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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비평

[읽어내기] 상실喪失의 데칼코마니

연희관공일오비 2019. 10. 6. 19:47

- 데칼코마니 모양 나비가, 아니 나비, 아니 나방 모양 데칼코마니가 날아온다. 날아와 앉는다. 황정은의 소설 위에.


0. 좋아하는 마음보다 좋아한다는 말 먼저[각주:1]



좋아한다는 문장만이 만들어내는 파동이 있다. 그 파동을 떠올리면 잔잔한 수면, 작은 돌멩이 하나가 떨어져 마음의 물에 닿는 순간, 원뿔 모양으로 움푹 파였다 뛰어오르는 물방울, 퍼져가는 파문과 떨림이 떠오른다. 기호나 취미, 사물이나 사람, 나아가 이야기나 감각에 대해서도 그 존재를 좋아한다는 문장은 분명한 무게의 울림을 만들어낸다.

 

좋아한다는 문장을 설명할 방법에 대해 질문받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그 존재를 소개하고 싶나요? 당신 주변의 이들도 그 존재를 좋아하길 바라나요? 만약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당신은 그 존재를 좋아하고 있는 거라고. 내가 황정은이라는 소설가와 황정은이 천천히 쌓아 올린 소설 세계를 좋아하는 마음도 그와 같을지 모르겠다. 나는 황정은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 따로 찾아보려 애쓴 적도 없다. 그러니 내게는 황정은을 좋아한다는 말과 황정은의 소설들을 좋아한다는 말이 동의어다. 내 주변에는 황정은을 좋아하는 이가 많다. 함께 모여 지내다 보니 취향이 비슷해진 건지, 원래 비슷한 가치관과 취향을 가진 이들이 삼삼오오 모이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을 읽을 당신은 이 글을 쓰는 나뿐 아니라, 내 주변의 이들도 함께 좋아하는 황정은을 소개받게 된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을 당신이 황정은을 좋아하길 바라나요?’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고, ‘그렇다라고 대답하려 한다.

 

황정은은 꾸준히 주목받아왔고 이제는 상당히 유명해진 소설가다. 그러니 황정은의 희소성이나 재평가를 주장하기엔 힘들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지면을 빌려 황정은의 소설을 다룬다. 단순히 황정은의 소설을 영업하기 위해서는 아니지만, 또 완전히 개인적인 기호를 배제하려고 애쓰지도 않을 것이다. 이 글은 황정은의 소설 중 의 그림자[각주:2],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각주:3], 계속해보겠습니다[각주:4], 디디의 우산[각주:5], 4권의 작품을 다룬다. 내가 읽은 황정은의 소설들은 어떤 이야기였는지, 나는 거기서 무엇을 찾았는지 말하고 싶다. 그저 감상을 단편적으로 늘어놓거나 단순한 도서 소개에서 그치지 않기 위해, 어설프더라도 비평적 접근을 유지하려 나름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황정은의 소설을 읽은 이와 읽어 보지 않은 이 둘 모두 황정은이 짜놓은 세계에 좀 더 다채롭고 깊이 다가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1. 상실과 데칼코마니

상실이라는 단어가 결여나 분실, 강탈 등의 단어와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본다. 상실이라는 두 글자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무언가를 전제한다. 그리고 단순히 그 무언가를 잃어버리거나 무언가가 없어진 상태를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이후의 시간을 함께 포함해 의미를 구성한다. 다른 단어들에 비해 상황에 의한 느낌이나 감정을 의미하는 감이라는 단어와 함께 쓰여 상실감이라고 자주 표현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상실이라는 단어를 읽고 여타의 단어들과 달리 슬픔이나 아쉬움 등의 감정, 고통이나 허무 등의 감각이 연상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하루에도 수십 번 폭력과 부정의不正義를 목격한다. 몇 년에 걸쳐 한국 사회에 길고 깊은 상처를 새긴 수많은 재난과 참사, 갈등은 끊이지 않고 변주되어 반복된다. 상실이라는 단어가 그 가운데에서 오롯하게, 아프게 떠오른다. 동시대를 겪어내는 많은 작가, 그들이 자아낸 문학이 상실에 맞닿아 각자의 결실을 피워 올리는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그 상실은 조금씩 더 존재감을 더해간다. 2019년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당신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당신의 세계는 누군가와 무언가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그 세계에서 상실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무게는 너무나 크다. 상실喪失. 그 단어는 말해지고 만다. 말해질 수밖에 없다.



