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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걔네 좋아해?”
중학생 시절부터 고등학생을 지나 지금까지, 나는 오랫동안 ‘빠순이’였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당시의 빅뱅을 시작으로 수많은 ‘오빠들’과 ‘언니들’을 좋아했다. 화면 없는 mp3로 거북이의 <빙고> 와 할아버지의 트로트를 듣던 초등학생은 음악 방송으로 처음 마주한 화려한 비주얼의 댄스 음악에 푹 빠졌다. 그맘때는 작은 유리구슬 같은 마음도 반짝거리는 수백 개의 조각으로 나누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나는 열 손가락을 모두 접고도 모자랄 만큼의 아이돌을 사랑했다. 포토샵을 배운 것도, SNS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인터넷의 낯선 사람과 처음 만난 것도 모두 ‘오빠(언니)’라는 교집합 아래에서였다. 하나씩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내 ‘덕질’의 역사는 길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은 바로 '대상'이었다. 교복을 입고 삼삼오오 교탁의 작은 컴퓨터 화면 앞에 모여 동영상을 볼 때나, 나른한 점심시간에 칫솔을 들고 사물함 앞에서 떠들던 때. 우리는 꽤 거리낌 없이 서로의 ‘덕질’을 말하고, 쉽게 누군가의 ‘팬’이라 자신을 정의했다. 그때보다 몇 년이나 지난 지금도 내 핸드폰 배경화면을 볼 때나, 식당에서 익숙한 멜로디의 음악이 흘러나와 고개를 들 때, 귀에 익은 목소리에 반응해 음식점의 TV로 시선이 돌아갈 때… 이처럼 ‘좋아함’의 순간들이 포착될 때마다 여전히 그 질문은 숙명처럼 내 ‘덕질’의 흔적들을 따라다닌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어조의 미묘한 (중요한) 차이겠다. 할 수 있다면 한 번씩 입으로 따라 읽어 보길 바란다.
“(난 얘네 좋아하는데) 너 걔네 좋아해?”에서,
“(여기서는 그렇게 말하면서) 너 걔네 좋아해?”로.
취향은 한 개인을 설명하는 지표 중 하나이다. 그렇기에 한 개인의 취향은 필연적으로, 때로는 자신이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당신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력을 지닌다. 그래서 “무엇을 좋아하냐”는 물음은 단순히 한 개인의 기호를 묻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 광범위한 의미를 내포한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 이 비슷한 사람에게 쉽게 호감을 느끼는 것은 그 사람과 자신이 잘 통할 것이라는 기대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때로는 그 사람의 정체성까지도 짐작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요즘의 내 ‘덕질 생활’에서 중요한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종종 혼자 있을 때는 ‘국힙’을 듣고, 아이돌을 소비하고, 동시에 페미니즘을 말하는 여성인 나는 과연 괜찮은가. 취향을 아직 공유하지 않은 이들과 만났을 때 내가 자꾸만 내 선호를 숨기게 되는 것은 어디에 웅크린 죄책감으로부터 기인하는가. 여성인 내가 여성혐오적인 한국 아이돌 산업을 소비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앞서 말했듯 수많은 아이돌 팬덤을 거쳤고, 과거에는 그 ‘팬덤’으로서의 정체성을 나를 설명하는 단어들의 앞쪽에 두고 있었다. 학생이었기에 앨범을 몇십 장씩 사지는 않았지만 인터넷 강의를 듣던 PMP에 아이돌의 무대영상을 담아 다니며 봤고, 어쩌면 의무적으로 ‘스밍 1’을 돌렸다. 