 대지 못하게 됐다. 그러고도 다른 비인간 동물은 먹는 게 비겁한 정신승리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변화라고 생각했다.
사실 사람이 이렇게 변하는 게 엿 같다. 몇 년 만에 이토록 쉽게 변할 수 있는 게 개탄스럽다. 확실한 포부를 가지고 시작한 일에서 정반대의 결과에 도달해놓고는 멀쩡히 살아도 괜찮은 걸까.
한때는 정신적으로나마 나름 준-운동가였다. 여성주의, 퀴어, 빈곤 이슈를 넘나들며 인권 단체에서 죽 봉사를 했고 여러 활동가와 허심탄회하게 술잔을 기울였다.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갔을 때는 백인 여자들이 비거니즘과 환경 운동만 하면 다른 세계 문제와 오리엔탈리즘 따위 몰라도 자기가 최고 ‘깨시민’이라고 생각하는 게 꼴 보기 싫어서 자주 싸웠다. 여성혐오적인 학과 문화에 반기를 들었고,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 외국인에 대한 혐오발언을 했을 때는 페이스북에 그를 규탄하는 글을 써서 좋아요를 1000개 이상 받기도 했다. 기득권적인 모든 것에 대한 반감과 ‘투쟁’에 대한 사명감이 있었다.
로스쿨을 갔다. 졸업 직후에 전업 활동가가 되고 싶었지만,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려면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 우선 힘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믿었다. 운 좋게 붙은 로스쿨은 아무래도 대한민국 엘리트의 최종적 성공 코스로서의 느낌이 우세했다. 인권과 관련된 비장함을 지닌 사람들도 있었지만, 문제없이 외고에 진학하고, 또 문제없이 서연고서성한으로 진학하고, 그것이 오롯이 자신의 노오력만으로 일구어낸 성취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둘 중 어느 타입이든 세상을 바꾸겠다는 결의를 다지긴 매한가지였다. 1학년 시험 등수가 낮게 나오자 인권법학회 선배들은 나를 뽑아주지 않았다. 페미니즘이 리부트되자 이퀄리즘과 형식적 평등 따위의 이야기가 진지하게 오가던 교내에서 “여성들의 피해 의식”과 “남혐”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들에게 “시선 강간”이라는 표현을 꺼냈다가 ‘강간’의 사전적 의미를 고려하면 그 표현은 말이 안 된다는 구구절절한 설명을 들어야 했다. 성적이 애매하고 ‘비주류’인 나를 얕봤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논리도 논리지만, 그들이 집착하는 유일한 지표인 성적과 순위로도 눌러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2학년이 되자 예전에 같이 인권단체 활동을 하던 친구들은 1년에 한두 번 보는 게 고작이었고 사회학과 대학원을 다니던 애인과는 시간이 잘 맞지 않아 헤어졌다. 사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만날 때마다 내가 학교에서 질리도록 겪는 무시와 분노에 대해 말하면 그러니까 로스쿨을 간 자체가 문제야- 라며 딴지를 거는 게 문제였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너는 이미 예전과는 다른 사람일 거야. 이 세계 안의 문제들을 이야기하는데 세계 자체가 문제라고 쉽게 말해버리다니. 그러긴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돌고 도는 이야기에 자꾸 짜증이 나고 며칠씩 평정심을 잃어서 그만 만나자고 했다. 식사를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우기 시작했고, 시험 기간에는 일주일씩 같은 옷을 돌려 입는 게 익숙해졌다. 법과 판례를 달달 외우다 보니 “장발장이 빵 하나 훔쳤다고 19년 형을 받은 게 말이 되냐”는 어린 사촌의 지적에도 ‘장발장의 경우 A죄로 2년, B로 최대 5년 추가......’라며 반사적으로 법에 따르면 합당한 판결이었는지 먼저 계산해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다 3학년이 되었을 때, 시험을 며칠 앞두고 뉴스를 들었다. 사고가 났고 몇백 명이 물에 빠졌다고 했다. 심장이 철렁했다. 몇 시간이 지나니 해경이 모두 구조했다고 했다. 아니, 구조된 것은 오보라고 했다. 첫 몇 시간 동안은 아예 구조 작업이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국가가 빠르게 대응하는 중이라고 했다. 솔직히, 중요한 기간이었다. 시험 때문에 페이스북은 이미 비활성화되어 있었고, 인터넷도 잘 열어보지 않았다. 기사를 찾아보면 괜히 흔들릴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재난을 믿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 무슨 시댄데,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뉴스 봤냐는 친구들의 카톡에도 대충 답을 남겼다. 정신을 다잡아야 했다. 등하교할 때도 이어폰을 끼고 페이스를 조절했고, 그 외의 시간엔 원룸에 처박혀있었다. 그 결과 중간고사에서 순위권에 들었다.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부모님에게서 급한 전화가 와 본가로 내려갔다. 지하철을 타자마자 오랜만에 폰 데이터를 켜서 네이버에 들어가 보니 메인 화면 한가득 배 사진뿐이었다. 내가 잠수한 8일 동안 사람들이 죽었다. 많이 죽었다. 그새 2년 전 내가 떨어진 인권법학회에서는 정부를 규탄하는 연서명을 진행했고, 일부 학생들은 곧바로 현장에 나가거나 대책위원회를 꾸렸다. 피해자와 유족들을 찾아가 함께 분노하고 울고 그들을 대리하겠다고 하는 변호사들이 있었다. 무거운 것이 뱃속을 끈적하게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이 얼어붙어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나는 너무 늦었다.
