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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비평

[들여다보기] 사랑에 관한 소고(小考)

연희관공일오비 2020. 10. 6. 09:55

사랑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


사랑, 사랑, 사랑


눈을 뜨고부터 감기까지 세상이 사랑을 부르짖는 소리를 끊임없이 듣는다. 방 안에 가만히 앉아(사실은 누워서) SNS를 확인하다가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한 필수적인 제품”이라는 문구를 내건 광고를 마주하기 일쑤다. 명절이 다가오는 시기에는 “연애를 (언제) 하냐”는 질문이나 “결혼은 (언제) 하냐”는 질문을 피하기 어렵다. 연애한다는 것과 사랑을 한다는 것이 동의어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나 또한 남들과 다르지 않은 사랑을 하기 위해 연애 시장을 부유한다.


사랑을 말하는 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내게 '사랑'이란 단어는 언제나 무겁고 불편하기만 했다.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이야길 들으면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나는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고, “좋아한다”는 이야기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누군가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건네면, 진심을 담지 않고도 사랑한다고 말해야 했다. 사랑이란 그런 것으로 생각했다. 내게 사랑은 '예의'와 다르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사랑'은 가족 간의 사랑과 이성 간의 유성애적 사랑 뿐이기에, 내가 느끼는 감정들은 철저하게 분류된 두 가지 사랑 안에 포섭될 수 없었다. 사랑에 관한 다양한 언어를 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을 폴리아모리 바이 섹슈얼 시스 젠더 여성으로 정체화할 수 있었고, 나아가 언어로 포섭되지 않는 영역에도 내가 전유하는 독특한 사랑의 색깔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 사랑, 사랑


입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소리내보다, 마음으로도 동그랗게 말아 굴려본다. 머릿속에 사랑이라는 글자를 띄워 어디로 흘러가는지 가만 들여다본다. 내 사랑은 언제나 하나로 모였다. 자아와 타자는 결코 하나로 합치될 수 없다고 굳게 믿으면서도 온 힘을 다해 다가가 사랑하고픈 이가 있다. 나의 생을 바치며 “사랑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존재다. 그는 언어만이 사랑을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라는 나의 굳은 믿음을 부수며 내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다. 인간이 어떤 존재를 열렬히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신화인 줄만 알았다. 그는 내게 그러한 경험을 선사해준 첫 번째 존재다.


그는 나의 반려묘(伴侶猫)이다.




내게는 반려(伴侶)가 있다.


나는 2017년 4월 중순, 중도휴학을 했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무기력과 집중력 결핍, 극심한 우울감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나의 첫 진단은 우울증이었다. 나는 매일같이 술만 마시고 다녔다. 늦은 오후에 기상한 후, 쇳덩이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밖에 나가 친구들을 만났다. 그리고 술을 들이붓기 시작했다. 사실 술을 마시기 위해 친구를 만났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술은 나를 더는 우울하지 않게 했고, 무기력하지 않게 했고, '웃긴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중도휴학을 하고 한 달이 지났을 즈음, 나는 이백 오십만 원 남짓 되는 환불받은 등록금을 모두 탕진한 상태였다. 술을 마시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서빙 알바를 처음 해봤고, 과외를 하나씩 시작했다. 나는 어느새 주 6일 노동자가 되었다. 약 부작용으로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며, 매일같이 덮쳐오는 끔찍한 악몽을 이겨내며, 스멀스멀 올라오는 무력함을 이겨내며 돈을 벌어야 했다. 그렇게 경제 사정이 좋아지자, 친구와 함께 사는 고양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고양이들이 그저 사랑스러웠다. 그들의 몸짓과 언어를 읽어내는 것이 즐거웠다. 고양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한 친구의 고양이를 일주일 간 덥석 맡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반려묘를 입양할 결심을 하게 된다.



2017년 7월 24일, 그를 처음 만났다. 학교 근처에 거주 중이었던 나는 강남에서 구조된 그를 데려오기 위해 택시를 타고 강을 건넜다. 당시 입양을 결심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저 “(주 3~4일 알바와 과외를 세 개정도 했던 시기였기에) 그를 부양할 경제적 능력이 되는 데다 고양이가 마냥 좋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철없는 마음이었던가. 얼마나 부끄럽고 한심한 동기였나. 나는 반려동물을 데려오기 전에 충분히 고민했어야 하는 지점들[각주:1]을 특별히 고려하지 않았다. 나는 단순했고 어리석었다. 


그와 함께하면서, 나는 고양이와 관련된 정보를 얻고자 여러 플랫폼을 전전했다. 그러면서 내가 놓친 많은 것들을 늦게나마 잡아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나는 아이의 식사로 건식[각주:2]만 존재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습식 캔/파우치부터 직접 고기를 사서 갈아 만드는 생식, 균형 잡힌 영양 공급을 위해 야채를 추가해 만드는 퓨레까지 고양이를 위한 음식은 무척 다양했다. 온라인상에 존재하는 많은 반려인은 대체로 습식을 급여하거나 생식을 만들어 급여했고, 영양제를 첨가해 생식에 아이의 소화를 돕거나 신장을 보호하는 기능을 추가하기도 했다. 온라인 속에서 마주한 '훌륭한' 반려인들보다 나는 형편없는 반려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관련 지식이 전무한 사람인 데다, 주위 반려인들과는 고양이 영양학이나 고양이의 신체 구조, 장기, 병증 등에 대해 하나하나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각주:3] 우리는 그저 반려인으로서 반려묘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이야기할 뿐이었다.



나는 고양이라는 종에 관한 지식 아닌 지식을 쌓아가면서, 입양을 결심했던 어린 마음을 떠올리면서 죄책감을 한 덩어리씩 쌓아갔다. 그렇게 쌓인 죄책감에서 앞으로도 영영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주변에 있는 누구에게도 소리 내 고백하기 어려운 마음이었다. 그때의 어린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 뭐가 어렵겠냐마는, 나와 같이 어린 마음으로 반려를 데려왔다가 쉬이 유기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그것을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지금은 그가 없는 생활을 상상하기 어렵다지만,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나보다 더 좋은 보호자를 만날 기회를 그에게서 강탈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빠지곤 한다.



