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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에브도’ 사건일지


2015년 1월 7일, 프랑스 파리 한복판에서 무장 괴한들이 만평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편집국에 쳐들어가 총기를 난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테러로 편집장을 포함해 열 명의 언론인과 두 명의 경찰이 목숨을 잃었다. 사건의 발단은 2012년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통적으로 비종교적이며 좌파적인 성향의 샤를리 에브도에서 이슬람교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알몸으로 “내 엉덩이도 좋아?”라고 말하는 만평을 실었던 것이다. 사실 무함마드를 소재로 한 만평이 그 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수위’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당시에도 이슬람권 국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프랑스 관련 시설이 문을 닫는 등 큰 논란이 불거졌던 터였다. 


테러의 파장은 컸다. 프랑스 시민들은 ‘나는 샤를리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에 쏟아져 나와 폭력의 희생양이 된 샤를리 에브도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시위의 총 참여자 수는 400만 명에 달했다. 테러범들은 ‘우리가 샤를리를 죽였다’고 소리쳤지만, 결과는 정반대가 된 것이다. 무함마드의 복수를 하겠다던 그들은 재정난에 허덕이던 샤를리 에브도에 돈과 명성을 가져다줬다. 정부는 100만 유로의 지원금을 즉각 약속했고, 정기구독 신청과 기부금 문의가 전 세계에서 밀려들었다. 


더불어 언론의 ‘표현의 자유’가 사회적 논쟁의 중심에 섰다. ‘나는 샤를리다’라는 구호는 칼에 굴복하지 않는 펜의 상징이 됐다. 당사자인 샤를리 에브도 역시 테러 직후 발간된 호에서 또다시 무함마드를 그림으로써 풍자정신이 사그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한편 거기에 맞서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나타났다. 테러 이전에 만평의 내용에는 지나친 면이 있으며, 타 종교에 대한 존중을 넘어 무작정 표현의 자유를 인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 다수의 의견은 샤를리 에브도의 손을 들어줬다. 무고한 생명을 대상으로 한 테러였다는 사실도 힘을 보탰다. ‘나는 샤를리다’라는 구호는 권위에 맞선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는 상징으로 떠올랐다.


침묵하지 않는 것


여기까지가 올해 초 일어난 샤를리 에브도 사건의 내용이다. 당사자인 프랑스와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무척 컸다. 프랑스에서 자란 이주민 2세대가 저지른 범죄라는 점에서, 사태는 그 동안 논란이 되곤 됐던 ‘이주민 관용 정책’이 완전히 실패했음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타 종교에 대한 ‘표현의 자유’의 논의를 시작으로 테러범들의 사회적 배경에 대한 논의까지, 저마다의 결을 가진 논쟁들이 끝없이 확산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샤를리 에브도 사건은 그만큼의 중요성을 갖지 못했다. 일부 언론은 연재 기사를 통해 사건의 흐름을 비교적 자세히 보도했지만, 단순한 사실 전달을 넘어 ‘입장’을 표명한 기사는 드물었다. 이에 대해 월스트리트저널 한국판은 샤를리 에브도 사건이 세계적인 논쟁을 불러왔다고 보도하며, “하지만 웬일인지 한국만은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각주:1] 경향신문 역시 논설을 통해 언론들이 이번 사건을 그저 ‘유럽의 문제’로 치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각주:2] 이러한 의견들은 단순히 국내 언론이 세계적 이슈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지 못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표현의 자유’이든 이주민과 관련한 ‘다문화 정책’이든, 어떤 면에서도 성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그 현실 속에서의 침묵을 지적하고 있다. 


이 침묵이 석연치 않다. 국내 이주민의 증가세를 말하기가 새삼스런 요즘이다. 더불어 우리나라에서도 이주민과 관련한 문제들이 조금씩 조짐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래 전부터 이민 정책을 시행해 온 나라가 끝내 막다른 골목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은 분명 더 토론되어야 할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사건이 터진 지 약 4개월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그렇다. 


