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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석춘의 도전: 2010년대 '위안부' 담론의 지형을 갈무리하며

 



 2019919,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류석춘 교수는 그의 <발전사회학> 강의 시간에 위안부는 매춘의 일종이다’, ‘궁금하면 (학생이) 한번 해볼래요?’라고 발언하였다. 수강생들이 해당 발언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학내외로 그의 문제적 발언이 공론화되었다. 사건 직후인 922, 연세대학교 제16대 사회학과 학생회 <프로미스>는 류석춘 교수를 강력히 규탄하는 입장문을 냈다. 924일에는 제54대 총학생회 <Flow>에서도 입장문을 내고 류석춘 교수를 비판했으며, 연세대학교 동문으로 이루어진 <연세민주동문회>에서도 류석춘을 규탄하는 입장을 이어서 냈다. 2019926,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운영위원회를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류석춘 교수 사건 학생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가 구성되어 류석춘 교수에게는 사과할 것을, 학교 당국에는 류석춘 교수를 파면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류석춘 교수는 이어지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학에서 학문의 자유가 침해받고 있다고 강변하며, 자신은 잘못한 바가 없고 사과할 일도 없다고 밝혔다. 20201월 현재, 대책위는 류석춘 교수의 강의가 2020-1학기 수강 편람에 게재된 것을 발견, 류석춘 교수와 학내 교수진, 그리고 학교 당국의 태도를 미온적이고 무책임하다고 주장하며 대책위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를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임하거나 파면되거나, 혹은 6개월 남은 정년을 무사히 마친 뒤에는 류석춘의 흔적도 많이 지워지겠지만, 글을 남긴다면 연희관에 있을 누군가가 다시금 이 사태를 읽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랬을 때 이 상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단순히 오점이나 불명예로 그를 보내기엔 이 사안은 뭔가 위화감이 든다. 특히 그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온 몇몇 입장문을 보고 있으면 그 위화감이 더해진다. 이는 류석춘의 발언, 그리고 이를 논박하는 것이 이전까지의 위안부를 둘러싼 담론의 자장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 위에서 류석춘을 기록하는 것이 이 위화감을 조금은 물리치고, 이 사태를 더 잘 이해할 바탕이 되기를 바란다.

 

위안부를 둘러싼 담론의 역사는 길다. 한국에서는 1991위안부피해자 김학순의 증언 이후 사회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이는 이전에 그 사실이 없었다거나 논의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1971조선인 위안부피해자로서는 최초의 증언이라고 할 수 있는 배봉기의 증언이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에는 한국사회의 가부장제적인 시선도 있겠지만, 배봉기를 지원한 것이 조총련계였다는 점, 그리고 당대 한국이 발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권위주의 발전국가였다는 점이 함께 작동했다. 그러나 어쨌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약칭 정대협)을 비롯해 이 문제에 주목한 학계 및 시민사회의 움직임 속에서 1991년 김학순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는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위안소를 설치 및 운영했다는 일본 언론의 보도 및 일본 학계의 연구와 더불어 1990년대의 몇 차례 담화로 이어졌다. 그 후로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 및 국가배상을 요구하는 위안부 피해자 및 관련 단체의 요구는 수요집회를 비롯한 활동으로 계속되어왔지만 위안부담론이 본격적인 도전에 직면한 것은 수요집회가 1,000회차를 맞은 2011년 이후, 2010년대였다.

 

담론의 구도에서도 알 수 있듯, ‘위안부는 젠더, 피해와 가해, 국가와 민족, 경제 발전, 국제정치 등이 결합된 복잡한 문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위안부담론은 여러 방식의 도전에 직면해왔고, 류석춘의 발언은 2010년대의 도전에 끝자락에 있다. 물론, 이번 류석춘의 발언은 이런 도전이라고 부르기도 빈약한 수준의 것이지만, 요전의 도전을 이해하는 것은 류석춘을 둘러싼 맥락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그의 언어와 맥락, 그리고 그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과 상황들이 있다. 이 자장들을 뜯어봄으로써 2010년대의 지난했던 위안부에 대한 담론의 지형을 갈무리하는 작업을 해보고자 한다.

 


 

도전: ‘거짓

류석춘의 발언이 나온 것은 그의 수업 <발전사회학>3주차 강의. 한 학기의 본격적인 강의를 시작하는 그 수업에서 그는 전 서울대 교수 이영훈의 반일종족주의(2019, 미래사)를 텍스트로 삼아 위안부에 관한 말을 꺼냈다. 그는 반일종족주의에서 다루는 식민지근대화론의 연장과 변형 위에서 위안부를 논했다. 따라서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일종족주의, 그리고 류석춘 이전에 위안부를 두고 일어난 몇 가지 담론들에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질문은 류석춘이 왜 그 현장에서 그런 발언을 했는가를 추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 그는 도대체 무슨 의도로 그런 발언을 했고, 어떻게 생각하기에 그런 발언을 할 수 있었던 걸까. 그리고 여기서 2010년대 말 위안부담론을 관통하는 도전이 결부된다. 그리고 이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류석춘의 뒤에 있는 두 텍스트,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2013, 뿌리와 이파리), 이영훈의 반일종족주의에 접근해야 한다.

