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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합리와 이성을 맹신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마치 모든 문제에 해답이 있는 것처럼 교육받는다. 과거 현재 미래. 원인과 결과. 가해 피해. 온갖 논리적인 언어로 구획된 인생은 명료해 보인다. 논리의 언어들은 삶이 필연적으로 흘러가게 되어있으며, 의지와 선택을 통해 그것을 원하는 모습으로 조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세계의 규칙에 따르면 우리는 논리를 통해 남과 평등하게 대화할 수 있고, 오로지 자신이 한 잘못에 대해서만 정당한 책임을 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그렇지 않다.
이런 언어는 통제할 수 없는 세상의 변수들과 그 변수에 휘둘리기도 하는 취약한 인간들이 설 자리를 주지 않는다. 현실에선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매일같이 벌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나아질 수 없고, 어떤 불행한 사건들은 끝나지 않고, 하루가 지나도, 일 년이 지나도, 심지어는 평생 ‘오늘’로서 다시 생생하게 돌아온다. 사람들은 나의 ‘말도 안 되는’ 경험을 믿지 못한다. 심지어는 나도 어떻게 이런 일이, 왜 하필 내게 벌어지는지 알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상황을 소화하지 못하니 말할 수도 없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이 폭발했다. 전례 없었을뿐더러 과학적 계산에 따르면 ‘불가능한’ 재난이었다. 방사성 물질의 비가시성으로 인해 일반인, 정치인, 심지어는 과학자들까지 그 사고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방사능이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까지 퍼져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동안 사태를 파악하는 데에 며칠이나 낭비가 되었다. 인근 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한 번에 엑스레이를 십만 번도 넘게 찍은 수준으로 피폭되었다. 벨라루스의 암 환자는 거의 74배가 늘었고 485개의 마을이 사라졌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우리들도 모르는 새에 어느 정도 피폭된 채 살고 있다. 세계는 “어떻게 해서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지,” “누가 책임을 지지”만을 물었다. 이런 질문들은 유의미할지언정,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고통은 하나도 담아내지 못한다. 이제 원전은 산만큼 거대한 철 뚜껑으로 덮여있다. 책임국인 소련도 붕괴했다. 시간이 흐르며 실패한 원전과 국가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전 세계가 잊었다.
2011년의 동일본 대지진은 일본 역사상 최대인 규모 9.0의 지진이었다. 뒤이어 거대한 쓰나미가 동쪽 해안을 덮치면서 지진과 해일로 약 1만 8500명이 사망했다. 재난의 거대한 숫자는 때로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고 그 안에 있는 복잡한 맥락들을 쉽게 지워버린다. 수치는 단 하나의 삶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도호쿠 지방의 오카와에는 쓰나미 때문에 통째로 없어진 학교가 있다. 일본의 철저한 재난 대피 매뉴얼을 믿고 있던 학부모들은 일시에 아이들을 잃었다. ‘예의 바르고’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일본의 사회적 정동 속에서 울부짖고 항의하는 학부모들은 외면당했다. 결국 소송을 시작했고, 일본 법원으로서는 놀랍게도 각 가정에 사망한 아이 한 명당 6000만 엔을 지급하겠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사건을 일단락하려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오랫동안 준비해서 얻어냈지만, 어쩐지 죽음 같은 승리였다. 유족들의 상흔은 여전히 안중에도 없었다. 재난의 숫자로, 6000만 엔으로 치환되고 끝나버린 삶들이 있다. 정부의 수습 방식, 그리고 일본 사회의 침묵은 단 하나의 삶도 구원하지 못했다.
Saidiya Hartman의 「Lose Your Mother」는 작가가 아프리칸 아메리칸을 대상으로 한 노예무역을 추적하기 위해 서아프리카를 1년간 여행한 후 집필한 기행문이다. 책의 서두에서 그는 미국의 수많은 노예 아카이브들이 실제 노예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협소했는지에 대해 언급한다. 그가 확인한 두꺼운 아카이브와 노예 역사서들은 가격, 물건 수량, 무역 경로나 거래인 정보 등 수많은 ‘팩트’로 가득했지만 정작 거래된 사람들의 이름, 지난 삶과 거래 이후의 족적에 관해서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나는 훼손된 자들, 파괴된 사회들의 흔적을 좇았다. 목록을 채운 각 물건에서 나는 무덤을 읽었다. 노예 아카이브를 읽는 것은 공동묘지를 입장하는 것과 같은 경험이었다” (17). 사실관계는 자주 현실을 지운다. 수치와 인과는 그 안에 서린 단 하나의 삶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1
단 하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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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기억되는 것들의 세계, 그 기념비 사이사이의 큰 틈은 잊혀진 것들이 채우고 있다. 잊히기 싫은 자들은 지상에 남아, 자신을 발견한 누군가에게 끈적하게 달라붙기도 한다. 억울한 조선의 처녀 귀신, 쓰나미에 죽은 일본의 엄마 귀신, 200년 전의 어느 노예, 병으로 죽은 후 집을 점령해버린 미국의 아기 귀신… 죽은 자의 혼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죽지 않아도 유령인 사람들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유령이었거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사건으로 인해 갑자기 유령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숨 쉬고 있는 우리 중에는 존재와 기억을 부정당하고, 온전한 인격과 삶을 인정받지 못하는 몸들이 있다. 기억될 만한 위인들을 적고, 기득권의 성공 서사를 읊고, 규범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보잘것없어서’ 잘 보이지 않던 자들은 점차 볼 수 없는 것이 되어간다. 그들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도, 복잡한 세계에서 그들을 배경으로부터 구별해내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누군가들은 유령이 된다.
일부러 기억에서 지우고 잊은 후, 더 이상 그녀를 잃는 것은 불가능했다. 누구도 그녀를 갖지도, 찾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해질만한 이야기가 아니야. 이건 물려줄 이야기가 아니야. 이건 전해줄 이야기가 아니야. 그렇게 그녀는 정교하게 잊혔다. 2
‘자기 서사.’