당연하지만 아이와 함께하는 모든 나날 속에서 자신을 나쁜 보호자라고만 여겼던 것은 아니다. 매 순간 내가 그의 행복을 강탈했다며 자책하는 것도 아니다. 나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그에게는 끔찍하리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와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 작은 온몸으로 내게 사랑한다고,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보고 싶었다고, 그리웠노라고 날마다 이야기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러한 추궁에서 스스로 결백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직도 그러한 추궁에서 결백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으며, 시간이 앗아갈 아이와의 순간들을 절박하게 붙잡아내려 한다.




“고양이에 큰 의미부여 하지 마. 동물일 뿐이잖아.”


부모는 내게 “고양이에 큰 의미부여 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봤자 동물일 뿐이라는 식이다. '대화'도 안 되는 '고작 동물'에게, 인간보다 짧은 수명을 가진 동물에게 애착을 갖는 것이 퍽 애처로웠나 보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무생물에도 애착을 가지는 것이 인간인데, 하물며 살아 숨 쉬는 존재에게는 더하지 않을까. 그는 내 일상에 가장 밀접한 존재였고, 나는 그의 일상에 더없이 밀접한 존재였다. 우리는 서로의 일상에 녹아들며 찬찬히 마음을 나누었다.



1. 어떤 첫 만남


그가 처음 집에 왔던 날이 생생하다. 집에 도착한 후, 그는 내가 이동장을 열자마자 후다닥 뛰쳐나와 침대 밑으로 도망쳤다. 갑자기 낯선 환경에 놓였으니, 두려웠을 법도 하다. 나는 그가 조금이라도 나올 구실을 만들고자 침대 아래에 간식을 놓았다. 그는 새로운 환경에 무척 놀란 것 같았지만 간식은 먹고 싶었는지, 작은 소리에 움찔대면서도 허겁지겁 간식을 먹었다. 그런 그를 온종일 쳐다보고 싶었지만, 나는 그의 눈에서 어떤 두려움을 읽었다.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내 시선은 어떤 위협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나는 평소처럼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가 언젠가는 집을 자유롭게 누비고 다닐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아주 순하고 작고 마른 아기 고양이였다. 낯을 가리지만 함께 있다 보면 금세 경계를 풀고 냄새를 맡는 고양이였다. 보통 아기 고양이들은 신나게 뛰어다니다가 갑자기 픽 쓰러져 잠들고 와구와구 먹다가 다시 픽 쓰러져 자기를 반복한다던데, 그는 그다지 뛰어다니는 고양이가 아니었다. 그릇이 달그락대는 소리에도 깜짝 놀라 온몸이 굳어버리는 고양이였고, 잘 먹지 못해 아주 마른 고양이였다. 내가 깨어 있는 시간 동안 그는 거의 잠들어 있었다. 그는 길에서 구조되어 링웜[각주:4]을 치료한 직후 우리 집에 오게 되었는데, 그래서 오른쪽 귀 뒤에는 털이 없었다. 치료를 끝마친 후였으니 아프지는 않았겠지만, 그곳을 볼 때마다 혹여나 아플까 자꾸만 의식하게 되었다. 털은 금방 자라났지만, 그가 다시는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작은 몸을 쓰다듬었다. 그는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내게 경계를 풀었다. 그날 밤, 그는 내 곁에서 몸을 맞대고 잠들었다.



2. 어떤 관계의 물듦


그는 내게 고요하고도 열정적인 관계가 무엇인지 처음 알려주었다.


내가 공부를 해야 한다는 핑계로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있을 때, 그는 내 곁으로 다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조그만 손과 발을 모으고 앉는다. 그리고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본다. 내가 의자에 앉아있다가 옆을 보거나 뒤를 돌면 그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나를 미워하는 표정도 원망하는 표정도 아니다. 그저 앉아있을 뿐이다. 특히나 내가 무언가에 열중인 듯 보일 때, 그는 내게 보채지 않는다.[각주:5] 가만히 내가 할 일을 끝내길 기다리는 것처럼 앉아있다. 온 세상에 나밖에 없다는 듯 하염없이 쳐다보는 모습을 발견한 후에는 차마 외면할 수가 없다. 아무런 기력이 없어 가만히 누워있는 날도 마찬가지다. 내가 몇 시간이고 영 움직이질 않으면 그는 내게 다가와 내 팔을 톡톡 친다. 잠에 취해 있다가도 그가 나를 건드리면 정신이 번쩍 든다. 그저 내 팔을 건드리는 것뿐인데도 그는 찰나의 순간 동안 내게 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잠은 잘 잤냐고, 오늘은 어떤 마음이냐고. 이렇게 다정한 그를 고작 10분이라도 못 본 척하는 날에는, 그를 향한 죄책감이 가득해져 그의 눈빛과 표정에 내 마음을 멋대로 투영한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그가 나를 원망하거나 미워하리라 생각해버리는 건 자아에 갇히는 존재의 특성상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도 분명한 것은 그가 내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외출하고 집에 돌아오면, 그는 저편에서부터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나를 맞이해준다. 현관에 가만 서서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는 툭, 하고 내 발치에 누워버린다. 왼쪽으로 툭, 바닥에 누워버리면 오른쪽으로 빙글 돌면서 하늘을 향해 하얀 배를 내놓으며 기지개를 쭉 켠다. 그러고 나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나를 쳐다본다.


“애앵-”


그리고 특유의 아기 같은 울음소리를 낸다. 무얼 하다 이제 왔느냐고 묻는 눈치다. 이제 내가 어디를 가든 그는 종종걸음으로 따라온다. 주방을 가든, 화장실을 가든, 베란다로 나가든 그는 아기 같은 울음소리로 내게 말을 건다. 내가 없었던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열심히 이야기해주는 것만 같다. 베란다에서 몇 마리의 새를 보았는지, 하늘은 어땠는지, 전반적인 온도는 어땠는지, 화장실은 얼마나 다녀왔는지, 잠은 잘 잤는지, 혼자 놀기도 했는지... 이것저것 말해주려는 것만 같다. 나도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그래서 기분은 어떤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그를 몇 번이나 보고 싶어 했는지 이야기한다. 남들에게는 내가 허공에 떠드는 중인 것처럼 보일 테다.