그날 집에서는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는 그 해 오랜 교사 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임을 했다. 당장 돈을 벌어야 하게 됐다. 무기력하게 부서진 마음을 어설프게 주워 안고 취업 준비를 했다. 유달리 하늘이 칙칙하던 날 한국 3대 로펌이라는 곳에 붙었다. 부모님은 조금 무리를 해서 조부모와 오촌 어른들까지 모시고 뷔페에서 축하 파티를 했다. 질리는 과거를 외면하고 싶은 마음에 많은 친구를 끊어냈다. 아무리 비겁해져도 동아줄처럼 남기고 싶은 둘만 빼고. 한 애는 소식을 듣고서 얼떨떨한 표정으로 축하해주다가 사실 조금 의외긴 하다고 말했다. 집안 경제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니 친구는 응, 그런 거 같았어. 나중에라도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라고 했다. 하지만 나중에? 성적 따위를 위해 남들의 절박한 죽음을 무시할 수 있었던 그때 이미 나는 영영 무언가를 잃은 것은 아닐까. 8일이 지난 그때도 피해자를 위해서는 뭐라도 시작할 수 있었겠지만 이미 나는 너무 먼 길을 흘러온 것 같았다. 죄스러워서 피하다 보니 점점 비겁해지고 더욱더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가끔 옛 친구들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악몽을 꾼다. 시선에 집어 삼켜질 때쯤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난다.
공익변호사를 하는 친구들, 퀴어퍼레이드에서 부스를 운영하고 인천공항에서 이집트 난민을 지원한 친구들의 SNS 게시글을 보았다. 댓글에 “너무 멋지다” “좋은 일 하고 있네”와 같은 말이 넘쳤다. 너희도 엘리트면서. 아니라는 듯이 깨끗하게 살고. 나만 못돼 처먹고 더러운 사람인 것처럼. 그 애는 공익변호사지만 남편이 서울대병원의 외과 의사였다. 같은 공익단체에서 일하는 다른 친구는 부인이 로스쿨 동기인 김앤장 변호사였다. 부부가 둘 다 공익변호사의 길을 걷는 경우에는 벌이가 넉넉하지 않으니 투룸이나 작은 아파트에 다른 친구 부부와 모여 사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영혼은 죽고 의미 없는 습관으로서만 남은 내 마르크스주의적인 사고방식이 그들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기만자들로 단언하고 싶어 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자신을 지키면서도 남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면 안 된다. 나는 둘 다 실패했으면서. 사실은 그들이 내가 잃은 무언가를 꽉 움켜쥐고 살아가는 모습을 볼수록 열패감과 죄의식이 짙어져서 미워하고 싶은 것임을 알았다. 끔찍한 나라도 지키고 싶어서 생겨나는 못난 증오였다. 다 내가 잘못한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억울하다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창피함이 더욱 커서 아무에게도 이 썩은 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다.
잡생각을 떨치려 커피 한 잔을 내리며 새로 들어온 케이스 문서를 집어들었다. 의뢰인은 어느 돈 많은 집 아들이었다. “취해서 길에서 마주친 여자와 합의하에 성관계를 맺었”는데 성폭행으로 고소당했다. 페이지를 넘겨보니 여자는 발달장애가 있다고 적혀있었다.