 

위안부문제가 사회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한 이후, “그것은 거짓이다!”라는 도전은 항상 따라붙었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그것이 증언되지 못하는 침묵을 강제하였다는 점에서 그 이전부터 함께했다. 그러나 수많은 치욕과 공포를 무릅쓰고 용기 내어 발화된 증언의 힘은 강력했고, 피해당사자를 지원한 여러 시민운동가와 학계, 시민들의 노력은 그것은 거짓이다!”라는 도전을 물리쳤다. 1991년의 증언과 그를 전후로 한 학계와 시민사회의 노력, 그리고 그 이후에 있었던 나눔의 집을 중심으로 한 증언자들의 모임과 지지자들의 노력이 1993년 고노 담화로 이어졌다. 1993년 당시 일본의 내각관방장관(한국의 국무총리급) 고노 요헤이의 이름으로 발표된 고노 담화’, 정식 명칭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慰安婦関係調査結果発表する河野内閣官房長官談話)>에서는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고,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이송에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음을 인정했으며, 이것이 일으킨 일련의 피해에 대해 사과하고 반성함을 밝혔다. 물론 이 고노 담화 역시 아베 등 자민당 내 정치인들이나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약칭 새역모) 등 일본 내 역사수정주의자에 의해 부정되려 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일본 정부가 이러한 담화를 발표했다는 것은 이제 그것은 거짓이다!”라는 한 도전을 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거짓의 도전'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제 이전과 달리 교묘하게, “위안부는 (전부) 거짓이다!”라는 말에서 위안부는 (일부) 거짓이다!”로 바뀐 문법으로 이루어진다. 이제 그들은 위안부는 없다!”가 아니라, “위안부는 있다! 하지만 의 논법을 사용한다. 이는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1) ‘위안부는 일본군이 만들기 이전에도 있었고이후에도 있다그러므로 그것은 거짓이다.

2) '위안부'는 그다지 폭력에 노출되지 않았고, 자유로웠기 때문에 성노예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거짓'이다.

3) '위안부'는 자발적이었으며 강제동원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거짓'이다.



류석춘으로 돌아오자
. 그는 일본군 위안부를 통해 현대의 매춘 여성이 겪고 있는 폭력이나 피해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매춘 여성이 겪고 있는 폭력이나 피해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를 정당화하고 있다. 그의 말은 방향이 거꾸로 되어있는데, 그는 마치 그 둘을 병치함으로써 일본군 위안부를 있을 만한 것혹은 괜찮은 것으로 만든다.첫 번째 논법은 이번 류석춘의 매춘발언과 밀접하다. ‘일본군 위안부는 있었지만, 그것은 그 이전의 것과 그 이후의 것과 연결되어 존재하는 매우 보편적인 현상일 뿐이기에 위안부라는 것을 일본 제국이 만들어낸 특수한 제도로 이해하는 것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 이전의 것에는 몇 가지가 동원되는데, 조선 시대에 존재한 기생과 관비, 공창, 그리고 일본의 가라유키상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기생, 관비, 공창은 이영훈이 반일종족주의에서 우리 안의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묶어 설명한 것이었고, ‘가라유키상은 박유하가 제국의 위안부에서 주목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영훈이 묶어낸 우리 안의 위안부챕터에는 그 이후의 것도 등장하는데, 2차대전 종전 이후에 지속한 한국군 위안부와 민간 위안부, 그리고 미군 위안부다.

 

이영훈의 주장은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의 식민지배 이전부터 조선 사회에 존재했던 가부장제적 여성 착취구조인 기생, 관비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배 이후 변용되어 형성된 공창의 연장일 뿐이기에 그것이 거짓이며, 일본 국가에 특수한 책임을 묻는 것은 그릇되었다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절과 절 사이에 무언가 엄청난 비약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일본군 위안부가 일본의 식민지배 이전의 여성 착취구조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과 그것이 거짓이라는 지적 사이에는 너무 먼 갭이 있다. 사실 위의 지적, 특히 조선 사회의 강한 여성 착취구조에 대한 지적은 여성학 연구자들을 통해서 축적되어 왔다[각주:1]. 그러니 조선 사회의 가부장적 질서나 여성 착취구조가 위안부의 동원을 용이하게 했다는 지적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위안부는 거짓이라거나 일본은 책임이 없다라는 논의와는 연결될 수 없다. 결국 그런 성 착취적 토양에 전쟁 수행을 결부시켜 여성의 몸을 극단적으로 도구화한 것은 바로 일본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시 조선 사회의 여러 남성 가장들이 손쉽게 을 팔아넘길 만한 사람들이었다고 할지라도, 이들을 데려다가 전쟁터 남성들의 성노예로 삼은 일본의 책임은 결코 희석되지 않는다.