친구들과 친해지는 과정에서도 아이돌 팬질은 하나의 교집합이자 긴밀해지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그동안 여성 팬들이 아이돌 시장에서 지니는 위치는 1세대, 2세대, 3세대를 지나며 변화해 왔다. 나이와 무관하게 ‘여덕 2’들의 뒤에는 ‘빠순이’라는 단어가 붙던 시절을 지나, 현재 아이돌의 팬덤은 기업과 소속사가 고려해야 할 중요한 소비자이자, 대중문화의 부정할 수 없는 한 축으로 여겨진다. 한국 아이돌 시장에 발을 들이고 있는 당신이 '좋은' 소비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려면, 이 산업이 지닌 여성혐오적 면모를 적어도 인지하고 있는 한 명의 ‘여덕’이라면. 당신은 팬덤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1. '덕후'도 변화한다
덕질도 변화한다. 아이돌 팬덤의 역사는 아이돌 세대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1세대, 2세대, 3세대로 분류된다. <응답하라 1997> 의 성시원이 사랑했던 HOT와 젝키로 대표되는 1세대 팬덤이 등장하던 시절, 처음 ‘빠순이’라는 호칭은 탄생했다. 이는 모욕적인 의미로 쓰였는데 당시 표절, 립싱크, 그들의 음악성 등을 빌미로 아이돌을 비판하면서 이 ‘수준 떨어지는 음악을 하는 오빠’를 사랑하는 여성 팬들에게 ‘빠순이’라는 낙인을 붙인 것이 그 시작이었다. 주로 십 대와 이십 대 사이였던 여성 팬들을 묶어 ‘미성숙한’ 무지성의 집단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문화 담론에서 제외했다. 이들 ‘빠순이’들이야말로 아이돌 문화를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나아가 규정하던 장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비평에서는 그들을 흥미로운 현상이자 분석 대상쯤으로 객체화하며 소외시켰다. 3 이러한 소외로 인해 1세대 팬덤은 매우 폐쇄적인 집단으로 변모하였다. 하나의 아이돌에게만 헌신하고 충성해야 함은 ‘진짜 팬’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었으며, 여러 그룹을 좋아하는 ‘잡덕’이나 자주 그 대상을 바꾸는 ‘철새’, 특정 멤버를 배제한 채 한두 멤버만을 품는 ‘악개’(개인팬)은 팬덤 내부 척결의 대상이었다. 팬덤의 내외부 경계가 명확했으며 따라서 팬덤 내부의 규율과 가치가 크게 작동하였다.
정소연(2018)의 한국 아이돌 1~3세대 구분 모델에 따르면, 이처럼 1세대 팬덤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던 폐쇄성은 2세대, 3세대를 지나며 여러 변화를 지나고 희석되었다. 국내에서만 활동했던 아이돌들은 해외로 발을 뻗기 시작했고, 연기, 뮤지컬 등 타 분야로 진출하는 일도 늘어나면서 아이돌들의 활동 공백기가 길어졌다. 따라서 2세대 팬덤은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애정을 바탕으로 한 스타에게 몰입했던 1세대 팬덤과 달리 여러 아이돌을 동시에 덕질하는 등 비교적 중첩적이고 유동적인 팬덤 정체성을 보였다. 4
또한 정소연에 의하면, 2세대와 3세대를 구분하는 큰 지표 중 하나는 팬덤 내부 소통 플랫폼의 변화이다. 과거 1세대, 2세대 팬덤이 주로 가입 절차를 거쳐야 하는 카페나 소속사 홈페이지를 바탕으로 커뮤니티를 형성했던 반면, 현재 3세대 팬덤은 그들의 주 활동 무대를 트위터로 한다. 트위터는 하나의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한 사람이 여러 계정을 손쉽게 전환해가는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이런 특징 덕분에 한 명의 팬은 여러 가지의 ‘팬 자아’를 가지기가 용이해졌다. 또한 개인 간의 '팔로우'를 통해 팬덤은 하나의 집단이 아닌 한 개인과 다른 개인의 연쇄적인 관계로 연결되게 되었으며, 커뮤니티 간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획하기가 어려워졌다.