빨간 잼을 잔뜩 얹은 빵을 베어 물었다.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두별
수업에 가긴 해야 하니, 힘겹게 일어난 아침. 퉁퉁 부은 얼굴과 아직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 정신머리를 찾아 헤매며 준비한다. 씻고 나와도 왜 이리 피부가 칙칙한지 의문을 가지며 거울 앞에 앉아 보습용 로션을 찍어 바르고, 딸기잼을 가득 묻힌 토스트를 입에 욱여넣는 과정은 익숙하다. 이젠 보기만 해도 아주 마음이 꽉 찰 것 같은 저 두꺼운 전공 책을 백팩에 옮겨 넣는 일만 남았는데, 책상 옆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는 책 한 권이 문득 눈에 들어온다. 이름, 그 네 글자 밖에 안되는 문자로도 수많은 전공생을 울게 한다는 사람의 유명한 저서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꽉 찰 것 같은 건 사실이지만 더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진심에 가깝기 때문에, 나는 몰래 마르크스의 책을 책장에 꽂아 넣었다. 오늘 하루 정도는 우리 서로 안 보고 지내도 괜찮을 것 같아요, 미스터 마. 여하튼, 그렇게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제 막 20대의 초입에 들어선 대학생으로서 가질만한 고민거리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때, 의외로 답을 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얼마 전에야 알았다. 물론 이게 동년배의 다른 인간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힘드니? 저 밑도 끝도 없는 따스한 질문에 결국 나는 언제나처럼 웅얼거리다가 그냥, 뭐, 그렇지, 등의 완전치 못한 말들로 끝을 맺는다. 어설픈 고통의 코스프레인 건 아닌지 싶어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경험해본바, 완벽하지 못한 답변이 주는 효과는 생각보다 괜찮다. 고갤 들어 바라본 대화상대의 표정에는 아련한 눈빛이 그득하다. 아이고 저런, 너는 너의 고민을 언어화하기 힘들어할 만큼 큰 걱정거리를 안고 사는가 보다. 흐릿한 목소리와 애매한 단어선택이 완벽한 시너지효과를 발휘한 셈이다.
무거운 책이 든 무거운 백팩을 매고 캠퍼스를 향하는 길에서 나는 그 고민과 대답 사이의 간극에 대해 생각한다. 머릿속을 매일같이 맴도는 지긋지긋한 걱정 더미 사이에서 적당한 단어 하나 뽑기조차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다. 이 상황, 이 장소, 그리고 이 시간, 게다가 당신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이 맞는 일인지 생각하는 것은 결국 또 다른 고민거리인 셈이었고, 고민과 고민에 쌓여 압사당하지 않기 위해 적절히 모면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니까 사실, 내 고민을 언어화하기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라, 내 고민으로부터 나를 방어하기 위한 최고이자 최악의 방식이었다.
강의실에 도착하자 나만큼이나 피폐해 보이는 동기의 얼굴이 보인다. 과제로 제출해야 할 리포트 때문에 밤을 새웠다는 동기의 말에 저절로 위로의 말이 툭툭 튀어나간다. 어떡하냐, 조금만 더 힘내, 피곤하지? 내 말에 피식 웃으며 아니라고, 참을만하다며 눈을 부릅뜨는 맞은 편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또다시 나를 떠올린다. 아무래도, 셀 수 없는 고민과 걱정 사이에서 나와 당신들이 살아가는 게 쉽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베개
모구야, 하루가 안 끝나.