데칼코마니. 상실이라는 단어 뒤에 왜 데칼코마니를 붙였는가. 황정은의 소설에 대해 말하며 데칼코마니를 꺼낸 이유는 무엇인가. 그냥 데칼코마니도 아닌 상실의 데칼코마니는 무얼 말하는가. 초등학교 시절 빳빳한 새 도화지를 반으로 접어 한쪽 면의 도화지에만 물감을 올리던 장면을 떠올린다. 예상하지 못했던 묘한 그림을 두 손에 들고 무심하게 이리저리 돌려본다. 한쪽에 짠 물감이 반대쪽의 하얀 종이에 들러붙었다 떨어지며 만들어 낸 흔적이 있다. 혼자였던 그림자는 둘이 되고, 하나였던 날개는 한 마리의 나비, 혹은 나방이 된다.

 

황정은의 소설은 상실에 대해 말한다. 상실이라는 단어와 매개되는 수많은 삶의 파편을 다양한 방식으로 찍어 데칼코마니를 그려낸다. 여기와 저기, 좌와 우, 상대와 나, 과거와 현재가 마주하고 하나가 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은 데칼코마니를. 혼자인 줄 알았던 존재를 곁에 있는 존재와 연결하는 데칼코마니를. 상실을 겪은 수많은 이들이 데칼코마니처럼 펼쳐진 그 시공간 위에 서 있다. 황정은이 인물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관계 맺게 하고, 서 있게 만드는 그 세계는 곧 상실의 데칼코마니가 된다.

 


2.

 

황정은의 소설에는 상실을 겪은, 겪고 있는, 겪을 존재들이 등장한다. 아니 사실 황정은의 소설에는 아버지를 상실하고(의 그림자, 계속해보겠습니다), 배우자를 사고로 떠나보낸 충격으로 자신을 상실하거나 소중한 이를 그리워하면서 기다리고(계속해보겠습니다),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동거인을 상실한 채 곧 철거로 사라질 전자 상가에 흘러들고(d), 세계가 원하는 곧고 순종적인 자세를 상실해 오뚝이가 되어가거나(오뚝이와 지빠귀),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어른들로부터 안전한 공간을 상실해 돈을 훔쳐 집에서 도망치는(소년), 우연히 맡게 된 미지의 생물을 잃어버리게 되면 자기 신체의 일부를 상실하게 되는 상황에 처한(곡도와 살고 있다) 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이토록 많은 이들이 그토록 많은 무언가를 상실하고 말았다는 사실에 아득해져 절로 눈살을 찌푸리고 말 정도로 끊임없이 죽음, 잃어버림, 빼앗김을 겪는 세계가 거기에 있다.

 

요즘도 이따금 일어서곤 하는데, 나는 그림자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저런 건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생각하니까 견딜 만해서 말이야. 그게 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그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맞는 것 같고 말이지. (중략)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게 되어 버리면 그때는 끝장이랄까, 끝 간 데 없이 끌려가고 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의 그림자, 46)


