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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재일조선인인가

한국 사회가 5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단일 민족으로 구성되었다는 말이 통용되던 시대는 지났다. 세계화의 물결에 힘입어(?) 다양한 문화권에서 건너 온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 살고 있다. 갑자기 다른 그들우리의 틈바구니에 끼어들어 살게 되면서 서로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속 싸우기만 하라는 법은 없다. 언젠가는 서로를 이해하고 마찰을 피할 것으로 추측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며 이러한 논의는 지금도 이뤄지고 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도 이에 관한 논의가 점차 일어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같은 우리이면서 우리가 되지 못하고 다른 공간에서 소수로 사는 그들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저조해 보인다. 재일조선인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왜 유독 재일조선인일까. 가장 먼저 당위적은 주장을 펼칠 수 있겠다. 다른 사회에 속한 그들을 조망함으로써 우리옆에 있는 그들과의 관계 맺음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소수로 사는 그들은 재일조선인 외에도 재미한국인이나 재중동포도 있다. 이들 역시 새로운 집단에서 이방인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재일조선인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인간이 끊임없이 환경에 영향을 받고 이에 적응하는 동물이라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이들은 현재 몸담고 있는 집단에서 기인하는, 동시에 다른 그들과는 구별되는 내재적 특성을 가지게 된다. 이 외에도 국제 관계로 인한 영향 등 다양한 변수가 작용할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이러한 변수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나타나게 된 각각의 특성은 절대 위계적인 것이 아니다. 어디에 중점을 두는가에 따라 그 특성은 더 풍부한 재원으로 기능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동의한다면 마찬가지로 재일조선인 사회에는 이들과는 두드러지게 구분되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전제가 가능하다. 이는 남과 북의 대립구도 혹은 미소의 대립구도가 그대로 재일조선인 사회에 이식되어 하나의 프레임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에 일본이 조선을 식민 지배한 당사자라는 점을 추가로 고려하면 일제의 식민 지배와 남북의 이념 대립이라는 요소가 시, 공간적인 재연성을 가지고 재일조선인 사회에 복합적으로 반영되었다 해도 무리가 없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재일조선인은 재미한국인이나 재중동포와는 다른 특성을 가지게 되었고 그에 따라 안팎으로 그들을 인식하는 다양한 양상이 나타났을 것이다.

문제는 상호 간의 인식이 모두 다르게 된 까닭이 단순히 재일조선인이 현재 머무르는 공간이 우리와 다르다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핵심은 그들이 경계의 끝에 위치한다는 점. 이를 좀 더 친절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그들은 한국, 북한, 일본이라는 세 테두리에만 속할 수 있을 뿐이다. , 어느 곳에서도 재일조선인이 중심에 접근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래서 그들은 점점 주변으로 밀려나게 되고 어느새 어쩔 수 없이 경계에 다다르게 된다. 그 결과 경계의 끝에 있는 재일조선인은 끊임없이 불안정하다. 이러한 불안정성 때문에 바라보는 주체에 따라 재일조선인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진다. 문제는 그들이 현재 살고 있는 국가가 민족으로서 정체성을 느끼는 국가와 다르다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 재일조선인은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형성된 집단으로 조선인의 일본 이주가 본격화 된 것은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식민 지배를 받게 된 이후부터이다. 19112,527명이었던 재일조선인의 인구는 해방 직전인 1944년에는 190만 여명에 이르게 된다.[각주:1] 해방 직후 한반도는 강대국의 이념 싸움의 장이 되어 남북으로 분단되고 말았고 남북 양 측 모두 과거 조선으로서의 정체성에 큰 결함을 갖게 되었다. 결국 남북 모두 재일조선인들에게 조선으로서의 정체성을 완벽히 제공할 수 없었다. 더욱이 시간이 흐르면서 재일조선인들은 조선인으로서 정체성도 점차 희박해져갔다.[각주:2] 일본 내 유무형의 차별과 억압 속에서 생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기저기 발은 조금씩 걸칠 수 있지만 오롯이 동화되어 살 수는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재일조선인이고, 그래서 특별하게 다가온다.


