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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마주침, 맞울림] 두 나무

연희관공일오비 2020. 5. 3. 16:05

:: 2019 홈리스추모제에서 ::

 

1.

무대 뒤로 커다란 플랑이 서 있었다. 플랑은 가림막이자 동시에 울타리였다. 플랑 상단에 적힌 동료를 위한 동료의 추모라는 문구가 또렷했다. 넓게 걸린 플랑을 가득 채운 건, 다름 아닌 영정이었다. 어두운 바탕의 플랑 위로 하얀 배경의 영정들이 빼곡했다. 몇몇 영정에는 주인의 사진이 자리했지만, 대부분의 영정은 비어있었다. 출생연 도와 사망이유 등에 대한 글귀가 영정 아래 자그마하게 쓰여 있었다. ‘19XX년도 출생. 사망 원인 : 000.’ 손을 들어 영정의 수를 하나하나 세어본다. 가로 26, 세로 6, 160여 개의 영정이 겨울바람에 펄럭인다. 160여 개의 글, 160여 개의 삶이 차가운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고 광장에 뿌리내리고 있다. 마치 하얀 이파리를 매단 짙은 색의 겨울나무처럼 플랑은 영정을 향한 마음들을 한가득 품는다. 오늘 하루만은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않기를, 이곳에 함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불어오는 바람과 부딪치며 소리를 낸다. 천막 오른편으로 분향과 헌화를 위한 작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천막을 마주한 계단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기다린다. 홈리스 추모제를.



영정은 201812월부터 201912월까지 약 1년간 사망한 홈리스들의 것이라고 했다. 10년도 아니고, 5년도 아닌 1. 결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추모제를 준비한 이들이 파악한 이들만 160여 명. 20191222일 일요일 서울역 광장 한 켠에 세워진 플랑에는 그렇게 많은 영정들이 자리했다. 그 영정의 주인들도 이곳에 함께 했을까. 영정 군데군데 서 유난히 불거진 미상이라는 단어가 플랑 앞을 지나던 나를 붙잡았다. 사망 당시 혼자였던 이들, 그래서 죽음의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었던 이들에게 붙여진 단어. 미상. 까슬거리는 그 단어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출생연도 87년생.’ 어떤 영정 아래 쓰인 숫자였다. 87년생. 숫자를 발견하자마자 나는 나도 모르게 젊다.”라고 중얼거렸다. 그 숫자 옆으로 일반적으로 여성에게 붙여지는 이름이 나란히 적혀있었다. 그 숫자와 이름이 홈리스는 나이가 많고 남성일 것이라는 내 편견에 금을 냈다. 그 숫자와 이름을 읽고 영정의 주인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나보다 고작 몇 살 더 먹은 그는 왜, 어디서, 어떻게 죽었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빈 영정에는 또렷한 얼굴과 입이 그려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영정은 플랑을 마주한 이들에게 분명한 어조로 단호히 물었다. ‘당신은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2.

알록달록한 배경의 판넬이 이젤 위에 올려져 있었다. 2019년 한 해 중요하게 다뤄진 홈리스 이슈를 담은 소식지 판넬이었다. 판넬을 읽기 위해 걸음을 늦추자 근처에 서 있었던 스탭 분이 신문을 나눠 주었다. 하늘색 배경의 신문 상단에는 홈리스 뉴스 - 홈리스 추모제 특별판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고, 추모제를 맞아 작성된 기사들이 빼곡했다. 판넬이 올려진 이젤, 신문을 나눠주던 이들과 사람 냄새가 나는 부산스러움이 광장에 도착한 나를 맞이했다. 광장 한쪽에서는 커다란 윷을 던지고 윷말을 옮기며 웃음을 터트리는 이들의 요란한 소리가 웅웅댔다. 한 동의 노란 천막에는 법률상담 부스라는 간판이 달려 있었고, 천막 주변에 옹기종기 자리 잡은 이들이 대화를 나누거나 따뜻한 차를 마셨다. 그들 옆으로 딱 예상만큼 아담한 노란 천막 몇 동이 그들을 지키듯 서 있었다. 이제 막 켜진 주황색 가로등 불빛 아래로 말갛게 존재감을 드러낸 채로, 노란 옷을 입은 아이들처럼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서.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역 광장에 도착하는 데는 이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서울역을 1년에도 몇 번씩 다녔지만, 오늘의 서울역은 유난히 서먹하고 낯설었다. 타지에서 상경해 기차를 타고 오르내린 지 8년 차인 내게도 서울역 광장은 생경했고, 동시에 그만큼 생생했다. 그리 특별하지 않은 낡은 노란 천막 몇 동과 이젤 몇 개, 서울역을 마주 보게 세워진 추모제 플랑, 그리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서울역을 그전과 다른 공간으로 만들었다. 물론 서울역 특유의 부산하고 냉담한 분위기는 오늘도 여전했다. 하지만 분명 20191222일의 서울역은 홈리스 추모제를 위한 공간이었다. 오늘 서울역을 통과한 이들이 홈리스를 떠올리지 않는 일이 가능할까. 정도와 수준의 차이는 있더라도, 오늘의 서울역을 거쳐 가는 이들은 홈리스를 떠올리고 상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행인들이 홈리스라는 단어에 더 가까워질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서울역에는 분명한 온기와 힘이 채워져 있었다.