따라서 3세대 이후의 팬덤에서는 한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팬이 같은 그룹 안에 속한다고 단정할 수 없어졌다. 팬덤 내부 정치는 트위터와 여타 SNS의 개방적인 특성으로 인해 강제성도 폐쇄성도 잃었다. 팬덤은 외부의 시선에 노출되기 쉬워졌고, 외부자의 비판으로 인해 팬덤 내부의 규율을 기준으로 이루어지던 논의들은 팬덤만의 가치가 아닌 인권, 평등 등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가치를 고려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식으로 내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바탕으로 강한 강제성을 띠던 자치규칙은 이전 세대보다 그 유효성을 잃었다. 단일한 정치권력을 잃은 팬덤은 내부적으로 분화되고, 그리하여 과거에 비해 다층적이고 이질적인 인적 구성을 띄게 되었다. 5
'공출목 7'과 RPS 8 소비 여부는 대표적인 구분 기준이 되었고, 개인은 각자의 가치관과 취향에 따라 군집을 이루어 ‘덕질’을 수행한다. 여전히 매주 방영하는 가요 프로그램의 1위 기록과 연말 시상식의 수상실적은 중요하게 여겨지고, ‘스밍’여부는 ‘진짜 팬’을 가리는 지표가 되곤 하지만 팬덤은 분명 과거보다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아이돌의 ‘입신양명’을 향한 무조건적인 헌신에서 벗어나, 팬덤은 자신이 지닌 소비자로서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아이돌 산업에 참여한다. 이들은 아이돌 및 그 제작사에도 보이콧과 #(해시테그) 운동, 검색어 총공 등의 방법을 통해 그들이 팬으로서 지닌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소비자적 권리는 팬으로서의 자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본래 자신이 추구하던 바나 인권, 평등 등 팬덤 외부의 가치와 맞닿아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구성된 팬덤은 SNS를 기반으로 하나의 '정치적 현장'으로서 기능한다. 필자 또한 그 속에 참여하는 한 개인으로서, 그동안 어떠한 순간마다 품어야 했던 조각난 의문들에 응답하고, 이러한 팬덤 문화와 아이돌 산업이 당장 사라질 수 없다면, 현재의 팬덤은 그 외부의 것들과 현재 어떻게 관계 맺고 있으며, 또 어떻게 관계 맺어갈 수 있는지를 상상하고자 한다.
2. 정치적 현장으로서의 팬덤
1) ‘팬덤으로서의 자아’는 더 이상 완벽히 단절되지 않는다. 비평적 덕질의 시작!
2015년 이후 페미니즘이 부상하고, 각종 여성 커뮤니티에서 ‘한남’으로 지칭되는 남자들의 가부장성, 남성중심성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팬덤 집단에서는 딜레마가 발생했다. 비판하는 ‘한국 남성’의 범주에서 나의 ‘오빠’는 예외일 수 있는가. 비판하는 ‘한남’들과 같이 국내 남성 연예인들도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그 분위기를 체화하며 성장했다. 그리고 아이돌-팬의 관계, 특히 ‘여덕’들의 소비자로서의 주체성이 부상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이때라고 볼 수 있다.