황정은의 소설이 상실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상실을 받쳐 세우는 황정은 특유의 기둥이나 축, 쉽게 말해 상실을 그리는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황정은이 등장시키는 인물들의 태도, 사건과 타인에 대한 대응에 집중해보자. 소설 의 그림자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한 명인 여 씨 아저씨가 말하는 위의 대목은 황정은이 수놓은 인물들 대부분이 견지하고 있는 특유의 태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그림자아무것도 아니라여긴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끝부분부터 펄럭거리며그림자가 일어난 많은 이들이 그림자를 따라가거나 그림자에게 완전히 먹혀버려 죽지만 그건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심드렁하다고 해야 할지, 무심하거나 체념했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특유의 태도는 황정은이 창조한 인물들 전반에 새겨져 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나도 마찬가지다. 그림자가 일어나는 일처럼 환상이나 꿈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들이 생겨도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반응하고 행동한다. 그림자가 일어나고 그림자 때문에 자신을 상실하는 일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아버지가 시도 때도 없이 모자가 되거나(모자), 멀쩡히 직장을 다니던 동거인이 점점 오뚝이가 되어가고(오뚝이와 지빠귀), 아무도 볼 수 없고 자신만과 대화 할 수 있는 기묘한 존재가 등장하더라도(모기씨,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 그들은 놀라거나 신기해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림자가 눈 앞에 나타나도 그림자가 멀리 가지도 않고 집 안을 돌아다니는데, 이걸 보지 못하는 건지 못 본 척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이”(의 그림자, 44),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피해서 앉거나 말을 나눌 때도 그림자의 좌우에서 서로를 보려고 머리를 좀 기울인 상태로 말하기까지 한다.

 

상실을 가깝게 곁에 둔 이들이 그걸 아무렇지 않아 하는 모습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황정은의 인물들은 상실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부끄러워하거나 선뜻 화를 내지도 않는다. 어머니인 애자가 배우자인 아버지를 사고로 상실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다른 인물이 사과 궤짝을 지게에 지고 걷다 심장 마비로 죽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풀어놓을 때조차 그들은 마치 그 상실과 이미 거리를 두었다는 듯 담담하게, 혹은 시니컬하게 발화한다.(계속해보겠습니다) 조금씩 철거되고 있고 언젠가 영원히 사라 질 전자 상가에 대해 말하거나(의 그림자), 과거 자신이 욕망했던 존재의 부재를 언급하고(계속해보겠습니다), 교통사고로 어머니와 자신의 다리를 잃은 기억에 대해 말할 때에도(모기씨) 그들은 쉬이 감정을 드러내거나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황정은의 인물들을 따라가며 그들의 표정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상실을 마주한 상황, 기묘하고 환상적인 상황 앞에서 표정을 잃었다는 사실이 그들이 가진 감정과 고통을 상쇄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아무것도 아니라 말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평온하게 서 있다고 해서 정말로 그들이 아무렇지 않은 상태라고 말할 수 없듯이. 인물들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상실의 감각과 감정을 듣지 않더라도, 아니 듣지 않기 때문에 상실을 겪는 인물들과 그 상실은 선명해진다. 부각되고 강화된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 말할 뿐인 이들이 있다. 그 같은 그들의 모습은 상실과 결부된 소설 속 장면들이 만들어내는 상실의 여파를 역설적이고 효과적으로 강조하고 표현한다.


 

3.

아무렇지 않게 말하기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위에서 언급한 황정은 식() 말하기와 함께 황정은은 인물 한 명이 처한 상황과 감각을 그 인물 안에만 한정 짓지 않는다. 한정 짓지 않는데 멈추지 않고 적극적으로 인물과 인물 사이의 구분을 흐린다. 황정은이 묘사한 인물들 사이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이 말이 누구의 말인지, 지금 고백 되고 있는 이 생각과 감정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진다.

 

무재씨, 나는 가마가 그냥 가마라고 생각했지 거기에 모양이 있을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거든요.

가마는 가마지만 도무지 가마는 아닌 가마인가요.

무슨 말이세요?

해 보세요, 가마.

가마.

가마.

가마.

가마.

이상하네요.

(의 그림자, 37)


 

쓸쓸하다. 그 얘기.

그런가.

그렇지 않아?

나는 잘 모르겠어.