이에 샤를리 에브도 사건의 속내를 네 가지 논점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 이 중에는 이미 여러 차례 논의되어 낯익은 내용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이 논점들의 연결고리 속에서 이른바 ‘문화 충돌’로 규정된 사건이 대도시 한복판에서 발생하고, 세계의 다른 곳에서 더 극단적인 형태로 되풀이되는 과정이 드러나게 된다. 이 과정은 세계 곳곳에서 ‘이슬람 극단주의’를 표방하는 테러들이 발생할 때마다 비슷하게 적용되는 양상이기도 하다. 


ⓒ 샤를리 에브도 *독자의 판단을 위해 개재합니다.



1. ‘표현의 자유’의 이중잣대


첫 번째 논점, ‘표현의 자유’는 의심할 여지없이 샤를리 에브도 사건이 불을 붙인 가장 큰 이슈였다. 사실 논란이 된 만평은 무슬림이 아닌 사람이 보기에도 매우 노골적이다. 어떤 이들은 총칼만 들지 않았을 뿐, 무슬림에 대한 테러나 다름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표현의 자유를 인정할지 여부를 떠나, 만평은 프랑스 인구의 10%에 달하는 무슬림에게 충격을 줄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를 외치던 이들은, 단순히 ‘지나친 표현을 삼가하고 타 종교를 존중하라’고만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들이 지적한 것은 ‘무슬림 테러리스트’가 저지른 이 사건에만 적용되는 ‘이중 잣대’였다.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됐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면, 왜 프랑스인들은 중동 전쟁에서 희생된 수많은 이들에 대해서는 침묵한 것일까? 샤를리 에브도의 평소 논조도 문제가 됐다. 그 중에서도 비교가 된 대상은, 프랑스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소수에 해당하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에 대한 것이었다. 양자에 대한 태도가 너무 달랐던 것이다. ‘표현의 자유’에 성역이 없어야 한다면, 왜 만평가들은 유대인 문제를 다루는 데에는 소극적이었으면서, 이슬람교의 성역을 침범하는 데에만 거리낌이 없었던 것일까? 


물론 샤를리 에브도가 일방적으로 이슬람교만 풍자한 것은 아니었다. ‘권위에 대한 반항’을 모토로 삼았던 샤를리 에브도는 종교적 인물들을 자주 소재로 삼았다. 자극적인 노출을 한 성모 마리아를 그렸고, 몸을 맞대고 뒤엉킨 하나님과 예수를 그리기도 했다. 우스꽝스런 모습의 랍비를 묘사하는 등 유대교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2008년 7월,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 작가 모리스 시네가 칼럼을 하나 썼다가 2주 만에 해고된 사건이다. 칼럼 내용 중 당시 대통령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의 아들이 유대인 재벌 총수의 딸과 결혼한다는 뉴스에 대해, ‘이놈 크게 성공하겠네’라며 비꼰 부분이 문제가 된 것이다. 보수 정계와 언론은 이 부분이 유대인에 대한 선입견을 조장한다며 ‘반유대적’이라고 비판했다. 극우 유대교 단체 ‘유대교보호연맹’는 살해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결국 편집장은 시네에게 공개 사과를 요구했고, 응하지 않자 그를 해고했다.


