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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소설 읽기

소설을 읽는다.

소설을 왜 읽나.

불안하고 답답하다. 그래서 소설을 읽나.

내 세계는 얼마나 좁나. 나는 얼마나 무지한가.

아무리 애를 써도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면, 절망하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소설을 읽는다.

 

 

동료와 함께 연어크림치즈 샌드위치와 감자튀김을 먹던 중이었다. 그는 며칠 전 다녀온 제주도 여행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제주도를 상상했다. 내가 상상한 제주도와 그가 다녀온 제주도는 같을 수 없고, 그의 여행에 대해 내가 알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어쩌면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애인과 다음 학기 수강 신청에 대해 얘기했다. 어떤 선생의 어느 수업을 들으면 좋을지 대화를 나눴다. 카페에 앉아 딸기 프라푸치노를 마시면서였다. 강의계획서를 들여다보고, 강의 평가를 살피며 의견을 내보아도 결국 그 수업을 듣는 건 내가 아니었다. 사실 내가 그가 들을 몇 달 후의 수업이 어떨지 알 방법은 없다. 생일을 맞은 친구의 집에 놀러 가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케이크를 조각냈다. 요거트 맛이 나는 케이크에 나는 사이다를, 그들은 막걸리를 곁들여 먹었다. 면접 때 만난 면접관이 얼마나 별로였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친구의 얼굴이 낯설었다. 그가 면접 때 느낀 압박과 부담이 얼마나 컸을지 나는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내가 먹은 샌드위치와 감자튀김, 마셨던 딸기 프라푸치노, 사이다와 함께 먹은 케이크의 맛을 당신은 모른다. 그 음식을 먹는 동안 떠오른 내 생각과 마음도 당신에게는 그저 낯선 것, 알 수 없는 것일 뿐이다. 집을 나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그날의 컨디션을 체크하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 내 앞에 앉은 이의 눈을 얼마나 편하게 볼 수 있는가. 눈을 바라보는 일이 조금 더 불편하면 그날의 컨디션은 하. 덜 불편하면 중, 안 불편하면 상이라는 식이랄까. 하지만 아무리 힘을 줘 건너편 자리에 앉은 이의 눈을 들여다봐도 점점 그를 모르게 된다. 그와 나누는 대화, 공유하는 기억의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틈이 계속해서 벌어진다. 함께하는 추억이 쌓이고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동시에 그 누군가를 알 수 없다는 감각도 커진다. 집으로 돌아와 혼자가 된 나는 깨닫는다. 타인을 이해하는 일이 이토록 어렵다는 걸.

 

직접 만날 수 있는 이들을 알고 이해하는 일도 그만큼 어렵다. 얼굴을 맞댄 채 이야기를 나누고, 목소리를 듣고, 존재감을 확인한 타인도 그렇게 멀리 있다면, 누군가에 의해 재현되는 타인을 이해하기란 또 얼마나 어려울까. 최근 우연히 지하철 파업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고작 12분 때문에 파업’, ‘승무 시간 12분 연장 놓고 노사 힘겨루기등의 제목을 단 기사였다. 기사를 본 나는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재난 영화 같은 도시를 떠올렸다. 그리고 문득 기자가 고작이라고, ‘힘겨루기라고 적을 수 있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자신의 생업을 걸고 싸우는 삶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이해하거나 공감하지도 못한다. 이해를 타인과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기사는 나와 지하철 노동자 사이의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그럴 때면 앞서 깨달았던 사실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실감한다. 타인을 이해하는 일이 이토록 어렵다는 걸.