2. 우리가 그리고 너희가 그들을 바라보는 방식

재일조선인은 일제강점기라는 역사가 낳은 유산이다. 하지만 그들이 일본에 살고 있다고 해서 모든 초점을 일본에만 두어서는 안 될 노릇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재일조선인은 한국, 일본, 북한에 모두 조금씩 발을 걸치고 있는 존재이다. 당연히 그들에게 각 국가가 갖는 의미도 전부 다르다.

일본이라는 공간은 현재 그들과 가장 직접 맞닿아 있는 공간이다. 오롯이 자의로 넘어가게 된 것은 아니지만, 재일조선인은 일본에 거주하게 된 그 순간부터 일본이라는 공간 속에서 자신들을 만들어왔다. 재일조선인의 역사는 일본의 실질적인 차별에 맞선 투쟁의 역사이며 이 과정에서 그들은 권리 수호를 통해 그들을 형성했고 일본 내에서 분명한 자신들만의 무엇을 가진 집단이 되었다. 자신을 규정하는 데 있어 빼먹을 수 없는 존재가 일본이다. 반면 남북한이 재일조선인에게 갖는 의미는 상당히 다르다. 남북한은 그들에게 있어 지리적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항상 추억하는 조국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분단으로 인해 조국으로서의 정체성은 훼손되었다. 관념적으로는 존재하지만 현실에서는 허상으로만 존재하는 조국, 바로 그것이 남북한이다. , 재일조선인의 조국에 대한 지향은 계속된다는 점에서 행복했던 조국에 대한 향수이자 미래에 다시 돌아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통일 조국을 향한 갈망이다. 그 공간 속에서 그들은 어떻게 인식될까.

- 일본

일본에서는 역사적으로 재일조선인에 대해 더럽다’, ‘불결하다처럼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이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실에 기초한 바는 아니다. 도리어 일본 근대화 이후 생겨난 뿌리 깊은 허위의식에 근거한 것이며 그 흐름이 근대화 이후 식민 지배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조선인에 대하여 불결’, ‘나태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각주:3]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것이 못된다. 더하여 31 운동으로 보여준 조선인의 폭발력은 일본인이 조선인들은 위험하다라는 이미지를 갖기에 충분했다. 이 같은 차별의식은 식민 지배 기간 동안 유지,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각주:4] 이러한 차별의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본인들의 무의식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일본에서 군국주의의 마수가 사라졌고 민주주의가 도래했다. 더불어 1965년 한일법적지위협정, 1982년 일본의 난민조약 비준 등으로 재일조선인에 대한 처우가 나아질 수 있겠다는 기대가 들기도 했다. 하지만 실상은 상기 차별의식의 잔존 혹은 부정적 이미지의 확대, 재생산에 지나지 않았다. 재일조선인에 의한 강력 사건에 관한 일본 미디어의 보도 행태는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각주:5] 중요한 것은 사건의 동기나 이면에 있던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거기에서 기인하는 불안감이 아니라 조선인에 의한 일본인 살해그 자체였다.

일본 최고의 배우가 되고자 하는 재일조선인과 그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박치기에서도 재일조선인에 대한 이미지는 유사하다. 그저 쓰레기를 버리고 있을 뿐인데 재일조선인은 불시 검문을 받고 개목걸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한다. , 최고의 배우가 되고 싶은 경자에게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은 절대 드러낼 수 없는 치부이다. 탁월함을 인정받으면서도 주연으로 발탁되기 위해서 더 중요한 것은 제작자와 잠자리를 갖는 것이었다. 배우로서 자질은 평가받지 못한다. 아니,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게다가 경자는 자신의 조상을 죽인 군국주의 일본을 찬양해 마지않는 대사만을 말해야 한다. 그가 지니고 살았을 가족사의 슬픔과 이에 대한 지적은 허공에 공허하게 울릴 뿐이다. 일본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화면에 필요한 것은 일본인으로서 순수성뿐이다. 동시에 재일조선인은 사랑하는 이의 가족들을 소개받을 수 없는, 항상 숨어있어야 하는 존재이다. 재일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까지 나누었던 남녀의 관계는 한순간에 어차피 결혼할 것은 아닌것으로 전락한다. 가장 소중한 자리는 순수한 일본인의 것이어야 하며 재일조선인은 재일조선인끼리만 어울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발은 역시나 재일조선인이라는 말에 압살당하고 만다. 이 온당하지 않은 차별은 사랑한다면 이해해야 하는 것으로 둔갑하며 이 때 받은 상처는 오롯이 경자개인에게만 남겨진 것이 된다. 이처럼 재일조선인이 드러나서 안 되는 이유는 오직 하나, 그들이 다른 종류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다름은 가 수용하기에는 너무나 불쾌하고 껄끄럽다. 적어도 영화 속에 사는 일본인들에게는.