무함마드를 그린 만평이 잡지에 실렸던 2012년에도, 프랑스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비판 여론이 매서웠다. 하지만 샤를리 에브도는 거기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사실상 편향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와 관련해 잡지의 창간 멤버였던 한 원로 기자는 기고를 통해 테러 공격으로 사망한 편집장을 비판하기도 했다.[각주:3] 수년 전부터 편집장이 시오니즘에 기울어 이슬람교에 대해 적대적인 쪽으로 잡지를 이끌었고, 그 결과 테러를 자초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 잣대’는 샤를리 에브도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극우 정치세력과 언론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럽의 극우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 것은 오래된 일이다. 그러나 국가주의를 외치는 극우정당은 최근 들어 프랑스에서 유독 약진하고 있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정당과 언론의 날 선 언급들은 주로 무슬림 정체성을 가진 이주민에게로 향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것은 이슬람교를 “퇴행적인 종교”이며 “국가 정체성에 대한 위협”이라고 표현한 ‘르 피가로’의 기사이다.[각주:4] 국가 정체성을 걱정하는 기사의 이면에는, ‘정체성’이란 기준에 부합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를 가르는 그들만의 이분법이 숨어있다. 현대 사회에서 ‘시민’은 민족과 종교를 초월한 존재로 상상되지만, 그 시민들로 구성된 프랑스란 ‘국가’는 민족성과 종교성을 초월하는 영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독교가 다수인 프랑스 사회에서, 이분법의 화살은 유대인이 아닌 무슬림을 주요 타겟으로 삼는다. ‘유대 혐오증’은 오래 전부터 양식 있는 시민들이 기피해야 할 태도로 자리 잡은 반면, ‘무슬림 공포증’은 지금도 공공연히 확산되고 있다. 양자에 대한 태도의 차이는 유대인과 무슬림이 속한 ‘사회적 지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유대인 역시 과거에는 이웃 프랑스인들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하지만 금융 자본을 손에 쥔 유대인들은 20세기 이후 당당하게 사회 주류로 올라설 수 있었고, 여론을 통제할 수단을 가지게 됐다. 그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에 대해 많은 설명들이 있을 수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방어할, 나아가 사회를 주도할 ‘힘’을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반면 무슬림 이민자들은 1960년대 이후부터 프랑스에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시기적으로 이들의 이주는 세계적인 불황에 프랑스 사회가 휩쓸리던 때와 맞물린다. 혼란스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들은 경제 위기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됐고, 계층 상승의 기회도 놓쳐버렸다. 물론 중산층의 생활을 누리는 이들도 있지만 최상위층까지 올라간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들이 주로 거주하는 파리 변두리의 ‘방리유(banlieu-프랑스어로 외곽을 의미한다)’는 가난한 이주민들이 전유하는 게토가 됐다. 지역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격리된’ 이들은 손쉬운 공격의 대상이 된다. 언론과 정치인들이 편향적인 언급을 해도, 프랑스 내 무슬림들에게는 스스로를 보호할 수단이 없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국민전선을 비롯한 극우파들은 무슬림 이주자에 대해 원색적인 비난을 내뱉었다. 강자가 약자를 향할 때 표현의 자유는 폭력의 수단이 되지만, 제동을 걸 장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2. ‘프랑스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의 테러’


이 맥락에서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중요한 논점을 제기한다. 바디우는 이 사건을 이슬람교와 연관 짓는 발상 자체가 틀렸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테러를 저지른 청년들이 이슬람 국가에서 온 것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의 교육제도에서 성장한 ‘순수 프랑스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번 사건이 “이슬람 근본주의의 과격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에 내재한 계층 간 갈등을 통해 배양된 것”이라고 지적한다.[각주:5]


바디우의 말에서 프랑스의 무슬림은 계층 간 갈등에서 소외된 이들로 나타난다. 그들의 민족이, 종교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건을 이슬람과 연관 짓길 거부하는 그의 시각은, 샤를리 에브도 사건을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집단 사이의 충돌’로 이해하려는 이들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문화 충돌’의 틀로 사건을 이해하는 이들은 테러의 종교적, 민족적 성격을 강조한다. 반면 바디우는 사회적 성격에 더 집중한다. 테러를 저지른 쿠아시 형제가 소외된 계층에 속했다는 사실 말이다. 