멋진 말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을 하나의 일관성 있는 이야기로 정리하고, 그 자아에 준해 앞으로의 선택을 해나간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어떠한 경험들은 내가 모르는 새에, 내 결정과는 무관하게 삶의 중심이 되어버리고 만다. 내 가치관과 날 섬과 철벽과 너그러움 등을 설명하기 위해,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된다. 이를테면, 끔찍한 전남친이라든지 폭력적인 아버지라든지, 거듭된 불합격의 경험이라든지, 세월호나 강남역 살인사건과 같은 것들. 잠시 지나가는 생채기가 아니라 영원토록 목에 탁 걸리는 응어리로, 원래 내 몸인 것처럼 무겁게 끌고 다녀야 하는 족쇄가 되는 기억들.
아, 이 감각을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트라우마.
어떤 경험은 한 사람의 세계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하다. 트라우마는 이해할 수도, 통역할 수도 없는 비사회적인 경험이다. 자기 서사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일관성 있는 자기 서사를 뒤틀어 버리고, 통제할 수 없는 예외로 각인된다.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은 자신의 직접 경험조차 끊임없이 의심하고 검열하게 될 뿐 아니라, 이윽고 합리적 인과에 대한 믿음을 포함해 자기 주변의 사회와 세상도 점차 부서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뿌리를 잃고 부유하는 것이다. ‘비사회적’이라는 것은, 이렇게 부서져 내린 혼란의 당사자가 더는 사회적인 언어로 남과 온전히 대화할 수 없는, 언어 상실의 상태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 경험에 휘말린 순간부터 자꾸만 주체성과 주관성을 빼앗기고, 통제할 수 없는 트라우마의 잔상과 방문에 허덕이곤 한다. 삶을 관통하는 고통과 혼란, 그리고 그것을 짊어진 사람들을 중심에 담은 작품들이 있다. 사람들에게 이야기되지도, 위로받지도 못하는 존재들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글들.
0. 트라우마의 목소리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사라져버린 학교와 아이들을 추모하는 리처드 로이드 패리의 「구하라, 바다에 빠지지 말라: 쓰나미에 빼앗긴 아이들의 목소리」.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폭발 이후 이전의 삶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 다룬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 그리고 5.18 광주 학살과 그 이후를 그려낸 한강의 「소년이 온다」. 각각 현장 르포르타주, 르포-소설, 그리고 일반 소설이다. 장르도 다르고, 중심적인 ‘사건’이 발생한 시대와 장소도 다르다. 그러나 세 글을 ‘트라우마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엮어볼 수 있다.
이미 잃어버린 것, 이미 죽은 사람들의 공허한 공백이 이 책들의 중심을 무겁게 채운다. 이해할 수 없이 압도적인 일들 앞에서는 사건 자체를 해석하는 작업에만 몰두하기 쉽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언제나 사건보다 사람이다. 이 작가들은 ‘왜 쓰나미가 왔나’ ‘왜 5.18이 벌어졌나’ ‘왜 체르노빌은 터졌나’ 등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가장 먼저 물을 질문에 답하는 데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인과와 사실관계를 파헤칠 시간에 그 사건을 겪어낸 사람들의 감정과 경험, 그리고 삶 전반에 더욱 주목한다. 인생을 관통하거나 심지어 넘어서는 거대한 규모의 트라우마를 지닌 여러 사람이 모두 화자가 되어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 중심적 공백을 둘러싼다. 상실과 아픔에 대한 진술로 이야기를 채운다. 저자들은 충분히 말해지지 못한 생존자들의 경험을 대리하고, 그들의 언어를 최대한 각색하지 않고 사용한다. 그 다층적인 목소리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들은 재앙의 이면에 있는 ‘삶’을 소생시킨다. 제각기 다른 상황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고통에 압도된 사람들의 목소리들은 마치 대화가 가능할 것처럼 닮아있다.
0. 트라우마의 시작
갑자기 뽑혀서 시간의 주머니 속에 밀어 넣어져 21세기로부터 단절된 장소에 있게 됐다. 3
시간의 고리가 끊여졌다. 순식간에 모든 과거가 힘을 잃어, 과거에 의존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보고 겪은 것을 설명할 말을 떠올리지 못하겠다. 침묵의 시간이었다. 4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내가 겪은 일들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5
트라우마가 시작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 속에서 존엄성이 짓이겨지는 순간은 트라우마를 촉발하기에 충분하다. ‘존엄’은 사람이 태생적으로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는 의미로, ‘생존’보다 훨씬 깊은 가치를 함의한다. 존엄은 생존을 위해 마땅히 보호받고, 다른 사람과 연결되고, 주변 세상과 상호 작용하며, 자신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삶의 자격, 즉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모든 것을 포함할 테다. 하물며 아무런 악의가 없는 경미한 교통사고로 몸을 다쳐도 악몽 같은 기억이 되곤 하는데,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게 다루어지고 살덩이로 전락하는 순간, 내가 사랑하며 살아온 세계가 삽시간에 부서지고 쓰레기가 되는 순간. 그것을 목격하거나 경험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기에 충분하다. 앞서 소개한 세 책의 인물들 모두 삽시간에 사람들의 영혼이 짓이겨져 주검이, 살덩이가 되고, 인간의 존엄이 바닥 밑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 충격으로 사망자들뿐 아니라 진술하는 생존자들마저 자신의 삶과 세상을 잃었다. ‘평범’은 그들이 떠나온 과거의 이름이자, 잃어버린 미래의 이름이다.