아이린이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밝힌 후 커뮤니티는 크게 두 분파로 나뉘었다. 다수의 ‘남덕’들은 “걔(아이린)는 그렇게 이쁜데 힘들 일이 뭐가 있었겠냐”, “남자팬들이 (아이린에게) 돈 쓰는 게 얼만데 이런 식으로 감히 페미 책을 읽고 엿 먹이냐”, “너와 결혼까지 생각했던 나를 후회하고...” 등의 반응을 보이며 아이린의 포토카드와 앨범을 버리는 ‘탈덕’ 인증을 벌였다. 이들에게 ‘예쁘다’는 ‘팔린다’의 뜻이었고, 이는 “(내가) 너를 사 주고 대상화해 주는데 왜 ‘페미’를 하느냐”는 말이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단지 책 한 권을 읽었다는 발언만으로 페미니스트 여부를 따지는 것이 가능키나 한지에 대한 의문이나, 페미니스트인 것이 ‘논란’이 될 일인가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어떠한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 ‘여덕’들의 반응은 이와 꽤 다른 양상을 보였다. 여덕들은 위와 같은 남덕들의 반응이야말로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서 존중하지 않는 한국 남성 사회를 단적으로 보여주며, 아이린을 비롯한 여성 아이돌들에게는 ‘그래서’ 페미니즘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과거와 달리 여성주의적 인식과 언어를 습득한 여덕들은 여성 아이돌들이 겪고 있는 차별을 언어화하고, 이를 개선해야 함을 말한다. 위 사례에서 ‘남덕’들의 반응과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이는 ‘여덕’들의 이러한 반응은, 그동안 끊임없이 대상화되며 일상적인 여성혐오를 경험하는 여성 아이돌과의 어느 정도의 동일시와 팬심을 바탕으로 한다. 이는 같은 아이돌을 좋아하는 하나의 팬덤이더라도 그들이 지니는 젠더 권력에 따라 팬 활동의 양상이 다름을 보여주며 팬덤이 과거처럼 내부규범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집단이 아닌, 외부로부터 습득한 언어와 가치규범이 동시에 강력한 기준으로서 작용하는 집단으로 변모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흥미롭게 볼 것은 여덕들과 남덕들의 구매력에서의 차이이다. 아이돌 시장에서 여덕들의 구매력이 남덕들에 비해서 더 높다는 것은 이미 꽤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걸그룹의 주된 소비층은 10대 남성, 20대 남성, 30대 남성 순을 이루지만 주로 삼촌 팬들로 칭해지는 이들의 구매력은 여덕들의 것에 비해 낮다. 소비 패턴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남성팬들의 경우 인터넷에서 '짤'이나 사진을 소비하는 것이 대부분인 반면, 여덕들은 앨범이나 굿즈를 구매하고 조직적으로 '스밍'을 돌리고, 오프라인 공방이나 콘서트 등에 참여하는 비율이 더 높다.
그래서 그간 중소 기획사들은 걸그룹의 성공을 위해 남성팬들의 구매력이나 높은 충성도를 기대하기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낮은 대중적인 컨셉과 곡을 통해 인지도 상승을 기대하고, 그 폭넓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행사를 돌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그들의 성공 전략으로 삼았다. 10 하지만 최근 (여자)아이들이나 마마무, 이달의 소녀들, 퀸덤의 흥행이 보여주는 패턴은 좀 다르다. 소통과 정보의 빠른 전달을 SNS를 기반으로 하는 3세대 팬덤 여덕들의 조직적 논의가 힘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이것에 있다.
2) 비평적 덕질과 '자격논쟁'
공출목이나 RPS의 소비여부, 프듀 시리즈 소비여부, 남돌 덕질 여부 등 각자의 기준에 맞춰 집단을 이룬 팬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맞춰 팬덤 활동을 한다. 덕질이란 기본적으로 '소비'의 공간이고, 따라서 의견 표명 또한 불매와 지향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중 자주 언급되는 것이 ‘까빠’와 ‘윤리적 팬질’이다.