그들의 계층적 고립을 더 깊게 만든 것은 몸으로 체감하는 지역적인 분리였다. 범인들은 게토나 다름없는 ‘방리유’에 살면서, 평생 대도시의 ‘외곽’을 벗어나지 못했다. 평범한 젊은이들이 파리의 변두리에서 피자 배달을 하며 살다가, 절망에 빠지고, 극단주의적 이념에 다가서는 일련의 과정은 모두 그 지역 안에서만 일어났다. 중심부가 방치한 외곽의 어둠이 범죄로 불거진 것이다. 


‘방치된 이들’에 의해 벌어졌다는 점에서 샤를리 에브도 사건은 지난 2005년 발생했던 ‘방리유 소요 사태’의 확장판이나 마찬가지다. 당시에도 파리의 외곽 지역에 거주하던 아프리카계, 아랍계 이민자들은 실패한 이주정책에 항의하며 파리 시내에서 화염병을 던졌다. 그로부터 정확히 십 년이 지나, 해소되지 않은 이민자들의 불만은 한 층 강화된 폭력성을 입고 다시 표출됐다. ‘이슬람 극단주의’는 무정형의 불만이 결집할 수 있는 이념의 기치를 제공했을 뿐이다.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두 가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프랑스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의 테러’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 충돌’의 관점이다. 양자는 사건의 원인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을 전제한다. 전자의 관점은 테러범들을 ‘방리유에 갇힌 이들’로 이해하면서, 외곽과 중심부를 가르는 높은 벽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후자의 관점은 그들을 ‘이질적인 존재’로 정의하고 있다. 테러범들의 외모가 얼마나 다른지, 그들의 종교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드러내는 데 더 집중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시선을 통해 사건을 바라보고 있을까? 겉으로 보기에 이는 온전히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선택한 시선이 무엇인지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지고, 해결책도 달라진다. 염두에 둬야 할 점은 사안을 다루는 언론과 정치권의 태도에 따라, 개인의 선택 이전에 부각되는 ‘사실’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3. 사실 이전에 사실을 결정하는 틀


언론과 정치권은 이주민 문제를 어떻게 이슈화하는가? 여기에 대해 프랑스 언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한 기사[각주:6]는 날카로운 분석을 제기하고 있다. 기사는 시대에 따라 이주 문제에 대한 프랑스 언론과 정치권의 태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분기점이 된 시점은 1970년대이다. 그 이전에 우파는 외국인 노동자의 프랑스 유입에 대해 대체로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이후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찾아오며 ‘이민자 출신 노동자들’의 문제는 ‘아랍인들’의 문제로, 나아가 ‘무슬림들’의 문제로까지 비화됐다. 이전에는 사회적 차원에서 다뤄지던 문제들이 이제는 민족적, 종교적 편견에 바탕을 두고 다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1981년 7월, 프랑스 남부 리옹의 외곽지역에서 이민자 청년들과 경찰 간에 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대다수 언론들은 이 사건을 ‘기타’ 면에 짤막하게 실었지만, 보수 언론 르 피가로는 유독 무게를 실어 다뤘다. 그러면서 르 피가로는 사태가 “북아프리카 출신들이 많이 거주하는 구역”에서 더욱 심각하며, “정부는 강제 추방 제도를 폐지”함으로써 청소년들의 탈선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고 보도했다.[각주:7]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좌파 정권이 10만 여명의 불법 노동자들의 지위를 합법화한 직후였으므로, 이주민 2세대가 저지른 폭력을 부각시키는 것은 보수 언론의 이해에도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그 이후 불법 노동자들의 폭력을 다룬 보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주자 문제에서 사회적 색채가 떨어져나간 자리엔 민족적, 종교적 편견만이 남았을 뿐이다. 