(, 27)

 

황정은의 작품 전반에서 꾸준히 이어지는 위와 같은 대화는 질문과 대답을 반복적으로 배치한다. 한 세트의 문답 뒤에 곧바로 따라오는 다른 세트의 문답은 탁구공을 통통거리며 주고받는 탁구채를 연상시킨다. 의 그림자에서 은교와 무재가 정수리 꼭대기에 위치한 가마를 언급하며 나누는 위의 대화는 황정은 특유의 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 중 하나다. 읽다 보면 결국 방금 말한 가마가 누구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지 알 수 없어지는 이 같은 방식의 대화는, 인물들의 관계와 감정을 서로 엮고 중첩시키고 연결한다. 거칠고 역동적인 감정 표현을 배제한 채 인물들 사이에서 비슷하고 유사한 발화가 겹치고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물들의 관계, 감정의 교류를 전달한다. ‘그런가하고 묻고 그렇지 않아?’라고 답하는 식의 대화는 데칼코마니의 양쪽 날개처럼 두 인물을 연결한다.

 

세개의 물방울이 뭉쳐 조금 더 큰 한 개의 물방울이 되고 만 것이다. (중략) 합체한 거야. 파워 레인저처럼 셋이서 합체. , 이게 뭐 같아? 나는 이게 뭐 같냐면..... (중략)

이름을 붙일까.

붙이자. 나비와 나방이 전부 있는 것으로.

나비와 나방.

나방비 나비방.

나나비.

나비바.

나비바가 될까.

나비바가 되자.

나비바.

소라, 나나, 나기가 합체하면, 나비바

(계속해보겠습니다, 202-203)

 

계속해보겠습니다의 소라와 나나, 나기는 나기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날 둘러앉아 술을 먹으며 대화를 나눈다. 먼저 잠들어 버린 나나를 곁에 둔 채 소라와 나기는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는다. 둘은 자신들을 세 개의 물방울로 찍고는 크기를 조금씩 키워가다 합쳐버린다. 그리고 그 물방울의 모양이 나비인지 나방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 명의 인물은 각기 다른 상실을 겪으면서도 앞서 밝힌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간다. 사실은 아무도 아무렇지 않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상실과 고단한 삶으로 그들에게는 구멍이 뚫려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세 개의 구멍에서 출발한 고통과 슬픔이 왼쪽과 오른쪽에서 조금씩 번져가다, 다가오는 다른 두 명의 그것과 만나 합쳐진다. 이쪽과 저쪽이 비슷하지만 결국 조금씩은 다른 나비 모양의 진득한 데칼코마니가 피어오른다.

 

상실을 말하는 가장 큰 목적이자 효과 중 하나가 감정의 전달, 즉 공감이라고 했을 때 황정은의 소설을 달리 읽을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서 생겨난다. 황정은은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갈등이나 관계 맺음을 서술하지 않고 몇 번씩 꼬아 만든 장치와 방법으로 교집합을 만들어낸다. 거리를 둔 채 자신의 세계만을 살아가는 인물과 인물, 인물과 독자, 인물과 좀 더 큰 맥락 사이에 나방비나비방’, ‘나비바라는 데칼코마니를 겹쳐 찍는다. 바로 이 작업이 황정은을 특별하게 만든다. 연대나 동료 같은 걸 말하기 이전, 인물들 사이의 발화와 대화를 묘사하는 특유의 방식을 통해 인물과 인물, 감정과 감정을 겹쳐 읽어내게 만드는 이 독특한 글쓰기가 황정은의 소설 속에 있다.


 

4.

 

데칼코마니는 아무렇지 않게 상실을 겪어내는 인물들 사이의 중첩과 확장만을 표현하지 않는다. 황정은이 소설을 통해 만들어 낸 또 다른 새롭고 독특한 장치는 인물과 인물을 둘러싼 공간이나 배경, 맥락으로 구성되는 데칼코마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두 명의 인물이나 몇몇 사건을 넘어 펼쳐진 좀 더 큰 규모의 데칼코마니가 그곳에 있다.

 

넘고 보니 벽 이쪽은 저쪽과 같은 구조였다. 방이 있고 부엌이 있고 방이 하나 더 있고, 두 집을 나누는 가운데 벽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활짝 펼쳐진 나비 날개처럼 이쪽과 저쪽이 같았다. (중략) 나나와 나는 남의 집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관람하듯 그 공간을 바라보면 계속 걷다가 다시 모퉁이에 이르러 우리 쪽 공간으로 넘어왔다. 신묘한 경험이었다. 벽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 현관을 등진 채로 바라보면 왼쪽이 우리집, 화장실을 등진 채로 바라보면 오른쪽이 우리 집이었다.