1980년 광주. 무자비한 학살이 계획되었다. 정부는 필요하다면 모두를 죽일 수 있도록, 광주 주민 수의 두 배가 되는 양의 탄환을 준비했다. 한강은 「소년이 온다」에서 광주 바깥의 정치적 맥락은 생략하고, 광장에서의 살육부터 시신을 수습하는 정경, 감옥에서의 고문, 그리고 그 이후 생존자들의 삶에 남은 상흔을 짚어내는 데에 주목한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혹은 그냥 친구와 가족을 따라 광장으로 나갔다가 잡힌 정치범들이 있었다. 구속된 정치범들은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 “묽은 진물과 진득한 고름, 냄새나는 침, 피, 눈물과 콧물, 속옷에 지린 오줌과 똥. 그것들이 내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아니, 그것들 자체가 바로 나였습니다. 그것들 속에서 썩어가는 살덩어리가 나였습니다” (120).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134). 다분히 의도적인 폭력 하에서 사람은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존엄도 자아도 짓밟히며 몸뚱아리로서 점차 훼손되었다.
2011년 쓰나미로 인해 도호쿠 오카와에 살던 사람들은 집을 잃고 직장을 잃고 가족을 잃고 조상들의 위패와 무덤도 잃었다. 쓰나미 직후의 도호쿠를 직접 본 사람들은 모두 그곳을 “이 세계가 아닌” “지옥”이라고 표현하며 “소나무, 진흙과 쓰레기 아래에서 튀어나온 아이들의 다리와 팔들” (58)을 기억했다. 생존자들을 가장 괴롭게 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을 찾더라도, 더는 그 몸에 삶과 성격을 가진 존엄한 그가 없다는 점이었다. 쓰나미로 딸 고하루를 잃은 나오미는 몇 달 동안이나 적극적으로 시신을 발굴하고 옮기고 그 눈코입을 채운 진흙을 손으로 일일이 빼내는 작업을 했다. 시체를 다루는 일에 무감해질 때쯤 드디어 고하루를 찾았으나 애틋하기는커녕 다른 시신과 다를 바 없이 참혹하고 징그러웠다. “그것은 그저 무슨 덩어리일 뿐이었어요. 팔도 없고, 다리도 없고, 머리도 없었어요. 그리고 이것이 내 딸, 내 어린 딸이었어요. 내가 가졌던 희망, 그 애를 알아보리라는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어요” (152). 결국 그녀의 작별은 실패했고, 그제야 그녀는 아프기 시작했다. 교육청 관계자들과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서 다른 학부모도 절규했다: “당신은 애들의 부푼 얼굴을 봤나요? 아이들은 한 달 만에 그렇게 많이 변했어요. 부패된 거지. 그 애들은 알다시피 인간이었어요. 사람이었다고. 그런데 트럭 위에 버려지고 누더기로 쌓였어” (122). 사람이 죽었는데. 처참하게 훼손된 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닌 무언가일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만져보고 인사하고 떠나보낼 몸을 잃었다. 사랑하던 모든 것이, 아름다운 바다와 평화로운 논, 가족 구성원들의 따스한 몸과 움직임, 일상 속 가구와 추억 담긴 물건들이 산산이 조각나거나 흔적도 없이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발견된 잔해들은 지독한 악취와 끔찍한 모양새 때문에 ‘쓰레기’로 처리되었다.
체르노빌은 쓰나미와 광주를 뒤섞은 재난과 같았다. 사고와 구조적 폭력, 자연재난과 인재가 모두 뒤섞였다. 그러므로 체르노빌 재난의 비인간화는 더욱 복잡했다. 방사능은 많은 사람을 죽였다. 하지만 그보다 무서운 것은 사람과 세상의 변화였다. 체르노빌에 살던 사람들은 강제로 이주했고, 고양이와 개 등 반려동물은 두고 가라는 명을 받았다. 이후 피폭된 동물들은 전부 총살되었다. 흘러나오는 사람들을 거슬러, 오로지 동물을 총살하기 위해서 방사능 구덩이의 중심으로 보내진 사람들이 있었다. 더 큰 방사능 확산을 막기 위해서 소방관들도 체르노빌로 향했다. 원자로 지붕 위의 폭발 물질을 치우기 위해 파견된 사람들과 원자로 바로 아래에서 밤낮으로 터널을 뚫은 400명의 광부가 있었다. 그들은 심하다면 일주일 내에 혈관이 터지고 장기들이 망가지고 살갗이 벗겨지기 시작했으며, 길어도 5년 안에는 암으로 죽었다. 그들이 체르노빌에 가지 않았더라면 유럽 전체가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으로 변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고통스러운 죽음의 운명을 국가로부터 점지받은 이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집을 잃고 고향을 잃고 이름을 잃었다. 발전소로부터 조금 멀리 살아 대피하지 않은 사람들은 직접 키운 감자와 덩이뿌리가 피폭되었으니 버려야 한다는 말에 혼란을 겪었다. 땅 속에 피폭된 건물과 땅을 묻었다. 물로 피폭된 물을 닦아냈다. ‘민족의 합창’ 챕터에서 이름 모를 목소리가 말한다: “우리 마을에는 묘지가 세 개 남았다. 첫 번째는 사람이 묻힌 오래된 묘지고, 두 번째 묘지에는 우리가 버려 총살당한 개와 고양이, 세 번째 묘지에는 우리 집이 묻혀 있다. 우리는 집까지 장사지냈다” (250). 친근한 삶의 방식, 생활 터전과 역사, 심지어는 자연도 죽었다. 사방이 “무덤뿐”이었다. 죄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체르노빌과 관련된 모든 사람은 자신들이 초래하지 않은 사건을 기점으로 괴물 취급을 받게 되었다. 체르노빌로 돌아가면 외로웠다. 몇 년간 사람을 보지 못하고 살았다. 체르노빌을 떠나도 외로웠다. 자녀들마저 체르노빌에서 온 부모님이 만진 물건을 “따라다니면서 닦고” 그들이 사용한 이불은 내다 버렸다. 의사와 과학자들은 연구를 목적으로 피폭된 소방관과 광부들의 나체 사진을 찍었다. 피폭된 남편을 돌보려고 하는 아내는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불렸다.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은 남편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닌 전염도가 높은 방사성 물질이에요. 죽고 싶어요? 정신 차리세요. 이제 사람이 아니라 원자로에요. 같이 타버린다고요” (42-43). 간호사들은 피폭된 몸을 만지지 않으려 비닐 천막을 치고 장갑과 막대기를 통해 환자와 접촉했다. 피폭으로 죽은 사람은 거대한 비닐 백에 밀봉했고, 그 비닐은 두꺼운 아연 관에 넣어 용접으로 봉인했다. 관보다는 거대한 무기같이 생긴 그것을 어느 무덤보다도 깊은 구덩이에 묻고, 콘크리트로 덮었다. 관을 묻은 땅도 버려졌다. 체르노빌의 사상자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인간적인 숨결도 없었고, 살아남은 사람들 또한 “희귀전시물 취급”을 당하게 되었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없는 세상 속에 낙오되었다.