혹은 박유하의 지적을 보자. 박유하 역시 조선 시대의 가부장제를 지적하고, ‘위안부의 전신으로서 가라유키상을 지적한다. 가라유키상은 19세기 말 일본이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중국 및 대륙의 일본인 거류지로 이주한 어떠한 여성들을 가리킨다. 가라유키(唐行)라는 말은 일본어로 중국(혹은 외국)으로 가다라는 뜻이다. 그들은 대개 규슈 지역 중심의 가난한 여성들이었는데 이들 중에는 그곳에서 성매매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이 성매매로 벌어들인 소득 중 일부는 해당 성매매 업소의 관리자들을 경유해 일본 제국의 자본으로 활용되었으며, 동시에 이들의 거주지 자체가 일종의 대륙 진출의 발판 역할을 했다. 박유하는 일본군 위안부가라유키 상의 후예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말한다. 가라유키상과 일본군 위안부가 일본의 제국주의 수행을 위해 국경을 뛰어넘어 비참한 삶에 노출되어야 했던 여성들이라는 공통점을 제시하고 싶은 것이라면 이 지적은 분명 유의미하다. 그러나 이들을 동류라거나, 본질이 같다고 보는 시선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나아가 이것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제국의 책임을 없애주는 것이라는 것에는 더더욱 동의하기 어렵다(, 박유하는 일본의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영훈과 같지 않다. 그는 위안부의 피해를 인정하며, 일본이 도의적 책임을 넘어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에 동감한다). 오히려 박유하가 사용하는 구조적인 강제성(이는 뒤에서 후술한다)’이라는 개념을 적용한다면, 오히려 일본의 가라유키상이라는 제도를 일본이 직/간접적으로 활용한 것에 스스로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에 가깝다. ‘일본군 위안부의 본질은 당시의 전쟁과 제국의 침략 과정에서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 대만인,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거주하던 아시아인과 일부 유럽인까지 동원하여 여성을 남성의 성노예로 활용한 전쟁범죄다.

 

류석춘과 이영훈은 왜 우리 안의 위안부에 주목하는가? 이영훈이 우리 안의 위안부에서 함께 묶고 있는 그 이후의 것들을 살펴보면 그 이유가 보인다. 2차대전 종전 이후 한국 사회 내 한국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 ‘민간 위안부의 존재는 분명 한국 사회의 강한 성 착취구조와 그를 묵인한 국가권력을 드러내는 것임이 틀림없으며[각주:2], 이에 대한 문제 제기와 공동체적 성찰 역시 불가결하다. 그러나, 이영훈의 텍스트와 류석춘의 발언에서 그것들이 배치되는 맥락을 살펴보면 그 의도에서부터 거짓에 대한 입장이 담겨 있다. 이영훈은 한국군 위안부에 관한 한국군 장성의 회고를 들며 이 모든 것을 그저 슬픈 역사의 비극 정도로 환원한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조선인 남성도, 조선인 여성도, 일본인 남성도, 일본인 여성도 그저 비극의 역사 속에 놓인 피해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르다. 분명히 비극적인 전쟁의 역사 속에서도 어떤 성폭력, 성착취가 발생했고 그것은 지워지지 않는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이 너무나 압도적이라서 이 모든 것을 그저 '비극적'이라는 추상적인 언어로 묶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류석춘은 강의 중에 위안부시스템의 국가 범죄성에 대한 질문에 일본이 아닌 전 세계 국가의 성매매를, 그리고 이를 방치하는 한국 정부를 지적한다. ‘위안부 문제에서 시공간을 넘나드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함께 이해하는 것이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은 아니며, 오히려 권장해야 마땅하다. 문제는 가장 근원적인 부분에 있다. ‘위안부 문제의 실재를 인정하고, 그리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진실하게 듣는 것이다. ‘위안부가 거짓이 아니며, 그들의 피해를 인정하고 그들에 대한 일본 제국의 가해를 인정함으로써 역사 속 여성에 대한 폭력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옳다. 이들은 그저 인정하기 싫을 뿐이다. 이영훈과 류석춘이 비판하고 싶은 것은 그들이 좌파라고 부르는 어떠한 집단이며, 그들은 역사 속에서 복잡하게 존재했고 존재하는 여성의 성 착취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들은 위안부 = 거짓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지금의 지위를 획득한 위안부 담론의 지위를 끌어내리고, 이것과 결부된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지위를 함께 끌어내리고 싶을 따름이다.

 

어떠한 폭력, 혹은 착취가 다른 역사적 시간에 존재하였다는 것이 특정 시점에 존재하는 폭력과 착취를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이건 인간사에서 아주 기초적이다. 성폭력, 노동착취, 권위주의 독재 등 제시할 수 있는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어떤 폭력이 존재했다고 한다면 그들의 존재를 관통하는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제시해야 하며(여기서는 '가부장제', 혹은 일본군에서 한국군의 군사적 연결 같은 것들), 바로 그 시점을 특정짓는 것은 무엇인지 규명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잘못된 것이 있었다.

