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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을 발행한 연희관 015B 2호에 실린 글임을 미리 밝힙니다. 세월호 사건 이후 1000일이 지난 시점에서 한국 사회가 걸어온 과정을 돌아보자는 의미에서 올리는 세월호 4부작의 두 번째 글입니다.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 지루해  하품이 나해 - 자우림, <일탈>


Set me free


만약 사람들이 질서에서 집단적으로 이탈한다면 어떨까? 만약 모두가 갑자기 질서를 따르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한다면 어떻게 될까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는가? 신호등? 따르지 않는다. 정지선? 지키지 않으련다. 군대? 가지 않는다. 결혼? 그게 뭐야. 국가? 그거  필요한거야? 이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는가? 가끔씩 이런 상상을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정신건강에 그럭저럭 도움이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나를 옭아매는 모든 것에 의문을 가져보고 꼬투리를 잡아보자. 이는 일종의 카타르시스와 같은 기분을 느끼게  준다.  세상 최고의 반항아가   같은 사춘기의 경험이라고나할까. 사춘기가 인생에서 누구나  번쯤 겪고 넘어가는 일시적인, 그래서  원래의 상태로 회복될 상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오해하지는 말아달라. 우리의 정신은 평생 완성되지 않을 것임을 명심하자. 어찌되었든 그런 상상은  유쾌하다.

 

필경사 바틀비를 아시나요


그런 상상력을 소재로 삼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필경사 바틀비 있다. 19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히는 허먼 멜빌의 단편 소설 필경사 바틀비[각주:1] 법률 문서를 필사하는 직업을 가진 바틀비라는 인물에 대한 짧은 전기다. 바틀비는 고용주인  원해 마지않는 말없이,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를 계속하는(59) 성격을 소유한 사원이다. 그는 함께 근무하는 터키처럼 갑자기 오후만 되면 신경질적으로 변하여 서류에 잉크 얼룩들을 떨어뜨리는 일을 저지르지도 않으며  다른 사원인 니퍼즈처럼 필사중에 실수를 저지르며 소리나게 이를 간다든지 한창 일하다가 쓸데없이 악담을(54) 내뱉지도 않는다. 정신이 메마를 정도로 매우 반복적이면서 눈이 빠질 정도로 무척 정교한 작업을 요하는 것이 필사이다. 바틀비는 근면한 것은 물론이고 감정 기복이 없으며 일의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사무실에서도 있는 없는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이러한 침착함과 성실함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기품은 고용주인  매료시킨다.  바틀비를 사원으로  것에 만족한다. 어느  고용주인  지시에 썰렁한 반기를 들기시작하기 전까지는


이현숙 作_「필경사 바틀비」,허먼 멜빌 저, 문학동네_222×193mm, 샤그렝


바틀비는 어느  서류를 검토하라는  부탁을 거절한다.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다니, 무슨 소리야? 자네 미쳤어? 내가 여기  서류를 비교하게 도와달란 말이야. 이거 받아.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not prefer to)

 

바틀비는  이후  지시에 그러지 않겠습니다.,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라는 말로 일관하기 시작한다.

 

바틀비,  서류를 모두 필사한 다음에 나와 함께 대조해보자고.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바틀비, 자네가 잠깐 우체국에 들러주겠나?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바틀비. 옆방에 가서 니퍼즈한테 내가 부른다고 말해줘.

 하고 싶습니다.

 

 얼마나   직원인가. 그러고도 바틀비는  하나 꿈뻑 않는다. 그에게는 어떠한 악의도 없고 다른 합당한 이유도 없다. 그는 다만 모든 지시나 부탁을 반사적으로 허나 공손히 천천히 거절할 뿐이다.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라는표현은 그가 무언가 올곧은 신념을 가진  마냥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그가 막무가내로 지시를 거부하는 이유를 찾기는 어렵다. 그의 이러한 태도에 사무실 안은 대혼란에 빠진다. 다른 직원들은 그를 미쳤다고 한다. 때문에 자신들의 작업량이 많아지자 그를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용주인  갖가지 회유를 통해 그를 통제하려고 해보지만 바틀비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되려 고용주인   앞에서 쩔쩔 맨다. 바틀비는 사무실에서 몰래 생활하는 것을 들킨 뒤에도 나가라는 말을 듣지 않는다. 나중에 결국  어쩔  없이 바틀비에게 사무실을 내어주고 자신과 사원들이 사무실을 옮기는 것으로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려 한다.   바틀비는 주변인들의 신고를 받고 구치소로 이송되는데  곳에서조차 식사를 거부하다가 결국은 영양부족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는  그랬던 걸까? 나중에   바틀비가 필경사로 일하기  워싱턴의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소(Dead Letter Office)에서 배달할 소재가 불분명한 편지들을 대량으로 소각하는 일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정확하지 않은 소문을 토대로 바틀비의 얼굴에 드리웠던 창백한 그림자의 원인을 짐작해본다.  안에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연애편지가, 전장에 있는 가족의 안부를 묻는 편지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들을 태우는 직원이었던 바틀비는  안에서누군가의 손에 끼워져야 했을 반지(101), 누군가의 배고픔을 덜어줄 지폐  (101) 발견했을지 모른다. 일을 하면서 바틀비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생각한다. 독자들도 생각에 빠진다. 그러다 작가는 갑자기 ! 바틀비여! ! 인간이여!(102)라는 마지막 탄성과 함께 이야기를 닫아버린다. 바틀비의 속사정은  이상 나오지 않는다. 지금까지  모든 것이 나의 일이 아닌 바틀비의 일이라고만 여겼던 독자들은  마지막 구절을 읽는 순간 일종의 충격과 허무함에 사로잡힌다. 과연 보관할 편지와 그렇지 않고 소각할 편지를 분류하면서 바틀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와 바틀비