0. 잊지 못하다, 잊혀지다.
당시에는 인지하지도 못한 것이 트라우마가 되는 것은 나중이다. 어떠한 상실은 내 우주에 구멍을 남긴다. 어떤 구멍, 어떤 변화가 남겨질지는 예측할 수 없고 오로지 나중에 봐서야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트라우마는 발생하는 순간뿐 아니라 이후의 모든 순간을 포괄한다. 상실이 유예될 때, 나중에서야 나도 모르는 새에 상실한 무언가를 되짚어볼 때, 뒤늦게 고독한 애도의 눈물을 흘릴 때, 그것에 드디어 이름을 붙이고 맥락을 선물하려 할 때. 트라우마의 고통은 이 과정에서조차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저 어떠한 상처와 상실은 영원히 회복될 수 없으며, 그 대체 불가능성 때문에 우리가 영원히 변해버리기도 한다는 점을 수용하는 것이 최선의 출발점인지도 모른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있다. 그러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체르노빌 사람이 되어버렸다. 돌연변이가 된 것이다! 우리는 도시가 아니라 인생 전부를 잃어버렸다 (65).
그것은 독특하고 회복될 수 없는 순간이었다 (291).
텅 비어서 절대로 채워지지 않을 공간이 생겼어요 (153).
그날 이후로 모든 사람은 머리 안에 문제가 생겼지요 (284).
하지만 트라우마를 그저 ‘사건’으로 인해 개인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한정해서는 안 된다. 세 작품은 사회가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에게 정상성으로 회귀하기를 강요하고, 심지어는 이들까지 외면함으로써 평화와 안정을 재건하는 것 또한 트라우마를 촉발한 ‘사건’ 만큼이나 커다란 폭력임을 보여준다.
쓰나미로 인해 학생의 대다수가 죽은 후, 오카와 초등학교는 신속하게 이사를 하고 다시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추모 기간도 없이 조용히 연례행사들이 강행되었다. 패리는 말한다: “아무도 죽은 아들과 딸들이 참석했어야 할 행사에 대해 통보받지 못했다. 일상적인 삶을 다시 시작하려 노력하고, 생존자들이 학생의 본분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장소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는 슬퍼하는 많은 가족들에게, 배를 한 방 때리는 것같이 느껴졌다” (109). 아이를 잃은 부모들을 더욱 처참하게 만든 것은 침묵과 겸허한 수용, 빠른 회복을 요구하는 일본 사회의 반응이었다. 상실을 뒤따른 배제의 경험이 오카와의 부모들을 오랫동안 괴롭혔다. 그렇다면 그들의 트라우마가 오로지 쓰나미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학살 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관공서와 학교들은 정상 운영을 하기 시작했다. 매 여름 시원한 물을 뿌리던 도청 앞 광장의 음악 분수도 어김없이 작동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색 피와 비린내가 흥건하던 그 광장에서. 소설 속 생존자인 은숙은 방학하는 날까지 매일 도청 민원실에 항의 전화를 건다.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벌써 그럴 수 있습니까” (69). “분수대에서 물이 나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제발 물을 잠가주세요.” 그러자 직원은 답한다. “그만 전화해요, 학생. 물이 나오는 분수대를 우리가 어떻게 하겠어요. 다 잊고 이젠 공부를 해요” (97).
하지만.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134). “깜빡 잠드는 순간, 잠에서 막 깨어나는 순간마다 그 얼굴들을 봅니다. 도려낼 수도 없는 내 눈꺼풀 안쪽에 박혀서” (144). 여전히 눈을 감으면 잘린 팔다리들의 잔상이 보이고, 꿈에는 죽은 아들이 나온다. 몸에 새겨진 기억들은 더욱 선명하다. 그해 여름 수용소에서 찐득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씻지 못하고, 물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고문당하던 그는 사람이 아니라 살덩이였다. 살덩이로서의 기억은 가시지 않는다. 여전히 여름에 흘러내리는 땀 한줄기와 등에 잠시 앉는 벌레가 일순간에 일상을 감옥으로 뒤바꾼다. 오늘까지도 10년 전 그날을 피부로 경험하며 산다. 당한 사람이 잊지 못하겠다는데 남들이 먼저 잊으라 할 수 있는 걸까.
세상의 쳇바퀴에서 이탈했다. 삶을 초월하는 거대한 고통에 넋 놓고 있는 동안 남들은 재빠르게 본래의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궤도로 회귀한다. 법적, 경제적 보상과 인과를 토론하더니 실리주의적인 난제들이 어영부영 갈무리되면, 혹은 갈무리되지 못하더라도 넘어가고 본다. 잊고 어서 나아가려는 사회, 잊지 못하고 기억 속에 갇힌 사람들이 서로 충돌한다. 어떤 상실들은 전쟁기념관과 헌정비와 교과서에 기록되고 애국가 선율로 수천 번 애도 된다. 하지만 어떤 상실은 그저 불편한 사회적 걸림돌로 남는다. 인간의 삶을 뛰어넘는 진실들, 납득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경험을 혼자 짊어지고 있는데. 잊을 수 없는 걸 잊으라 하더니, 결국에는 그 사태에 갇힌 나마저 버리고 나아가면 그만이라고 한다. 어쩌면 아무도 잘못하지 않은 재난에서조차 흐르는 고통을 영구적인 고립으로 굳히는 것은 사람들의 외면과 무시인지도 모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말할 수도 온전히 살아갈 수도 없는 유령으로 점차 변화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들의 아무렇지 않음이 나를 매번 새롭게 죽인다. 유령으로 사는 매 순간이 트라우마의 연장선이다.
