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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걘 나에 대해 대체 뭘 알고 좋아하는 거야?”

 

       뻔하게 연기하는 사람이, 함부로 가늠하는 사랑이 좀 별로다. 친구들은 연애를 시작할 때면 감탄형보다도 빈번하게 의문형의 문장을 뿌렸다. 분명 아직 그만큼 친밀해지지 않았는데 사귀기 시작하는 순간 ‘애인’이라면 수행해야 할 역할들을 연기하며 설렘을 쥐어 짜내는 사람을 보면 설득력이 없고 의아해졌다. 우리는 그 투명한 대본을 느꼈을 때 우리 안에 곧바로 생겨나는 엄청난 객관화 능력과 놀랍도록 차분해지는 마음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이 관계에 집중하고 너의 마음이 진심이라고 믿기 위해서, 잡생각을 하지 않고 설레기 위해서는 무언가 더 섬세한 디테일이 필요했다. 네가 갈구하는 ‘로맨스’라는 고정된 의례의 대본집 속에 내가 그저 대체 가능한 연기자로서 배치된 것이 아니라, 이 마음과 관계가 우리 둘이 차근차근 만들어갈 소중한 것이며 나의 동의를 구한다는 예의 바른 신호가 필요했다. 하지만 한 계절을 풍미하는 여느 이성애 로맨스 드라마에서도 어딘가 많이 생략된 사랑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무조건적이고 성급한 문법을 가진 남자 주인공, 그리고 준비되어 있었다는 듯 홀딱 넘어가는 여자 주인공. 왜? 그 애의 말 어디가 매력적이었는데? 너희 서로 뭘 아는데? 어째서 그렇게 쉽게 사랑에 빠지고 서로를 만지고 모든 것을 내어줘? 그저 주인공의 평범하지 않은 외모 때문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내심 ‘로맨스 장르’ 자체를 가소롭게 여기며, 그런 허접한 극이 사랑이고 연애라면 나는 영원히 진심으로 설렐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를 보게 되었다. 신세계였다. 서로를 꼼꼼하게 바라보고 기억하고 기다리고 회피하다가도 끝내 사랑을 선택하는 아델과 엠마의 불투명한 진심에 마음이 고동쳤고 그 사랑의 결말에 나도 눈이 빠지게 울었다. 둘의 사랑이 완벽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을 만난 나는 텅 빈 도화지 같은 사랑의 세계를 상상하게 되었다. 아직 문법이 부재하고 우리를 규정할 언어가 충분치 않은 사랑의 세계. 그래서 내가 나의 마음에 대해 자꾸만 묻고 다시 확신하고, 어렵지만 소중하게 품고, 고민을 바탕으로 너와 함께 처음부터 정해나가고 맞추는 사랑, 예의의 사랑이 필요했음을 알았다. 나는 이러한 무궁무진한 사랑의 세계를 여전히 퀴어 영화에서 더 자주 발견한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이성애 규범적 대본에 적합하지 않은 주인공이고, 따라서 정해진 역할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퀴어적인 사랑 이야기에는 불안과 억압만큼이나 희망과 자유의 씨앗이 있다. 


     최근 두 레즈비언 영화가 개봉했다. 유독 조용했던 겨울의 <윤희에게(2019)>, 그리고 뜨겁게 고동치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를 관통한 세심한 관계성과 예의 바른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윤희에게>: 침묵의 겨울에서 새 봄 속으로

     <윤희에게>는 제목에서 보이듯 쥰이 윤희를 위해 쓴 편지로부터 시작한다. 윤희와 쥰은 고등학생 시절에 서로를 사랑했지만 쥰이 일본 오타루로 이사 간 후로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안 했다기보다는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그 시간 동안 쥰은 윤희에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계속해서 처음부터 적어 내렸다. 쥰은 수의사가 되었고 윤희는 남자 고등학교의 급식실에서 일하며 서로 사뭇 다른 궤적을 살게 되었다. 윤희의 얼굴에는 오랫동안 무언가를 포기한 사람 특유의 지친 기운이 새겨졌다. 그는 남동생의 대학등록금을 지원해주기 위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곧바로 일터로 나가야 했고, 동성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들킨’ 후엔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했다. 이제는 평범한 일상의 쳇바퀴를 돌면서 그저 딸 새봄을 위해서 꾸역꾸역 살아간다. 영화는 쥰의 고모 마사코가 쥰이 쓴 편지 한 통을 몰래 윤희에게 부치고, 그 편지를 윤희가 아닌 새봄이 먼저 읽으면서 시작한다. 엄마의 첫사랑을 알게 된 새봄은 윤희와 쥰을 재회시키기 위한 오타루 여행을 계획한다.