미나의 책을 자주 훔쳐보는 옆집 모구는 바보 같은 놈과는 더이상 보고 싶지 않다며, 마르크스는 원래 모든 것을 의심한다고 했다. 나는 이름이 마르크스라니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다. 이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또각, 또각. 수빈이가 책상에 앉아 프라모델을 만들던 소리를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수빈이는 프라모델을 잘 만들었다. 수빈이의 생일이거나, 시험을 잘 봤을 때. 어머니께서 건담 프라모델을 하나씩 사 주셨다. 부모님이 교회에 가신 주일의 점심에 수빈이는 책상에 앉아 작은 부속품들을 떼어내고 붙였다. 수빈이의 손바닥보다 조금 작았던 플라스틱판은 몇 시간이 지나면 로봇이 되었다. 나는 그동안 창가에 앉아 따뜻한 햇볕으로 눈 비벼 가며 그것을 구경했다. 집중한 수빈이는 입을 반쯤 벌린 채 프라모델을 만들다가도 내가 부르면 어김없이 이쪽을 돌아보곤 했다. 그때 수빈이의 눈은 강바닥 가장 깊은 곳에서 골라낸 조약돌 같았다. 집중한 눈이 예뻤는데. 깨트리고 싶지 않아 그저 시치미를 떼면 수빈이는 웃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칙칙한 날에는 함께 잠을 오래 잤다. 나는 수빈이의 옆구리에 붙어 부비적거리기를 좋아했다. 수빈이는 이런 날은 덤 같은 날이라고 했다. 사실 오래전부터 덤이었을 수도 있다고,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덤은 뭐지. 모구는 커다란 밥 주머니에 붙어 오는 작고 맛있는 치킨 간식이 덤이라고 했다. 난 치킨 간식을 먹을 때마다 기분이 좋았지만 수빈이의 덤은 그런 게 아닌 것 같았다. 가끔 수빈이의 귀랑 목이 빨개지면 나는 수빈이를 부르며 어리광을 부렸다. 그날의 눈은 가슴에 콕 와서 박혔다. 우리는 치열한 추격전을 끝낸 주인공들처럼 머리를 맞대고 가만히 비가 그칠 때까지 엎드려 있었다.
식탁에서 딸기잼 바른 빵을 오물거리던 수빈이를 생각했다. 어릴 때의 수빈이는 다리를 달랑거리며 먹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두 발을 땅에 붙인 채 먹었다. 시종일관 나풀거리던 줄무늬 양말이 좋았는데... 더이상 잡기 놀이를 즐기지는 않았지만 난 밥을 먹다가도 몇 번씩 수빈이의 발을 쳐다보았다. 발이 바닥에 닿을 만큼 크고 나서도 수빈이는 가끔 두 발을 흔들며 먹었는데, 그런 날마다 수빈이는 목에 카메라를 걸고 오래 나갔다 오곤 했다. 돌아온 수빈이의 옷에서는 고소한 햇볕 냄새가 나기도 했고, 짭조름한 바닷바람 냄새가 나기도 했으며, 물안개 같은 달빛의 냄새가 나기도 했다.
수빈이의 서랍 아래쪽에는 내가 어릴 때 하던 파랑 목걸이가 있었다. 입학할 때 선물 받았지만 한 번도 하지 않은 비싼 시계와, 삼 년째 쓰는 일기장, 편지 봉투에 담긴 편지 한두 개와 쪽지 여러 장이 있었고 잘 깎기만 하고 쓰지 않은 연필이 스무 자루 정도 있었다. 수빈이의 부모님은 내 하루가 견딜 수 없을 만큼 길어지던 날 수빈이의 서랍을 정리했다. 수빈이가 아닌 다른 이가 그 서랍을 연 첫 번째 날이었다.
나는 미처 정리되지 못하고 책상 위에 올려진 하얀 종이쪽지를 쳐다보았다. 끝자락이 여러 번 접었다 편 듯 헤져 있었다.
….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겠지
그때는 참지 말자 수빈아
우는 거 참지 말자
아침마다 가방을 챙기는 수빈이에게 참견하는 일,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리면 현관으로 걸어 나가는 일, 매일 밤 컴퓨터를 하는 수빈이의 옆에서 조는 일, 수빈이의 발치에서 웅크리고 잠드는 일, 사랑스러운 하루의 모든 일, 일, 일…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도 수빈이가 오래 들어오지 않은 날이 있었다. 윗집 문 닫히는 소리와 대화 소리, 강아지 짖는 소리, 밤공기에 부유하는 삶들 속에서, 오렌지빛 센서등이 몇 번이고 켜졌다 꺼지는 동안 수빈이는 뭘 생각했을까. 덤을 생각했을까, 또각거리던 소리를 생각했을까.