그렇게 죽어가는데 우리가 무엇을 견뎌냈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아무도 제대로 물어보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산다. 현실과 비현실에서 동시에 살아간다 (51).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79).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괴물에게 살해당했어요. 우리는 그것에 분노를 터뜨렸지만 반응이 없습니다. 쓰나미는 눈에 보이는 괴물이었어요.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괴물은 영원히 계속될 거예요.”
“눈에 보이지 않는 괴물이 누구죠?”
“나도 그게 무엇인지 궁금해요. 사물의 표면만을 중시하는 일본인의 독특한 특성이지요. 그리고 절대로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들의 자만심에 있는 것이지요” (245).
지금 세상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우리 체르노빌레츠와 당신을 포함한 모든 다른 사람들입니다. 눈치채셨습니까? 여기서는 벨라루스 사람이고, 우크라이나 사람이고, 러시아 사람이고 그걸 강조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자신을 체르노빌레츠로 부릅니다. “우리는 체르노빌에서 왔습니다.” “나는 체르노빌 사람입니다.” 마치 우리가 다른 국가인 것처럼. 새로운 민족인 것처럼... (188).
우리는 같은 운명을 지녔어요. 다른 곳에선 어디든, 우린 이방인일 뿐이에요 (194).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이 아니게 된 외톨이들끼리 우리가 된다. 모두가 잊고 넘어갈 때 절대로 잊지도 넘어가지도 못하는 자들끼리 우리가 된다. 우리만의 지옥 속에서. 위안받지 못한 채 쉬쉬되며.
0. 광기
투명한 존재가 되었다. 이전의 삶에 작별을 고하지도 못한 채 목소리만 남았다. 하지만 목소리조차 아무 데도 전해지지 않는다.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충분한 추모의 기회를 잃으면서 죽은 사람들은 온전히 떠나지 못하고, 산 사람들은 온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모두 죽음도 삶도 아닌 연옥에 갇혔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터질 듯한 고립의 감각을 온전히 담아낼 방법은 오로지 흩뿌려진 광기 그대로일지도 모른다. 목소리들이 쌓인다. 이제는 무엇이 누구의 고통인지 구분하기도 어렵다. 말해지지 못한 모든 것이 뒤엉켜 메아리처럼 영원히 그 자리에서 울려 퍼진다.
아이를 갖기까지 4년이 걸렸어요. 우리도요. 오랜 시간 동안 노력했어요. 그리고 이제 그 애가 죽었어요. 당신은 뭔가를 할 수 없어요? 아이를 돌려줘요. 매일 밤, 나는… 무엇을…?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우리의 미래였어요. 제발, 제발, 그 애를 돌려줘. 그래! 그를 놓아줘! 그는 나를 향해 계속해서 느릿느릿, 궤변에 가까운 횡설수설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 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병원에 입원했어요. 정말 많이 아팠어요. 그래서 엄마한테 부탁했어요. 엄마 나 못 참겠어요. 그냥 죽여주세요! 집에 내 햄스터를 두고 왔어요. 문도 꼭 닫고, 이틀 치 먹을 것만 주고 왔어요. 그런데 우리는 영원히 떠난 거였어요. 엄마랑 아빠랑 뽀뽀하고 내가 태어났어요. 옛날에는 내가 절대로 안 죽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죽을 거라는 거 알아요. 의사 선생님께서 그러는데요, 우리 아빠가 체르노빌에서 일했어서 내가 아픈 거래요. 그래도 난 아빠가 아주 좋아요. 할머니가 “하나님의 새를 위해.” 체에다 달걀을 모아와서는 마당에 던지셨어요. “우리 개와 고양이에게.” 훈제 비곗덩어리도 잘라줬어요. 주머니에 모아두셨던 씨앗을 다 털어내셨어요. “땅에서 살아라.” 그 다음에는 집에 절하셨어요. 창고에도 절하셨어요. 사과나무에도 따로따로 절하셨어요. 할아버지는 떠날 때, 모자를 벗고 인사하셨어요.
0. 침묵의 무덤에서 목소리를
사람을 넘어서는 압도적인 고통을 개인 안에 꽁꽁 가두기란 불가능하다. 사람이 되려 그 안에 갇힐 뿐이다. 언어화하지 못한 무게들이 그를 덮고 짓누른다. 세 작가가 해낸 것은 바로 이 침묵의 묘지를 하나하나 발굴하여 언어로서 소생시키는 작업이다.
개인의 트라우마가 큰 사람살이의 유형에서 벗어나지 않기도 하지만, 집단적인 트라우마도 결국 개인적인 삶의 맥락 속에서만 경험된다. 같은 사건으로 촉발된 고통일지라도 각자가 짊어진 고통의 구체적인 모양과 깊이는 모두 다를 테다.
유가족 중에서도 슬픔의 농도가 달랐다. 바깥쪽에 있는 색이 잘 구별되지 않은 검은색 스펙트럼같이 말이다. 그것은 결국 냉정한 질문이 됐다. 파도가 물러갔을 때 당신에게는 얼마나 남았는가? 시토 사요미는 사랑하는 딸 지사토를 잃었다. 지사토의 언니와 오빠 두 명, 남편, 대가족, 그리고 그녀의 집은 하나도 피해를 입지 않고 그대로였다. 다른 사람들은 사요미의 상황과, 그리고 그것이 자신들과 다른 정도를 정확히 아주 잘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나오미는 세 명의 자녀 중 하나만 잃었고 그녀의 집, 남편, 나머지 가족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사요미는 지사토를 빨리 찾아서 묻을 수 있었던 반면, 나오미는 고하루의 유해를 찾아 오랜 고통을 겪었다. 게다가 훨씬 더 안 좋은 사람들, 그러니까 자녀 전부는 아니라 해도 여러 자녀와 집 전체를 잃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훨씬 더 가엾은 사람들은 집과 가족 전체를 잃었다 (215).