왼쪽과 오른쪽.

오른쪽과 왼쪽.

(계속해보겠습니다, 34)

 

계속해보겠습니다의 앞선 세 인물은 술자리 물방울뿐 아니라 어린 시절 자신들이 살아온 공간에서도 데칼코마니를 마주한다. 각기 다른 사연으로 아버지와 배우자를 잃은 두 편부모가정은 활짝 펼쳐진 나비 날개처럼 화장실과 현관을 공유하는 신묘한공간에서 함께 거주한다. 이곳에서 소라와 나나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삶의 의지를 잃은 어머니인 애자가 아닌 나기의 어머니인 순자의 밥을 먹고, 순자의 보살핌으로 자란다. 셋은 한뿌리에서 자란 감자처럼 양분을 공유한 사이”(계속해보겠습니다, 41)가 되어 똑같은 모양을 한 채, 하나의 머리와 하나의 배를 가진 나비 모양의 데칼코마니 속에서 뒤섞여 성장한다.

 

황정은이 만들어 낸 이토록 소설적인 거주 공간은 세 명의 인물이 경험하는 각기 다른 방향과 수준의 상실과 고단함을 연결하고 섞어 묘사하는 데칼코마니가 된다. 황정은이 계속해보겠습니다에서 끊임없이 등장시키는 나방 등에 대한 은유는 이렇듯 인물과 인물 사이의 흐린 경계와 각자의 경험이 포개어지는 공간을 향해있다. 이러한 데칼코마니적 공간은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간 경험과 감각, 감정을 한데 모아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실이라는 키워드를 효과적으로 부각한다. 데칼코마니는 소라, 나나, 나기라는 인물들이면서, 그 인물들이 서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너와 나 사이의 중첩, 인물과 배경 사이의 중첩을 넘어 중첩 속의 중첩, 달리 말해 데칼코마니 속의 데칼코마니가 그곳에 있다.

 

가동을 시작으로 나, , 라 마동까지, 동심 하천 쪽으로 길게 이어진 상가 건물들이 보였다. 다섯 량의 거대한 객차들처럼 보였다. 바퀴도 없이 배를 끌며 열을 지어 가다가 문득 멈춰서 굳어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의 그림자, 99)

 

가와 나와 다와 라와 마동은 전자 상가, 나아가 현재는 도시재생 사업의 대상이 된 세운상가를 떠올리게 한다. 전자 상가는 같은 규격의 가게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동시에, 같은 모양의 좁고 높은 상가가 여러 동 함께 서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데칼코마니적 공간이다. ‘40년 동안 장사를 했고, 20년은 더 장사할 거라고힘없이 외치지만 계속해서 배제되고 소외되는 철거의 공간, 과거의 공간인 전자 상가는 미래의 상실,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커뮤니티의 상실을 동시에 겪는다.

 

그러나 여기 이렇게 균열들이 있다. 멀쩡하다는 것과 더는 멀쩡하지 않게 되는 순간은 앞면과 뒷면일 뿐, 언젠가는 뒤집어진다. 믿음은 뒤집어지고, 거기서 쏟아져 내린 것으로 사람들의 얼굴은 지저분해질 것이다......

(의 그림자, 69)

 

곧 상가에서 쫓겨날 인물들과 존재 자체를 잃어버리게 될 상가 건물이 함께 존재하는 전자 상가는 상실의 데칼코마니라는 단어가 시간과 공간에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모두가 입을 모아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라 장담했던 상가의 계단은 세월을 통과해 수많은 균열을 가지게 된다. 위 대목은 과거를 데칼코마니의 날개 하나로, 현재를 또 하나의 날개로 읽는다는 점에서 시간과 공간이 뒤섞인 데칼코마니를 묘사한다. 전자 상가는 다른 여러 동의 건물이라는 날개, 동시에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라는 날개를 함께 퍼덕인다.