내가 하릴없이 천장만 바라보며 누워있는 날에 그는 내 발치에서 잠든다. 그는 한참을 같은 자세로 자다가 벌떡 일어나 기지개를 쭉 켠다. 그렇게 다른 곳으로 갈 것처럼 움직이다, 비슷한 자리에 다른 자세를 잡고 또 한참을 잔다. 그렇게 우리는 살을 맞대고 한참을 누워 있다. 불을 모두 끄고 잠들 채비를 마치면 그는 언제나처럼 내 머리맡에 오는데, 이는 겨드랑이께의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들어오겠다는 신호다. 그는 내 몸이 닿아있던 모든 공간에서 잠들기를 좋아한다. 그는 나와 서로의 결을 맞대며 이불 속에서 한참을 누워있다가도, 이불을 빠져나와 내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단잠에 빠지곤 한다. 내가 의자에 앉아있을 때, 그는 이불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앵-” 하고 나를 부른다. 그럴 때면 그에게 후다닥 달려가 이불 끝을 살짝 들어 올려 그를 위한 작은 동굴을 만들어 준다. 그는

찬찬히 냄새를 맡다가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간다. 이불이 한참을 꿀렁이다 그가 자리를 잡으면, 이불이 찬찬히 멈춘다.



3. 어떤 고유한 사랑


그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은 그에게 스며드는 것이었다.


그가 어떤 음식을 좋아할지 모르니 이것저것 사보고 급여한 뒤 기록하는 것, 그가 어떤 놀이 방식을 좋아하는지 모르니 종류별로 장난감을 모두 사들여 시험해보는 것, 그의 음수량을 늘리기 위해 고양이의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식기를 사들이는 것, 그의 야생성을 최대한 고려한 화장실을 고르고 배치하는 것, 그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유지하는 것, 어설프게나마 양치 교육을 시도해보는 것, (1년 내내 털갈이 시즌이라 해도 무방하지만) 털갈이 시즌에 그의 정기검진을 위한 적금을 꼼꼼히 들어놓는 것, 그가 다양한 맛을 경험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여러 종류의 간식을 사들여 급여하는 것, 매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해, 항상 고마워라고 그에게 세 번 이상 이야기하는 것,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울음소리를 내는지, 유심히 관찰하고 기억하는 것


그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자 다가가는 과정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이다. 늘 같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



그는 내게 더는 '그냥 고양이'거나 '그냥 동물'이 아니었다. 그는 내게 고유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와 비슷한 고양이가 여럿 등장했을 때 그를 찾지 못하는 악몽을 꾼다. 그럴 때마다 그와 나의 관계에서만 존재하는 무언가를 열심히 찾으려 노력한다. 어떤 특유한 것을 찾아내려 한다. 이를테면 함께 놀자고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와 배변을 마친 뒤 만족스럽게 내게 자랑하는 목소리, 나를 혼내는 목소리의 미묘한 차이를 기억하려 노력한다. 우주가 담겨있는 듯한 눈 색깔과 우아한 그의 털 무늬를 들여다본다. 어디에 어떤 색의 털이 나 있는지 한 올 한 올 꼼꼼히 살펴본다. 그러다 가끔 하얀 털이 나 있을 자리에 검정 털이 나 있거나, 검정 털이 나 있을 자리에 하얀 털이 나 있을 때가 있다.[각주:6] 그렇게 의외의 위치에 있는 하얀 털이나 까만 털을 발견하면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의 몸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도 찾아낼 수 있다는 자부심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기억한다. 그는 내가 선물한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 그는 내 움직임과 내 목소리를 기억하고, 다가올 다정한 손길을 기대하며 하얀 배를 드러내고 바닥에 눕는다. 그는 내가 외출을 하기 전에 인사하지 않으면 문 앞으로 도도도 달려와 나를 애타게 찾는다.[각주:7] 그는 매일 밤 양치를 하기 전에 간식을 먹던 것을 기억하며 늘 비슷한 시간에 나를 부른다.



삼 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함께하면서 매일 봐온 보드라운 그이지만 매일 새롭고 신기하다. 그 어떤 사진도, 그 어떤 영상도 담을 수 없는 그의 표정과 감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고무줄처럼 길게 늘어진 시간 속에 있으면, 내게는 그가 전부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작은 눈에는 우주가 가득하고, 조그만 손에는 따뜻한 사랑스러움이 가득하다. 그를 결대로 쓰다듬다 낮은 울림이 들리면, 곧잘 그의 가슴께에 귀를 대고 나보다 살짝 높은 체온을 가진 그의 따뜻함에 기댄다. 그의 호흡과 그의 낮은 “그르릉” 소리가 내 귀를 감싸면 이대로 세상이 멈춰도,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뿐이다. 언제든 검지로 그의 코를 가리키면 그는 조심스레 다가와 얼굴을 부비고


“그르릉”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매일 똑같은 몸짓, 똑같은 반응, 똑같은 패턴을 보이는 것 같지만 늘 새롭게 느껴지는 감각이 낯설게 익숙하다.