 

 


폭력과 구속

두 번째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었다라는 논법도 비슷하다. 이영훈은 위안부가 과연 성노예였던가라고 되물으며 그들에게 약간의 이동의 자유가 있었고, ‘우리 안의 위안부로 지칭한 미군/한국군 위안부와 비교해 일본군 위안부가 특별히 더 폭력적이지 않았음을 주장한다. 그는 여기서 무려 미군/한국군 위안부가 하루에 평균 몇 명의 남성을 상대했어야 했는지까지 수치로 제시하고, 전쟁이 끝나기 이전에 귀향했다는 것을 사례로 들며 일본군 위안부에게 어떠한 자유가 있었던 것으로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위안부는 성노예였다라는 주장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 전개의 경악스러움은 잠시 제쳐두고... 다른 무엇보다 이영훈의 거짓에 대한 논변에서 가장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은 그가 무엇을 거짓 증언으로, 무엇을 진실된 증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다. 1991년 김학순이 증언한 이후, 한국에서는 100명 이상의 피해자들이 부끄러움을 딛고 증언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종전 전후로 위안소를 탈출해 중국을 돌고 돌아 한반도로 돌아온 사람들이 많다[각주:3]. 그리고 이들 중에는 차마 적기 힘든 폭력피해를 증언한 피해자들도 많다. 이영훈은 이들이 겪은 폭력에 대한 증언은 거짓이라고 부인한다. 그는 저서에 미군/한국군 위안부가 하루 평균 몇 명의 남성을 상대했는지를 수치로 제시하지만, ‘일본군 위안부가 몇 명을 상대했는지는 적고 있지 않다. 자료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미군/한국군 위안부의 조사 자료 자체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자료이지만, 훨씬 더 넓은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일본군 위안부의 해당 통계를 작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들을 차치하더라도 그것이 폭력이 아니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운 좋게빠져나온 여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구조가 폭력과 강제, 구금으로 점철된 것이었다는 것도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상당한 신뢰성을 지닌 자료 중 하나인 남서태평양지역 총사령부 연합군번역통역부(ATIS) 문서 중 194511월 미군이 작성한 조사보고서 제120[각주:4]에는 당시 일본군에 의해 운영되던 마닐라의 위안소의 규정에 관한 자료가 있다. 해당 문서는 위안소 업무에 관한 몇 가지 규정들이 기재하고 있는데, 그중에는 성교 때는 콘돔이나 여타 예방기구를 사용해야 한다”, “행실이 나쁜 난봉꾼의 성명 및 소속 부대명은 병참담당관이 보고한다”, “여급에게는 입맞춤을 하지 않는다”, “위안소 업주는 성병예방기구를 준비하여 여급에게 사용하게 한다등과 같은 내용이 존재한다. 애초에 위와 같은 규정들이 얼마만큼 지켜질 수 있으며, 지켜지는 것이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영훈이라면 이 규정을 근거로 위안부는 폭력적이지 않았다라고 주장할 것이다. 해당 문서에는 위안소의 요금에 관한 내용도 존재한다. “일본인/조선인은 1시간에 3, 중국인은 1시간에 250”, “여급 수입의 반은 업주에게 배분된다”, “여급의 저금을 장려한다와 같은 식이다. 마찬가지로 이것들이 지켜질 수 있는 것인지, 지켜지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 싶지만, 이영훈은 이를 통해 위안부는 돈을 번 매춘부들이다라고 주장할 것이다. 류석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위 문서들은 위안소가 끔찍한 야만의 산물이면서도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관료제에 기반해 수행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다.

 

위 논법의 흔적으로는 삭제당한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의 저술, “(위안부는) 군인들을 정신적신체적으로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역할”,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 관계였다는 저술의 형태로도 나타난다[각주:5]. 이영훈 역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선에서 병사와 위안부는 어느 의미에선 한 덩어리의 운명공동체”, “거칫게 짓눌러지기도 했지만, 남녀가 살을 섞는 관계이기도라는 식으로 서술한다. 박유하와 이영훈/류석춘의 접근법과 의도는 동일하지 않지만 유사한 지점이 있다. 그것은 2010년대를 중심으로 나타난 위안부의 재현 방식과 그에 대한 문제 제기 과정과 연관되어 있다.


