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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한국에서, 서로 다른 얼굴을 가진 두 명의 장그래가 서로 싸우고 있다.
한 명은 아이돌 가수 겸 연기자 임시완의 얼굴이고, 다른 한 명은 웹툰 작가 윤태호 씨의 손에서 탄생한 2차원 캐릭터의 얼굴이다. 임시완이 연기한 드라마 <미생>의 장그래는 2014년 12월 정부가 발표한 ‘비정규직 종합대책(안)’의 별칭인 이른바 ‘장그래법’에 이름을 올렸다. 이에 윤태호 씨가 그린 원작 웹툰 [미생]의 장그래는 비정규직 노동자 3,400명의 모금으로 실린 한겨레 신문 광고에서, 또 다른 장그래를 향해 하이킥을 날리며 일갈했다.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으로서 호연한 임시완의 배역 장그래는, 드라마의 선풍적 인기와 더불어 한국 사회에서 청년 노동, 또 비정규직 노동에 대한 화두를 이끌어내는 계기였다. 그러나 드라마 종영을 전후해 그 얼굴과 이미지는 주로 사기업 CF, 그것도 특히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하청업체 문제 등 이 땅의 ‘미생’들을 양산하고 괴롭혀 온 주범인 재벌 대기업들의 CF에 활발히 활용되었다. 드라마 <미생>이 불러일으킨 사회적 담론의 확대와 공론화는 임시완 등 <미생> 출연 배우들과는 무관하게, 노동계와 시민사회 영역에서 별도로 진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소위 ‘노동시장 구조개혁’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고용노동부 광고에, <국제시장>의 황정민과 함께 임시완이 모델로 기용된 시점에서 그 불일치는 임계점을 넘어섰다고 할 수 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냐 안정성이냐의 논쟁 속에서 두 명의 장그래가 정면으로 맞붙게 된 것이다. 고용노동부 광고에서 임시완은 자의인지 타의인지 몰라도 이렇게 말했다. “노동시장을 개혁해야 청년 일자리가 해결됩니다.” 그가 역설한 ‘노동시장 개혁’을 전력으로 막아내기 위해, 웹툰의 장그래는 노동자, 시민, 빈민, 학생, 청년, 문화, 종교, 교육, 법조, 언론, 의료, 장애, 여성, 환경, 인권 분야의 350여 단체와 함께 장그래살리기운동본부를 출범시켰다. 2 운동본부는 민주노총의 4월 총파업에 적극 결합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국의 청년, 학생, 비정규직, 미조직 노동자들의 힘을 모아 6월 ‘장그래 대행진’으로 집결하여 사회적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전국을 누비고 있다.
지겨워도 한 번 더 까자! 장그래법 주요내용
정부의 ‘비정규직 종합대책(안)’에 처음 ‘장그래법’이라는 별칭을 붙인 것은 2014년 12월 23일 중앙일보 기사다. 앞서 18일 박근혜 대통령이 <미생>을 거론하며 청년세대의 구직난에 안타까움을 드러낸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정부가 자기네가 붙인 것도 아닌 ‘장그래법’이라는 별칭 때문에 비난받는 것을 더 섭섭해 할지, 아니면 정말 장그래를 위하는 정책으로 받아들여지길 바랐는데 그렇지 않은 것을 더 섭섭해 할지 궁금해지는 대목인데, 아무튼 청년 및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공감과 환호가 정부의 종합대책보다는 원작 웹툰 캐릭터가 던진 냉소적 반문에 더 집중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듯하다.
기업의 입장은 그렇다. 이미 현행 2년의 기간 안에 기업은 충분히 비정규직 노동자를 직무에 숙련시키고, 교육비용을 회수하고, 저임금 노동의 열매를 충분히 따 먹을 수 있다. 2년의 기간이 지난 후에 기업은 노동자를 해고... 아니 ‘계약만료 통보’한 후,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를 다시 고용할 수도 있다. 아니면 2년 미만의 시점에서 고용 계약을 해지한 뒤 재계약하는 수법으로, 비정규직법을 우회해 계속해서 노동자에 대한 비정규 고용을 유지할 수도 있다.