4. 어떤 보호자 되기


반려견과 반려인의 관계와는 다르게 반려묘와 반려인은 쉽게 '주인님'과 '집사'로 명명된다. '도도'하고 '까탈스러운' 고양이의 특성에 인간이 '비위를 맞추며' 산다는 우스운 설정이다. “나만 고양이 없어” 밈meme[각주:8]과 함께 주인님-집사의 관계는 반려묘와 반려인의 당연한 도식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처음 그와 함께 살기 시작했을 즈음, 나 또한 그와 나의 관계를 주인님-집사의 관계로 상정했다. 내가 아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반려묘와 반려인의 관계는 그게 전부였으니까.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주인님-집사라는 관계 설정은 그를 기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의 식사를 챙기지 않거나 음수량에 신경 쓰지 않고, 화장실을 청소하지 않거나 놀이시간을 갖지 않으면, 심지어는 내가 청소를 하지 않아도 그는 온갖 질병에 노출될 가능성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내 모든 행위에 그의 생이 달려있었다. 그와 함께 생을 살아가기로 한 이상, 나는 그의 건강을 염려하면서 그의 생활 반경이 깔끔하게끔 끝없이 부지런해야 했다. 나는 그의 식사를, 수면을, 놀이를, 배변을, 습관을 모두 관찰하면서 평소와 같고 다름을 확인할 수 있어야 했다. 내 모든 행동에 그의 생이 달려있는데, 어떻게 우리의 관계가 주인님-집사일 수 있는가. 그토록 기만적인 명명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토록 이질적인 호칭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의 엄마였다.


이 아이의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곁에서 함께할 보호자였다.



그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내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이 그에게로 수렴했다. 어딘가에서 누군가와 함께하고 있더라도 그가 문득문득 그리웠다. 잠은 잘자고 있을지, 밥은 잘 먹을지, 심심하진 않을지.... 그런데 자신을 그의 '엄마'라고 여기기 시작한 이후, 나는 종종 엄마 생각이 나곤 했다.


나의 부모 또한 여느 부모와 다르지 않게 자식을 중심으로 삶을 살아간다.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소통은 일절 하지 않지만, 그들은 내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비용을 꾸준히 부담하고 있다. 그들처럼 살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는데, 어쩐지 피보호자의 모든 생활을 염려하며 지내는 모습이 나와 꼭 닮아보였다. 내가 그의 보호자로서 그를 사랑하고 아끼고 염려하며 그가 내게 어떤 상흔을 주더라도 꼭 끌어안고야 말겠다는 다짐은 내 부모의 다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종종 엄마 생각이 났다. 그에게 짙은 죄책감을 느끼며 방 안에 웅크려 있을 때도 종종 엄마 생각이 났다. 그의 아픔을 대신할 수 없어 괴로울 때도 종종 엄마 생각이 났다.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던 그가 결국 단잠에 빠진 것을 보면서, 나는 문득 엄마를 이해할 수도, 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은밀하고 지독하게 원망했던 것을 떠올렸다.


나는 그의 보호자였지만 동시에 엄마의 피보호자였다.



그와 나는 보호자를 선택할 수 없었던 피보호자였다. 내가 내 부모를 선택해 살아가게 된 것이 아니듯, 이 아이도 보호자를 선택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로 엮인 것이다. 내가 부모에게 남몰래 던지곤 했던 원망들을 떠올리면서, 이 아이도 내게 그런 원망을 던지지 않을까 걱정하기 시작했다. 내가 남몰래 던진 원망을 부모가 모르듯, 이 아이가 던지는 원망을 나는 알 수 없으니까. 누군가의 보호자가 된다는 것은 이토록 무거운 마음을 견디는 일임을 깨닫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그저 '좋은 보호자'이고 싶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주변에는 나보다 '더 좋은 보호자'가 많았다. 이를테면 입맛이 까다로운 아이를 위해 고양이 영양학을 공부하고, 정육점에서 직접 떼 온 고기를 갈아 생식을 만들어 급여하며, 시중에 판매하는 웬만한 영양제의 성분표를 꿰고 있어 유연하게 아이의 건강을 챙길 줄 아는 보호자가 있었다. 어떤 보호자는 고양이를 위한 방이 있었고, 벽면 설치형 고양이 놀이터는 물론이요 좋은 나무로 만들어진 캣타워와 캣폴[각주:9]을 세트로 갖추고 있었다. “누가 더 좋은/옳은 보호자인가”를 수치화하면, 나는 형편없기 그지없는 보호자였다. 내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좋은 보호자'가 되기에는 현실적인 여건이 넉넉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충분히 '좋은 보호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괴로워하는 날이 많아졌다. 하지만 내게는 '더 좋은 보호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조차 자신이 '좋은 보호자'인지 자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누구에게 좋은 보호자가 되고 싶었나. A 보호자보다 더 많은 고양이 장난감을 가지고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은 보호자'가 되는가. B 보호자처럼 직접 생식을 만들어 급여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보호자'가 되는가. C 보호자보다 더 많은 고양이 놀이터를 만들면 그보다 '더 좋은 보호자'가 되는가. 나는 그저 다른 보호자와 내가 처한 상황을 비교하며 '더 좋은 보호자' 서열을 매기고 있었다. 다른 보호자들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었지만,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을 반드시 내것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제아무리 훌륭한 보호자의 조언이라 할지라

도, 내 아이가 원하지 않으면 모두 쓸모없는 것이었다.


그토록 '좋은 보호자'가 되고 싶었으면서, 정작 피보호자의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좋은 보호자'로서의 자격을 갖췄는지 다른 반려인들과 서열을 매길 때, 나는 그가 보호자를 선택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만 매달리며 그가 나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행복하게 살았다면 다 좋은 거 아니겠냐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고 자기합리화를 하려는 것 같았으니까. 그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부모와 지독하게 닮은 생각인 것 같았기 때문에.



그러니까 내게 '좋은 보호자'라는 타이틀은 그저 자신의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빠져 허우적대기 위한 구실이었다. 나는 그저 내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자 노력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고자 노력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가 놀고 싶어 하는지, 쉬고 싶어 하는지, 화장실을 가고 싶어 하는지, 가만히 앉아 있길 원하는지 알아내어 그것을 최대한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렇게 그에게 최대한의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내 영혼을 다해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것만이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것이 '좋은 보호자'가 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엄마와 같은 엄마이면서, 전혀 다른 엄마였다.