이런 처지의 차이 때문에 개인적인 경험과 진실의 편차도 당연히 생겨난다. 어느 사람이 이겨낸 것을 다른 누군가는 절대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집단적 트라우마와 관련해서도 주류 담론이 생겨나고, 아픔을 호소할 수 있는 사람들이 특정되기도 한다. 이에 맞서 작가들은 다양한 경험과 이해관계를 지닌 사람들의 발화를 제거하지 않고 함께 배치한다.
「구하라, 바다에 빠지지 말라」에서 패리의 중심적인 인터뷰이는 사요미와 나오미 가족이며, 이 외에도 미오의 이야기를 길게 소개한다. 쓰나미가 닥쳤을 때 선생님의 지도하에서 죽은 학생 대부분이 오카와 초등학교 소속이었기에, 사요미는 아이들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정부를 상대로 법정 공방을 주도한다. 한편 딸의 유해를 수습하지 못한 나오미는 트랙터 운전면허를 따서 시체를 발굴하는 작업에만 몰두한다. 트랙터를 포함하여 재난 수습 현장의 모든 도구를 정부에서 공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오미에게 사요미의 진실 공방은 이기적인 걸림돌로 느껴질 뿐이었다. 그러나 나오미 또한 고하루의 유해를 찾은 후엔 남은 자녀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현장을 떠나 일자리로 복귀한다. 부모님과 모든 자녀를 잃고 그들의 유해도 찾지 못한 미오는 계속 쓰나미 현장을 맴돌고, 트라우마로 인해 새 아이를 가지는 데에도 실패한다. 패리는 이들이 같은 ‘엄마’이고 같은 ‘쓰나미 피해자’일지언정 전혀 다른 경험을 하고,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살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갈등하는 사람들 간의 우선순위를 매기거나 편을 들지 않고, 상황의 차이로 이야기를 풀어내어 쓰나미 ‘생존자’의 전형을 다채롭게 한다.
알렉시예비치의 소설은 더욱더 많은 목소리를 담는다. 그의 소설은 명확한 내레이션이나 사건 없이 오로지 백 개가 넘는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독백은 내면의 생각을 비논리적으로, 말하고 싶은 만큼, 말하고 싶은 순서대로 쏟아낼 수 있는 글 형식이다. 어느 독백은 체르노빌의 상처를 “우리 부적, 집안의 유물... 고대의 파피루스같이 우리 삶에 대한 기록을 품은” (67) 파란 대문의 상실로 설명하며, 누군가는 새들이 피폭되어 죽는 바람에 새소리가 사라진 것을 애도한다. 이러한 독백들은 체르노빌 원전의 폭발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지만, 체르노빌을 둘러싼 여러 상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다. 한편, 차라리 전쟁은 이해할 수라도 있었지만, 방사능은 보이지 않으니 이해하지도 못하겠다는 사람, “이것을 전쟁과 비교하면 안 되고, 엄연히 전쟁과 다른 일” (184)이라고 설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체르노빌은 “진짜 전쟁이었다” (121)고 하는 사람들과,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전쟁보다는 방사능 속에서 사는 게 낫다는 이들도 있다. 알렉시예비치는 이와 같이 상충하는 진술들을 삭제하지 않는다. 그 진술들이 서로 다를지언정 발화자 각자의 경험과 각자가 이해한 트라우마의 모습과 얽혀있는 진실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 안에서 체르노빌의 트라우마는 사랑, 증오, 상실, 평화, 외로움, 자연과의 교감, 변명, 속죄의 이야기로 다양하게 변주된다.
이렇게 오로지 개인적인 기억과 진술을 출처이자 정보 전달의 매개로 삼음으로써, 알렉시예비치의 이야기 속에서는 이전에 상상되지 못한 존재들도 설 자리를 얻는다. 이를테면 체르노빌레츠 중에는 원자로가 폭발한 당시에 체르노빌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던 사람들이 있다. 이후 소련 말의 지난한 내전과 학살을 피해 여러 소수민족이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으로부터 버려진 땅인 체르노빌로 이주해 체르노빌레츠가 되었다. 그들은 체르노빌에서 살면서 “나는 아이들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살리고 있어요” (104)라고 말한다. 모두가 오염되고 저주받았다고 하는 곳에서 그들은 되려 평화와 안식을 찾았다. 그들이 가진 전쟁의 트라우마가 체르노빌의 트라우마와 다르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한편, 체르노빌 재난을 설명하기 위해 재난 이전 소련의 “중노동 때문에 자궁이 흘러내린 아주머니들” (57)부터 회고한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의 발화에서도 “우리 여자들은 다들 텅 비었어. 세 명 중 한 명꼴로 자궁을 들어내고 없어” (89)이라는 비슷한 회고가 등장한다. 붕괴하는 소련에서 발생한 전쟁과 난민, 방사능 오염의 비극과 생체로봇으로 파견된 소방관과 광부, 그곳에서 자궁이 떨어질 정도로 중노동을 해야 했던 여성들. 그 사이사이에 선을 그을 수 있는 걸까. 알렉시예비치의 소설은 다른 이름이 붙은 사건들을 기준으로 사람의 인생을 조각내지 않고, 사람들의 인생 속에 배치된 체르노빌만을 말한다.