- 한국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는 재일조선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대한민국에서 재일조선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방송인 추성훈이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대한민국의 유도 유망주였던 그가 일본의 국가대표로 국제무대에 나서게 된 이유는 보이지 않는 차별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한 경자와 마찬가지로 유도 선수로서의 실력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재일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꿈의 문턱 바로 앞에서 좌절해야만 했다. 그런 그가 국제무대에서 대한민국 선수를 꺾고 메달을 획득하자 우리는 그를 매국노로 몰았다. 같은 민족을 메다꽂은 반역자. 이것이 당시 그에게 붙은 타이틀이라면 타이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그는 이른바 워너비 아빠혹은 딸 바보가 되었으며 격투기 선수로서는 항상 포기하지 않고 꿈을 좇는 모범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이 대목에서 재일조선인에 대한 우리의 이중성이 드러난다. 우리가 보기에 나쁜 것은 재일조선인 개인으로서 부적격에 기인할 뿐이다. 반대로 괜찮아 보이는 것은 한민족이라는 미명하에 집단을 전위에 세우고자 한다.

이는 비단 추성훈 개인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분단 이후부터 대한민국 정부는 남북의 분단 구도를 재일조선인에게 그대로 대입했다. 그 결과 우익 계열의 재일본 대한민국거류민단(민단) 세력은 포용하나 좌익 계열의 재일본 조선인총연맹(조총련) 세력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배척하고자 했다. 또한, 일본과 마찰을 빚을 때는 은연 중에 한국의 편에 설 것을 기대하면서도 그러기 위해 심리적 거리감은 전혀 줄여주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에게 재일조선인들이 필요한 적은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한일 국교 정상화 시 재일조선인의 자본을 도입을 추진할 때, 근대화 추진을 위해 재일조선인의 자본과 기술이 필요했을 때, 88 서울 올림픽 준비를 위한 자금을 마련할 때, 병역 의무를 부과할 때이다. 스스로 필요할 때만 재일조선인을 한민족혹은 국민으로 규정할 뿐이었다.[각주:6] 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이중적인 자세란 말인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가 그들을 지켜주었느냐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들은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더럽힘을 당해 민족적 순수성을 오염시킨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주홍 글씨를 그들에게 새겼던 듯하다. 이에 더하여 적극적으로 재일조선인 귀국 사업을 펼치던 북한을 의식해서인지 남한의 반공 이데올로기는 재일조선인에게도 똑같이 투영되었다. 게다가 육영수를 암살하고 박정희까지 살해하려 했던 문세광이 조총련 출신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각주:7] 공산주의자로서 재일조선인에 대한 낙인은 더 깊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후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혹은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 그 낙인을 지워주려는 척하며 경제 근대화의 디딤돌로 혹은 반공 이데올로기 상의 바람막이로 그들을 이용하려 했을 뿐이다.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재외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라는 우리나라 헌법[각주:8]을 상기해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행태라 아니할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와 우리 국민들이 가진 소위 반쪽바리라는 인식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에는 차마 확신이 들지 않는다.

- 북한

마지막으로 북한은 어떨까. 북한은 얼핏 보기에 남한보다 재일조선인을 동포로서 인식하고 수용하려는 듯하다. 실제로 한국전쟁 종전 이후에 북한은 재일조선인들의 귀국 사업을 추진하고 재일조선인의 민족 교육을 지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이 귀국 대상으로 삼은 것은 조총련의 간부들과 지식인들, 그리고 고급 기술자들이었다.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밑거름이었던 셈이다. 일본에 남아 있는 재일조선인들은 일종의 볼모가 되어 북한으로 넘어간 그들의 안전을 기원하며 계속해서 북한에 송금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으로 건너간 조선인들 역시 시간이 갈수록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으며 일반 북한 주민들로부터도 차별을 받기에 이른다. 8, 90년대 대대적인 방북 사업 당시에도 북한이 한 것은 단순히 배를 제공한 것뿐이다. 당시는 동독이 붕괴하는 등 사회주의 진영에 커다란 불안감이 맴돌던 시기로 공산권 국가가 제공한 배를 타고 자유진영의 주민이 넘어온다는 것은 커다란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것마저도 북한의 과시를 위한 일종의 정치적 쇼였다는 계산이 나온다. 집단주의를 표방하여 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을 완료하고 공산주의 이행을 목소리 높여 주장하던 북한에마저도 재일조선인은 노동 계급화 할 수 없는 반종파세력이었던 것일까. 이렇듯 북한에 있어 재일조선인은 계급 투쟁을 위한 수단인 것처럼 보인다.