 

그런 마음으로 소설을 읽었다. 최근 읽었던 소설 중 3편을 다시 펼쳤다. 소설가들은 나름의 답을 찾았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서. 김혜진은 딸에 대하여[각주:1]에서 엄마와 딸 사이의 갈등, 30대 여성과 60대 여성의 삶을 다룬다. 김애란은 입동[각주:2] 에서 사고로 아이를 잃은 엄마아빠의 세계를 그린다. 윤이형은 정원사들[각주:3]에서 비정상이라는 손가락질과 욕설, 배제와 혐오를 감내하는 이들을 등장시킨다. 소설가들에게도 철저히 타인이었을 소설 속 인물을 그들은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작품을 통해 소설가들이 도달한 이해는 무엇일지 알고 싶었다. 소설을 읽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타인을 만날, 타인 앞에서 나름의 곤욕을 겪을 당신과 함께 알고 싶었다. 타인과 이해, 소설이라는 단어를 꿰는 가느다란 새끼줄을 함께 붙들어보고 싶었다.


1. 이해와 공감을 벗어난 압도적 고통 앞에서

 

김애란이 쓴 입동속 화자인 나와 나의 배우자인 미진은 아들을 잃었다. 아들인 영우는 봄이랄까 여름이란 걸, 가을 또는 겨울이란 걸 다섯 번도 채 보지 못하고, 오십이 개월(입동, p.21)의 나이로 엄마와 아빠를 떠났다. 영우는 후진하던 유치원 차에 치여 사망했고, 영우의 엄마와 아빠인 미진과 나의 일상과 세계는 무너졌다. 영우의 가족으로서의 미진과 나는 다른 어떤 관계나 집단보다 그 죽음이 낳는 고통을 직접적으로 경험한다. 그 고통을 가장 정확하게 드러낸다. 영우의 엄마인 미진이 일을 그만두고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부엌 한쪽에서, 거실 구석에서, 베란다 창문에서, 인디언 천막 안에서(입동. pp.23-24) 흐느끼며, 영우를 생각하는 모습은 그 고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알 수 없다. 절대로. 미진과 나를 집어삼킨 그 고통의 무게와 질량이 얼마나 무겁고 거대한지 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김애란은 그 고통의 크기와 질감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거칠지 알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아내는 사람들이 자꾸 쳐다본다고, 아이 잃은 사람은 옷을 어떻게 입나, 자식 잃은 사람도 시식 코너에서 음식을 먹나, 무슨 반찬을 사고 어떤 흥정을 하나 훔쳐본다고 했다.” (입동, 23)

 

미진이 마트의 시식코너에서, 옷가게에서, 길거리에서, 아파트 현관에서 피부로 느낄 타인의 시선은 독자의 시선과 다르지 않다. 알 수 없는 이들, 가늠하거나 추측하지 못하는 이들의 불가피한 눈동자가 미진을 따라다닌다. 김애란은 철저하게 미진과 내가 아닌 타인의 위치에서 그들을 그린다. 읽는 이가 함께 슬퍼하고 괴로워하려 할 때마다 머뭇댈 수밖에 없는 장면을 김애란은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그 고통 앞에서 어쩔 줄 몰라 주변을 배회하게 되는 여러 순간이 소설가인 그가 포착해낸 타인과 이해라는 단어 사이의 틈이다.

 

영우가 다니던 유치원에서 보내온 명절 선물을 보며 미진은 토해내듯 내뱉는다. 어쩌면 이렇게 무감할 수 있느냐여기가 어디라고. 알고 보냈으면 나쁘고, 모르고 부쳤으면 더 나쁜 거 (입동, 25)라고. 미진의 말을 듣고 자연스레 미진의 편에 서서 유치원을 욕하려던 것도 잠시, 생각에 빠진다. 나는 그보다 얼마나 더 예민하고 어느 정도로 덜 무감할 수 있나. 얼마만큼 더 나쁘지 않을 수 있나. 답할 수 없다. 김애란은 답할 수 없다고 쓴다. 나와 당신들은 무감하거나 나쁠 수밖에 없다고. 알았든, 몰랐든 간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 꽃이 마치 아내 머리 위에 함부로 던져진 조화처럼 보였다. 누군가 살아있는 사람에게 악의로 던져 놓은 국화 같았다. (중략) 처음에는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한 이웃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기 시작했는지, 그들은 마치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 듯 우리를 피하고 수군거렸다.” (입동, 36)

 