트라우마가 이렇게 개인화되었을 때 생기는 또 다른 효과는 누구도 함부로 단죄할 수 없어지는 것이다. 사요미는 지사토를 잃은 고통을, 나오미는 고하루를 잃은 고통을 평생 오롯이 떠안을 것이며, 그 고유의 고통은 남의 더욱 큰 고통을 목격한다고 해서 줄어들지 않는다. 각자의 발화를 통해 그것이 전달되기 때문에 우리는 패리의 글을 읽으면서 어느 한 부모가 이기적이거나 고통이 상대적으로 작은 주제에 미련하다고 감히 단언할 수 없다. 한편, 체르노빌에서 피폭되어 임신 중절을 권유받았으나 아이를 낳기로 한 임산부들, 어린 자녀가 있음에도 피폭된 부모와 배우자를 돌본 사람들, 학살을 피해 체르노빌에서 새로 정착하기를 선택한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지만, 사정을 들은 우리는 그들을 함부로 질책할 수 없다. 책임은 나누지 못할 거면서, 남의 삶이라고 다들 얼마나 쉽게 말하는지. ‘이기적’이고 ‘무책임’하다는 말 때문에, 혹은 자신의 자격을 의심하느라 내밀한 고통을 한 번도 말하지 못한 이들이 많다. 저자들은 생존자들이 목에 걸린 말들을 마음껏 쏟아낼 수 있게 함으로써, 최악과 차악뿐인 상황에서는 조금이나마 사람다운 삶을 지키는 쪽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외부에서 쉽게 들이미는 ‘논리적이고 인도주의적인 해답’들이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0. 유령을 제자리로
눈에 보이는 사실이 어떤 사람의 경험적 진실은 전혀 담아내지 못할 수도 있다. 뚱딴지같은 기억이나 ‘불가능한’ 경험에 주목하는 것이 사실보다 깊은 진실을 규명할 수도 있다. 사실이 아닐지언정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기억이 있을 수도 있다.
이 소설들이 모두 유의미하게 소환하는 생존자들의 경험 중 하나는 유령을 보는 것이다. 「소년이 온다」의 ‘소년’은 5.18 때 군인들의 진압 과정에서 죽은 중학생 동호다. 그는 책의 초반부에서 죽지만 유령 화자가 되어 다시 등장하고, 생존자 은숙이 보는 환영 속에서도 등장한다. 체르노빌의 마리아는 피폭되어 죽은 가족들의 묘지에 갈 때면 남편 안드레이의 유령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는다. 그와 소식을 모두 나누고 나면 꾀꼬리, 뻐꾸기와 함께 날아온 딸의 목소리와 대화한다. 피폭으로 남편과 자녀를 잃은 류드밀라 또한 꿈속에서 남편과 딸을 자주 만난다. 지나이다는 “말은 산 사람과도, 죽은 사람과도 할 수 있어. 나는 차이를 몰라. 목소리가 들려” (64) 라며 그들과의 대화 내용을 말해준다. 이들의 경험은 그저 소설을 위한 장치, 혹은 비논리적인 착각일까.
패리의 르포르타주에 의하면 동일본 대지진 후에도 수많은 사람이 유령을 보기 시작했다. 한 남자는 “매일 나는 우리 아들과 딸이 울면서 ‘아빠, 도와줘요!’라고 외치는 걸 들어요. 그들은 내 꿈에서 울고 있어요. 그들은 내 꿈을 떠나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297). 많은 사람이 “유령 같은 낯선 사람과 친구, 이웃, 사랑했던 죽은 사람들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집에서, 일터에서, 사무실과 공공장소에서, 해안가에서, 그리고 폐허가 된 도시에서 출몰한 유령을 보고했다” (137). 나오미를 포함해 오카와의 많은 부모가 영매를 찾아가 죽은 자녀의 영혼과 대화하려 한다. 마치 유령이 있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다. 다양한 유령들을 소개한 후, 패리는 트라우마에 허덕이는 많은 피해자에게 위안이 된 가네타 스님에게 주목한다. 그의 발화가 작가들의 태도를 대변하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유령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귀신을 봤다고 한다면, 그걸로 좋습니다” (298).
당신의 장례를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99).
앞서 언급했듯 트라우마는 죽음과 삶의 경계, 시간의 경계를 뒤섞어놓는다. 충분히 애도 되지 못한 죽음들도, 충분히 위로받지 못한 생존자들도 유령이 되어 망각 속에 갇힌다. 체르노빌에서 방사능이 생명력을 얻으며 퍼지는 동안 인간들은 점점 축소되었듯, 트라우마에 압도된 인간은 삶의 주체성을 상실해간다. 트라우마를 해소하는 데에 있어 말하기가 중요한 이유는 고통이 내 삶을 지배하고 있을 때, 오로지 말하기를 통해서만 ‘나’를 주어로서 되살리고, 고통을 내 멋대로 대상화하고 다듬어서 뱉어낼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 저자는 재갈을 물고 침잠하던 개인들을 의미 있는 서사의 주체이자 출처로 소환함으로써, 그들의 인간성을 복원하려는 윤리적인 시도를 한다.
증언하고 싶다. 10년 전 일이지만 지금도 매일 일어나고 있다. 이제 영원히 나와 함께 할 것이다. 증언하고 싶다. 내 딸은 체르노빌 때문에 죽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침묵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나의 인생은 그렇게 길지 않다 (69).
낯선 사람 앞에서 이렇게 울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 속이 이렇게 엉망이고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다고 호소하고 싶었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동안 가족에게도, 어느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던,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358).
소설이라는 공간, 그리고 그것을 쓰고 읽는 시간이 대리적인 장례의 시공간이 되어 애도의 기회를 창조한다. 저자들은 생존자들이 영원히 잃어버린 과거와 변해버린 자신을 위해 충분히 울 수 있게끔 하고, 그들이 품고 사는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여,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각자의 유령 상태로부터 헤어 나올 수 있도록 보필한다. 또한, 저자 자신뿐 아니라 수많은 독자를 트라우마의 청자로서 생존자들에게 제공해주고, 이런 트라우마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타인을 위해서는 공식적 서사 밑에 묻힌 삶들을 이해 가능한 이야기로 통역해준다. 그래서 이 글들을 읽으며 우리는 있는지도 몰랐던 새에 잃은 것들을 애도할 수 있게 된다. 글의 현장이 사람들 간의 연결을 회복할 가능성을 지니는 것이다.