2016년에는 일부 BTS 팬들이 트위터에 ‘방탄소년단 여성혐오 공론화’를 위한 계정을 만들어 여성혐오적 가사를 쓴 방탄소년단과 소속 기획사인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에 피드백을 요구했다. 이들은 방탄소년단의 여성혐오적 가사와 언행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며, 방탄소년단 및 소속사에 공개적인 SNS 맨션이나 이메일을 보내고, #운동을 벌이는 등의 집단행동을 조직했다. 몇몇 언론 보도 이후,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당해 7월 6일 공식 팬카페에 ‘동아일보 기사 및 여성혐오 논란에 대한 회사의 공식 입장’이라는 제목의 사과문을 게재한다. 11
이러한 성과는 아이돌 팬덤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트위터에는 곧 세븐틴, 블락비, 비투비, NCT, 아스트로, 엑소 등 K팝 아이돌의 약자/소수자 혐오 공론화 계정이 생성되었고, 여성혐오, 퀴어포비아, 제노포비아, 에이지즘 12, 화이트워싱 등에 관한 의견들이 적극적으로 오가기 시작했다. 지코의 ‘Tough Cookie’ 가사 수정이나 빅스(VIXX) 라비의 <Bomb> 뮤직비디오 수정 등은 그 성과들 중 하나였다. 13
이들은 주로 “까빠”라고 타자로부터 정체화되며 팬덤 내부의 주류 집단과 팬덤 외부 자신이 속해 있다고 여기는 집단과의 갈등을 동시에 경험한다. 남자 아이돌의 팬이기 때문에 페미니즘 집단 내부로 속할 수 없다고 여겨지며, 팬덤 내부에서도 내부고발자로서 불편한 동행, 입 속의 가시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방탄소년단 팬덤 내부의 공론화는 팬덤 내부 주류집단에 의해 비판과 공격을 받았지만 결국 방탄소년단 및 기획사가 그들의 논란에 대해 피드백하고, 여성혐오적인 지점에 신경쓰게 되는 계기로서 작용하였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그간 많은 남성 아이돌 그룹의 가사가 불평등한 젠더 권력 관계 하에서 얼마나, 어떻게 무의식적으로 남성 지배적인 시각을 담아왔으며 또 재생산했는가 성찰하도록 한다.
팬덤은 아이돌 산업 자체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내부 자정작용에도 참여한다. 그중에서도 팬덤 내 ‘공출목’ 소비 지양 운동은 최근 논쟁적인 점들 중 하나이다. 만약 당신이 아이돌 덕질을 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공출목’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공항, 출근길, 목격담으로 대표적인 사생활 침해 컨텐츠를 의미하는 ‘공출목’ 은 과거에는 비교적 이것에 대한 윤리적 인식 없이 소비되었다. 응답하라 NNNN 에서의 정은지가 토니의 집 앞에서 밤새워 기다리던 모습을 생각하면, 현재의 ‘공출목’ 소비란 그 침해성의 정도가 충분히 완화되었다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누가 타인의 사생활을 ‘소비’한단 말인가?) 하지만 과거 ‘오빠’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열성팬의 자세로 여겨지던 팬덤문화에서 공출목 지양, 비소비의 조류로 옮겨온 데는 이유가 있다. 아이돌의 사생활이 해당 산업 내에서 '판매하는 상품'이 되고, 그 유해성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V앱과 우후죽순 등장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이 말하듯 아이돌의 사생활이 ‘컨텐츠’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노동 공간은 공항, 출퇴근길, 경조사, 식당, 심지어 숙소까지 연장되고, 노동 형태는 끊이지 않는 감정 노동과 자아의 착취로 이어진다. 노동 공간과 휴식 공간이 구분될 수 없거나, 구분되기 아주 어려운 환경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다분히 관음적인 소비자들의 욕망과 플랫폼, 연예기획사들의 합작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V앱, 디스패치, <프로듀스101> 시리즈와 같은 컨텐츠들이다.
이러한 관음적 컨텐츠와 공출목의 소비를 지양하는 사람들은 '사생활 컨텐츠'의 소비가 미치는 영향에 집중한다. 특정 문구가 적힌 핸드폰 케이스를 사용했다고 ‘사상검증’과 비웃음을 당하고, 책 하나 읽었다 말함으로써 실망했다며 ‘탈덕 인증’이 올라오는 현상이 과연 이것과 무관할 수 있는가. 점점 더 희미해지는 아이돌의 노동 공간과 휴식 공간을 생각한다면, 또 ‘공출목’ 컨텐츠를 생산해내는 이들이 그 정보를 어디에서 얻는지 생각한다면. 과연 현재 아이돌 산업에 노골적으로 존재하는 이 관음적 욕망이 자연스럽고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의 비윤리적 소비를 '관행'이라는 이유로 정당화하고, 그 암묵적으로 합의된 침묵 속에서 필연적으로 아이돌 산업 종사자들의 권리는 잊혀진다. ‘공출목’의 소비를 지양하고, 사생활과 관련된 컨텐츠의 소비에 대한 자기검열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이유이다. 혹자는 이러한 ‘공출목’을 소비하지 않으면 볼 수 있는 컨텐츠가 반 이상 줄어든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그것은 ‘공출목’의 소비를 정당화할 수 없으며, 그만큼 당신이 다분히 관음적인 소비 방식에 익숙해졌음의 방증일 뿐이다.