수군대지 않는다고 그들의 불행을 알게 되지 않는다. 분명 탄식안타까움은 누군가의 고통과 불행 앞에서 타인이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대처다. 하지만 동시에 최대한의 대처다. 김애란이 자신의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각주:4]에서 산 자들이 느끼는 그 비루한 것들의 목록 안에서조차 그들이 누릴 몫은 하나도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271) 라고 말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영우의 죽음이 어떤 것인지, 심지어 미진과 나조차 알지 못한다. 죽음이라는 상태, 혹은 상황 앞에서는 엄마와 아빠라는 존재조차 철저하게 남이 된다. 죽음이 얼마나 아픈지, 슬픈지 알 수 있는 이는 없다. 살아남은 이들의 그 비루한고통조차 가질 수 없는 이들을 통해 김애란은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 (입동, 37) 라고.

 

김애란은 입동을 통해 좁은 갈림길에 도달한다. 갈림길 가운데 세워진 표지판에는 무감하지 않거나, ‘수군대지말아야 한다는 경고문구가 쓰여 있지 않다. 안내 문구가 서 있다. 그 무감함과 수군댐에 앞서 타인의 고통은 그토록 별개의 것이라는 안내가 갈림길에 선 이들을 맞이한다. 고통을 통과해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이해는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268)이라는 문구의 표지판이 홀연히 세워져 있다. 그 갈림길에서 김애란은 계속해 무지차이를 인정하며, 성급하게 내가 아닌 누군가의 고통과 삶을 지나치지 않는 느린 길을 선택한다. 그래야 한다고 다짐한다.

 

2. 엄마는 얼마나 멀리에

 

엄마라는 단어는 아련하다. 엄마를 주제로 한 영화,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엄마에 대한 노래 가사, 엄마가 등장하는 소설은 감동적이다. 구태여 엄마라는 말을 듣자마자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고백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엄마는 기쁨과 슬픔, 감사와 미안, 애증이라는 감정을 모두 소환하는 특별한 존재다. 나를 세상에 낳은 존재인 엄마는 나와 가깝거나 연결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때론 미워하고 싸우지만, 임신과 출산 등을 거쳐 형성된 그 거리는 가깝다고 상상된다. 하지만 엄마는 언제나 그런 존재인가. 엄마는 타인이라는 단어에서 얼마나 멀리 있나.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에 화자인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무려 자신의 딸에게.

 

요리도 잘하고 청소도 잘하는 그 애는 왜 결혼을 하지 않는 걸까.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엄마가 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일. 그런 의미 있고 대견한 일을 할 생각을 하지 않고 무의미하게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걸까." (딸에 대하여, p.61)

 

남편이고 아내이고 자식이라니. 너희들이 뭘 할 수 있니? 결혼을 할 수 있니? 새끼를 낳을 수 있니? 너희가 하는 건 그냥 소꿉장난 같은 거야. 서른이 넘어서까지 소꿉장난을 하는 사람들은 없다.”(같은 글, p.106)

 

동성 연인과 함께 집에 세 들어 살기 시작한 당신이 집주인에게 이 같은 말을 들었다고 상상해보라. 길 가는 행인, 또는 직장 상사, 친구가 위와 같이 이야기했다고 가정해보자. 그처럼 말한 이는 아마 최소 꼰대, 높은 가능성으로 나쁜(혹은 낡은, 아니면 빻은’)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이들에게 앞선 문장은 ‘2020년에 그런 이야기를 대놓고 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라는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위의 말을 엄마가 딸에게 했다, 그랬다면 얘기는 달라지나. 아마 달라지지 않을까. 달라진다면 왜, 그리고 어떻게 달라지나.