종이 위로 남아 있던 작은 물자국 위로 발을 얹었다. 마음과 뼈가 욱신거렸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울리지 않는 도어락을 한 번 노려보다 침대 끝자락으로 올라가 몸을 웅크렸다. 울지 않았지만 운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
연자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지. 그러니까, 나는 혼자 이삿짐을 옮기다가 넘어졌다. 비가 오면 칙칙한 건물들이 웅웅 울고 있는 듯한 그 동네를 떠서, 새로운 집에 빨리 짐을 풀고 싶었다. 몇 번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사이 어둠이 어스름하게 깔리고, 노란 가로등이 곳곳에 켜졌다. 내일 알바가야 하는데, 언제 다 정리하고 자지. 마음만 급해서는 하나씩 옮길 걸 두 개, 세 개씩 집어 들었다. 가까스로 한껏 안고 있던 짐이 결국에는 계단 밑으로 와르르르 쏟아지면서 꼴사납게 넘어져 버린 것이다.
박스가 토해낸 것들이 내 발 언저리부터 저 끝 계단까지 나뒹굴었다. 마르크스니, 기든스니, 더이상 보고 싶지 않았던 두꺼운 사회학 전공 책들이, 상자 안에 아무렇게나 욱여넣었던 그 편지들이, 언제부터 안 썼는지도 모르는 일기장들이, 빛이 바랜 사진들이, '술 그만 마시고 건강해지자' 함께 다짐을 적은 포스트잇이, 보지 않으려 덮어뒀던 것들이, 내가 도망쳐 나오고 싶었던 그 모든 순간의 것들이 온통 튀어나와 내 앞을 가로막아버린 셈이었다. 거짓말처럼 그때의 기억들이 나를 압도했다. 잊었다고 생각할 때마다 더욱 선명해져 가는 듯했다. 발밑의 부서진 우리의 순간들을 어쩌지도 못하고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차라리 그 동네에 버려버리지. 아파서 줍지도 못할 거 왜 죄다 바득바득 지고 왔는지, 미련한 나를 탓하며.
작은 것 하나에도 쩔쩔매며 어찌할 용기도 없는 주제에, 콩알만 한 마음에 삐죽한 잔정 가득 채우고는, 나는 늘 너를 그린 것이다. 먼저 좁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달아나지도 못한 채 미운 순간 곱씹으며 그 언저리를 빙글빙글. 온갖 쾨쾨한 마음들에 사로잡혀 있는데, 후둑후둑 비가 떨어졌다. 어찌할 줄 몰라 무서워 집지도 못하던 것들을, 이젠 젖어 번져버릴까 봐 무서워 나는 마구 집어버렸다.
어쩌지. 졸업한 너가 보고 싶었다. 낯가리는 성격까지 닮아 개강 첫날 겨우 한마디 나누고는 어느새 그 동네에서 일 년을 살며 둘도 없는 친한 친구로 지낸 시간들이 스쳤다. 같이 비 맞으며 학교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너가 좋아하는 딸기잼 한껏 바른 식빵을 나눠 먹고 싶었다. 구질구질한 서로의 연애사부터 철없는 고민들까지 주고받으며 킬킬대던 것들이 그리웠다. 어찌해도 좋으니 일단 젖지만 말자. 머릿속에 하고픈 말들이 가득해졌다. 그동안 그렇게 떨어지지 않았던 말들을 전하고 싶어 온 입안이 바싹거렸다. 얼른 다시 입이 굳어버리기 전에 너가 좋아하는 그 빵집 딸기잼을 사둬야지. 짐은 나중에 정리하자.
응팡
안 오시려나 보다, 하고 노트북을 켰다. 원래 수리 기사님이 오시기로 한 날이다. 몇 주 전부터 샤워기 줄을 쇠가 떨어져서 투명한 호스가 드러났다. 혹시 알려나? 투명한 호스는 쉽게 구부러지고, 그럴 때마다 물이 뚝뚝 끊기는걸. 몇 주간 호스가 끊어지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다 드디어 고쳐야겠다고 결심했다. 뜨거운 물이 안 나올 때도, 방 전구가 클럽 조명마냥 요란하게 번쩍일 때도 버티다 도저히 안 될 때가 되어서야 항복하듯 수리를 부탁했다. 혼자 사니 이 정도 불편은 감수할만하고, 집 밖에서도 할 일이 너무 많고, 건물주에게 전화하는 일이 왜인지 껄끄러워서다. 술 먹고 방문을 두드리고, 보증금을 안 내주고, 낡은 벽지도 안 갈아준다는 악명높은 임대인에 비하면 이 건물주에겐 감지덕지해야 하나. 뜨거운 물이 잘 안 나온다니까 보일러를 바꿔줬고, 전구를 갈아도 번쩍임이 멈추지 않는다고 하자 조명을 LED로 바꿔줬다. 샤워기 줄이 끊어졌다고 말했을 때도, 곧바로 내일 오전 중에 수리 기사님을 보내겠다고 했다. 건물주의 호쾌함에 감사하다가도 뭐 어차피 자기 집인데, 하고 만다.