하지만 이처럼 공출목 소비 지양이나, 팬덤 내부의 운동들은 자주 '자격 논쟁'에 휩싸여 오랫동안 제자리걸음을 걸었다. “까빠”들과 “순덕 14” 들과 “지향점이나 그 단계가 조금씩 다른 까빠” 들이 서로를 비난하면서 ‘논점 흐리기’가 발생하고, 결국 원래 목표로 했던 것에 집중하기보다 상대방이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검증의 쪽으로 관심이 치우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과거 공출목을 지양하자고 말하는 진영의 다수가 RPS 를 한다는 이유로 이들을 ‘성희롱하는 트페미’로 라벨링하고 그들의 도덕성을 운운하면서 그들이 논의하는 문제 자체를 공론장에서 논의될 수 없게 차단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나아가기 위해서는, ‘공출목’을 소비하지 말자고 말하는 이들의 주류가 RPS를 한다는 점을 꼬집어 이들 자체를 아이돌을 성희롱하는 존재로 낙인찍고, ‘공출목’이나 페미니즘 문제제기 자체의 윤리성을 부정했던 것과 같은 자격논쟁의 대립구조를 넘어서야 한다. '덕질'하는 당신이 무결할 수 없음은 때로는 좋은 담론을 위한 동력이 될 수 있다. 자신이 지니는 모순점에 대해 되돌아보고 외면했거나 알지 못하고 지나쳤던 의문들에 답하게 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당신의 ‘덕질’에 대한 상상력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충분히.
3.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사람은 변화하고 커뮤니티 또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왜 활동 중단을 선언하는 아이돌들이 늘어나는지, 왜 사생활의 범주는 자꾸만 줄어드는지, 왜 애정과 관습의 명목으로 가해를 정당화하는지…. 한국의 아이돌 산업이 “어떻게” 아이돌을 서비스로서 제공해 왔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판 것’을 구입한 소비자를 탓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당신이 그 셀링 포인트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인지하고,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을 소비해 온 당신에게는 적어도 그 의문들에 대답해 보아야 할 이유 정도는 있지 않을까.
퀸덤의 흥행은 당해 여자 아이돌들의 연말무대를 바꾸었고, 과거에는 실패하기 쉬운 비주류의 영역으로 여겨지다 이제는 여자 아이돌 컨셉의 한 축이 된 '걸크러쉬' 또한 여덕들의 수요를 기반으로 했다. 퀸덤이 흥행하고 <퀸덤 2> 제작 논의가 발발되었을 때 퀸덤의 여덕들은 불매 선언과 함께 <퀸덤 2>를 남자 아이돌이 아닌 여자 아이돌로 구성해 달라 요구했다. '사생팬' 홈마의 2차 가공물에 대한 불매와, 소속사의 부당 행동에 따른 집단행동. 지나치게 착취적인 컨텐츠에 대한 불매 선언 등 결국 '소비'를 주축으로 하는 팬덤 문화와 아이돌 산업의 크고 작은 변화는 그 팬덤 문화의 내부자들이자 자신의 외부적 삶을 가진 자로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이들이 주체가 되어 이룬다.
“_를 좋아하시나요?”
어떤 취향을 설명할 때 당신의 마음을 상상해 보라. 취향을 묻는 질문은 자주 정체성을 묻는 질문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는 고민하는 '덕후'가 되자. “취향존중” 이라는 말로 포장된 '덕질적 허용' 과 그저 그동안 그래 왔다는 관습에 매달리지 않고 새로운 것을 상상해 보자. 자격논쟁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자격이 없고 바꿀 수 없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체념의 마음에서 당신이 고민하던 문제들은 수십 번 아사한다.