 

요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60대 여성인 화자에게는 대학의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는 딸이 하나 있다. 경제적 어려움을 토로하다 딸은 결국 화자의 집에 세 들어 살 게 된다. 혼자가 아니라, 연인이 된 지 7년이 넘은 동성 연인과 함께. 식당에서 일한다는 마음에 들지 않는아이를 화자는 엄마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딸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심지어 딸을 고치거나 바꾸어 제대로살게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딸은 30대의 나이의 대학 강사다.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학교에서 해고된 동료 강사들의 복직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남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신념에 맞춰 살아간다. 엄마인 화자와 딸은 다르다. 화자가 그런 귀중한 걸 누군가에게 줘야 한다면, 줄 수 있다면, 가족이 유일하다. 숨과 체온, 피와 살을 나눠 준 내 자식 하나뿐이다. (딸에 대하여, p.74)”라며 되뇌는 장면은 그들이 얼마나 다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앞서 언급했듯 엄마라는 존재, 나아가 엄마와 딸은 가장 가깝고 특별한 존재로 상상된다. 김혜진은 딸과 엄마를 등장 시켜,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한다. 화자가 딸이 집에 데려온 동료들이 시끄럽게 굴어 누가 보거나, 자신의 귀에 안 좋은 말이 들릴까걱정하는 장면이나 가족과 자식을 강조하며 자식을 가질 수 없는딸을 비난하는 장면 등이 그렇다. 그 같은 화자의 모습은 두 인물 사이의 차이를 부각하고, 그걸 넘어 답답함과 분노의 감정을 야기한다. 화자가 저렇게까지 냉정하게, 또는 낡은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되묻게 만든다.

 

남편이 죽고 화자에게 남은 거라곤 군데군데 부서져 물이 새고 외풍이 드는 낡은 건물 하나가 전부인 삶, 그 집에서 나오는 월세로는 생활이 어려워 요양원의 간병인 일까지 해야 하는 혼자남은 생활이 결코 녹록지 않은 화자의 현실이다. 화자의 그런 현실, 나아가 딸이 살아가는 삶은 화자가 간병하는 이라는 노년 여성의 삶과도 중첩된다. 평생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세상일에 시간과 열정과 돈(딸에 대하여, p.134)을 써버리고 치매에 걸려 혼자 남은, 가족도 없고, 자식도 없어 혼자 죽어가는 의 삶이 두 인물의 삶과 계속해서 겹치기 때문이다. 젠의 삶을 통해 화자는 위태로운 시간을 거치며 딸에게 다른 방식의 삶을 바라고 요구하는 자신,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간섭하며살아가는 딸을 반복해서 떠올린다.

김혜진은 촘촘하고 구체적인 묘사를 통해 한 인물이 자신이 걸어온 삶의 궤적 위에서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를 설득한다. 그렇게 살아왔다면 그가 생각하는 방식과 말하는 모양이 그럴만하다고 납득하게 만든다. 하지만 소설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화자는 타인을 위해 헌신해온 젠이라는 노인, 딸과 함께 학교와 싸우다 사고로 다친 동료 강사, 딸을 그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곁에 머무르는 딸의 연인을 통과한다. 그리고 조금씩 변화한다.

 

내 피와 살 속에서 생겨나고 자라난 저 애는 어쩌면 나로부터 가장 먼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로선 결코 알 수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로선 결코 알 수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딸에 대하여, p.155)

 

그는 자신이 딸을 모른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다. 딸은 자신에게서 가장멀리 있어 결코 알 수 없는존재임을 알게 된다. 아직은 딸이 정말 그런 것을 원하는지의심하지만, 그렇더라도 화자의 이런 깨달음은 그를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 그가 몰랐던, 앞으로도 모를 타인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 것이다. 딸의 일이 세상일이 아닌 나의 일(딸에 대하여, p.131)이라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말하며 피해자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바로 그 문턱을 지나서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가 지니고 있던 세계와 딸에 대한 감각이 변화한 것이다. 계속해서 감지되는 화자의 변화는 자신이 딸에 대해 묻고 또 묻고 지칠 때까지 물을(딸에 대하여, p.156) 것이라는 다짐, “그런 식으로 회피하고 머뭇거리면서 딸을 잃고 싶지 않다”(위와 같은 페이지)는 각오로 이어진다.