기사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 9시에 일어나 옷을 대충 챙겨입고 바닥에 널린 짐을 대강 치웠다. 5시간 전까지 마시던 술이 올라와 속이 메슥거린다. 씻는 일도 화장실을 가는 일도 기사님 오신 뒤로 미룬다.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벨소리가 눌린다고 생각하면, 아득하다. 12시가 돼도 기사님이 안 오신다. 건물주에게 전화할까 망설이다 딱히 할 말이 없어 오늘은 안 오시려나 보다, 하고 노트북을 켰다. 유튜브에 들어가서 스토브리그 요약본을 볼 생각이다. 냉장고에 딱히 먹을 것도 없어 어제 딸기잼 대신 산 블루베리잼을 치아바타에 아무렇게나 발랐다. 이 정도면 꽤 만찬이다. 빵가루를 책상에 잔뜩 흘리며 먹고 있는데 벨이 울린다. 띵똥. 현관 앞에 부부처럼 보이는 노인 두 분이 서 계신다. 칙칙한 색깔의 공구함과 함께.
“샤워기 고치러 왔는데요.”
앗 오셨구나. 인사를 하고 부랴부랴 방으로 두 분을 안내한다. 7평짜리 방 한 칸. 멈춰있는 화면, 식탁에 널브러진 식빵과 딸기잼. 내게 다른 방이 주어진다면 그 방으로 건너가고 싶었다. 마실 거라도 사둘걸. 드릴 것도 없어 더 머쓱하다. 두 분 중 한 분은 새 샤워기 호스를 들고 화장실로 가셨고, 한 분이 내 방을 스캔하기 시작한다. 책과 자료가 엉망진창 쌓여있는 책상에 고정된 시선. 한참 읽다 더이상 보고 싶지 않아서 쓰다 멈춘 내 자소서, 사회정책 수업 때 읽었던 마르크스 『자본론』, 애인이 지난주 써준 편지. 그에게 내가 읽히는 기분이 들어 귀가 뜨거워졌다. 그는 한참을 더 방을 살피더니 인덕션에 올려둔 튤립을 보고 말을 꺼냈다. 새벽에 술집에서 나오다 받은 튤립이다. 아무렇게나 던져둬서 거기 있는 줄도 몰랐다.
“어유, 내가 집주인 엄마예요~. 나는 불 위에 뭘 안 놨으면 좋겠는데~ 고양이가 올라가서 불이라도 나면 어떻게 해~.”
나 고양이 안 키우는데…. 죄송하다고 해야 하나. 안 그러겠다고 해야 하나. 입 밖으론 아아... 넵, 말고 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쏴 아아. 샤워기 수리가 끝났다. 다시 현관 앞 나와 두 분.
“죄송해요.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어서 드릴 게 없네요.”
“아니에요. 내 손녀딸 같아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튤립 포장을 까서 화병에 꽂아두고 식탁에 앉아 먹다 만 빵을 마저 먹는다. 좁은 방이 더 답답하게 느껴진다.
재찬
세상이 원래 그래라는 말
자취방 책상 위에 노트북이 올려져 있다. 아니, 몇 달 전 사둔 거치대 위라고 해야 좀 더 정확할까. 자주 찾아오는 두통이 노트북을 오랜 시간 들여다봐 목에 무리가 갔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산 거치대였다. 노트북을 거치대에 올리면 키보드가 비스듬해져 타자를 제대로 칠 수 없었고, 목 건강을 위해 손목 건강을 포기하는 짓은 너무 어리석었다. 그 때문에 노트북에 따로 연결하는 키보드까지 함께 구매했다. 다른 이유가 없었던 건 아니나 노트북 거치대에 이어 키보드까지 산 가장 큰 이유는 글을 쓰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노트북 옆에 놓인 깨끗이 씻어 말린 딸기잼 병에는 여러 자루의 펜과 연필이 담겨 있고, 그 옆으로 책들이 꽂혀있다. 대학에서 강의를 듣기 위해 샀던 여러 사회과학 서적 옆으로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소설과 시집이다. 소설과 시들은 나를 매료시켰고, 그 작품들을 통과한 난 나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문학은 다른 종류의 글과는 다른 모양과 냄새, 색을 품고 있었다. 한 소설가가 어디선가 이야기했듯 문학은 직선이 아닌, 여러 겹의 곡선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번 반복해 다르게 말한다. 작가가 나름대로 치열하게 고민한 언어로 느리게 표현되는 여러 삶과 세계는 분명 다른 말하기나 이야기와는 상이한 효과와 매력을 품는다.