재현의 문제: 할머니와 소녀, 끌려가는 여성

위안부를 어떻게 재현되어 왔고, 또 어떻게 재현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논의가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여성학계에서도 지적하는 중요한 논점으로 소녀와 할머니의 재현 방식의 곤경이 있다[각주:6]. 2000년대 이전의 대중 서사물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재현하는 것은 성인 여성의 성애화된 신체화 결부된 것이 많았고 이는 대개 문제적이었다. 그러나 2015년 이후 큰 반향을 일으킨 평화의 소녀상세우기 운동, 그리고 <귀향>(2016)<눈길>(2017), <아이캔스피크>(2017)와 같은 몇 편의 흥행한 영화들을 거치며 소녀와 할머니의 단절된 재현 방식은 상당히 강한 힘을 갖게 됐다. 대중매체와 현실 사이에서, ‘위안부의 표상은 소녀에게 가해진 폭력과 현재 운동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으로 강조되었다. 동시에 위안부 = 끌려가는 소녀에 대한 대중적인 이미지가 정착되었다. 박유하, 이영훈, 류석춘은 모두 이러한 이미지에 문제를 제기하려 한다. 위안부는 그렇게 탈성애화, 탈자본화된 여성들이 아니었다는 식의 논지를 펴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문제 제기, 혹은 우려는 실제로 여성학계에서도 다루어진다[각주:7].


박유하, 최소한 이영훈과 류석춘은 순결한 소녀가 끌려가는 방식'그것은 거짓이다!”라고 외치고 싶어 한다. 우선 말해두겠지만, 그것은 거짓이 아니다. 물론 밧줄에 끌려간 어리고 순진한 여성의 이미지로 위안부전체의 이미지가 가두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박유하가 지적한 대로 어떤 위안부에 대한 배제를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끌려간 여성들이 증언과 삶이 거짓이며 그에 대해 폭력이 아니었다”, “노예가 아니었다라는 식의 서술은 그르다. 자신의 의사에 반해 그곳으로 이동했고, 거기서 돌아올 수 없었으며, 그곳에서 성/폭력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여기서 그들이 숨통을 갖기 위해 가해자들과 어느 정도의 정서적 교류를 했다거나, 어느 정도의 돈을 벌었다거나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이것을 마치 연애 서사나 애국-동지 서사, 자본주의적 계약관계, 심지어는 자아실현의 서사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폭력이 아니었다라고 말하는 이영훈과 류석춘의 태도는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중적 서사가 거짓이다!”라고 자극적으로 지적함으로써 자신의 명성이나 권위를 확보하려는 것과 함께, 그 권위에 흠집을 낼 것으로 생각되는 그리고 아마도 바꿀 수 없을 그들의 여성, 피해자에 대한 인식을 고수하려는 의도에서 비롯한다. 그들에게 돈을 받은 여성혹은 언제나 목숨을 걸고 저항하거나 탈출하지 않은 여성은 피해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폭력은 단일하지 않다. 지향해야 할 것은 진정한 피해자를 골라내려는 자세가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 다양한 폭력의 실재와 피해 사실에 귀 기울이는 것과 함께 청자가 그들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함으로 인해 다른 피해를 불러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돌아보는 자세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순결함을 부정하는 자들과, '순결함'을 무기로 쓰는 운동 진영 모두 이 점에서 폭력성을 공유하고 있다. 대립하는 두 세계 사이에서 소녀가 아니었던 모든 당사자는 영원히 무시되어, 가해자와 가해 행위에 가담했던 존재들의 책임으로 잡혀야 할 초점의 칼날은 무뎌져 왔다.

 


 

자발적이라는 것에 대하여

세 번째, “위안부는 자발적이었다라는 논법은 위에서 지적한 거짓의 도전들, “폭력적이지 않았다”, “약간의 자율성이 부여되었다등과 결부된 방식으로 진행된다. “너는 덜 맞았으니까, 돌아다닐 수 있었으니까 자발적이었어!”라는 식이다. 류석춘의 위안부는 매춘이다라는 수식은 이런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다.

 

애초에 '자발적'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의사로 움직였던 것, 그리고 빈곤이나 폭력과 같은 처지 하에서 어떠한 선택을 내렸던 것들을 모두 '자발적'이라는 말로 치환할 수 있을 것인가. 국가나 민족과 같은 어떤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바탕으로 구성되는 행동이나, 빈곤과 가부장제적 폭력으로부터의 탈출의 의미로 구성되는 행동의 '자발성'을 판단할 때 그것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자발적'이라는 어휘의 의미와 같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


 

강제동원과 자발성: 제국으로 걸어들어간 위안부

위안부는 강제동원되었다라는 명제는 자발성을 가르는 중요한 쟁점이 되어왔다. 이는 특히 201811월 내려진 일제강점기 징용 피해자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배상 판결과 더불어서 쟁점이 격화되었는데, 이 즈음하여 식민지배 치하에 있던 징병, 징용, 위안부들의 동원에 강제성의 의미를 묻는 시도가 여러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는 성매매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시동원체제에서의 성 착취 역시 자발성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종종 위안부와 섞여 쓰이는 정신대라는 명칭이 있다. 이는 전쟁 말기인 1943~45년 여성을 동원하기 위해 마련되었던 제도적 장치로, 공식명칭은 여자근로정신대’, 곧 일본군의 전쟁 수행을 위해 필요한 노동력 등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일본인과 조선인 여성을 끌어다 썼던 제도다. 그러나 이 제도 이전부터 일본군 위안부의 모집과 연행은 진행되고 있었다. 다만, 정신대 도입 이후 정신대를 명목으로 위안부의 모집과 연행이 진행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당시 조선인들에게 정신대와 위안부는 혼동되어 수용되었고, 이는 해방 이후의 인식으로도 이어졌다. 정신대(挺身隊), 정신(挺身)이라는 말 자체가 자발성논의와 관련이 깊다. 문자 그대로 이를 이해하면 몸으로 앞장선다라는 의미로 국가나 민족을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일본 제국은 이 이름을 통해, 전쟁기 여성의 동원을 자발적인 형태로 포장하고자 했다. 실제 집행 과정에서도 정신대에 자원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충성, 그리고 그와 결합된 자아의 실현이라는 의미가 부여되기도 했다. 식민지 치하에서 본국에의 충성을 내면화하는 과정이 정신대라는 이름에 부여되어 있다.