 

김혜진은 소설의 끝에 남긴 작가의 말에 이 소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다른 누군가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지 않는 어떤 마음(딸에 대하여, p.199)이라고 쓴다. 포기하지 않고 지칠 때까지 질문하겠다는 마음가짐’, 그것이 노력하는 순간에만 겨우 가능해질지도 모르는[각주:5] 이해일지도 모른다. 결코 도달할 수 없지만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 약속은, 안개 속으로 이어진 새끼줄을 힘껏 쥐고 중간중간 묶어두는 매듭처럼 그의 소설 위에 걸려있다. 목표를 달성하거나 종착지에 다다를 수 없음에도 멈추지 않는 천천한 발걸음이 사뭇 고마워진다. 김혜진은 그런 마음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닿기 위해 소설을 쓴다. 끈질기게 지속되는 그런 수많은 노력(딸에 대하여, p.199)으로.

 

3. 내가 그래도 될까요? 나도 이해받아도 되나요?


타인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보다 큰 건 오히려 자기 자신을 이해받고 싶어 하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윤이형은 타인에 대한 이해라는 주제를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이해받길 원하는 인물들을 통해 풀어낸다. 정원사들의 레이와 효주가 그렇다. ‘퀴어퍼레이드에 방문한 레이는 우연히 회사 동료인 효주를 만난다. 헤어진 애인의 흔적을 더듬으며 퀴어퍼레이드가 열리는 광장을 배회하던 효주는 옆 부서의 디자인 팀장인 레이와 마주친다. 그곳에서 만나리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던, 낯설고 어색한 레이와의 만남에 효주는 놀란다. 더군다나 맥주라도 한잔 하러 가자며 자신을 끌고 간 레이가 늘어놓은 말은 놀라움을 넘어 충격이다.

 

그건 너그러움도 아니었고-팀장님이 말을 꺼낸 순간부터 나는 그분의 얼굴에 담긴 죄책감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팀장님이 생각하는 진짜 퀴어들에 대한 죄책감. 하지만 그분이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어떤 죄책감을 갖든, 나는 그분을 포용하거나 반대로 비판하거나 할 위치는 아니었다.” (정원사들, p.92)

 

효주는 자신이 팀장이라 부르는 레이의 입에서 퀴어라는 단어를 듣게 될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무실에 앉아 딸과 통화를 하는 기혼 여성인 레이와 퀴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왔기 때문일까. 다른 부서의 팀장인 레이를 효주는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예상하고, 짐작하고, 추측해왔을 뿐이다. 윤이형이 그린 둘의 만남은 그 짐작과 추측이 깨어지는 순간이다. 타인을 알지 못하면서 가늠하는 일은 많은 이들에게 익숙하다. 그러니 독자들은 효주가 레이를 만난 우연한 시간을 통해 떠올리게 된다. 잘 알지 못하는 상대를 가늠하던 수많은 순간들을.

레이는 퀴어이지만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안전하게 지내온 스스로를 퀴어라고 부르지 못한다. 레이는 죄책감과 미안함 그 사이 어딘가에 갇혀있다.

 

죄송한데 레이님, 결혼하셨잖아요. 제도 안에 있으시잖아요. 차별받는 것도 없고, 누릴 것 다 누리면서 왜 소수자 정체성까지 뺏어 걸치려 하세요, 힙해 보여서인가요? 퀴어 놀이가 재밌어요? ...... 그런 말들을 수없이 상상했어요. 실제로 들으면 정신이 차려질 것 같았어요. 너무 어지러운 상태여서 판단의 대상이 되고 싶기도 했어요. 그냥 감각의 혼란이고 착각이라면 차라리 얼른 찬물을 얻어맞고 싶었거든요.” (정원사들, p.93)

 

