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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 한다. 모두가 평등할 수 없기 때문에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향욱 前 교육부 정책관
1. 우리 안의 괴물
고백하건대 나는 내가 대외적으로 강력히 반대하는 엘리트주의에 찌든 채 살아왔다. 사실 이를 엘리트주의라 칭하는 것이 옳은 지도 모르겠는 것이, 엘리트주의는 내 안에 있는 이 치졸하고 비열한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이후에 좀 더 자세히 언급한다). 내 안에 뿌리 깊게 자리한 이것은 엘리트 집단에 속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과 그들에 대한 열등감의 산물이니 ‘왜곡된’ 엘리트주의라 하겠다. 내가 때 아닌 자기고백을 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삐뚤어진 엘리트주의를 들여다보기 이전에 우리 잠시 솔직해지자. 우리가 일상적으로 비판하곤 하는 속물근성은 우리에게도 스며들어 있다.
특성화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동생은 운이 좋게도 졸업과 동시에 S증권에 정규직으로 입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학업을 지속하는 나와 내 여동생의 삶이 다르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학비를 보태고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업을 지속했던 반면 여동생은 여유로워 보였다. 연휴에는 친구들과 여행을 다니고, 주말에는 술자리를 가졌으며, 안정적인 적금을 매달 꼬박꼬박 들고 있었다. 입사한 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때에는 천만 원을 모았다고 기뻐하기도 했다.
앞서 내가 여동생의 입사할 당시를 묘사하며 ‘운이 좋게도’라고 언급했다. 얼마 전 깨달은 사실인데, 나는 사람들에게 여동생의 이야기를 할 때면 ‘운이 좋게’라는 말을 무의식중에 덧붙여 왔다. 나는 그녀가 입사한 것이 그녀가 재능이나 노력이 아닌 운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여동생은 나와 학업성적 차이가 컸으니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내심의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그러던 와중 여동생이 재직자 특별전형으로 이름 있는 대학의 야간 학부에 입학했고, 사람들이 그녀를 칭찬할 때마다 내 안의 괴물은 조용히 읊조렸다. 내가 더 열심히 공부했고, 내가 항상 더 우수한 학생이었으며, 야간 대학보다는 내가 소속한 대학이 더 낫고, 내가 더 똑똑하다고.
아마 내가 느꼈던 복잡한 감정을 거칠게 표현하면 “어떻게 고졸인 내 여동생이 쌔빠지게 공부한 나보다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가 있는가?” 하는 배신감이었을 게다. 내 안에는 “공부를 더 잘 하는 사람이 더 나은 인생을 살 것”이라는 건방진 믿음과 여동생에 대한 냉소적 우월감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나의 일화가 당신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여겨지는가? 나의 이 뒤틀린 감정은 현재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엘리트주의를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다. 학창 시절 공부와는 담을 쌓았던 친구가 당신보다 나은 삶(금전적으로든, 사회적 명예의 측면에서든)을 누리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당신보다 학벌이 낮은 친구가 내로라하는 기업의 인턴 내지는 정규직으로 선발되었을 때 등등. 당신이 언젠가 한 번쯤 느꼈을 그 불편한 감정의 기저에는 엘리트주의가 아주 견고하게 내재해 있다. 당신에게 ‘응당’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보상이 주어지지 않은 데에 박탈감을 느끼는 것이다.
2. 엘리트주의의 모순되는 현 주소
본래 엘리트주의라는 사상은 많은 사람들이 곧잘 떠올리곤 하는 ‘선민주의’와는 조금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상적 의미의 엘리트는 ‘선택받은 귀족’이 아니라 뛰어난 자질로 인해 사회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즉, 이상적인 엘리트들은 대중들의 주권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한다. 이를 나타내는 말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이다.
대의민주주의의 특성상 사회 곳곳에서 엘리트주의는 관철되고 있는데, 여기서 엘리트주의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대두해 온 필연적 모순이 발생한다. 엘리트집단에 기대되는 사회적 역할과 그들이 실제 행하는 것의 괴리! 역사적으로 엘리트집단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애써 왔다. 과두제의 철칙이라 하지 않았던가? 엘리트집단은 비엘리트집단의 모범이 되는 것보다는 그들의 우월함을 내세우고 현상을 유지하는 데에 주력한다. 엘리트주의의 본 취지와는 달리 그들에게 불리한 이슈는 무시해버리고 비엘리트 집단의 잠재력을 경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적 엘리트주의는 대한민국에서 학벌주의를 통해 유지되고 있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대한민국 내에서 엘리트 집단은 곧 고학력자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자리한 듯하다. 능력 있는 사람들을 모아 교육시켜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자는 것은 언뜻 효율적으로 들리지만 엘리트주의에 반기를 드는 사람을 마주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이유는 첫째로 대한민국에서는 ‘엘리트주의=학벌주의’의 등식이 성립되기 때문이고, 둘째로 고학력자들이 그들이 사회 내에서 점한 우위를 지속시키려는 과정에서 불합리한 양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엘리트는 곧 고학력자로 구별되는데, 고학력 자체가 아니라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점이 눈여겨 볼 만 하다. ‘엘리트’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SKY'를 떠올리고, ’SKY' 재학생들을 일컬어 ‘엘리트’라고 칭한다. 엘리트주의가 학력주의도 아닌 학력의 위계, 학벌주의로 이어진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학력의 위계 그 자체가 아니라, 명문대 졸업장이 삶의 (지나치게) 많은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 있다.