행사 중간에 도착한 데다, 아는 얼굴도 몇 없던 나는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하고 천막 주변을 서성였다. 그것도 잠시 추모제에 함께 방문하기로 한 아정이 녹색 상의를 입고 빨간 목도리를 두른 채 반갑게 걸어왔다. 윷놀이와 법률상담을 위한 부스가 마무리될 즈음이었다. 앞선 순서들을 정리하는 대로 팥죽을 나눠 먹는다고 했다. 오늘은 동지, 24절기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이었다. 동지를 맞아 팥죽을 먹으려는 이들이 노란 천막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난 동지에 팥죽을 먹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하려 애쓰며 천막 주변을 엉거주춤 쭈뼛댔다. 팥죽을 먹으려는 이들은 그런 나를 무심히 지나쳤다. 노란 천막 앞으로 줄이 늘어섰고 천막 내부는 팥죽 그릇을 하나씩 든 이들로 금방 채워졌다.


수많은 이들의 동지가 천막 앞과 안에 모여 있었다. 동지라는 단어가 괜스레 특별하게 느껴졌다면 너무 감상적이거나 억지일까. 나에게는 동지(冬至)와 동지(同志)를 함께 떠올릴만한 요만큼의 권리나 자격도 없다. 하지만 팥죽을 그릇에 담아 나르는 저들과 천막 속 난로 근처에서 팥죽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저들은 그 두 단어를 함께 상상해도 괜찮지 않을까. 저들이 오늘 서울역 광장의 노란 천막을 방문한 까닭이 단순히 팥죽을 먹기 위해서만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새 스쳐 갔다. 천막 속이 따뜻했던 이유는 단지 난로를 켜두었기 때문일까. 옆자리에 앉은 이에게 별것 아닌 질문을 던지고, 금방 잊어버릴지 모를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그 시간이 어떤 온기를 만들어냈던 건 아닐까. 천막 속의 수더분한 관심과 꾸준한 수고들이 이 팥죽과 저 팥죽 그릇에 담겨, 함께한다는 감각을 옮기고 있었다. 천막 앞에 늘어선 줄은 길었고 모여든 사람들은 쉬이 줄어들지 않을 모양새였다. 줄을 선다는 행위가 그들을 상처 입히지 않기를 바라는 팥죽을 나눠주는 이들의 마음도 함께 커져갔다. 그렇게 2019년의 동지는 깊어갔고, 동시에 길어지고 늘어났다.

 

줄이 길었던 터라 거의 마지막 순서가 되어서야 팥죽을 먹을 수 있었다. 팥죽 그릇을 비운 후 플랑 앞쪽 계단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팥죽을 나눠 먹고 난 뒤 진행될 문화제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플랑 옆으로 문화제를 위한 음향 장비와 조명이 놓여 있었다. 계단 앞에는 문화제 내용을 속기하기 위한 스크린을 설치하는 이들과 문화제 때 부를 노래를 연습하는 이들로 부산했다. 어색하게 서 있는 것이 불편했던 나와 아정은 광장 바닥에 붙어있던 형형색색의 스티커를 떼는 일, 전날 비가 내려 축축한 계단 바닥에 깔개를 까는 일을 도왔다.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할 테지만 그냥 앉아있기보다는 작은 일이라도 함께하고 싶었다. 돌아와 다시 앉은 계단에서는 모여 앉은 이들이 함께 초를 나눠 가지는 중이었다. 문화제를 진행하는 동안 추모의 의미를 담아 켜둘 초였다. 촛불이 이리저리 옮겨붙으며 계단을 불빛으로 채웠다. 얼마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문화제를 시작한다는 사회자의 인사말이 그 불빛 속으로 날아들었다.