그런 기업들에게 있어서, 비정규직 고용 연한을 4년으로 늘려 주겠다는 정부의 대책은 참으로 고마운 배려가 아닐 수 없다. 비정규직 고용에 따른 저비용과 ‘유연성’(해고의 용이함)은 좋지만, 생산과 업무의 불안정성은 기업 입장에서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요소다. 마침 정부가 나서서 이 점을 개선해, 별도의 재고용 절차 없이도 노동자를 저임금 불안정고용 상태로 두 배나 더 긴 기간 동안 사용할 수 있게 해 준다니, 굳이 정규직 채용을 늘려야 할 필요도 덜어지고, 얼마나 좋은가!
정부의 종합대책에는 계약직 기간 연장 외에도 파견(간접고용) 허용 업종을 대폭 확대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1) 55세 이상의 경우에는 제조업과 절대 파견금지 업종(의사, 한의사, 치과의사)을 제외한 모든 직종에 파견 허용한다는 것과, 2) 대분류상 관리직과 전문직에 해당하는 400여 개 업종에 기간 제한 없이 파견을 전면 허용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기존에 32개 업종에 대해서만 2년의 기간 제한을 전제로 파견이 허용되어 왔던 것과 비교하면 그 규모를 체감할 수 있다.
이 대목쯤 오면 이런 질문을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다. “혹시 장그래들을 훨씬 더 많이 늘리는 정책이라서 ‘장그래법’인 게 아닐까?”
그래도 괜찮다. 걱정하지 말라며 임시완의 장그래는 웃는다. 아니지, 임시완의 얼굴을 빌린 고용노동부는 웃으며 말한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없애 주겠단다.
고용노동부 장관은 4월 19일 있었던 언론인 간담회에서, 올 6월부터 전국 사업장에 일반해고를 전면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6 기존 근로기준법 제24조 7에 따르면, 중대한 귀책사유가 없는 정규직 노동자를 회사 경영상의 이유로 해고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까다로운 네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했는데, 특히 24조 1항에서 규정하고 있는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입증돼야 했다. 정규직 노동자를 대량해고하지 않으면 회사가 넘어갈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일 때만 정리해고가 허용된다는 것이다. 일반해고 도입이란 이러한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 없이도 일정한 기준에 따라 저성과자 등을 해고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성과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지, 기존 근로기준법 하에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노조 조합원 등을 해고해 온 KT의 사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사측으로부터 정리해고 대상자로 찍히면, 그 때부터 ‘성과’는 노동자의 실력과 노력, 전문성 따위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전화 교환원은 현장 배선, 수리 업무에 투입되고, 기술직 직원은 영업에 투입된다. 성과가 안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도 기존 근로기준법 하에서는 성과가 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노동자를 즉각 해고할 수는 없었기에, 사측은 노동자를 보직 해임하고 다양하게 압박을 넣으면서 자진 퇴사를 종용해야 했다. 올해 6월부터는 그럴 필요는 없어질 것이다.
더불어 비정규직 종합대책(안)에는 대기업, 공공부문 중심으로 직무성과급제를 확산시키겠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근속 년수에 따라 호봉이 상승하던 기존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체계도, 성과에 따라 차별적으로 임금을 받는 체계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고용도 임금도 보장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이는 희미해져 가는 것이다.
장그래를 대량 양산하는 ‘장그래법’,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이의 ‘차별을 없애는’ 노동시장 구조 개편. 찬찬히 돌아보건대, 정부가 딱히 거짓말을 한 것은 없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노동유연성이라는 신화
[미생]과 비슷한 시기에 인기를 끈 웹툰으로 최규석 작가의 [송곳]이 있다. 아직 싸움에 나설 용기까지는 내지 못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기업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을 다룬 것이 [미생]이라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싸움에 나서기로 마음먹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어떤 과정을 겪게 되는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 [송곳]이라 할 수 있다. [미생] 못지않게 [송곳] 역시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에 대한 공감을 모아내는 데 작지 않은 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런데 [송곳]의 한 대목에서 작가 최규석은 비정규직이라는 고용 형태의 도입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요컨대 기업의 경영 환경은 수시로 변화하고, 이에 따라 어느 산업에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가 하는 점도 시시때때로 변화하므로, 상황에 맞춰 여러 산업 부문을 옮겨 다니며 노동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면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규석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설명하는 ‘노동 유연성’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단지 이로써 향상된 생산성의 대가는 그 같은 유연성을 가능케 하기 위해 여러 현장을 오가며 노동한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점만을 비판한다.