 

3. 그렇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할까

사실 이 문제는 명확하게 답을 내리기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글을 쓰고 있는 본인도 재일조선인은 만나본 적도, 대화 한 마디 나누어본 적도 없다. 더욱이 단순히 역지사지의 마음가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분명히 존재한다. 재일조선인 사회라는 공간에서만존재하는 경험과 느낌, 역사적 맥락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먼저 걸어온 길이 서로 비슷한, 하지만 최종 결정은 아주 판이한 두 인물이다. 물론 겨우 두 명을 통해 전체 재일조선인을 조망한다는 것에 무리가 있다는 지적에는 동의하는 바이다. 다만 이들은 재일조선인 중 미디어 노출 정도가 가장 높은 무리에 속할 것이며 그렇다면 추후 분석을 위한 1차 자료(?)로 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여겨진다.

그 두 인물은 바로 재일조선인 축구 선수인 정대세와 이충성이다. 정대세는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 프로 축구 무대에 데뷔하여 북한 국가 대표로 선발되어 성인 대표팀 경기를 치른 선수이다. 그는 자신 마음의 디딤돌은 북한에 있으며 조국을 배신할 수 없다고 말한다.[각주:9] 그에게 있어 북한은 부모와도 같다. 이것만 보면 그의 정체성은 온전히 북한에 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조선 사람이지 북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는 북한이 마음의 고향임에도 직접 가서 살지는 못할 것이라 말한다. 오히려 그의 선택지는 일본이다. 다만 이것은 모국으로서 일본이 아니다. 그는 한국, 일본, 북한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공간으로서 일본을 지향하며 다시 이는 곧 재일이라는 말이 된다. 더불어 그는 자신의 존재를 통해 일본 내 만연한 재일조선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꾸려고 한다. 그 자신도 좌절하는 재일조선인이 많다는 것을 알지만 맞서고자 한다.

이충성 역시 정대세와 마찬가지로 재일조선인으로 태어나 일본 프로 축구 무대에 데뷔한 선수이다. 그가 정대세와 다른 점은 일본의 유니폼을 입고 국가 대항전에 출장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단순히 국가 대표로서 일본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한국 국적을 버리고 아예 일본인으로 귀화하는 길을 택했다.[각주:10] 이충성의 일본명은 타다나리 리이다. 그는 리()라는 성을 버리지 않았다.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의 뿌리가 한반도에 있기 때문이라고 명확히 밝힌다.[각주:11] 더불어 그는 스스로 재일조선인임을 숨기려 들지도 않는다. 또한, 그는 한국 청소년 국가 대표 상비군으로 소집되었을 때 받았던 차별로 인해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는 점 역시 부인하려 들지 않는다. 그의 결정은 정대세와 마찬가지로 재일조선인으로 사는 것이었고 다만 그 방법이 정대세와는 달리 귀화였던 셈이다.