5. 어떤 관계는 다른 언어를 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현상을 잡아내고자 한다. 상대를 향한 마음을 가장 잘 설명해내는 언어를 찾아 그것을 전달함으로써 소통한다. 그러나 언어는 일종의 개념과 같아서, 같은 단어라 하더라도 화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언어가 담고 있는 내용의 의미는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이를테면 “잘한다”는 말을 칭찬의 의미로 사용할 수도 있고, 비꼬는 의미로 사용할 수도 있다. 같은 개념이라도 누가 어떤 방식으로 전유하느냐에 따라 미묘하고도 첨예하게 달라지니, 언어를 단순히 객관적인 사물의 형상이라고 보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결국, 소통이나 교감은 글자로서의 언어뿐만 아니라 무형의 비언어적 표현이 더해졌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얼마나 많은 문자(文字)를 주고받았는가는 내밀한 관계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나와, 고양이로 태어난 그는 종이 다르기에 어쩔 수 없는 소통의 한계가 존재한다. 그는 몸짓과 울음소리를 통해 타자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나는 주로 글자를 통해 타자에게 의사를 전달한다. 내가 그의 요구사항을 명확하게 알 수 없듯, 그 또한 나의 요구사항을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니 내가 그의 의도를 완전히 헛짚을 때도 많고, 그가 내 마음을 영영 몰라줄 때도 많다. 하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듯, 사용하는 언어가 같더라도 이러한 상황은 마찬가지다. 자아는 타자가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이상 그가 품고 있는 생각이나 마음을 영영 알 수 없다. 어떤 자아도 진정으로 타자를 '알' 방도는 없다. 그러니 언어의 문제를 배제하고 반려동물과의 관계를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소통하는 언어의 부재'만이 반려인과 반려동물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전부가 될 수도 없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과의 소통 또한 결코 완벽할 수 없으니,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타자를 지독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사이에 놓인 수많은 갈등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러니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관계는 결코 '쉬운' 관계일 수 없겠다. 그것이 반려라는 관계로 묶였다면 더욱이 그러하다. 그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알아채면서 그가 느끼는 감정을 알아내고자 수십 번, 수백 번 실패하며 다가가는 것이다. 그의 미묘한 행동 변화를 수없이 놓치고 찾아내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에게 내 사랑을 적절히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그의 언어로 소통하고자 노력하는 인고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가 내게 전하는 이야기를 수없이 놓치면서도 계속해서 붙잡으며 나의 언어로 해독해내는 과정이다.



언어가 관계의 전부라면 곁에 함께하기만 해도 그릉대며 따뜻한 바닥을 뒹구는 그의 몸짓과 그의 그릉거림에 호응하듯 그 작은 울림을 가만 귀 기울여 듣고 있는 내 모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영역 동물인 고양이의 특성상 바깥으로 '산책'을 가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나와 방안을 나란히 걷는다. 꼬리를 바짝 세우고 귀를 쫑긋 세우며 종종걸음으로 걷는 그는 내가 따라오는지 확인한다. 그렇게 우리가 함께 작은 집 안 곳곳을 누비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서로에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 그러다 결국 서로의 등을 맞대고 가만히 온기를 느끼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 목소리를 알아채고 반응하는 것, 내 온기가 가득한 잠옷을 좋아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오늘 당장 한 줌의 재가 되어 스러질 것만 같은 날, 구석에서 흐느끼며 울고 있을 때, 그가 내 앞에 다가와 가만히 바라봐주는 모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마주하는 언어의 장벽은 든든한 위로와 삶에 대한 용기 앞에서 무너진다.


언어가 숨통을 조이는 세상에서 그와 조용한 위로를 나눌 수 있기에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우리는 기표를 통해 나눌 수 있는 마음을 넘어 고요하게 멈춘 공기를 음미할 수 있다. 가만히 서로의 살갗을 맞대고 누운 채로, 여기 이곳에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감각한다.



관계 형성이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기에 그 관계가 '쉬운'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그 관계가 더욱 본질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사랑한다는 것은


1. 어떤 사랑을 생각하시나요


인간의 관계가 가장 가치 있게 여겨지는 순간은 위기의 상황에서의 변화다. 어떤 관계가 위기에서도 변함없었거나, 더욱더 돈독해졌다면 그것은 인생에 더없이 소중한 보물과 같다고 말한다. 나에게는 그가 그러한 존재다. 내 모든 순간에는 그가 빠지지 않고 존재했다. 공기마저 온몸을 짓누르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는 순간에도, 그는 내 곁을 담담히 지켜 주었다. 나의 존재가 한없이 가벼워 당장 사라질 것 같은 순간에도, 그는 그 작은 몸으로 내 존재의 무게를 붙잡아내 주었다. 고통에 짓눌린 울부짖음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순간에도, 그의 조그만 몸에 담긴 무거운 생명에 대한 책임감으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에게 나는 그저 동거인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내게 그는 온 우주에서 그 어떤 존재보다 소중할 수밖에 없다.


그와 함께하기 이전의 모든 순간이 더는 존재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인간과의 관계가 내 생에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누군가 내게 위기의 상황에 곁을 지켜준 이를 떠올려보라고 물었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그를 떠올린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하면서 삶이 이토록 찬란해질 수 있음을 알았다. 그를 사랑하면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이토록 다양했음을 알았다. 어떤 몸짓들이, 어떤 냄새가, 어떤 소리가, 어떤 촉감이 뇌리에 박혀 오래도록 존재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를 사랑하면서 언어가 관계의 전부가 아님을 진정으로 '알게' 된다. 그와 내가 서로 의지하며 존재하는 것을 고요하게 느낄 때면, 시간이 무한히 팽창하는 것을 느낀다. 처음으로 영원함을 믿고 싶었다. 그와 함께하는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사랑은 언제나 찬란한 빛깔이기만 할까.


짐작건대 사랑은 짙은 밤에 시달리는 어떤 죄책감과, 흐린 조명 아래 선명해지는 관계의 책임감, 공기의 서늘함 속에서 느끼는 존재의 무게, 일렁이는 시야에 보이는 어떤 이별이 마구 뒤엉킨 채 얼룩져 있을 테다.