레이의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감각들과 폐를 끼치고 있다는 감정들은 모두 자신을 이해받고 싶은 욕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욕망은 타인과의 차이가 커질수록 더욱 격하게 추동된다. ‘진짜 퀴어들의 삶을 알 수 없다는 전제가 굳어질수록, 레이는 스스로를 이해받을만하지 않은 존재로 여긴다. ‘찬물을 얻어맞는 판단의 대상이 되면 이해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기대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레이의 모습을 통해 윤이형은 말한다. 타인과 나 사이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감각이 이다지도 또렷하고 강력한 것이라고. 자기 자신을 인정해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조차 거부하게 만들 정도의 명징함과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레이는 어느 날 우연히 집 뒤쪽에도 정원이 하나 더 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됐다고, 피어 있는 꽃들의 종류도 다르고, 날아다니는 새들도, 햇빛의 결도, 그걸 받은 식물들의 그림자가 만드는 형태도 조금은 다르게 보이는 정원. 조금 더 활기차고, 들어가 숨을 들이마시면 다른 종류의 향기가 날 것 같은, 그런 정원 (정원사들, pp.97-98)을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레이가 새롭게 발견한 정원, 다른 말로는 섹슈얼리티, 성적 지향, 정체성 등으로 바꾸어 쓸 수 있을 그 정원을 들은 효주는 생각한다.

 

나는 그 통유리의 감각을 알고 있었다. 팀장님의 정원에 있는 것과 정확히 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니다. 다르다. 다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원사들, p.99)

 

에이븐 삼각형을 가방에 달고 다니던 효주는 정원과 레이 사이에 놓인 통유리의 감각을 안다. 그 삼각형은 레즈비언친구들도 쉽사리 알지 못하는 비밀스럽지만 공개적인 표식이다. 무성애라는 딱지를 단 효주가 타인들로부터 자신의 사랑을 이해받지 못해 괴로웠던 시간과 레이가 정원을 발견해온 시간은 같지 않다. 하지만 효주는 레이의 통유리와 자신의 것이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 통유리의 감각을 안다고 생각한다. 통유리는 레이가 자기 자신 속에 자리한 기존의 섹슈얼리티, 스스로에 대한 이해에서 벗어난 새로운 정원을 발견했지만, 죄책감으로 다가갈 수 없었던 그 거리를 함축한다. 그리고 동시에 효주가 이제껏 남들과 다른 자신 때문에 갈등하던 순간들을 비유하기도 한다. 통유리 너머에 존재하는 것은 다르더라도, 통유리의 모양과 색이 다르더라도 통유리를 안다는 사실을 통해 레이와 효주는 연결된다. 윤이형은 통유리를 통해 말하고 있다. 다름과 앎은 공존할 수 있다고.

 

정원사들의 인물들이 상처를 입으면서도 자신을 말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정원사들, p.100) 모습은 또 다른 가능성을 들춰낸다. 타인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당위 때문이 아닌, 내가 이해받고 싶기 때문이다. 효주가 레이의 정원과 통유리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레이나 올바름의 가치 때문이 아닌, 효주 자신의 정원과 통유리를 이해받고 싶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올바른 일이라서 아니라, 그것이 내게 필요하기에 한 개인은 타인을 이해하는 작업을 놓지 않아야 한다. 타인과 나 사이에는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눈여겨 딛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을 만큼 흐릿할지라도, 거기에는 분명 다리가 존재한다.

 

이해하고 싶지만 사실 다는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나는 이성애 결혼이라는 것을 모르고, 이혼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나보다 앞서 살아간 사람들의 삶의 조건들에 대해서도 모르니까 뭐라고 할 수 없다고. 그렇지만 내 안에도 내가 이성애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나는 하고 싶더라도 할 수 없는데 그들은 할 수 있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생긴 박탈감은 당연히 있다고.” (정원사들, p.103)

 