문학 작품들을 차곡차곡 읽어가면서 조금씩 취향이나 관점 비스무리한 것들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취향과 관점과는 별개로 최근 인기와 인정을 동시에 얻는 작품들에 대한 관심 또한 함께 키워갔다.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평가받는가. 누구의 소설이 많이 읽히는가, 이런 질문들은 소설을 끄적이는 나에게 당연히 중요했다. 동경과 질투의 대상이었고, 때로는 참고서가, 때로는 반면교사의 용례가 되기도 했다. 그런 측면에서 윤이형이라는 작가가 쓴 소설은 내 취향이자, 동시에 동경과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참고서였다.
시대가 바뀌면서 문학작품이 세상에 나와 빛을 보는 경로와 방식은 이전보다 훨씬 다양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작품을 공모받고, 심사해 상을 주는 문학상의 권위는 여전하다. 과거보다 그 힘이 다분히 떨어진 건 사실이나, 여전히 문학상을 통해 등단하는 작가들은 많다. 독자들 또한 자신보다 많이 알고 좋은 감식안을 가졌다고 간주하는 ‘권위자’들에게 선택받은 작품에 신뢰와 매력을 느낀다. 심사와 선정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얼마나 바람직한지는는 잠시 차치하더라도, 여전히 그 같은 방식의 문학상 수상은 상당한 힘을 지니고 있다.
인재의 등용문이라는 차원에서 문학상은 분명 긍정적인 기능을 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문단이나 카르텔 등의 단어와 얽혀 부정적인 영향력도 함께 행사하고 있다. 최근 불거진 윤이형 소설가, 이상 문학상, 문학사상사로 이어지는 거미줄이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이 짧은 글에서 그동안 벌어졌던 일련의 사태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거칠게 요약해보자면, 수십 년에 걸쳐 중견 소설가를 대상으로 이상 문학상을 수여 해온 문학사상사가 작가의 작품에 대한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지 않고 부당한 방식으로 이익을 편취해왔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그 과정에서 2019년 이상 문학상 대상 수상자였던 윤이형 소설가는 “수치심과 자괴감”을 토로하며 절필을 선언했다. 궁금하다면 구글에 윤이형이라는 세 글자를 검색해보라.
윤이형 소설가는 입장문을 작성해 문학사상사에 사과와 해결방안, 개선책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입장문 가운데에서 이처럼 말한다.
“수치심과 자괴감을 견딜 수 없었고, 이제 더 이상 문학계에서 어떤 곳을 믿고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모르는 곳에서 우수상 작가들의 권리 침해가 일어났는데 저는 그 사실을 모른 채 거기에 일조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상황을 무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작가가 마음 놓고 어느 곳과 일을 하고 작품을 발표할 수 있습니까. 대체 무엇을, 어떤 인정과 평가를 신뢰할 수 있습니까.”
공일오비 이번 호에 실린 ‘’을 쓰기 위해 산문집 한 권을 읽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책에 실린 한 편의 글에는 작가가 여러 ‘선생님’들과 술을 기울이며, 노래를 불렀던 이야기를 담겨있었다. 그의 글에는 동료와 그 선생님들에 대한 애정이 가득 담겨있었지만, 그 글을 읽은 내가 감지한 건 이유 모르게 피어난 내 안의 불편함이었다. 술을 먹지 않는 나, 누군가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걸 경계하는 나와 그들 가운데 건너지 못할 것만 같은 강이 흐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까. 나는 윤이형이 쓴 여러 권의 책이 듬성듬성 꽂힌 칙칙한 책장 앞에서 그의 절필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앞선 산문집의 선생님과 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작품 활동을 영구히 그만두”겠다는 누군가의 비명과 산문집 속 술자리의 노래가 왜 겹쳐 들렸을까. 윤이형이 자신의 작품이 “훼손”되어버렸다고 말했던 이유가 그 겹쳐짐에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내게 그건 핑계이자 실패한 이들의 넋두리라고 쓴소리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윤이형의 글을 목격한 이후 습작을 단 한 자도 쓰지 못한 나는 그렇게만 생각할 수 없다. 아주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써온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무언가를 써보려고 애쓰던 난 그런 내게 되물었다. 내가 그들 사이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벌써 겁먹고 걱정하며 무서워하는 건 도망치는 것에 불과하지 않나. 아직 아무도 네 글을 읽어주거나, 출판하거나, 심사하지 않는데 이 무슨 설레발이냐. 나는 과연 그 선생님들과 편히 앉아 술잔을 기울일 수 있을까. 술을 먹지 않는다는 나를 내려다볼 출판사 회장의 눈빛은 어떨까. 나처럼 불안해하는 이들이 어딘가 또 있지 않을까.