2. 어떤 사랑을 시작하기에 앞서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가구 수는 날로 증가하고 있다. 유명 연예인의 반려동물이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면, 포털사이트에는 그가 '어떤 품종'을 키우는지 묻는 말이 쏟아진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길에 사는 동물이었다는 이유로 진료에 차별을 받아 어려움을 토로하는 반려인이 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반려동물과 살기를 결심하지만, 아무래도 팍팍한 인간 세상에서의 삶이 조금 더 '쉬운' 관계를 기대하며 비인간 동물과 함께 살기를 결정하게 만드는 것 같다.


반려동물은 인간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쉽다. 동거인에게 무한한 애정을 주고 '훈련'도 가능하며, 대화의 소재로서도 훌륭한 데다 이름 붙이기 어려운 우월감을 맛보기도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려동물은 집 밖에서 낡아버린 자신을 돌보고 위안을 얻는 데 훌륭한 매개가 되리라 생각한다. 실제로 반려동물이 어떤 인간에게 보이는 이미지는 그러하다. 반려동물이 동거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몸짓과 울음소리, 표정과 체온이 담긴 사진은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까.



확신하건대,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것은 인간의 자아도취적인 기대만큼 적은 비용으로 높은 효용을 얻게 해주는 경제모형에 들어맞지 않는다. '자녀'에 관한 논의에서 경제적 부담이 경시되지 않듯, 반려동물을 입양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고양이 한 마리를 입양하는 데 드는 회계 비용[각주:10]만 생각해도, 어린아이를 키우는 데 들어가는 비용과 맞먹는 수준이다.


게다가 누군가를 '키우는' 일에 대한 책임감과 죄책감은 패키지처럼 함께 온다. 반려동물 입양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반려동물에게서 어떤 절대적인 감정적 포용을 기대하거나, 복종을 기대하거나, 은밀한 우월감을 느끼길 기대하면서 입양을 결정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떤 반려동물은 곁을 내어주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끝내 곁을 내주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반려동물은 동거인의 감정에 반응하고, 어떤 반려동물은 반응하지 않는다. 어떤 반려동물은 쉽게 훈련이 가능하며, 어떤 반려동물은 영악하다는 단어와 어울리기도 한다. 어떤 반려동물은 단순한 욕구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어떤 반려동물은 인간이 기대했던 것보다 복잡한 욕구를 표현하고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현실의 어떤 반려인은 반려동물에게서 감정적인 포용을 느끼고, 절대적인 복종을 느끼기도 하며, 심지어는 차마 언어화되지 못한 은밀한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다면 대체 반려동물을 입양할 수 있는 적절한 조건은 무엇인가? 이미 반려동물과 생을 함께하는 사람들은 차치하고, 앞으로 반려동물을 입양할 계획이 있는 사람이라면 불로소득이 충분한 성인군자이어야만 하는가?


더 나아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더라도 같은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언어'라는 공통의 도구를 통해 소통할 수 있지만,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소통은 상대적으로 원활하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이에 더해 인간은 비인간 동물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이용 가능한 자원을 가졌다. 이렇게 비대칭한 권력관계와 어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조건을 고려했을 때, 인간은 비인간 동물과 결코 함께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3. 어떤 사랑도 '완벽'하지 않다


유독 오만하고 방자한 마음이 짙어서인지, 어딘가에서든 누군가 나의 '도덕적 결함'을 찾아내어 비판하면 주저 않고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들지 못한다. 일단 내가 정당하다거나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는 개념이나 관점을 언급하면 감히 의문을 던질 생각은 않고 작아지고만 싶다.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일 테다.


언제 어디서나 도덕성을 시험받는 기분으로 위태롭게 보냈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보낸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의 부도덕함을 보고 환멸을 느끼며 모두 고개를 돌릴까 두렵다. 내가 그를 진정 어떤 마음으로 입양했는지 끝내 밝히지 못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를 만난 건 '이상적'인 순간이 아니었다. SNS에서 '더 좋은 보호자'와 나의 거리를 습관처럼 재보면서, 그 차이가 나의 '도덕적 결함'과 같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공간에서는 반려인을 향해 무심하게 '학대'와 '대상화'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납작한 인터넷 세상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에 무슨 커다란 의미가 있겠느냐마는, 그런 말들은 가슴에 박혀 오랜 시간 동안 빠지지 않았다. 나와 그의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당연히 내게(만) 귀책 사유가 있는, 매우 비윤리적인 관계에 대한 말이었으니까.


어느 날, 누군가에게서 나와 아이의 관계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 몇 시간을 내리 울기만 했다.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악의 없는 말이 내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가슴이 답답한 것이 “흠 잡혔기 때문”일까 두려웠다. 아마 그런 마음도 없잖아 있었을 테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의 무심한 말에 맹목적으로 흔들렸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나와 아이의 관계에서의 변화가 아닌 '도덕적 결함'에 대한 감각이 나를 흐리게 했다는 것이 속상했다. 그의 말이 그토록 무심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타인의 관계나 사랑에 대해 한마디 얹어보는 것은 참 쉬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명백히 잘못된 관계[각주:11]에 대해서는 어찌어찌 말할 수 있겠지만, '이상적인 관계'가 아닌 보통의 어떤 관계들에는 흠잡을 구석이 참 많았다.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어떤 행위와 언어가 적합한가를 고민하는 것은 언제나 권장하는 바이다. 이를테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에 보편적이었던 윤리적 규범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음지에 놓고 외면했던 부당한 관계의 양상들을 양지로 끌어올려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가를 물었을 때, (반드시 섹스가 포함된) 이성애만을 상상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여긴다. 성별·성적지향·나이·교육 수준·장애 여부·인종·계급·지위 등에 의해 두 사람 이상의 관계에서 은밀하고도 분명한 권력 관계가 존재하며, 그로 인한 불이익이 실재하는 현실이 부당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부부간의 성폭력, 가스라이팅[각주:12], 그루밍 성범죄[각주:13] 등 10년 전까지 “사적인 '사랑' 문제”로 여겨진 관계에서의 폭력이 가시화되고 있다. 어떤 관계에서 '사랑'이라 불렸던 방식이 결코 '사랑'이 될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윤리적인 행위와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중요하다. 누구도 '완벽한 관계/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치열한 논의를 통해 어떤 관계와 어떤 사랑이 오늘날의 규범에 더 적합한지는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이상적인 관계'이며 '이상적인 사랑'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논의할 수 있고, 논의할 필요가 있으며, 논의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보통의 관계 속에 놓여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단순히 어떤 폭력적인 관계에 책임이 있는 사람에게 면죄부를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합의된 수준의 윤리의식을 갖춘 인간을 기준으로, 현실에는 그토록 '흠잡을 구석 없는' 관계가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정해야겠다.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의 (윤리적인) '결함'이 있다. 그러니 누군가의 관계가, 어떤 사랑이 완벽하지 않다고 힐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설령 그것이 조언이었다고 할지라도, 상대의 내밀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던지는 언어는 그저 경쟁적으로 상처 주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정작 어려운 것은 할 수 있는 최선의 몫을 다하며 사랑하는 것이다.