 

인물의 감정이나 감각을 넘어 공간과 배경으로 확장된 데칼코마니는 황정은의 다른 소설에서도 날개를 펼친다. ‘빨랫줄에 맨 겨자색 천이 두 개의 공간으로 나누고 있는 방에서, 건너편에서 코를 고는 남자가 어머니와 함께 잠들어 있는모습을 끔찍해 하거나(소년, 238), 교통사고로 상실한 애인이 읽던 책을 발견하고 애인이 갈색이 아닌 노란색 가름끈으로 페이지를 나눴을 거라 상상하며. 갈색 가름끈이 본래 위치로 돌아간 뒤엔 첫 장부터 시작해 노란색 가름끈까지를읽는(d, 116) 모습이 그렇다.

 

데칼코마니로 피어난 날개에는 축이 있다. 기준이라고 말하기엔 애매하고 몸통이라 표현하기에는 어색한 데칼코마니의 가운데, 날개와 날개가 만나는 부분이 그 축이다. 아쉽게도 이 글은 황정은의 소설 속을 날아다니는 날개 편 데칼코마니를 모두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니 황정은이 그어놓은 데칼코마니의 축 또한 몇 가지만 살펴보자.

 

, , , , , ,

두근, 두근, 하는 소리를 듣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요란하게 쐐, , 하고 들려왔다.

(계속해보겠습니다, 64)

 

자그자그자그자그, 하고 내 것보다 빠른 박동으로 내 것과는 다른 흐름으로 순환하는 조그만 심장.

(같은 책, 124)

 

소라와 나나는 나나가 임신한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듣는다. 소라는 나나와 함께 간 병원의 초음파 검사를 통해, 나나는 자신과 연결된 두 번째의 심장을 통해. 이 소리는 소라와 나나라는 두 인물, 과거 어머니였던 애자에 대한 경험을 달리 받아들여 온 두 인물이 아기를 두고 갈등을 벌이다 결국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은유한다. 아기의 심장 소리는 나나와 소라라는 데칼코마니의 날개, 아기와 소라라는 날개 사이에 위치한다. 아기라는 존재를 두고 가로질러지는 각기 다른 경험이 끌어올려 진다. ‘, 쐐 그리고 자그자그하며 뛰는 소리가 데칼코마니의 축으로 작동한다.

 

드럼과 기타와 보컬, 소리가 너무 엄청나, d는 그것 말고 다른 것은 들을 수 없었다. 음악뿐이었다. 15번 방의 창 없는 구조는 성능 좋은 소리상자처럼 음악을 담고 있었다. (중략) 누군가가 다시 벽을 때렸고 이번엔 다른쪽 방이었다.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번에는 벽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오른쪽 방과 왼쪽 방에서.

(d, 90)

 

황정은의 다른 소설 dd는 음악과 소리를 통해 교통사고로 죽어 자신이 상실하고 만 애인인 dd를 자신의 시공간에 재현한다. dd가 모아놓았던 LP를 작디작은 고시원 방에서 대형 앰프와 스피커로 틈으로써, d는 음악을 가득 채운 방을 축으로 삼아 상실하지 않았던 때와 장소를 자신이 위치한 그때와 그곳에 반듯하게 접어 포갠다. d의 앰프, ddLP, 음악이 울려대는 방은 자신이 상실한 소중한 존재를 소환하고, 뒤이어 오른쪽 방과 왼쪽 방에 거주하는 다른 존재의 삶까지 포착하는 데칼코마니의 축이 된다.


 

5.

상실의 데칼코마니라는 거창한 제목을 붙였지만, 황정은이 만들어 낸 인물과 서사,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데칼코마니로 우뚝 서 있지 않다. 오히려 황정은은 크고 우람하고 아름답고 완전한 데칼코마니의 존재를 삐딱하게 바라보고 서서 가능한 한 많은 데칼코마니를 만들어낸다. 형형색색의 크고 작은 데칼코마니를 이리저리 어지럽게 날려 보낸다. 이 글은 그 데칼코마니의 군무를 포착하고 싶은 소망을 품고 있다.