게다가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챙겨가는 주범으로 원청 대기업이 아니라 ‘깃발잡이’들, 즉 하청 파견, 용역업체들을 지목하는 헛발질까지 거하게 날린다. 이 대목은 작품의 등장인물인 노무사 구고신이 강연하는 장면에서 구고신의 말풍선 속에 들어가는 내용으로서, 작품 전체의 흐름이나 재미, 가치를 크게 손상하는 부분이라 할 수는 없으나, 비정규직 문제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틀로서는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진실은 어떠한가? 현실에서 더 많은 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수십 년 동안 일정한 직무에 종사하면서 해당 직무에 전문성과 경험을 갖추고, 그러한 전문성과 경험으로부터 얻는 자부심과, 같은 현장에서 오래 함께 일한 동료들과의 관계를 삶의 중요한 자산으로 삼아 살아간다는 점에서 정규직 노동자들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존재들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무리 오래 일해서 전문성과 경험이 쌓이고, 그 일 이외의 다른 일로 이직하기 어려워지고, 가정을 꾸려 가정에 대한 책임감 등으로 인해 직장과 회사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져가도, 이들의 임금은 최저임금 인상분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한 푼도 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고용주인 기업이, 언제든 계약 해지될 수 있는 이들의 처지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이들의 노동 권리에 대한 주장이나 조직화 시도를 차단하려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한 현장에서 노동하다가 해고되거나 강제로 전환 근무하게 된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 노동자와 똑같이 반발하며 똑같이 충격을 받는다.
종종 진보적 학자 및 활동가 일부, 특히 프레카리아트론을 주창하는 그룹 일각에서, 현대 철학적 개념을 접목해 ‘새로운 삶의 방식의 탄생’을 찬양하며, 정규직 전환 구호를 부정하고 ‘불안정성 그 자체를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노동자들은 ‘유목’하지 않는다. 유목은 오히려, 노동유연성 개념을 정당화하려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제시하는 그림 속에 있다.
기업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정규직이든 무기계약직이든 단기직이든, 어차피 누군가가 하게 될 그 일을 이왕이면 더 저임금이고, 미조직이고(노동권을 주장하지 않고), 쉽게 해고 가능한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이전 단락에서 살펴본 정부의 노동시장 구조 개편 내용에서, 비정규직 확대와 정규직 고용 불안정 심화가 함께 이루어지는 이유도 그것이다. 정규직 노동자의 밥그릇을 지켜주느라 비정규직 노동자를 차별한다거나, 비정규직 노동자를 살리기 위해 정규직 노동자가 양보해야 한다거나 하는 식의 편 가르기는 솔직히 거짓말이다. 정부와 기업이 불안정성을 원할 때 양자의 고용과 생계는 함께 위협받는다.
유목은 그렇게 해고될 노동자에 대한 변명에 가깝다. “비가 와서 부채가 안 팔리면 우산공장에서 일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러나 만약, 부채공장에 일자리가 없는 이유가 비가 오기 때문이 아니라. 세계적인 경제위기로 기업은 투자를 줄이고 소비자는 돈이 없어 소비를 줄이기 때문이라면? 그래서 부채공장과 우산공장을 합한 총 일자리 수 자체가 일정하지 않고 줄어드는 마이너스 게임이라면? 유연성이라는 미명 하에 해고된 노동자들은 누가 책임지는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는가?
기업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
숲에서 두 친구가 곰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 한 친구가 수그리고 앉아 운동화 끈을 묶기 시작하자, 다른 한 친구가 말했다. “시간 낭비야! 그런다고 곰보다 빨리 뛸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러자 운동화 끈을 묶던 친구가 대답했다. “곰보다 빨리 뛰는 게 문제가 아냐. 너보다 빨리 뛰는 게 문제지.”
기업은 물건을 팔아야 산다. 물건을 살 사람 주머니에 돈이 있어야 물건을 판다. 물건 살 사람들이 온통 빈털터리이니 물건이 안 팔린다. 기업은 매출이 줄어드니 비용, 특히 인건비를 줄여 일단 언 발에 오줌을 눈다. 노동자들이 해고되거나 임금이 줄어드니 빈털터리가 더 늘어나고 물건은 더 안 팔린다. 경제위기라는 곰은 부정할 수 없이 기업들을 덮쳐오고 있다.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불안정하게 만들어서 곰을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기업들도 안다.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곰의 다음 번 희생양이 내가 아닌 다른 기업이 되는 것이다.