4. 그러니까 오늘도 '최선의 사랑'을


어떤 관계와 어떤 사랑에서 최선의 몫은 어떤 것일까.


적어도 무책임해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 대상이 비인간 동물이든 인간이든, 적어도 인연의 끈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을 때, 그것에 최선의 책임과 예의를 보내는 것이 아닐까. 무책임한 것과 책임지는 것, 무례한 것과 예의를 지키는 것은 첨예하게 다른 만큼 닮아있기에, 모호하다. 모호하지만 인식하기에는 어렵지 않은 감각이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것은 최선의 몫을 다하려는 것이다. 비인간 동물과 인간이 함께 사는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다. 누군가는 자주 걷지 않던 길을 걷다가 인연을 만나고, 누군가는 꾸준히 보호소에서 봉사하다가 인연을 만난다. 무작정 다친 길 동물을 집으로 데려와[각주:14]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인연을 시작하기도 한다. 그에게 만남이 시작부터 '완벽'하지 않았다고 다그치는 것은 선의에 대한 의욕을 꺾어버리는 셈이 될 테다. 다만 이처럼 우연히 어떤 인연을 시작하는 것이 아닌 경우에는, 최대한 관계의 책임에 대해 숙고할 것을 권하고 싶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 후회 없을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 때, 충분히 숙고한 시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생명의 무게는 크기에 비례하지 않는다. 어떤 존재를 '책임'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시간적·공간적·신체적·정신적·경제적 여유가 있으며 그것의 장기적인 안정성이 보장되었을 때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어린아이를 돌보는 보호자의 마음으로, 함께 시간을 걷는 동반자의 마음으로, 그의 마지막을 지킬 용기로, 삶의 즐거움 일부를 포기할 각오로 관계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누군가는 자신도 반려를 데려오는 과정에서 떳떳할 일 하나 없었던 주제에 훈계질한다고 내게 눈을 흘길 수도 있겠다. 자신도 철없이 데려왔으면서, 말만 많다고. 맞는 말이다. 내 '결함'을 부정할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 중인 내 사랑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내 사랑은 미지근한 마음도, 열렬한 마음도, 두려운 마음도, 미안한 마음도, 고마운 마음도 마구 뒤엉켜 있다. 나는 앞으로도 그를 처음 만나게 된 순간을 문득 복기하며, '더 좋은 보호자'와 자신을 비교해 죄책감에 젖을 것이고, 그로부터 영영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를 사랑하게 된 만큼, 앞으로 다가올 어떤 이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필연적으로 예정된 이별을 숙고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는 날들이 잦아질 것이다. 그러나 완벽하지 못한 것에 책임지는 길은 가능한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므로 '완벽한 사랑'이라는 신화에 머무르며 나의 것을 포함해 누군가의 어떤 사랑과 어떤 관계를 쉽게 재단하지 않을 것이다. 완벽한 사랑이 아니라는 이유로 어떤 사랑과 어떤 관계를 포기해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아끼고 사랑할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싶다. 동시에 퇴보하지 않는 사랑을 하고 싶다. 비록 그를 사랑하는 일이 이별을 감내해야 하는 것일지라도, 나는 기꺼이 그것의 먹이가 되어 사랑할 것이다. 나는 어떤 존재를 고유하게 받아들이는 것과 서로가 닿을 수 있는 한계를 이해하는 것이 최선의 사랑이라 믿는다.



나는 '완벽한 사랑'을 최선의 사랑이라 부르고 싶다.



글 편집위원 운령(a__9914_h@naver.com)