 

여기서 강제동원의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일본 정부를 비롯한 집단은 포주 혹은 업자의 책임을 강조한다. 제국 일본은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바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고, 그 구조 아래에서 이들의 착취를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업자들이 활동한 판을 마련하였다. 박유하는 여기서 일본 제국의 책임이 없다고 보지는 않으나, 1차적인 책임을 당시에 활동했던 업자들에게 묻는다. 제국은 직접적인 집행을 통해서 이들을 동원하지 않았으며 증언된 강제동원의 사례는 예외적인 것이며, 그에 대한 법적 책임은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나아가 위안부의 지위에 빠진 여성들에 대한 강제연행을 부정하고, 그것을 자발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구조적 강제성이라는 이름으로 변환해 사용한다. 이러한 논리는 한 뼘만 더 나아가면 위안부는 자발적이었다는 논법으로 변형되기 쉽다. 그런 논법을 악용하는 것이 이영훈과 류석춘인데, 이들은 위안부와 일본 제국과의 관계를 마치 충성[각주:8]과 계약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 관계인 것처럼 말한다. 이는 당시 조선인 여성들의 계급적 지위와 더불어, 빈곤한 여성들이 돈을 벌고 싶고, 교육을 받고 싶고, 그것과 구분되기 힘들게 (국가에 충성한다는) 자아를 실현하고 싶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매춘이라는 계약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거대한 제국의 구조 속에서 빈곤에 빠져 있던 여성들이, 국가의 책임을 묻기 애매한 업자를 경유해서 일본군에 의해 착취당한 이 모든 구도를 자발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강제연행에 대한 '법적 책임'의 소재 여부를 이곳에서 다룰 수는 없. , 이러한 제국의 구조 속에서는 '합법성''불법성', '자발성''강제성'을 구분하는 것 자체를 되물어야 한다. 이것을 되묻지 않으면 그것은 일부 논자들에 의해, '위안부' 피해자들을 '자발적'이라 명명하는 꼴을 지켜보게 된다. 한편으로 박유하에서 이영훈, 류석춘으로 한뼘 나아가게 했던 연결지점은 "자발 vs. 강제"라는 이분법적 사고였다. "위안부들은 자발적으로 걸어가지 않았어! 그러므로 그들은 강제동원되었어!"라는 말은 반만 맞고 반은 틀리다. 애초에, 제한된 정보와 제한된 이동가능성, 제한된 경제활동 속에서 이들에게 유도된 제국의 경로가 '위안부'로 향하는 길에 놓여있었을 때 그것은 강제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되묻는다. 수요를 만든 것이 곧 강제동원의 증거가 될 수는 없으나, 만들어놓은 수요와 공급의 경로를 배치해 놓은 것 역시 일본 제국이 아니었던가.

 

제국 속에는 제국적 착취 경로를 삶의 방식으로 채택해서 살아가던 업자들, 그리고 그 업자들에 동조한 이들 그리고 제국을 향해 일정 수준 내면화된 피해자 여성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이영훈과 류석춘은 '제국'에 내면화된 것에 더불어 일종의 '자본주의적 자아'를 내면화한 여성들의 자아실현 서사를 통해 이들을 '자발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만들어진 자발성은 누가, 어떻게, 왜 만들었는가에 대해 물어야 한다. 결국 '위안부'의 본질이 성착취라고 한다면, 그것을 '자발성' 혹은 '구조적인 강제성'에 이르게 만든 일본 제국의 책임에 대하여 물어야 한다.

 


빈곤과 자발성: 위안부는 매춘이 아닌가

'위안부는 매춘이다'라는 명제의 위험성은 그것을 부정할 때에 비로소 치열하게 떠오른다. '위안부는 매춘이 아니다'라고 반박하는 것은 쉽지만, 그럴 경우에 다시금 질문이 뒤잇는다. 과연 위안부는 매춘이 아니었던가. 매춘과 위안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던가.