 

아무도 모르게 전자 상가 구석 층에 거주하며 전자 상가 상인들에게 부유한 형편과 배부른 고민에 대한 거짓말을 늘어놓다 외롭게 죽은 이(의 그림자), 소중한 존재를 상실하고 검디검게 휘어져서 어머니의 몸을 빈틈없이 덮고 있는 (중략) 그림자를 내버려 둔 채로 이따금 입을 벌려서 미미, 하고 가가, 하며 그림자의 말을 따라하다 죽은 이(같은 글, 70), ‘고아원에서 자라나 정육점에서 일하며 매일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이(마더)들의 삶. 그 삶들이 각각의 색으로 하늘을 수놓는다.

 

세종대로 사거리는 두개의 긴 벽을 사이에 둔 공간空間이 되어있었다. 고요하게 정지되어 있어 진공이나 다름없었다.

(d, 132)

 

쓰라렸다.

 

d는 놀라 진공관을 바라보았다. 이미 손을 뗐는데도 그 얇고 뜨거운 유리막이 달라붙어 있는 듯했다. 통증은 피부를 뚫고 들어온 가시처럼 집요하게 남아있었다. 우습게 보지 말라고 여소녀가 말했다. 그것이 무척 뜨거우니, 조심을 하라고.

(위의 글, 145)

 

가장 최근 작품인 디디의 우산d에서 황정은은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집회가 열린 광화문 주위의 공간을 위와 같이 표현했다.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게 막아버려 속이 텅텅 비어버린 집회의 공간과 d가 애인 dd의 음악을 틀던 앰프 속 진공관을 겹쳐 은유하는 방식으로. 이를 통해 황정은은 꾸준히 관심을 기울이던 구조적 폭력과 부정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조금 더 직접적으로 밀고 나간다. 황정은의 이 같은 변화나 시도는 자신의 소설 속 데칼코마니가 날아가 앉을 또 다른 자리, 더 넓은 자리를 모색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연하게도 데칼코마니라는 표현은 황정은의 소설을 완전하고 가장 적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이 글을 펼쳐 든 이가 황정은을 읽으며 모호하고 불분명하게 느낀 지점에 대한 약간의 관점은 제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상실의 데칼코마니라는 제목이 날아가 내가 아닌, 당신의 황정은에도 내려앉기를 기대한다.

 

황정은을 당신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마음에 이 글을 시작했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조금 다른 욕심이 조금씩 생겨났다. 내가 황정은을 어떻게 읽었는지, 내가 황정은에게서 찾아낸 특별한 점이 무엇인지를 황정은을 읽어본 이가 확인하고 그에 대해 함께 나누어 주었으면 하는 욕심이다. 비평이나 평론은 작품을 소개하고 흥미를 끄는 목적을 넘어 작품을 읽어본 이와 함께 관점과 의견을 나눌 때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기에 황정은의 작품을 읽지 않은 이가 느끼기에는 조금 낯설고 생소하더라도, 황정은을 애정하고 좋아해 온 이가 읽었으면 하는 대목과 생각을 좀 더 채워 넣었다. 그러니 혹시 이 글을 읽고 황정은을 읽고 싶어졌다는 말이나, 나도 황정은을 좋아하고 그 글을 읽어봤는데 나는 그 생각이나 방향에 별로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듣게 되는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그런 기회가 찾아온다면 좋을 것 같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그 기회가 이 글을 쓰는 나와 이 글을 읽는 당신 위로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와 앉는 데칼코마니가 될지도. 퍼덕퍼덕.

 


편집위원 재찬 (paperlifer@naver.com)


  1. 안녕하신가영의 <좋아하는 마음> 가사를 변용, 2016 [본문으로]
  2. 『百의 그림자』, 황정은, 민음사, 2010 [본문으로]
  3.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 황정은, 문학동네, 2014 [본문으로]
  4. 『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창비, 2014 [본문으로]
  5. 『디디의 우산』, 황정은, 창비, 201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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