문화제의 순서가 하나하나 진행될수록 저녁도 함께 깊어갔다. 공기는 차가워졌고 발과 손은 얼어붙었다. 초를 쥔 손이 뻣뻣해져 초를 놓치거나 촛불을 감싼 종이컵에 불이 붙을까 나도 모르게 신경이 곤두섰다. 새삼스레 서울역이 얼마나 추운 공간인지 느껴졌다. 최근 며칠 평소보다 따뜻해진 날씨가 이 정도라면, 앞으로 더욱 깊어질 한겨울의 서울역은 훨씬 추울 터였다. 이곳을 살아갈 이들에게는 하루도 녹록지 않을 만큼의 추위. 누군가의 생활에 깊고 당연하게 새겨져 있을 추위라는 두 글자가 촛불 위로 떠 올랐다.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을 서울역에서의 짧은 시간이 그려낸 글자였다. 나는 서울역을 살아가는 이들의 추위를 알 수 있을까. 추위라는 단어 옆으로 내가 더 적어야 하는 단어와 질문은 무엇일까. 어려운 질문이었지만, 오늘 서울역에 오지 않았다면 떠올리지 않을 물음이었다.


문화제 사회자와 그 앞에서 언 손을 부단히 녹이며 문화제 내용을 스크린에 속기하고 있는 스탭 뒤로 번쩍이는 건물이 보였다. 우중충한 밤하늘 아래 비에 젖어 을씨년스러운 건물이 동시에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려한 색으로 치장한 채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물에 젖은 로봇 같았다. 높고 거대한 건물 전면에 홀로그램 조명이 요란스럽게 번쩍댔고,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부자연스러울 만큼 새하얗게 선명했다. 저걸 하룻밤 트는데 얼마 정도의 돈이 필요할까. 내 짧은 셈으로는 가늠도 되지 않을 만큼 비싼 조명들이 빠르게 모양을 바꿨다. 사람 모양의 조명은 의자가 되었다가, 책상이 되었고, 다시 사람으로 돌아왔다.


문득 건물을 오르내리며 화려하게 탈바꿈하는 저 조명과 서울역 광장 계단에 앉은 이들이 쥐고 있는 작은 촛불이 겹쳐 보였다. 촛불은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꺼지지 않았다. 조용히 하지만 확실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각기 다른 빛이 서로를 마주한 서울역의 계단 주변이 조금 추워졌다 따뜻해지기를 반복했다. 빛의 강도나 비용으로 따진다면 저 건물들의 조명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작은 촛불들이 이곳을 조금 덜 춥게, 조금 더 따스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건 초를 쥔 이들이 마주 보고 앉은 플랑 속 영정을 향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영정을 마주한 이들의 슬픔과 미안함, 부끄러움이 계단을 달궜기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달궈진 온기가 어쩌면 계단 앞에 드리운 한 그루 나무에 핀 하얀 이파리를 위한 양분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무에서 떨어질 꽃잎이 조금 덜 슬프기를, 앞으로의 나무에는 조금 더 적은 꽃이 피기를 바라는 양분이.


Ⓒ2019홈리스추모제기획단


여러 순서를 지나 홈리스 당사자가 직접 자신의 동료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서가 됐다. 누군가는 담담히, 누군가는 울음을 참으며 동료에 대해 증언했다. 자신만의 속도와 깊이로 꾹꾹 눌러 담은 그 말에는 힘이 있었다.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동료의 죽음에 대해 증언하는 이들을 보며 내가 떠올린 생각은 실로 부끄러운 것이었다. ‘그들이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물대며 내 속을 채웠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더욱 부끄러워지는 생각이었다. 내 앞의 그 장면들이 소설의 한 대목이나 극 중의 독백 한 토막이기를 기대했다. 소설이나 연극도 그처럼 명백하게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 같았다.