경쟁 시장에서 기업이 택할 수 있는 생존방식은 그다지 다양하지 않다. 갈수록 좁아지는 시장에서 모두가 고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어느 한 기업이 총대를 메고 임금 인상 등 사회적 가치를 위한 비용을 지출하겠다고 말한다면, 다른 기업들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총대 멘 기업의 비생산적 비용 지출 증가로 인해 그 기업 상품은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되고 순식간에 시장 점유율을 다른 기업에 빼앗기게 된다. 그 기업이 도산해 버리면서 헌납해준 고마운 시장과 자본을 양분 삼아, 다른 기업들은 조금씩 더 생명 연장의 꿈을 이룰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비용 절감을 통한 가격 경쟁력 확보로 타 기업의 시장 점유율을 빼앗아 도산시키는 것은 경제위기 시기 기업의 거의 유일한 생존 방식이다. 친구를 곰에게 먹이로 던져주고 시간을 버는 것이다. 그럴 만한 시장 주도권이 없는 중소기업이라면, 적어도 타 기업에 떠밀려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비용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공격적인 투자와 개발, 수요 창출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다는 전술은, 꼭 절대로 불가능하다기보다, 거시적 경제 상황이 어려워지는 것과 비례해 매력이 줄어든다. 시장 전체의 평균 이윤율이 낮아짐에 따라 투자자들의 투자는 점점 더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데, 기업 입장에서도 가뜩이나 소비자의 구매력이 별로인 상황에서, 투자하기 싫어하는 투자자에게 높은 이자 물어가면서까지 자본을 끌어다 도전해 볼 만한 사업이 마땅히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기업은 시장 전체, 사회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목표로 하는 결사체가 아니다. 각개 생존을 위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이는 기업들을 중재, 조정하는 것. 필요하다면 기업들에 통제를 가해서, 궁극적으로 사회 전체의 공동 이익을 추구하는 것. 이것은 보통은 국가에 기대되는 역할이다. 그러나 실제로 국가 역시 시장 전체의 공멸로 치닫는 경제 위기 드라이브를 역행시키려는 급진적 시도를 하지 않는다.
왜인가? 국가 수준으로 올라가도 여전히 경쟁 시장이라는 현실은 압도적이다. 국가는 여러 국가들이 서로 경쟁하는 세계 시장에서 하나의 ‘기업’처럼 행동하며, 자국 기업의 비용 절감을 돕고 타국 시장을 곰에게 던져줌으로써 자국 시장의 이익과 생존을 추구한다.
지금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예로 들어봐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어느 정권이 집권하느냐가 크게 상관있지는 않다. 한국에 신자유주의, 노동 유연화 정책을 도입한 것은 탈권위주의 정권으로 일컬어지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였다. 비정규직 고용 연한을 2년으로 제한하는 법을 제정해 실질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 불안정을 더욱 심화시킨 정부도 노무현 정부였고, 집권기 5년 동안 구속된 노동자의 수가 이명박 때보다 노무현 때 훨씬 더 많았다는 것도 수치적 사실로 남아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이명박, 박근혜 정권과 본질적으로 똑같다거나 더 악한 정권이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들에게도 결국 똑같은 생존방식밖에 없었다는 점을 말하는 것뿐이다.
어쨌든 기업이 살아야 하지 않는가?
2010년대 중반을 지나고 있는 오늘날 한국의 현실 속에서 “어쨌든 기업이 살아야 하지 않는가?”하는 질문은,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이 조금 죽더라도 어쩔 수 없지 않는가?”하는 질문을 속에 감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업은, 사람을 죽인다. 2009년 쌍용자동차는 2646명을 해고했고, 2014년까지 해고 노동자들과 가족들 가운데 26명이 죽었다. 11 12 삼성반도체 공장에서는 2013년 초 기준으로 제보된 것만 160여 명이 백혈병 등 희귀, 난치 질환에 걸렸고 60여 명이 사망했다. 13 전국의 건설 현장에서는 매년 700여 명씩 죽고 있다. 14 2014년 4월에 진도 앞바다에서는, 해운업체의 비용 절감과 해양구난업체의 영업이익을 위한 국가 기구의 각별한 배려 속에 300여 명이 죽었다. 경제 위기 시기에 대응하고 살아남기 위한 기업의 노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삶의 파국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 중 적지만은 않은 숫자가 생물학적 죽음을 수반하고 있다.