필자는 엘리트주의에 찬성 혹은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국 사회에서 엘리트집단이 교육을 포함한 권력의 기제를 고착화하는 양상(gate-keeping이라고 한다.)이 그 취지에서 상당히 변질된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 한다. 무엇이 내가 내 여동생의 이력을 무시하게 만들었을까? 엘리트주의가 본래의 사상적 의미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학벌주의로 다시 태어나 그 입지를 견고히 하게 된 이 시점에서, 그것이 어떻게 괴물이 되었는지 좀 더 살펴보자.
3. 엘리트집단의 gate-keeping
교육 이데올로기
이렇듯 학벌주의는 왜곡된 엘리트주의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는 무엇으로 유지되고 있을까? 학업 성취도는 곧 그 사람의 능력을 말해준다는 교육 이데올로기가 그 뿌리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를 내면화한 이들은 학벌을 통해 사회적 권력을 획득하고자 하는 ‘보상심리’와, 입시 경쟁의 승자라는 ‘선민의식’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고착화하는 것이다.
연극 <모범생들> 포스터
대한민국에서 대부분의 20대는 그 시작을 승자와 패자로 나뉜 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승자와 패자의 위치는 다양한 삶의 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그들의 의식 체계 또한 승리의식과 패배의식에 젖어 지배된다. 오늘날 이십대들은 자신의 현재 위치에 대한 방어와 타인에 대한 공격성을 가진 가해자이자 사회의 피해자의 두 모습을 갖추고 있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길 원하는 것에 대한 박탈감과 분노, 지방대와 상위권대 학생들 간의 학교 서열과 학교 등급, 학과 등급을 나누고 정시생과 수시생, 특별전형을 구분 짓는 등 단계의 차이를 과장하고 벽을 쌓는 ‘학력위계주의’가 이십대들을 지배한다. 1
그들을 승자, 패자로 가르는 입시 과정은 지극히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학벌주의가 관철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입시 과정이 합리적인 것으로 꼽히는 근거는 공정성이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같은’ 시험을 치르게 함으로써 신분제 사회와는 달리 후천적 지위를 형성하는, 이른 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계층 상승의 돌파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정한 학벌을 통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권력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현 상황은 신분제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도 학벌은 곧 개인의 능력이라는 전제는 끊임없이 주입되고 있다. 입시 제도를 통해서!
학벌이 개인의 능력이 아님은 두 가지 근거로 자명하다. 먼저는 그것을 획득하는 과정에 개인의 능력 이외에도 부모의 소득, 문화 자본, 지역 환경 등의 많은 요인들이 개입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누구나 치를 것으로 예상되는 수능시험이 도덕과 인격, 창의력, 감수성 등 인간의 능력 중 상당 부분을 배제한 능력치를 측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이러한 한계에는 눈 감고 귀 막은 채 “의지만 있으면 원하는 학교에 입학할 수 있고, 학벌은 곧 개인의 능력이며, 좋은 학벌을 얻는 것은 곧 사회적 성공”이라는 믿음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보상심리
내 지인 B군은 S대 졸업을 앞두고 있는데 그는 졸업을 앞두고 두 가지의 진로를 고민 중에 있다. 눈에 띄는 점은 그 두 개의 진로가 로스쿨 진학과 의대 편입이었다는 것이다. B군이 원하는 것은 한 가지였다. 학벌의 위계에서 높은 위치를 점한 자신에게 자신의 학벌에 마땅한 사회적 지위가 주어지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부와 권력을 가진 기득권이 되는 것 그 자체가 중요했을 뿐이고, 그는 스스로가 마땅히 그럴만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본인은 일류대 출신이니까. 소속한 집단의 정체성을 그대로 자기 자신에게 투영하는, 전형적인 학벌주의자였던 것이다.
B군의 경우는 다소 극단적이지만, 어느 정도 희석시키면 명문대 졸업생들의 일상에 얼마든지 등장하는 일화가 된다. 분명 좋은 학벌을 가진 사람들에게 직업 선택의 마지노선은 존재한다. “내가 XX대 졸업하고선 이 정도는 해야겠다.” 하는 마지노선 말이다. 그들은 그들의 학벌이 자신의 능력을 어느 정도 입증한 것으로 인지하며, 학벌에 따르는 어느 정도의 대가를 필연적이라고 여긴다. 그 정도를 가늠하는 데에 차이가 있을 뿐.