효주가 레이에게 말한다. 결혼과 이성애라는 단어를 가로지르며 생겨나는 수많은 감정과 감각을 그대로 둔 채로. 자신이 잘못된 존재라는 생각은 우리를 어디로도 데려가 주지 않고 단지 병들게만 할 뿐(정원사들, p.103)이라고. 효주가 레이를 용서했다고 말할 수 없다. 누군가가 얻지 못한 것을 또 다른 누군가가 가졌다고 해서 그 둘이 대립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또한 틀렸다. 레이와 효주의 대화를 통해 윤이형은 용서나 화해, 해결이라는 단어를 미룬 채 말하지 않는 시간을 제안한다. 타인과 이해라는 단어 사이에서 생겨난 타인을 이해하지 못함이라는 문장이 역설적으로 세계를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는 한 북토크 자리에서 섣불리 희망을 말하지 않고 다름을 그것 그대로 두자고 말한 적 있다. 그의 문학의 효과와 목표를 섣불리 묻고 정답 내리지말자는 또 다른 말은 잠시 숨을 고르자는 제안이다.[각주:6] 멈춰 서서 숨을 고르더라도, 아니 숨을 골라야지만 병들지 않을 수 있다.’

 

정원사들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과거 소방서에서 군 복무를 하던 시절 함께 구급차에 탔던 부장님을 떠올렸다. ‘딸이 있고 푸짐한 몸집의 안경 낀중년 여성이라는 레이와 그가 닮았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가끔 내게 심호흡에 대해 알려줬다. 과호흡 환자나 임신 환자를 이송한 후엔 특히 더 그랬다. 짧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쉬고, 짧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쉬고.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히 남은 그 호흡이 윤이형의 소설에서도 내쉬어 지고 있다. 앞선 북 토크 자리에서 그는 문학이 너는 뭐가 그렇게 특별해서 그렇게 많은 위로를 받으려 하느냐는 말을 밀어내기를, 일단은 같이 옆에서 아파할 수 있기를바란다고 했다. 그 말에서 문장과 어휘를 경유해 타인의 삶을 길게 내쉬는 그의 소설을 연상하는 건 과한 걸까. 일단은 짧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쉬자. 다시 한번 짧게 들이쉬고, 길게 길게.

 

4. 다시 소설 읽기


언젠가부터 소설을 읽고서 재밌다는 평을 쓰지 않는다. 아니 사실은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 게 좀 더 정확하겠다. 단순히 내가 읽은 소설들이 재미없는 작품들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설은 타인의 이야기다. 때로는 즐겁고 행복한, 또 때로는 슬프고 괴롭기도 한 이야기로 가득 찬 그 세계는 어쩔 수 없이 내가 아닌 남에 대한 것이다. 소설 속의 인물이 겪는 세계는 결코 완전한 허구일 수 없고, 그렇기에 소설을 통해 들춰지는 감정과 감각, 생각들을 그저 유희 거리로 삼을 수 없다. 그래서일까. 재밌다고 말하면 괜히 무례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낀 건.

 

나는 지금 좋다정도의 단어를 사용한다. 재밌다와 좋다라는 단어는 어떻게 다를까. 소설이 재밌다는 표현은 정말 타인의 삶에 대한 무례하고 몰상식한 접근인가. 잘 모르겠다. 당위적인 방식으로 소설을 신격화하거나 귀중품 취급할 생각은 없다. 문학과 독자는 떼려야 뗄 수 없고, 그러니 독자의 평가 또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3편의 소설을 다시 읽으며 나는 어떤 표현과 평가들은 유보되거나 경계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닿았다. 타인의 무엇을 성급하게 평가하고 판단하기 전에, 최소한 그것을 잘 모른다는 인정과 수용이 선행되어야 한다. 물론 나는 그 이후에 어디로 나아갈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다만 갈림길에 세워진 안내 문구를 겨우 발견하게 되었을 뿐이다.

 