위의 사례에서는, 정치적 색채를 가진 언론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는 사안을 선택하고 부각시키는 과정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새삼스레 언론의 위력을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프랑스가 아니더라도, 경제 상황이 악화될 때마다 이주자 문제는 불안의 근본적 원인을 회피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곤 했다. 현재 상황에서 그 도구를 다시 꺼내들어 이득을 보려는 이들은 물론 극우파 정당과 언론이다. 실제로 샤를리 에브도 사건은 극우파, 우파 정당에게 엄청난 호재로 작용했다. 올해 3월 22일 치러진 지방선거 1차 투표에서 우파 정당동맹은 약 29.4%를 득표해 1위를 차지했고, 이어 25.2%를 얻은 국민전선이 2위에 올랐다. 민심을 잃은 올랑드 대통령의 사회당은 21.9%를 기록하며 3위로 밀려났다.[각주:8] 선거 판도의 변화에 언론이 직접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전에 이주자 문제에 대한 ‘사실’을 바라보는 틀을 짜는 데, 언론과 정당이 크게 개입해왔음을 부정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4. 테러의 진짜 수혜자


테러로 인해 시민의 목숨이 희생되는 와중에서도 이득을 챙기는 이들이 존재한다. 앞서 언급한 극우 정당이 대표적이다. 당사자인 샤를리 에브도 역시 호재 아닌 호재를 누렸다. 프랑스 본토에서 이슬람 국가의 시위 현장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드물게 된 것이다. 또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리던 경영진은 국외판매, 기부금, 구독료 등으로 3천만 유로라는 전례 없는 수익을 거뒀다. 그러나 테러 이후에도 풍자만화를 멈추지 않자 새로운 위협이 발생했고, 결국 대표 만평가가 나서 ‘이제는 재미가 없으니 더 이상 무함마드를 그리지 않겠다’는 애매한 성명을 내놓아야 했다.[각주:9] 더불어 최근의 뉴스는 한화로 약 360억 원에 달하는 엄청난 수익금을 어떻게 쓸 지를 두고 경영진과 편집국 직원들이 갈등을 빚고 있다고 전해왔다.[각주:10] 그들은 결국 작은 한 잡지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테러로 이득을 누리는 이들은 프랑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 5월 3일, 미국 본토에서 샤를리 에브도 사건을 빼닮은 일이 벌어졌다. 한 단체에서 ‘표현의 자유’를 기치로 내걸고 무함마드를 그린 만평 350점을 전시한 행사장에 무장 괴한들이 침입한 것이다. 주변을 지키던 경찰의 발 빠른 대처로 인명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샤를리 에브도 사건과 거의 똑같다. 닮은 점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두 사건의 범인들이 모두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의 사주를 받았음을 시인했던 것이다. 미국에서 발생한 사건은 알카에다를, 샤를리 에브도 사건은 IS를 배후로 하고 있음이 다를 뿐이다.  


테러가 발생할 때마다 ‘극단주의자’들은 빠짐없이 배후로 지목되곤 한다. 세계 전역에서 일어나는 테러를 조종하면서 그들은 어떤 이득을 챙기고 있는 것일까? ‘극단주의자’라는 용어는 가끔 ‘근본주의자’라는 말과 혼동된다. 하지만 많은 이슬람 국가들에서 근본주의적 성향을 띤 종교정당들이 건전한 활동을 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둘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그 중 하나가 극단주의자들은 유독 자신들이 벌인 소행을 과시하려 한다는 점이다. 사건의 피해가 크다는 것은 곧 훈장과도 같다. 심지어 테러범 중 어떤 이들은 실제로는 IS나 알카에다와 접촉한 적이 없는데도 조직의 사주를 받았다며 거짓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은 극단주의자들의 원동력이 집단의 외부, 다시 말해 ‘적’의 존재에서 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명확한 적을 두고 거기에 적개심을 표출하는 행위는, 그들에게 정체성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핵심적인 기제가 된다.