이 두 인물을 통해 재일조선인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엿볼 수 있다. 우선 둘 다 자신의 근원이 조선 혹은 한반도에 있다고 말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를 통해 현재 재일조선인이 자신의 정체성의 한 축을 통일된 한국에서 찾고 있다는 짐작을 조심스레 해보고자 한다. 그들에게 있어 조국은 현재의 분단된 남북이 아니라 관념적으로 변용된 통일 한국인 것이다. 이는 스스로를 규정하고 내부의 갈등을 다잡는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은 통일 한국이라는 관념 속의 조국에 종속되지도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일본 내의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고 굳이 재일조선인이라는 점을 부인하려 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재일조선인임을 떳떳이 드러내고 극복하려고 한다. 나아가 이를 통해 일본 내 차별 철폐를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조국을 그리워하면서도 현재 사는 공간 역시 포기하지 않으려는 일종의 긴장 관계인 셈이다. 또한 재일조선인은 초기에 비자발적으로 일본으로 이주하게 되었지만[각주:12] 아직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결집한다는 점에서 디아스포라라 할 수 있다. 현재의 공간과 조국 사이의 긴장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재일조선인이 디아스포라에 속한다는 것, 이 두 요소를 종합하면 재일조선인은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종합하자면 재일조선인은 미래의 통일 한국에의 정체성과 재일조선인으로서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드는 의문은 성공한 유명인으로서의 재일조선인이 아니라 평범한 재일조선인이 갖는 인식이다. 김종곤(2014)의 연구에 의하면 3세대로 분류되는 재일조선인들은 조상의 뿌리가 있다는 점에서 조선을 조국으로 선택한다.[각주:13] 동시에 아직도 일본에서는 자신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존재함을 인정하면서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가짜라고 밝힌다. 만들어진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자신들이 겪는 문제가 역사적인 문제에 기인하는 점을 인지하면서 현재를 살아간다. 이는 얼핏 보기에 한국(조선) 대 일본의 대립 구도인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그들은 이 역사를 용서는 하되 잊지는 않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 조국에 대한 지향은 여전히 가지지만 일본의 만행이 밉다고 하여 일본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설령 가짜일지라도 -거주자로서 재일이라는 의식을 동시에 갖는 것이다. 일본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욕심과 일본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비판 의식이 공존하는 셈이다. 다만 앞서 언급한 정대세와 이충성처럼 재일조선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일소하고 차별에 맞서려는 저항 의식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이 표본들을 통해 재일조선인의 스스로에 대한 인식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는 있다. 언급한 표본만 보자면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은 조국을 지향하되 현재의 공간에서 인정받고자 한다는 것 정도로 압축된다. 하지만 이 역시 단정 지어 말하기는 무리가 있을 것으로 본다. 어떠한 연구에서건 반드시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려 드는 사람이나 모든 것을 체념하고 개인만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답은 무엇일까. 단언컨대 100% 옳은 정답은 없을 것이다. 다만 앞에서 언급한 다양하고 복합적인 변수들을 상기하고자 한다.[각주:14] 이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경계하는 종의 안전 장치이다. , 재일조선인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방식이 어쩌면 경우에 따라 모순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4. 너도 북어지

지난 225일 수원 삼성과 우라와 레즈 간의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는 수원 삼성의 응원석 쪽에 ‘Stadium for football not only for Korean'이라는 걸개가 걸렸다. ’Japanese only'라는 걸개를 내걸었던 일본의 차별 의식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차이는 인정하되 차별은 안 된다라는 것이 상호 공존의 기본적인 원칙이고 다문화주의에서도 기본적인 차이는 인정하지만, 보편 인권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을 것을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문제 제기는 온당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얼마나 떳떳할 수 있는지 되묻고 싶다. 우리는 일본에게 동포인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그만두라고 요구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 역시 그다지 진실하지 못하다. 굳이 따지자면 우리는 겨 묻은 개이고 일본은 똥 묻은 개이기 때문에 그나마 낫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건가.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이다. 재일조선인이 서 있는 경계의 한 축씩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 북한, 일본 중 그 어느 나라도 재일조선인에게 안정적인 경계를 제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의적으로 그리고 도구적으로 그들을 인식하고 각자의 편의와 필요에 맞게 대처할 뿐이었다. 가장 있는 그대로, 그리고 당당하게 자신들을 인식한 것은 재일조선인 자신들뿐이었다. 아마 이런 왜곡되고 굴절된 상이 맺어졌기 때문에 모두에게 재일조선인 문제가 어렵게 다가오지 않나 싶다. 이미 관념화된 재일조선인에 대한 이미지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애써 무시하고 넘어가려 하지 말자. 누군가는 분명히 이 놈의 나라, 지겨워서라도 돈 벌면 외국으로 떠 버려야지.”라고 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분들에게 한마디. 너무 안심하지 말기를 권한다. ‘Japanese only’를 외친 것이 비단 일본뿐이라고 어떻게 자신할 것인가