 산업과 성착취제국의 산업과 빈곤산업

아시아의 정복과 대동아 강대국을 건설하려는 제국에 있어서 '위안부'는 효율적인 전쟁 수행을 위한 활용 자원이었다는 점에서일종의 제국의 산업이었다그것이 '효율적'이었던 것은 일본이 이전부터 트랜스내셔널하게 여성 섹슈얼리티를 제국을 위해 활용하였던 경험조선반도 여성의 취약한 사회경제적 지위전쟁 말기 발달한 초국가주의적 관료제 등이 합쳐진 것이었다전쟁이 끝난 한반도그중에서도 한국에서 약 40년간 여성의 몸은 다른 식으로 '효율적'으로 활용된다발전국가적 지향 아래에서 '효율적'인 비즈니스의 일환으로 활용되었던, '룸살롱'으로 대표되는 남성들의 성접대 문화에서부터, 88올림픽 등 국제행사에 장려되었던 '기생관광같은 것들이 그 사례다[각주:9]신자유주의 시대로 갈수록 명령의 언어는 점점 충성에서 매매로 재편된다.

 

성매매 산업을 '빈곤산업(poverty industry)'이라는 관점에 입각해 분석하는 김주희는 "탈빈곤의 개별화 이데올로기가 확산된 사회에서 자원 없는 여성들의 미래를 유일하게 기약해주는 곳이 성산업이었다는 점은가난한 여성들에게 과연 사회란 무엇인지 질문하도록 한다"고 지적한다[각주:10]빈곤의 출구가 성매매 산업밖에 없도록 강제하는 사회에서, '자발성'을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혹은 시계를 되돌려빈곤과 가정폭력의 출구가 '위안부'밖에 없도록 강제하는 사회에서 '자발성'을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제국과 조국의 틈바구니에서, 어떤 빈곤한 여성들은 '위안부'로 유입되었고,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시장과 기업가적 자아의 틈바구니에서도 어떤 빈곤한 여성들도 '성매매'에 유입된다. 제국의 업주와 성매매 업소 온라인 성착취 공간의 운영자는 이 관계를 원활히 하고 집행하는 행위자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며, 빈곤한 여성에게 제한된 출구로서 '착취될 몸'을 거래하라는 명령이 제시되는 건 80년 전과 지금이 다르지 않다. 여기서 불법과 합법을 구분하고, 자발성과 강제성을 구분해 '순수한 피해자'를 걸러내고자 하는 태도는 이러한 선택지의 구조적 속성을 통째로 무시하는 다분히 남성중심적이고 착취적인 시선이다.

 

박유하의 구조적 강제성 개념도 마찬가지다. “구조적 강제성은 가해자성을 옅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성을 짙게 할 때만 유의미하다. “원래 구조적으로 그래라는 것은 가해자가 면피하기 위해 사용될 때에 인용될 수 없다. 거꾸로 구조적으로 그래. 그러므로 나도 책임이 있어라는 식으로 그라데이션 가해자성을 가진 사람들이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고 성찰하는 맥락에서만 인용될 수 있다. 폭력적인 강제연행 사례에 대한 책임은 명확하다. 그러나 빈곤과 독해력 부족과 같은 식민지 치하의 여성들의 상황을 악용하고, 이들에게 허상과 같은 자아실현의 욕구를 주입하고, 식민지 조선 업자들을 활약하도록 만들어낸 책임 역시 구조적이라는 이름으로 면피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위안부혹은 성노예가 되어버린 이들에게 자발적이라는 수식은 틀렸다.

 

그러나 지금 함께 논의되어야 할 것은, '위안부는 매춘이 아니었다' 혹은 '모든 위안부는 강제로 끌려갔다'라는 구체적 역사 맥락에 의거한 구분 짓기가 아니다. 그때도 지금도 무엇이, 어떻게 경제적사회적으로 취약한 여성을 탈출할 수 없는 성착취로 유도하고 있는가에 대한 검출과 저항이다. 애초에, 이들이 자발적이었는가 자발적이지 않았는가는 여기서 주된 논쟁지점이 될 수 없으며 되어서는 안 된다.

 

 

본 지면에서 다루기에는 위안부를 둘러싼 논의 지점은 수도 없이 많고, 내 역량으론 그것을 충분히 다룰 수도 없다. 류석춘과 이영훈, 박유하의 의견을 연결지어 2010년대의 위안부담론을 이해하는 것도 그 수많은 방식 중 하나일 따름이다. 그리고 한편, 류석춘의 발언을 통해서 학내외 논의의 지평이 확산되었다는 것을 유의미하게 기억할 필요도 있다. 총학생회나 민주동문회의 입장문, 특히 불법 성매매라는 표현이나 매국적 망언이라는 표현을 되돌아보는 과정도 이 글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식민지, 가부장제, 빈곤. 최소한 이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위안부문제에 접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존의 위안부피해자 여성들은 물론 성매매 종사자를 비롯한 남성 중심의 성착취 카르텔의 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피해를 안겨주는 발화로 이어지기 쉽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의도와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볼 것인가에 있다. 피해를 축소하거나 희석하려는 시선을 취한다면, 어떤 자료를 목격하더라도 그것을 피해자의 증언을 막는 재갈로 활용한다. 피해자가 겪은 고통, 그의 경험에서 비롯하는 고뇌 그리고 가해자를 포함한 구조의 변화 요구를 지지하는 시선을 갖는다면 같은 자료라도 다른 문장의 결론으로 이어진다.