기업이 살기 위해 사람이 죽는 현실에서, 우리는 기업과 사람이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하는가?
그러나 왜, 진짜로 살아 숨 쉬는 사람의 생존과, 사람들의 모임과 관계맺음을 통해 실체화되는 조직체인 기업의 은유적인 ‘생존’은 동등한 자격으로 저울 위에 올라야 하는가?
기업이 주도하는 경제 시스템. 이것은 ‘공존’을 가능치 않게 하는 시스템이 아닌가? 여전히 더 많은 사람들은 이 질문을 외면하고 싶어 하지만, 경제 위기가 점차 심화되어감에 따라 점점 더 외면할 수 없는 질문으로 떠오르고 있는 듯하다. 만약 기업 중심의 경제 체제 그 자체가 공존을 불가능케 하는 체제라면 우리는 “사람이 살기 위해 기업을 죽이면 왜 안 되는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기업이 죽으면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지 않는가? 그러나 어차피 기업이 살아도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는다. 해고의 규모는 점차 커져 가고, 제도적으로도 해고를 더욱 쉽게 할 수 있게끔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차라리 기업이 죽으면 시도해 볼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이 더 많다. 기업주가 경영을 포기한 기업을 노동자들이 인수해서 자주관리하는 방안,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는 방안, 시민 주주들을 모으는 방안 등. 내가 활동하는 노동자연대의 경우 쌍용자동차를 국유화하여 해고노동자들을 복직시키라는 대안을 내놓은 바도 있다. 이들 모두가 완전하고 완벽한 대안은 아닐지라도, 어차피 기존의 기업 중심 경제의 불완전성과 모순이 날로 커져가고 있는 오늘날, 적어도 기존 체제를 고수하는 것보다는 더 공존의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 속에서 제안되고 있는 방안들인 것이다.
마무리 : 바람개비를 생각하며
이 글을 쓰고 있는 5월 1일 오전 11시 기준으로 15시간 전, 장장 5개월을 끌어 오던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 기숙사 해고노동자 복직 투쟁이 드디어 노사 합의를 이끌어내었다. 해고된 노동자들 중 12명을 6월에 즉시 원직 복직시키고, 나머지 노동자들은 12월까지 순차 복직시키는 방안이 합의된 것이다.
투쟁에 나섰던 노동자들은, 드라마에 출연한 젊은 대기업 사원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어떤 면에서 그 누구보다도 장그래였다. 그들은 비정규직이었고, 2년마다 재계약으로 고용을 이어가야 하는 처지였고, 정부가 파견을 전면 허용하겠다고 이야기하는 ‘55세 이상 고령자’에 상당수 해당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졸업하는 순간 40%의 확률 16로 장그래가 되어야 할, 또 앞으로 그 확률이 얼마나 더 늘어날지 모를 처지에 놓인 대학생들이, 마치 자기 일처럼 기숙사 해고노동자들의 싸움에 발벗고 나섰다.
국제캠퍼스 기숙사 노동자들의 싸움은 공교롭게도, 가깝게는 신촌캠퍼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집단교섭 투쟁에 나서는 시기, 넓게는 민주노총이 4월 총파업으로 투쟁을 집결시키고, 시민사회 역시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거리에서 행동에 나서는 시기와 겹쳐서 벌어졌다.