형님은 첫 공공근로를 나갔다가 돌아오던 중 3층 방으로 가던 계단에 넘어졌고’, 그런 형님을 받아주는 곳이 없어 ‘6개나 되는 병원을 옮겨 다녔다고 했다. 필요 없다는 형님을 설득해 적금을 들도록 우겼다, 그런 형님의 유골을 직접 모셨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용산 스크린 경마장을 함께 갔던 언니, ‘소사역에서 토스트를 사줬던 언니, “전기장판 그거 얼마나 한다고 깔고 자라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차가운 쪽방에서 혼자 죽은언니에 대한 추모가 뒤를 이었다. 언니가 사줬던 컵라면, , 음료수, 담배를 다시 떠올리는 순간이 또박또박한 그의 말과 함께 느리게 흘렀다. 누군가는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동료와 함께 다녔던 도배 학원’, ‘야학에서 함께 배웠던 컴퓨터’, 같이 다니자고 했던 조리사 학원과 동료가 시골에서 하겠다던 버섯재배를 말하며 울먹였다. 그는 누구에게 하는지 알 수 없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눈물을 훔쳤다. 함께 마셨던 맥주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그의 농담이 얼마나 웃겼는지, 그의 죽음이 얼마나 부당한지, 그를 향한 죄책감과 미안함, 그리움이 얼마나 큰지에 대한 증언이 계단 앞, 플랑 아래 흘러들어 고였다.[각주:1]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떠올린 앞선 생각은 고인을, 그리고 동료를 추모하는 이들을 모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리고 이 문장을 쓰는 순간까지도 나는 그들이 연기를 하는 것이기를 바랐고,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 바람과 기대가 생생한 만큼, 그들의 삶이 현실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말과, 그들의 기억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다. 그 기억이 조금 불분명하거나 훼손되었을 수도, 지명이나 이름을 헷갈리거나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현실을 증언했다. 오류나 헷갈림도 그 증언 자체를 훼손하지 못한다. 그들은 고인이 된 동료들을 기억하고 마음에 품었다.’ 그들을 위해 소주 한 병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그 사실을 외면하려던 부끄러운 생각을 통과하고 나서야,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그 증언들이 얼마나 아픈 현실임을 알 수 있었다. 무엇을 떠올리고, 어떤 걸 알아야 할지, 누구의 이야기를 더 들어야 할지 겨우 가늠할 수 있었다. 그들의 증언이 수많은 고민들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가까스로 깨달았다.


동료에 대한 증언을 마친 3명의 발언자는 각기 다른 속도와 음량으로 ‘2019 홈리스 추모제 권리선언을 낭독했다. 사회를 맡았던 친구에게 부탁해 선언문 파일을 전달받지 않았더라면 기억 너머로 사라졌을 그 목소리를 다시 떠올려본다. 세 목소리가 조금씩 느려졌다 빨라질수록, 옆 사람의 목소리에 맞추기 위해 멈췄다 다시 이어질수록 그들이 보장하라고 요구했던 집다운 집”, “적절한 치료”, “안전에 대한 울림도 함께 커졌다. 오늘의 추모가 멈출 수 있는 죽음을 멈추게 하지 않는 세상에 반대하고,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겠다는 다짐[각주:2]이라던 그들의 문장을 되뇌어본다. 당연하게도 선언문을 썼을 이들의 마음, 문화제를 준비한 이들의 노력, 추모제를 진행한 이들의 생각을 이 한 문장에 다 담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이들이 딱 한 대목만을 기억한다면, 어딘가 적어둘 문구 한 줄이 필요하다면 이 문장이길 바란다. 그 문장을 읽으며 자신이 홈리스의 삶을 얼마나 모르는지 반추하기를, 그래서 2020년의 홈리스추모제에 가보겠다고 마음먹기를, 추모제가 더 이상 없어도 될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하기를 바란다.

 

3.