패리는 쓰나미와 관련된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생존자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거의 거들어주지 못하더라도, 인터뷰이들이 같은 말을 반복하고 또 되돌아가면서도 조금씩은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적는다. 많은 생존자에게 의존의 대상이 되었던 가네타 스님 또한 그저 피해자들을 찾아가고 그들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었다. 도호쿠 지방의 한 출판사는 피해자와 생존자들이 “초자연적인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겠다며 귀신 문학 대회를 주최하기 시작했는데, 패리는 그것이 실제로 생존자들의 회복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대회의 첫 수상자는 쓰나미 이후 계속해서 아버지의 유령을 보았지만, 남에게는 그 사실을 한 번도 언급한 적 없었다고 말하며 덧붙인다: “아버지에 관해 글을 쓰면서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다른 사람과 나눴습니다. 아마도 나는 어떤 면에서 아버지를 구했고, 아마도 저 자신을 구했습니다” (302).
용기 내어 응어리들을 뱉어냈다. 닮았지만 다른 이야기들, 그 두텁게 쌓인 목소리의 이불 속에서 처음으로 구원과 안정을 찾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고통을 여전히 기억하고, 영원히 느낄 것이라고 해도, 영혼을 담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면서 생존자들이 구렁텅이 속 작은 숨구멍을 얻고, 죽음뿐인 시간을 떠나 조금이라도 더 살만한 상태로 나아갔으리라 기대해본다.
0. 트라우마를 말하는 윤리
세 책은 끈질기게 인물들의 직접 발화를 통해 집단적 트라우마를 개인화한다. 한 사람의 숨결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누군가의 삶을 펜 끝에서 지우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모은 여러 목소리를 쌓아 조각난 한 세계를 고통스럽게 통역해낸다.
하지만 이 연결의 노력 속에서도 꾸준히 독자들을 책 속 생존자들로부터 분리한다. 위 글들은 모두 목소리와 기억, 영혼 등 손에 잡히지 않는 모호한 것들을 기반으로 하는데, 이는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붙잡을 수 없는 트라우마의 경험을 닮았다. 또한, 이 글들은 서사를 발전시키거나 완결하기는커녕 같은 구절을 반복해가며 끝까지 빙빙 돈다. 심지어 「체르노빌의 목소리」와 「소년이 온다」는 둘 다 새로운 화자의 상실을 소개하는 긴 독백으로 이야기를 활짝 열면서 글을 마친다. 앞서 말했듯 트라우마를 견디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서사화가 필요하지만, 소설 속 트라우마가 독자들에게 완벽하게 통역되고 해소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말이자 인물들의 혼란과 고독에 대한 기만일 것이다. 따라서 트라우마를 섬세하게 담아내는 글들은 필연적으로 깔끔한 서사화와 결론 맺기에 실패한다. 시간의 흐름과 인과에서 벗어난 트라우마의 성질을 형상화하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트라우마의 감각을 재현함으로써, 남의 아픔에 대해 말하는 최소한의 윤리를 지킨다. 한편, 이 불편한 장치에는 독자들에게 마지막까지 상기시키려는 의도도 어느 정도 담겨 있지 않을까: 세상에는 어찌할 수 없는 경험, 괜찮지 않은 삶, 그리고 당신이 온전히 입장할 수 없는 세계들이 있다고. 보이거나 들리지 않아도 우리가 밟고 선 땅 위에는 아직도 수많은 폭력과 유령, 들리지 않는 목소리들이 있음을 잊지 말라고.
사실 트라우마의 목소리뿐 아니라, 그 목소리들을 낳은 비극도 저마다 닮았다. 용산 참사를 보며 소설가 한강은 생각했다고 한다: “저건 광주잖아.” 국가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인해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들이 발생하는 사건이 여전히 반복된다. 한편, 체르노빌이 전무후무한 사건이라고들 생각한 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쓰나미로 인해 후쿠시마 원전이 터져 체르노빌보다도 높은 수준의 방사능 오염이 발생했다. 비극을 쉬쉬하고 인간의 나약함을 부정함으로써 사회는 개개인을 불행하게 만들 뿐 아니라, 또다시 새로운 비극이 생겨나는 것을 방치한다. 그렇게 탄생한 비극 또한 이름만 다르게 붙여져 새롭고, 흔치 않고, 불편한 것으로 만들어지고 고립되길 반복한다.
상실을 마주하는 것은 내가 알지도 못하고 영원히 만날 일도 없는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는 취약한 몸을 지니고선 완벽하지 못한 사회를 살고 있기에 언제나 예상 못 한 상실과 폭력을 맞닥뜨릴 위기에 놓인다. 나와 타인이 통제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을 수 있으며, 한두 명의 변덕으로 수백만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근원적인 두려움과 슬픔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아픔을 말하고 쓰고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간의 연결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생기는 죄와 아픔에 대해 털어놓고 서로를 용서하고 부둥켜안기 위함인 것이다. 자립의 신화로 포장되는 고립의 세계에 맞서,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들은 사람의 보편적 취약성을 일깨우는 것으로 시작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비논리적인 조각들과 작은 선택들, 그리고 상호 의존의 힘을 유독 간절하게 좇는다. 그 기록 속에는 현실의 지독한 아픔뿐 아니라 조금 더 연결되어 단단해진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깃들어있다.
글 편집위원 노랑 (raryoo613@gmail.com)
- Saidiya Hartman. Lose Your Mother. Farrar, Straus and Giroux. 2007. [본문으로]
- Toni Morrison. Beloved. Vintage Books. 1987, 2004. p. 324. [본문으로]
- 리처드 로이드 패리, 「구하라, 바다에 빠지지 말라: 쓰나미에 빼앗긴 아이들의 목소리」, 조영 옮김, 알마 출판사, 2017. p.43. [본문으로]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체르노빌의 목소리」, 김은혜 옮김, 새잎, 2011. p.11 [본문으로]
-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p. 12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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