대한민국에서 학벌은 삶의 대부분의 영역을 지배하고, 이러한 체제를 내면화한 개인은 “나의 학벌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성취물이며, 이는 나의 사회적 지위를 올려줄 것”으로 기대하게 된다.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던 내 안의 엘리트주의와 여동생에 대한 멸시, B군과 그의 친구들 무리의 선민의식은 모두 학벌은 곧 사회적 지위를 가져다준다는, ‘응당’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적 믿음이 작용한 결과이다.
끼리끼리 선민의식
직업 외에도 학벌이 강하게 작용하는 영역이 있는데 바로 결혼이다. 대학이 ‘결혼 시장’으로 비꼬일 만큼 학벌은 ‘통혼이 가능한가?’를 고려하는 요소로 크게 작용한다. 학벌 혹은 직업을 통해서 가입가능여부를 통제하는 소개팅 어플이 존재할 정도로 말이다. 결혼정보업체에서 혹은 누군가의 중매를 설 때 외모와 함께 학벌은 대표적인 개인의 ‘급’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어느 정도의 교환 관계를 투영하는 현대인들의 결혼은, 언뜻 자연스러운 연애 감정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어느 정도의 외적 조건에 의해 통제된 것이다.
앞의 B군을 포함해 비슷한 생각을 가진 친구들은 보통 그 이유나 근거를 설명할 때 “배우자와 대화가 통해야 하는데, 비슷한 수준의 사람끼리 대화가 잘 통할 것 같아서.”라고 한다. 그렇다면,
- 학벌이 개인의 ‘수준’을 절대적으로 나타내는 것일까?
- 그렇다면 당신의 학벌은 정말로 당신의 수준일까?
- 공교육 교과과정을 숙지한 정도를 측정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당신의 모든 능력을 나타낸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단언할 수 있는 명문대 학생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명문대 학생들은 기존의 생각을 쉬이 고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그들은 우리 사회가 “학벌은 곧 개인의 능력”이라고 생각하기를 은연중에 바라기도 한다. 입시 경쟁의 승자인 그들에게 학벌주의 사회는 문제가 되지 않고, 그들은 이 사회에서 유리한 위치를 쉽게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엘리트주의에 대처하는 우리의 모순된 태도
엘리트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가져오는 왠지 모를 반감은 위에서 언급한 엘리트주의의 폐단을 사람들이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은 개, 돼지’라는 발언에 공노하던 국민들의 반응을 떠올려 보라. 대중의 분노는 그저 개와 돼지라는 가축에 비유되었다는 불쾌감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능력과 잠재력이 비하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그들의 분노는 비단 ‘개, 돼지 사건’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 내에서 엘리트의 고착화 및 세속화는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넘나들고 있으며 끊임없이 지적되고, 문제시되고 있다. 그렇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엘리트주의라는 사상에 반사적으로 반감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비엘리트집단을 경시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엘리트집단을 손가락질하고 경멸한다.
학벌주의의 타파?
그럼에도 사람들은 신분상승을 꿈꾸는데, 대한민국에서 그 수단은 명문대 진학으로 한정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갖은 수단을 다해 명문대에 자녀들을 입학시키려 하고, 엘리트집단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특권을 자녀들도 누릴 수 있도록 하려는 강한 관성이 유지되고 있다. 이처럼 한국에서 학벌은 기득권층에 편입할 기회로 여겨진다. 개인이 추후에 점하게 될 사회 내 위치를 상당 부분 결정짓는 요인이고, 권력이 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 정작 명문대 재학생들은 자신들이 ‘엘리트’라고 칭해지는 현실에 난감함을 표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명문대에는 진학했지만 미래에 대한 보장도 없고, 스스로가 정말로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는 것이다. 엘리트라는 사실을 부정하기에 이른 시점에서, 이들은 이제 학벌에서 나아가 타고난 태생과 배경에 주목한다.
그들은 ‘학벌로 득 보는 시대는 지났다.’, ‘학벌도 요즘은 소용이 없다.’ 하는 푸념을 심심찮게 내뱉는다. 여기서 주의 깊게 생각해보아야 할 점이 있다. 그들이 사실은 학벌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길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엘리트 집단이 느끼는 회의감은 사실 왜곡된 엘리트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의 한탄은 결국 학벌이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학벌이 기대했던 만큼을 보장해주지 않는 것에 대한 배신감을 담고 있다.
학벌은 엘리트집단의 형성이 아니라 신분상승의 수단으로서 기능해 왔고, 그 여파로 많은 모순적 현상들이 성행해왔다. 학업 성취도가 능력의 절대적 지표라는 전제를 주입시키는 허황된 교육 이데올로기, 그 아래에서 성장하여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길 바라는 엘리트 집단의 이기심-보상심리와 선민의식. 이들을 기반으로, 왜곡된 엘리트주의는 좋은 학벌을 획득하지 못한 절대다수의 고통을 발 아래에 밟고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글 편집위원 센
편집 및 교정 개씨
-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오찬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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