  1. 예를 들면 고양이와 관련된 것은 영양학, 신체적 특징, 시기적 특징(자묘와 성묘, 노묘) 등이 있고, 보호자와 관련된 것에는 책임감, 경제적 안정성, 시간적·신체적·정신적 여유 등이 있다. [본문으로]
  2.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고체 사료이다. [본문으로]
  3. 사실, 이런 종류의 대화는 대화 참여자 모두가 일정 수준 이상 지식을 갖추어야 가능하다(내가 관련 지식이 전무했기에 주위 반려인들과 관련 대화를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화는 전문가와 하는 것이 가장 좋다. 전문지식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하더라' 식의 거짓 정보를 퍼 나르며 그것을 철석같이 믿고 수행하는 것보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상대적으로) 낫다. [본문으로]
  4.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는 고양이 링웜을 “고양이 피부사상균증”을 의미하는 탈모 증상을 동반하는 곰팡이성 피부병이라 한다. 이것은 인수 공통 질병으로, 건강한 성묘보다 어린 고양이나 면역력이 떨어진 고양이에게서 발병하기 쉽다. [본문으로]
  5. '보통' 보채지 않을 뿐이지, 그날 컨디션에 따라 다르다. 같이 뛰자고(?), 나 좀 보라고, 신나게 놀자고 사이렌 소리처럼 계속 “왜옹왜옹” 할 때가 있다. 기분 탓인 것 같지만, 유독 수업을 들을 때 더 많이 그런다. 한결같이 조용하기만 한 고양이는 아니다. 그는 나름대로 하고 싶은 말이 꽤 많은 고양이다. [본문으로]
  6. 고양이의 털 색이 바뀌면 아이가 아플 가능성이 높으니 병원에 가보자. 이 경우, 털 색이 바뀌었다기보다는 무늬가 바뀌는 경계의 지점에서 색이 조금 교차하어 나타난 것이다. [본문으로]
  7.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잠시 나갔을 때 알아낸 사실이다. [본문으로]
  8. 밈meme은 [문화의 전달 방식]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며, 대개 온라인 놀이 문화를 통칭한다. 그 중 “나만 고양이 없어”는 반려묘가 없는 자신의 처지를 자조하며 주변 반려인들에 대해 부러움을 느끼는 자신의 마음과 자신 또한 고양이와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을 드러낼 때 사용되는 밈meme이다. [본문으로]
  9. 고양이는 인간과 다르게 공간을 인식한다. 방 한 칸을 인식할 때 인간은 바닥의 너비에 집중한다면, 고양이는 그가 뛰어 올라갈 수 있는 영역(너비)까지 포함하여 더욱 입체적으로 공간을 인식한다. 이에 더해 높은 곳을 선호하는 고양이의 특성(물론 선호하는 정도는 고양이마다 차이가 있다)을 고려했을 때, 캣타워나 캣폴은 고양이의 삶의 질을 측정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척도라고 볼 수 있다. 캣타워와 달리 캣폴은 바닥과 천장을 잇는 설치형 구조물로, 고양이가 스크래칭을 하거나 높은 곳을 타고 올라갈 수 있게끔 기둥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본문으로]
  10. 동물병원의 진료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고양이)를 생각해 보자. 일반적으로 자묘(생후 1년 미만)는 3차 접종까지 마친다(1회당 3~4만 원). 이에 광견병 접종을 추가하기를 권장한다(대략 3만 원). 이에 미처 서술하지 않은 추가 접종을 할 경우 비용은 계속 증가한다. 일회성 접종이 아니기 때문에 매년 접종을 해주어야 한다(대략 5만 원). 이에 더해 매달 목덜미에 발라주기를 권장하는 심장사상충 약도 잊어서는 안 된다(대략 1~2만 원). 보통 생후 5~7개월부터 발정기가 시작되는데, 임신이 될 때까지 발정기는 반복적으로 찾아온다. 여아나 남아 할 것 없이 발정기가 지속한다면 신체적 증상뿐만 아니라 무척 큰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길고양이의 경우 개체 수를 줄이려는 의도도 있다) 건강에 좋지 않다. 임신 계획이 없다면 중성화 수술을 하는 것이 좋다. 중성화 수술의 경우 여아는 30만 원이며 남아는 15만 원이다. 여아는 절제 수술을 받아야 하므로 가격이 더 높다. 고양이도 정기검진을 받아야 한다. 여기에는 엑스레이, 초음파, 피검사, 소변검사가 기본적으로 포함된다(대략 30~50만 원). 성묘~노묘의 시기에는 특히 신체 특화 진료를 보는 것이 권장된다(추가 비용 발생). 특히 치아 관리는 나이 상관없이 주기적으로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치석 제거 연 1회 권장, 대략 30~70만 원). 치아 질병으로 대표적인 치아 흡수 병변 등의 발병을 알기 위해서는 엑스레이를 찍어야 한다(회당 대략 20만 원, 엑스레이 찍는 치아 개수에 따라 다름). 엑스레이를 통해 상태를 파악하고 난 후에는 발치를 진행할 수 있다(개당 10~50만 원). 이 외 주요 장기 질환의 진료 및 치료를 위해 동물병원을 방문했을 때는, 1회당 1백만 원이 거뜬히 넘는다. 적어도 대한민국 시민이라면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만, 동물의 경우 그러한 혜택이나 제한이 없기 때문에 난감한 경우가 많다. 그뿐만 아니라 화장실 개수(고양이 수+1 권장), 화장실 크기(고양이 체격*1.5 권장), 화장실 청소 주기(일 2회 권장), 화장실 전체 갈이(월 1~2회 권장), 고양이 모래 종류(벤토나이트 권장), 모래 알갱이 크기(고운 입자 권장), 모래의 질, 배변 봉투의 종류(웬만하면 생분해 봉투 사용 권장, 너무 많은 비닐을 씀), 주식(생식 > 습식 > 건식 순으로 권장), 장난감, 스크래쳐, 식기, 벽면 설치형 놀이터, 캣타워, 캣폴, 캣폴... 현실적인 차원에서 고려해야 하는 지점은 집 크기나 주거의 건전한 환경 조성 등 지면이 부족해 적지 못할 정도로 많다. 이토록 많은 소모품을 포함한 유지·관리가 최소 20년 가까이 안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본문으로]
  11. 동물 판매-특히 펫샵-의 주춧돌이 되는 브리더breeder나 애니멀호더animal hoarder와 동물이 그 예시가 될 수 있겠다. 명백하게 인간이 귀책 사유를 갖는 유해한 ‘관계’(라고 명명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러하)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폭력적인 관계를 생각했다. 범죄로 처벌되는 영역부터 사회적으로 문제시되는 관계들(가스라이팅, 그루밍 성범죄, 데이트 폭력, 가정폭력, 동물 학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본문으로]
  12.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는 가스라이팅을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로, <가스등Gas Light)>(1938)이란 연극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본문으로]
  13.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는 그루밍 성범죄를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호감을 얻거나 돈독한 관계를 만드는 등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폭력을 가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그루밍 성폭력 피해자들은 피해 당시에는 자신이 성범죄의 대상이라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덧붙인다. [본문으로]
  14. 이때 길에 놓여 있는 '아기 고양이'의 경우, 한눈에 다친 것이 보이거나 위험한 상황에 놓인 것이 보이는 경우가 아니라면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된다. 먼저 그를 돌보는 어미가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어미가 돌보는 아기 고양이를 만지게 되면, 아기 고양이에게서 낯선 냄새가 나기 때문에 어미가 돌보지 않고 버릴 가능성이 높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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