 

'위안부'를 다룬 학술 연구는 많지만, 대중적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유를 확장할 수 있는 기회는 생각보다 많이 주어지지 못했다. 그것은 '위안부' 문제를 여전히 '민족의 딸' 혹은 '민족의 할머니'와 같은 방식으로 단순화하면서, 우리의 비판적이거나 확장적인 사유가 제한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평화의 소녀상 세우기 운동'은 민족주의로부터 급격히 이탈하기 시작한 세대들의 코스모폴리탄적인 여성주의 운동이기도 했지만, 거기서도 세부적인 질문들이 사회적으로 공유되지 못했다. 그건 반대로 본고에서 비판한 사람들이 세력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페미니즘적 사고에 근거한 역사의 재해석이나 개념의 재개념화, 폭력이나 재현의 문제 등을 해소할 때, '위안부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더 설득력을 가지면서도 과거와 현재에게 필요한 담론을 생성해 나갈 수 있다. 폭력의 수위나 항시적인 성착취의 존재 유무, 혹은 입체적으로 구성된 자발성으로 위안부피해를 희석하는 류석춘을 비롯한 자들의 전략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민족 중심적, 공동체 중심적인 논박을 넘어서서 위안부를 구성하는 요소나 개념들을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공백의 영역이 아니다. ‘위안부피해자들의 삶과 증언들은 물론이거니와, 현대의 여성주의 운동이 조명하고 있는 폭력의 양상들 그리고 이 바탕에서 성찰하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그것에 답할 수 있다. 여기서 다룬 역사와 담론의 흔적들, 그리고 몰상식한 사유의 흔적들이 적어도 그런 언어의 재료가 되길 바란다.

 


글 편집위원 나루(qeq0822@gmail.com)

 

 



<참고자료>

- 김신현경, 김주희, 박차민정, 페미니스트 타임워프, 반비. 2019.

- 김주희, "여성의 경제적 어려움과 "쉬운 돈" - 빈곤산업으로서의 성산업에 대한 시론적 연구", 한국여성학 제344, 2018):99-138.

-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뿌리와이파리. 2015.

- 이영훈, 반일종족주의, 미래사. 2019.

- 정영환,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임경화 역, 푸른역사, 2016.

- 허윤, "일본군 '위안부' 재현과 진정성의 곤경 - 소녀와 할머니 표상을 중심으로", 여성과 역사 제290, (2018):131-163. 

-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ATIS SWPA Research Report No. 120. (https://archive.history.go.kr/id/AUS043_57_00C0411))

- 연세춘추. 사회학과 류석춘 교수 인터뷰. 2019. 09. 25. (https://chunchu.yonsei.ac.kr/news/articleView.html?idxno=26030))

-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KYEOL. (https://www.kyeol.kr/))





  1. 동국대 조은 교수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1991~1999년 사이의 조은의 글을 살펴보면 좋다. [본문으로]
  2. 물론 여기서 당시 한국군이 과거 일본 제국군(특히 관동군)의 상당 부분을 계승했으며, ‘일본군 위안부’의 관습이 ‘한국군 위안부’로 이어졌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이것 또한 민족주의에 토대한 변명으로 활용되어선 안된다. [본문으로]
  3. 그리고 우리는 돌아오지 못한 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본문으로]
  4.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서 직접 열람이 가능하다. http://archive.history.go.kr/id/AUS043_57_00C0411 [본문으로]
  5. 위 저술은 『제국의 위안부』 초판본인 2013년판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2015년 개정판에서는 삭제되었다. 이는 2014년 ‘위안부’ 피해자들과 나눔의집 박유하를 상대로 한 명예훼손 및 가처분 신청 소송 과정에서 한국 재판부의 판결에 의해 삭제 처분되었다. [본문으로]
  6. 허윤의 「일본군 ‘위안부’ 재현과 진정성의 곤경 – 소녀와 할머니 표상을 중심으로」(2018)을 살펴볼 것을 권장한다. [본문으로]
  7.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의 좌담 시리즈,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 ‘위안부’의 재현”을 참고하면 좋다. [본문으로]
  8. 이러한 충성은 단순히 군대에서 경례하는 형태의 충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떠한 공동체에 충실하고, 공동체의 요구사항을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역할이나 경제적 지위를 약속받는 것이라는 점에서 자유주의적 계약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본문으로]
  9. 자세한 내용은 김신현경, 김주희, 박차민정의 『페미니스트 타임워프』(2019) 속 김주희의 저술에 담겨 있다. [본문으로]
  10. 김주희의 "여성의 경제적 어려움과 "쉬운 돈" - 빈곤산업으로서의 성산업에 대한 시론적 연구"(2018) 참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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