흠칫. 옷장을 열어 옷을 꺼내던 손이 나도 모르게 멈췄다. 쥐고 있는 녹색 상의가 어색했다. 며칠 전부터 추모제에 함께 가기로 한 아정과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빨강-녹색 조합의 옷을 맞춰 입자고 정해두었지만, 쉬이 옷을 꺼내 입지 못하고 주저 댔다. 옷을 고르는 시간이 자꾸만 길어졌다. 추모제. 주저하는 마음 사이에는 그 단어가 있었다. ‘추모라는 단어와 뒤이어 따라오는 죽음과 슬픔이라는 단어가 모래처럼 까슬거리며 마음 사이로 스며들었다. 기름을 치지 않은 뻑뻑한 모터가 된 것만 같았다. 추모제에 크리스마스를 연상시키는 색의 옷을 입고 가는 게 괜찮을까. 그들을 추모하는 자리에는 어떤 색의 옷이 적절하거나 필요할까. 알 수 없었다. 추모제를 기획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거나, 단체 채팅방에 의견을 구하는 건 너무 우습지 않나. 결국 불편한 마음과 해소되지 않은 질문을 주머니에 욱여넣은 채 서울역으로 향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연상시키는 빨간 셔츠와 녹색의 상의를 껴입고.

 

추모제를 위한 공간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여러 색의 스티커가 눈에 띄었다. 바닥에 띄엄띄엄 붙은 스티커들은 추모제로 나 있는 구불대는 길 같았다. 그 사이로 야구 베이스를 연상시키는 집 모양 스티커가 일정한 간격으로 붙어있었다. 집 모양 스티커 위로 YS 등의 이니셜을 가진 이들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하나의 색깔마다, 하나의 이니셜, 한 명의 삶이 짧게 기록되어 각각의 발판을 천천히 따라가면 그들의 삶을 좇을 수 있게, 그리고 자연스레 추모제에 도착하게끔 만들어진 길이었다. YS는 열심히 살았다. 열심히 살았지만, 집 밖으로 밀려났다. 때로는 불행해서, 때로는 실수로. 열심히 살았지만, 그들은 홈리스가 되었다. 교회에 나가 피아노를 치고 동료들과 장기를 두었던 그들의 일상이 스티커 위로 담담하게 자리했다.


 

집 모양 스티커는 그들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통로였다. 서로를 가로지르는 여러 색의 스티커 사이로 초록색과 붉은색의 길이 천천히 떠올랐다. 입고 있던 빨간 셔츠와 녹색 상의, 그리고 여러 명이 밟아 때가 탄 빨간색과 녹색의 두 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앞으로 내가 살아가며 마주칠 크리스마스트리는 서울역을 떠올리게 만들 터였다. 서울역 광장에 누워있던 붉은 가지와 녹색의 나무 기둥이 겹쳐 보여 홈리스 추모제를 생각하게 될 터였다. 추모제에 오기 전 고민했던 옷들이 조금은 부끄럽고, 또 조금은 다행스러웠다. 사건이라면 사건일, 별일 아니라면 정말 별일 아닌 자그마한 우연이 그 같은 부끄러움과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동시에 답을 찾지는 못하더라도 일단은 나무 한 그루를 세워두자는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었다.


추모제에 오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무언가를 서울역 건너편 건물의 조명과 촛불에서, 동지와 동지라는 단어에서 느꼈다면 너무 건방질까. 크리스마스 색의 옷과 길을 통과해 자라난 나무와 흰 이파리를 단 어두운 색의 플랑 나무가 앞으로도 기억에 남을 질문이 되었다면 과하게 감상적일까. 오늘 느낀 그 무언가가 앞으로 내가 살아가며 떠올릴 홈리스 추모제, 관계하게 될 홈리스와 어떻게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홈리스 추모제에는 두 나무가 서 있었다. 서울역 광장 바닥과 내 몸에 세워진 크리스마스 색의 나무, 촛불이 알알이 새겨진 계단을 마주하고서 이지러지듯 흔들리던 흰색 이파리를 품은 남색 나무가 함께. 플랑에 담긴 흰 영정들이 물었던 질문을 다시 한번 꾹꾹 내리누르며 무겁게, 무겁게. ‘당신은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글 편집위원 재찬 (paperlifer@naver.com)

 

  1. 이 문단은 2019년 홈리스 추모제 중 있었던 발언을 빌려와 작성했다.. [본문으로]
  2. 2019 홈리스추모제 권리선언 中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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