출저: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페이스북 페이지


올해 4 이후 잠깐이지만 일었던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국민적 맹세의 물결을 다들 보았으리라.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4 16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 미안합니다 함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문구이다. 매스컴에서 시작해 많은 국민들이 선장의 가만히 있으라라는 명령때문에 단원고 학생들을 비롯한 여러 승객들이 배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바다에 잠겨버렸다는 사실에 크게 안타까워했다.[각주:2]  직후 일부에서 가만히있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이 터져나오자 이는 세월호 사건에 분개한  강력한 정치적 구호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국민들의 이러한 참담한 심정은 바틀비를 떠올리게 한다. 바틀비는 편지를 소각하는 일을 하면서 사람의 삶의 가치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전해졌어야  우편처럼, 존재해야 했으나 존재하지 못한 혹은 존재를 부정당한 삶이 있을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우편국에서 쫓겨난  필사를하면서 그는 생각한 것이다.  삶도   뭉치 법률 문서의 필사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닐까?라고 말이다.


세월호 사건을 바라봤던 우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울어가는 배를 실시간으로 보았다. 그리고 안의 사람들을 보고도 구조해내지 못하는 정부도 같이 보았다. 아이들이  안에서 죽어가는 것을 알고도 그저 바라보면서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던 국민들의  무기력함은 편지를 태우면서 느꼈을 바틀비의 참담함,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필사를 하면서 느꼈을 그의 공허함과 닮아있다. 아이들과 일반 승객들, 그리고 남아있던 선원들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였던걸까? 정확히 말해 배를 책임져야  선장에게는 어떤 존재였던 걸까? 국민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게는? 선장이 배를 떠나듯, 해경이 사람들을 구조하지 못했든 승객들의 생명이 그토록 쉽게 포기될  있었던 것이라면 우리와 우리 아이들의 생명도 마찬가지 아닐까? 바틀비가 편지를 소각하며 자신의 삶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듯 국민들은 자신과 자신의 아이들의 삶의 가치가  사회에서 제대로 존중받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


시간이 지나자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라는 구호가 가지는 위력은 급격히 감소했다. 누구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것이 그래서 결국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는 못했다. 단순히 국가권력에 대한 아나키즘적 으로 거부하거나, 박근혜 정권에 대한 심판으로 해석하려고 했던 집단들은 대중적인 공감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단호하면서도 공허한, 공허하지만 무작정 단호한  가만히 있지 않겠다 문구가 사람들의 마음  켠을 차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껏 지켜 마땅했던 과거의 가치들이 이제는  번은 의심해봐야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 사회에 여러 곳이 이제는 세월호라는 빨간불을 달게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


바틀비는 ~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 안하는 편을 택함”’으로서 자신의 선호 표시한다. 많은 학자들이 그의 정형어구,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 담긴 언어적 뉘앙스를 분석하는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들에 따르면 틀비의 행동은 명령에 대한 단순한 거부가 아닌 ~ 안하는 것을 선택하겠다는 적극적 노숙 행위이다.  시킨대로 해야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안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일  있다는 생각, 우리의 , 나아가 우리 사회에도 가능한 많은 선택지가 존재할  있다는 , 그것이 바틀비와 세월호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지 않을까




글 편집위원 희조



참고 문헌

정진만, ““ 바틀비여!  인간이여!: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나타나는 부정성, 한국라깡과현대정신분석학회, 2012

한기욱, "근대체제와 애매성 : 「필경사 바틀비」 재론", 영미문학연구회, 2013


  1. 허먼 멜빌, 한기욱 역, “필경사 바틀비”, 창비, 2010. [본문으로]
  2. 생존자들 중 많은 경우가 ‘가만히 있으라’는 배의 지시를 어기고 선실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었다. 또한 이 명령은 정확히 말해 명령이라고 할 수 없었다. 당시 선장의 부재로 인해 조타실에서 별다른 명령을 내려 받지 못한 일반 선원은 선실을 향해 무기한 대기 방송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명령 부재 상태, 명령 디폴트 상태였다. 이러한 어이없는 선장의 통제권 포기로 300명 가까이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은 사건은 고위 간부급 책임자와 공권력에 대해 국민대대적인 실망과 불신이 히스테리적으로 솟아나는 계기가 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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