글 편집위원 노아

  1. 모리다 요시오, 『숫자가 말해주는 재일 한국 ․ 조선인의 역사』, 1996, p33,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 중앙 민족교육위원회(2007), p35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2. 이주 1세대가 이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조국이나 기원을 그리워하는 반면 이주 2세대는 이러한 1세대를 부정하고 경멸한다. 그들은 조국에 대한 향수나 애정보다는 이주 사회에서 인정받아 이주민으로서 인식되는 것을 거부한다. 하지만 이내 차별과 멸시로 좌절하고 만다. 이주 3세대에게서는 또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2세대처럼 1세대를 무시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원류를 인정하는 동시에 이주 사회에서 능력으로 인정받고자 한다. 조국에 대한 향수와 이주 사회에서의 동화라는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며 그 후 세대로 갈수록 이주사회 내의 동화가 더 견고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세대가 지날수록 1세대와는 다른 방식의 자기 인식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3. 이승희, 「식민지 시기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 치안당국의 인식」,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제44집, 2013, p167. [본문으로]
  4. 실제로 1928년 경시청 내선계장이었던 스즈키 요시사다는 조선인이 자제심이 부족하여 방종하고, 위생관념이 없으며, 말솜씨로 일본인들을 속이고, 지식수준이 낮아 폭력을 사용하며, 마지막으로 도박을 좋아하고 도벽이 있다고 서술한다. 이승희(2013), pp171-173. [본문으로]
  5. 1958년 고미쓰가와 사건이 대표적인 예이다. 본 사건은 1958년 4월과 8월에 걸쳐 도쿄 에도가와 구에서 두 명의 여성이 당시 18세의 소년이었던 재일조선인 이진우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다. 그 때 아사히 신문, 요미우리 신문 등 일본의 주요 매스컴이 주목한 것은 단지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이진우였다. 그들은 “조선인 이진우”, “조선인 이진우의 유일한 양심은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 뿐” 등 조선인으로서의 이진우와 살인에 대한 죄책감이 없는 조선인으로서의 면모만을 강조했다. 이면에 있던 재일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받아야 했던 차별과 거기에서 기인하는 불안감 등은 전혀 조명하지 않았다. 사건 자체는 “조선인에 의한 범죄”로 프레이밍 되었으며 이진우를 죄 없는 일본 여성을 살해한 극악한 “조선인”으로 규정지음으로써 일본 국민들로부터 감정적 동조를 이끌어낼 뿐이었다. 그들은 재일조선인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묘사 대신 예의 차별 의식을 바탕으로 재일조선인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할 뿐이었다. 재일코리안변호사협회, 박인동 역, 『일본 재판에 나타난 재일코리안』, 한국학술정보(주), 2010. pp49-60. [본문으로]
  6. 한일민족문제학회, 『재일조선인 그들은 누구인가』,삼인, 2003, p53. [본문으로]
  7. 적어도 정부의 발표로는 그렇다. [본문으로]
  8. 대한민국 헌법 제2조 2항, 국가법령정보센터, http://www.law.go.kr/lsEfInfoP.do?lsiSeq=61603#0000, 검색일 2015-03-20. [본문으로]
  9. 신무광,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 선수』, 왓북, 2010, pp15-54. 이후 정대세에 관한 논의는 본 저서를 참조함. [본문으로]
  10. 정대세는 북한 소속으로 국가 대항전에 출장했지만, 한국 국적은 유지한 상태이다. 정대세 출생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 국적법에서는 부계 혈통주의를 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무광(2010), p22. [본문으로]
  11. 신무광(2010), pp281-300. 이후 이충성에 관한 논의는 본 저서를 참조. [본문으로]
  12. 물론 일제가 물리력을 동원하여 강제적으로 끌고 간 것은 아니다. 다만 일본으로의 이민은 토지조사사업, 산미증식계획, 황민화 정책에 의한 노동력 수탈로 대표되는 일본의 정책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자유의지가 박탈된 비자발적 이주라 해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13. 김종곤, 「‘재일’ &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가치지향성- 재일 조선인 3세를 중심으로」,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논총, 제 59집, 2014, pp36-43. [본문으로]
  14. 다수 집단 내의 이질적 소수라는 점, 남북 대립의 구도가 시공간적 재연성을 가지고 재일조선인 사회에 투영되었다는 점, 남한․ 북한․ 일본이라는 세 집단에 속할 수 있지만 항상 주변부에 머물러야 한다는 점 등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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