물론 이 글에서 다룬 3편의 소설을 타인과 이해하는 단어로 모두 눙쳐버릴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여성, 퀴어, 세대, 노인, 주거, 재난 등 이 작품들을 횡단하는 단어는 무수히 많다. 그 단어들을 통과한 읽기 또한 꼭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 글은 그 단어들을 잠시 제쳐두고 소설가들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삶을 재현할 때 마주하게 되는 이해의 어려움, 타인과의 거리에 집중했다. 글을 시작하며 앞서 늘어놓은 제주도, 딸기 프라푸치노, 막걸리와 사이다, 면접 등의 단어를 다시 한번 떠올려보자. 그 단어들은 이 글을 쓴 나와 당신 사이에 분명한 거리와 어려움을 만들어냈다. 그 단어들을 아무리 듣고, 읽는다고 해도 당신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 단어들이 놓인 여러 갈래의 길을 열심히, 그리고 빨리 달리더라도 당신은 나와 그다지 가까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소설은 천천히 간다. 소설가는 에둘러 말한다.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세요!” 라거나 여기 딸과 엄마라는 가장 가까워 보이는 이들끼리 이해하지 못해 갈등하다 변화해가는 인물들이 있어요! 이들로부터 교훈을 얻으시죠!” 라거나 남에게 이해받기를 원하는 자신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의 괴로움을 느끼세요!” 라고 소리 높이지 않는다. 소설이 그렇게 걷고 말하는 이유는 타인의 삶을 표현하고, 말하고, 쓰는 작업이 아무리 다시 말하거나 다르게 쓰여 에둘러 가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갈림길을 지나 끈질지게 지속되는 숨 고르기라는 이 글의 제목은 세 편의 소설을 읽고 맺으며 수집한 비유나 다시 떠올린 기억에서 따와 보았다. 비유는 소설가가, 나아가 소설이 하는 작업을 설명하는 유효한 단어 중 하나다. 비유는 본질을 말하거나 주장을 펼치지 않는다. 그저 다르게 말한다. 그러면서 그 다른 말이 타인을 이해하는 일에 조금 더 가까이 가는 발버둥이 되기를 믿을 뿐이다. 사실 소설의 내용은 금방 휘발되고, 남는 건 그리 분명치 않은 흐릿한 기억 몇 조각이다. 하지만 어떤 기억은 이유 모르게 오래도록 남는다. 소방서 부장님의 호흡법에 관한 기억이 그러하듯. 기억은 철저히 개인적이다. 내 안으로 들어와 켜켜이 쌓여 천천히 퇴색되는 그 기억은 아무도 모르는 나의 것이지만, 동시에 내 밖의 일에 대한 것들이다. 기억이라는 작업은 나라는 단어를 지나 타인에게 맞닿는다.

 

결국 도착하지 못할, 멀고 요원한 목적지를 향해 있는 갈림길이라 할지라도 함께 가면 쓰러져 멈추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읽는 것만으로, 쓰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음을 뼈저리게 체감하는 날들이 반복되지만, 당신도 일단은 읽었으면 좋겠다.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갈림길에 섰으면 좋겠다. 갈림길에 섰다면 잠시 멈춰 다시 한번 숨을 고르자. 짧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뱉자.

 

 

소설을 읽는다.

소설을 왜 읽나.

불안하고 답답하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다.

괜찮다고 이야기해도 괜찮다. 그 정도로도 괜찮다는 말은 타인을 향한 무례나 공격이 아니다.

내 세계는 얼마나 좁나. 나는 얼마나 무지한가.

아무리 애써도 타인을 이해할 수 없지만, 절망하고 포기하지 말자는 다짐이 소설 속에 있다.

소설을 읽는다. 함께 읽으면 좋겠다.


글 편집위원 재찬 (paperlifer@naver.com)



  1. 김혜진, 『딸에 대하여』, 2017, 민음사 (이후 본문에서의 인용은 제목과 페이지만 표기) [본문으로]
  2. 김애란, 「입동」, 『바깥은 여름』, 2017, 문학동네 (위와 같음) [본문으로]
  3. 윤이형, 「정원사들」, 『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 2019, 큐큐(QQ) (위와 같음) [본문으로]
  4.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2019, 열림원 (이후 인용은 본문 속 해당 글의 소제목과 페이지만 표기) [본문으로]
  5. <김혜진 “엄마와 딸은 이해하고 싶지만, 이해할 수 없는 관계”>, 채널 예스 7문7답, http://me2.do/xLqMQ03X (검색일자 : 2020년 1월 26일) [본문으로]
  6. 연세대학교 공강혁신 <작은 마음들의 시간>, 윤이형 작가와의 만남 中, 2019년 12월 2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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