이 맥락에서 역설적이게도 극우파를 지지하는 일부 시민들과 샤를리 에브도 사건을 저지른 무슬림 청년들은 같은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극우파의 타겟이 된 사회적 약자들처럼, 샤를리 에브도 역시 결코 강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샤를리 에브도는 적개심의 대상이 될 만큼 충분히 ‘달랐고’, 그 다름은 테러행위에 종교의 이름으로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를 통해 극단주의자들이 얻는 이득은 분명하다. 테러가 연이어 일어나고 폭력이 증오를 불러일으킬수록, 그들은 확고해진 정체성을 대가로 얻는다. 


이 과정은 무슬림 국가가 아닌 나라들에서 더 중요하다.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테러범들에게 무슬림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은 당연하게 타고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주민들이 공유하는 민족적, 종교적 특성은 그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구심점이 됐다. 하지만 그 과정에 촉매제로서 폭력이 개입되지 않았다면, 언론에 보도되는 테러의 잔상이 체제에 반항하는 ‘공동체’란 환상을 강화하지 않았다면, ‘이슬람 극단주의자’라는 모호한 기치 아래 젊은이들이 결집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불만을 통해 자라는 극단주의자들과 불안을 통해 자라는 극우파는 서로 묘한 동맹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를 외부의 적으로 겨냥하고, 내부에도 또 다른 적-극우파는 국내의 이주민을, 극단주의자는 세속주의에 영합하는 ‘가짜 무슬림’을 내부의 적으로 삼는다-을 만들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화한다. 한 번 일어난 폭력은 더 강한 폭력으로 되돌아온다. 이 악순환 속에서 몸집을 불리는 그들이야말로 샤를리 에브도 사건의 진짜 수혜자가 아닌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샤를리 에브도 사건은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라는 낯익은 말을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그 속내는 낯익지 않다. 단순히 폭력이 복수를 부른다는 맥락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그 과정을 세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계층의 격차에서 소외된 이들의 불만이 ‘이주민’이란 정체성 아래 결집하는 과정이 있었다. 이후 언론은 ‘계층 격차’라는 원인의 사회적 색채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민족적, 종교적 편견을 덧씌우며 여론이 사안을 바라보는 틀을 규정한다. 그 틀이 인도하는 자연스러운 결론은 완전한 동화, 아니면 배제라는 이분법이다. 마지막으로 이분법의 논리가 사회에 정착되면서, 극단주의자와 극우파를 위한 토양이 마련된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폭력이 발생한다. ‘극단’의 색채를 띤 이들에게 폭력은 없어서는 안 되는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일으키는 테러는 불안과 불만을 조장하며 또 다른 폭력의 희생자를 낳고 있다. 


이 악순환을 끊으려면 사회를 구성하는 이들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하지만 낙관적인 기대를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지난 5월 5일, 프랑스 하원은 테러 방지 목적에 한정해 국가 정보기관이 사법당국의 승인 없이도 테러 용의자를 감시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지난 2001년 9·11 테러 후 미국에서 제정된 애국법과 비슷해 ‘프랑스판 애국법’으로 불린다.[각주:11] 이에 대해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은 “프랑스가 감시국가로 한 발짝 더 다가서게 됐다”라고 논평하기도 했다.[각주:12] 샤를리 에브도 사건의 여파가 가시지 않는 상황에, ‘공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명제가 설득력을 지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프랑스가 지키고자 하는 ‘공익’은 누구의 공익이며 제한하고자 하는 ‘개인’의 자유는 누구의 자유인지 의문이 남는다.