왜 아이돌은 섹슈얼한 이미지를 끊임없이 팔면서 동시에 연애하지 않는 무성적인 이미지를 가져야만 하는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말보다는 생각 한 번이 더 필요하다. 만약 아이돌이 주체적 선택을 했을 때 ‘감히’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소비자로서 그들의 삶 자체를 소비해도 된다는 생각을 했다면. 그대로 한 손을 들어라. 그리고 당신의 머리를 내리쳐라. 지금은 2020년이다. '한국 아이돌을 '덕질'하는 우리의 소비는 결코 무해할 수 없겠지만, 게으르지 않은 상상력과 성찰을 기반으로 할 수 있는 한 가장 유쾌한 '덕질'을 하기를!
글 편집위원 베개 (mellinn0309@naver.com)
- 스트리밍의 준말. 수익이 집계되는 음원 사이트에서 음악을 재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 여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덕후, 여자인 덕후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나 이 글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문으로]
- 딴지일보, 2017년 02월 09일, 「빠순이에서 덕후로, 덕후에서 메타-덕질로:우리 시대에 주체적 덕질은 가능한가」 http://www.ddanzi.com/ddanziNews/162826694 (검색일자 : 2020-03-05) [본문으로]
- 정소연, “3세대 여덕의 탄생”, 도서출판여이연, (2018): 125-143 [본문으로]
- 위의 논문. [본문으로]
- 트위터에서 친구를 구하는 '트친소' 해시테그, 첫 번째 사진 출처 트위터 @cocowl6625, 두 번째 사진 출처 트위터 @BAKU056 [본문으로]
- 공항, 출근길, 목격담. 사생활침해적 자료들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인다. [본문으로]
- real person slash 의 약자. '팬픽', '팬아트' 등이 이에 해당한다. [본문으로]
- 디시인사이트 에이프릴 갤러리에서는 “이 정도도 못 버틴다면 연예인 그만둬라”, “EXID 를 비롯한 그룹들이 이런 짤을 통해 ‘역주행’ 했다, 이런 짤 소비는 문제될 것이 없다”, “성희롱이 아닌 단순한 하나의 팬 문화”, 심지어는 진솔의 이러한 토로가 “좀 메이저가 하면 설득력 있을 텐데”, “그룹 이미지에 타격을 준다” 라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는 여론이 등장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본문으로]
- 향신문, 2017년 07월 17일, 「청순 아니면 섹시... 소녀들에게 '개성'을 허하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7142122015&code=210100 (검색일자: 2020.03.05) [본문으로]
-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작년 말부터 내부적으로 방탄소년단 가사 내에 창작 의도와는 관계없이 여성 혐오나 비하에 대한 오해 소지가 있고, 여성들이 불편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 “빅히트와 방탄소년단 전원은, 가사와 SNS 콘텐츠로 인해 불편함을 느끼신 모든 분들과 팬 여러분들께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지적 사항과 문제점을 앞으로의 창작 활동에 지속적으로 참고하고자 한다” 고 밝혔다. [본문으로]
- 연령차별주의, 연령을 이유로 개인의 기회를 박탈하거나 소외시키는 사회적 이념 및 행위. '연령차별주의', 두산백과, [본문으로]
- 딴지일보, 2017년 02월 09일, 「빠순이에서 덕후로, 덕후에서 메타-덕질로:우리 시대에 주체적 덕질은 가능한가」 http://www.ddanzi.com/ddanziNews/162826694 (검색일자 : 2020-03-05) [본문으로]
- 순덕 : 과거에는 한 그룹만 덕질을 하는 경우에 사용했으나, 현재는 아이돌이나 연예인에 대해 부정적인 기사가 뜨거나 '논란'이 발생해도 무조건적으로 감싸고 도는 덕후들을 지칭하는 말로 변모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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