문학이라는 번지르르한 탈을 쓰고 벌어진 추악한 일들이 이미 너무 많이 쌓여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문단_내_성폭력, #참고문헌_없음을 통과하며 이전보다 나아졌어야 할 그 세계는 #문학사상사_업무_거부로 건재함을 증명했다. 인생은 실전이니 독하게 살라는 충고, 원래 세상이 그런 것이라는 지적 같은 것을 계속해서 빗겨내던 문학이 결국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책장 한구석에 위시하듯 꽂혀있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꿰찬 소설과 시들이 훼손되는 모습을, 그리고 ‘그렇지, 세상은 원래 그런 거지’라며 한숨 쉬는 이들의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누군가를 의심하거나, 불안하게 만드는 지독한 짓거리들은 멈춰져야 한다. 문학은 가장 앞장 서 세상은 원래 그렇지 않음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믿는다.
희
함께 밥을 먹던 중 친구가 내게 3행시를 해보라며 ‘딸기잼’이라는 단어를 던졌다. 그와는 심심할 때면 곧잘 삼행시를 짓던 나는 “딸기잼? 쉽지 않아 보이는데...”라 답하며 잠시 생각할 시간을 번다. “음... 딸... 이 집에 올 날만 오매불망, 기다리고 기다렸더니만, 잼... 잼... 잼으로 어떤 말을 만들 수 있지?” 시원찮은 미완의 결과물이 그에게도 마뜩잖았는지, 그가 내 말을 끊고는 “잼이 없네”라 말하며 삼행시를 마무리 지었다. 그의 선방에 당황한 나는 이내 머쓱한 웃음을 보이며 마저 식사를 한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밥을 퍼서 한 숟가락, 두 숟가락 입에 가져다 넣는다. 인터넷에서 유명한 맛집답게 분명 맛있고, 양도 적지 않아 배도 차오르는데 그 이외의 감각은 따로 생겨나지 않는다. ‘맛’에 대한 욕구가 작은 탓인지, 나는 암만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행복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가게의 마라샹궈를 먹고자 집에서 두 시간 거리를 한 걸음에 달려오는, 심지어 한 달에 열 번도 넘게 오는 친구를 보면 참 신기할 따름이었다. 내게는 음식 먹는 게 종종 귀찮은 과업으로까지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는 그 과업을 달성하는 데에 의지를 가지고 노력을 한다. 그의 식생활은 다채로웠고, 나의 식생활은 칙칙했다.
칙칙한 게 어디 식생활뿐일까. 어쩌다 연희관 1층에 있는 전신거울을 지날 때면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무채색으로 가득한 내 모습을 보게 된다. 자취방에 있는 옷장을 들여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칙칙한 먹구름만 가득하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하얀 티를 입고 등교했더니 마주친 친구가 해준 말이 떠오른다. “매일 검은 옷만 입고 다니다가 하얗게 입으니 성격도 밝아 보이는 게 다른 사람 같다"라며. 어릴 때부터 남의 눈에 띄는 게 싫었기에 굳어진 습관은 전혀 의도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리도 무섭도록 내 안에 남아있다. 조금은 더 밝은 모습으로 나를 내비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내일 아침에는 짙은 파란색의 목도리를 둘러메고 밝은 바지를 입어봐야지.
지금의 우리네가 19세기의 마르크스를 아직까지도 논하는 것 마냥, 지금의 내가 어린 나의 칙칙함을 아직까지도 입어오는 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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