다른 한편에서 IS는 중동 일대의 치안력 부재를 틈 타 더욱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IS는 SNS를 통해 아주 세련된 홍보를 벌이면서, 세계 각국의 절망에 빠진 젊은이들을 끌어들인다. 사실 그들의 홍보 전략은 속이 빤한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거기에 가담한다. 세계 각지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난 테러범들도 극단주의자의 정체성을 얻기 위해 IS의 이름을 기꺼이 빌리려 한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왜 어떤 이들은 극단주의의 논리를 그토록 쉽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맥이 빠지지만 그 질문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없다’. 젊은이들이 IS로 떠나는 이유는 획일화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전사로서 용감하게 죽으면 아름다운 여인들로 가득한 천국에 간다’는 말을 믿고 IS에 가담한다. ‘페미니스트가 싫다’는 이유로 집을 떠난 철없는 소년도 있다. 낯선 조직에 대한 각양각색의 환상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발 딛은 현실이 얼마나 희망 없는 곳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아니면 젊은이들은, 딱히 무언가를 기대했기 때문에 새로운 삶을 선택한 게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삶을 찾아 고국을 떠나는 것과 지금 여기에 남아 현재의 삶을 이어가는 것 사이엔 사실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테러범들이 약속하는 무기와 돈이 정말이든, 설령 그게 거짓이어서 타국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든, 그들에게는 어차피 잃을 것이 없었다. 


집을 떠난 젊은이들의 속내를 알아내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사람마다 다른 이유는 있어도, 정형화된 하나의 답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는가이다. 도시의 외곽에서 방황하다 막다른 곳에서 정체성을 찾는 ‘방리유’ 내부의 과정을 깨트릴 방안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샤를리 에브도 사건이 진정으로 제기한 질문들은 그리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방리유의 잠재적인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사회적 안전망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가 다 취해졌다고 가정해 보자. 가난에서 벗어난 이들은 이제 프랑스 사회에서 자리를 얻게 된 걸까? 그 전에 먼저 그들은 히잡이나 너무 긴 치마처럼 무슬림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들을 몸에서 제거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 사회가 정의한 ‘시민’의 개념은 종교, 민족, 성별과 같은 ‘주어진 정체성’에서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는 프랑스 공화국의 핵심적 가치인 ‘라이시테’와 관련된다. 세속주의라고도 번역되는 라이시테는 종교를 국가의 공적인 영역으로부터 철저히 분리하는 원칙을 말한다. 한 마디로 사적인 영역에서 종교의 자유는 주되, 모든 공적인 영역에서 종교의 자리를 엄격히 배제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학교나 관청의 벽에 십자가를 달아서는 안 되며, 같은 논리에 따라 이슬람 여성들이 부르카[각주:13]를 착용하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도 금지된다. 역사적 맥락에서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공화국 탄생을 위해 중요한 과정이었다. 종교가 국가에 미치는 영향을 제한함으로써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같은 역사를 공유하지 않는 무슬림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애당초 그들에게 ‘타고난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시민의 개념은 몸에 맞는 것이 아니었다. 종교와 일체된 삶이 당연한 무슬림에게, 종교와 삶을 분리하는 공화국의 원칙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 되기 쉽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방식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재 프랑스에서는 무슬림 여성들이 히잡[각주:14]을 착용했다는 이유로 해고되거나 거리에서 다짜고짜 린치를 당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최근에는 한 15세 여학생이 ‘검정색 긴 치마를 입었다’는 이유로 등교 금지 처분을 당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각주:15]


프랑스 사회가 무슬림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하다. 오늘날 세속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무슬림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이웃이 됐다. 피부색과 성별의 차이는 넘을 수 있어도,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원칙의 차이에 이르면 ‘다름’은 넘어서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 과정에서 미디어는 명예살인과 같이 일부 이슬람 지역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크게 보도하며 부정적인 인식을 확산시킨다. 결국 현대 사회의 ‘시민’들은 이슬람교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으며, 여성을 차별하고 폭력을 용인하는 ‘나쁜’ 종교라고 쉽게 말하게 된다.