대규모 노동자 투쟁을 앞두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살리기 위해 정규직 노동자들이 양보해야 한다’는 프레임을 밀어붙이던 정부와 기업들로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전면화 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4월 초~중순에 서울경인지역 대부분의 대학 비정규직 사업장들은 노동자들이 요구한 임금 인상과 고용 보장을 예상보다 순순히 수용했다. 단지 “오래 전부터 준비해왔다”며 강경하게 비용 절감을 추진하던 연세대학교만이 신촌캠퍼스, 국제캠퍼스, 연세재단빌딩 등 3개 현장 모두에서 철저한 침묵으로 일관하며 버티고 있었던 것이지만, 갈수록 불리해지는 여론과, 흔들림 없이 집결하는 학생들의 지지 앞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 이상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살 수 없다”고 외치며 일거리를 내팽개치고 싸움에 나서는 노동자들이 전국 곳곳에서 비슷한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는 지금 같은 시기는, 가진 자에게나 못 가진 자에게나 시스템에 대한 중대하고 근본적인 질문이 던져지는 시기이다. 경제 위기가 깊어져감에 따라, 생존을 위해 노동자들을 내팽개치려는 기업들의 행보와 생존을 위해 들고 일어나는 노동자들의 행렬이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일은 더욱더 빈번해질 것이고 더욱더 큰 규모로 벌어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공존을 가능케 하는 시스템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비껴갈 수 없게 될 것이다.
글 강병준(기고)
- <고함20>, “2D 장그래를 배신한 3D 장그래?”, 2015년 4월 13일 [본문으로]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장그래를 정규직으로!, '장그래 살리기 운동본부' 출범“, 2015년 3월 18일 [본문으로]
- <고함20>, 위 기사 [본문으로]
- <경향신문>, “[동영상 뉴스] ‘내가 정규직 시켜달랬지, 비정규직 연장해달라고 했냐?‘”, 2014년 12월 29일 [본문으로]
- 오민규, <400여 개 업종에 ‘평생 파견’의 문이 열린다>, 뉴스타파 포럼, 2015년 2월 16일 [본문으로]
- <서울경제>, ““내달 취업규칙 변경, 6월 일반해고 기준제시”… 정부 ‘쉬운 해고’ 속도전“, 2015년 4월 19일 [본문으로]
- 제24조(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의 제한) ① 사용자가 경영상 이유에 의하여 근로자를 해고하려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어야 한다. 이 경우 경영 악화를 방지하기 위한 사업의 양도·인수·합병은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본다. ② 제1항의 경우에 사용자는 해고를 피하기 위한 노력을 다하여야 하며, 합리적이고 공정한 해고의 기준을 정하고 이에 따라 그 대상자를 선정하여야 한다. 이 경우 남녀의 성을 이유로 차별하여서는 아니 된다. ③ 사용자는 제2항에 따른 해고를 피하기 위한 방법과 해고의 기준 등에 관하여 그 사업 또는 사업장에 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있는 경우에는 그 노동조합(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없는 경우에는 근로자의 과반수를 대표하는 자를 말한다. 이하 "근로자대표"라 한다)에 해고를 하려는 날의 50일 전까지 통보하고 성실하게 협의하여야 한다. (국가법령정보센터 www.law.go.kr/법령/근로기준법) [본문으로]
- 최규석, <송곳>, 2-9화, 2014년 5월 26일 [본문으로]
, “Bear chases man after being shot with tranquilliser dart”, 2010년 1월 29일 [본문으로] - <노동자 연대>, “삼성전자서비스지회, ‘경찰, 삼성 비호에 시신탈취·폭력연행까지‘”, 2014년 5월 20일 [본문으로]
- <한겨레>, “[속보] 대법원 “쌍용차 정리해고 유효”…원심 파기 환송“, 2014년 11월 13일 <오마이뉴스>, “쌍용차 해고자, 또 사망... 벌써 26번째”, 2014년 12월 14일 [본문으로]
- 이 글의 초고를 넘긴 5월 1일, 쌍용차 해고노동자 중 2명이 추가로 사망한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따라 쌍용차 해고 사태에 따른 희생자는 28명으로 늘어났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본문으로]
- <한겨레>, “백혈병 등 관련 제보자 160명, 사망자 60여명“, 2013년 1월 22일 [본문으로]
- <노동자 연대>, “노동자들이 나서야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2014년 6월 30일 [본문으로]
- <한국대학신문>, “'108일만의 합의' 연세대 해고 노동자 고용승계 합의”, 2015년 5월 1일 [본문으로]
- <문화일보>, “대졸 첫 직장 10명 중 4명 ‘비정규직’”, 2015년 3월 2일 [본문으로]
- 페이스북 페이지 ‘장그래살리기운동본부’, 2015년 5월 13일. https://www.facebook.com/hopelabor2015 [본문으로]
- 오민규 전국비정규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페이스북 계정, 2015년 5월 16일.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461204700702198&set=a.108675009288504.15280.100004380162443&type=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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