오늘날 이슬람이 폭력과 극단주의의 이미지를 얻게 된 것은 이러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샤를리 에브도 사건은, 사실상 지금까지 중동, 미국,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등 세계 각지에서 벌어져 온 갈등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이 갈등의 끝이 어디인지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하지만 조심스레 상황을 예측해 볼 수는 있다. 아마도 이슬람 세계는 민주주의와 세속주의의 가치를 종교의 원칙 속에 수용하려는 시도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이 맥락에서 2011년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휩쓴 ‘아랍의 봄’은 희망적인 사건이었다. 비록 혁명 이후 시리아는 아직 내전을 극복하지 못했고, 이집트에서는 권위주의 정부가 다시 복귀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는 상황이다. 하지만 튀니지는 올해 최초로 민주적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며 가능성을 이어가고 있다. 


세계의 나머지 부분에 사는 사람들 역시 현대 사회에 조건처럼 주어진 가치들이 포용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시민의 개념이 포함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공공장소에서 히잡 착용은 금지되어야 하는가? 샤를리 에브도 사건 이후 프랑스에서는 대학교에서 히잡을 착용할 수 있는지를 두고 라이시테와 종교적 관용 사이의 논쟁이 다시 한 번 점화됐다.[각주:16] 논의는 계속될 것이다. 자유를 속박하는 모든 굴레로부터의 해방을 외치며 탄생한 공화국이 어떤 이들에게는 속박을 가하고 있지 않은지,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그 결과로 시민의 정의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민주주의의 조건에 대한 성찰의 폭이 넓어질 수도 있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글 편집위원 jh

  1. Jeyup S. Kwaak, ‘샤를리 엡도 테러와 표현의 자유, 한국인들의 의견은?’, 월스트리트저널 한국판, 15.01.20 [본문으로]
  2. 이대근, ‘제각각 표현의 자유’, 경향신문, 15.01.15 [본문으로]
  3. 권수현, ‘샤를리 창간 멤버, 사망 편집장 비판…"도발 과했다"’, 연합뉴스, 15.01.15, 본문 중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4. 브누와 브레벨, ‘이슬람 포비아의 위험성’,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5.02.02, 본문 중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5. 이재훈 기자, ‘테러범을 키운 것은 프랑스 자신이다’, 한겨레신문, 15.01.19 [본문으로]
  6. 브누와 브레벨, ‘이슬람 포비아의 위험성’,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5.02.02 [본문으로]
  7. 브누와 브레벨, 위와 동일. 본문 중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8. 송옥진,, ‘佛 지방선거서 사르코지 야당 승리… 극우정당도 상승세’, 국민일보, 15.03.30 [본문으로]
  9. 박성진, ‘샤를리 에브도 만화가 "무함마드 그리지 않겠다"’, 연합뉴스, 15.04.30 [본문으로]
  10. 방현덕, ‘테러 이겨낸 샤를리 에브도, '돈벼락'에는 내분’, 연합뉴스, 15.04.02 [본문으로]
  11. 박종서, ‘샤를리 에브도 테러'에 놀란 佛…'프랑스판 애국법' 논란’, 한국경제신문, 15.05.06 [본문으로]
  12. 오애리, ‘프랑스版 ‘애국법’ 통과’, 문화일보, 15.05.06 [본문으로]
  13. 부르카는 눈을 포함해 전신을 가리는 긴 천으로서, 이슬람 여성들이 몸에 두르는 베일 중 가장 폐쇄적인 형태를 가진다. 부르카 금지는 2011년 프랑스 의회가 ‘부르카금지법’을 제정하면서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본문으로]
  14. 히잡은 ‘두건’이란 의미로 머리만 가리고 얼굴은 내놓는 베일이다. 부르카를 착용하는 이들은 극히 일부이지만, 히잡은 대부분의 이슬람 여성이 착용하기 때문에 법안으로 금지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히잡을 두르는 일은 여전히 부정적인 인식의 대상이 된다. [본문으로]
  15. 박성진, ‘"너무 긴 치마 입었다"… 프랑스서 무슬림 여학생 등교 금지’, 연합뉴스, 15.04.29 [본문으로]
  16. 임세정, ‘프랑스 대학교서 이슬람 스카프 금지 논란’, 한국일보, 15.03.3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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