충분하고 느슨하게

     <윤희에게>의 성인 남성 캐릭터들은 쥰과 윤희가 감내하며 살아가는 일상적인 불편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지끈한 두통을 느끼는 쥰에게 남자 사촌 류스케는 괜찮은 한국인 남성을 소개해주겠다며 만나보라고 권한다. 쥰이 거절하고 무시해도, 고모가 눈치를 보며 말려도 류스케만은 쥰의 언짢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답답했던 쥰은 결국 류스케를 두고 집까지 혼자 걸어간다. 윤희의 전남편 인호 역시 평범한 무례함으로 무장되어있다. 왜 엄마랑 이혼했냐는 새봄의 질문에 그는 함부로 윤희가 “남을 외롭게 하는 사람”이라고 단정한다. 인호는 술에 취할 때마다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윤희의 집 앞에 찾아간다. 윤희는 그런 방문이 괴롭고 두렵지만, 인호는 자기 연민에 도취해 윤희의 마음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못한다. 현실에서도 류스케나 인호의 것과 닮은 마음과 표현 방식을 흔히 찾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편함이 줄지는 않는다.

 

     악의 없이 유해한 두 사람과는 달리, 영화 속의 여성들은 느슨하게 연대하며 서로의 세계에 동행하되 함부로 침투하지는 않는다. 쥰은 부모님이 이혼한 후로 고모와 둘이 살고, 윤희 또한 이혼 후 고등학생인 딸 새봄과 둘이 산다. ‘정상 가족’에서 이탈한 채로 함께 살아가는 이 여자 성원들 간의 관계는 서로 닮았다. 윤희는 딸 새봄의 행적을 감시하거나 통제하려 들지 않는다. “나 자꾸 (엄마한테) 신세 지게 만들지 마. 그거 다 빚이야” 등의 차가운 말도 툭툭 내뱉는 새봄에게 부모 특유의 뻔한 호통 한 번 치지 않는다. 새봄이 오타루에 도착하자마자 “오전에는 각자 시간 보내자”고 선언했을 때도 윤희는 대체 무슨 꿍꿍이냐고 한 번 물은 뒤로 더는 추궁하지 않는다. 모녀는 실제로 오타루 여행 내내 많은 시간을 따로 보낸 후 느즈막이 만나서 함께 걷고 쉰다.


     영화는 그렇다고 해서 침묵이 무조건 방치와 무관심을 의미하지는 않음을, 오히려 배려와 기다림의 소중한 증거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윤희는 새봄과 함께 오타루의 길거리를 걷다가 무심하게 라이터를 내놓으라고 말한다. 새봄은 자신이 담배 피는 것을 엄마가 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지만, 라이터를 받은 윤희는 덤덤하게 담뱃불을 붙인다. 이후 둘이 함께 눈사람을 만드는 씬에서도, 윤희가 장갑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아무렇지도 않게 새봄이 말한 적 없는 남자친구에 대해서 언급하자 새봄은 깜짝 놀란다.


“장갑 하나 사줘? 왜 한 쪽만 끼고 다녀”

“아니 이거 의미가 좀 있는 거라”

“남친이 사줬어?”

“어?!”

“너 남자친구 있잖아, 경수”

“와 나 소름 돋았어. 어떻게 이름까지 알아?

근데 왜 모른 척하고 있었대?”

“기다렸지 뭐. 언제 말하나 보자-하고.”


     이 대사가 <윤희에게>를 관통한다고 할 수 있다. 상대방이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 그리고 충분히 준비되었을 때 말해주기를 그저 기다리는 것. 윤희는 새봄의 선택과 그 속도를 존중해주면서 적당한 거리에서 딸을 돌본다.




     그 존중 속에서 자란 새봄도 엄마를 보살피고 가늠하는 법을 배웠으며, 혼자서 조용히 이해하려 한다. 앞서 언급했듯 마사코와 새봄은 주인공들보다도 먼저 등장하여 관객과 함께 쥰과 윤희가 “용기 내지 못해” 말한 적 없는 애틋한 마음에 대해 알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쥰과 윤희에게 직접 그 관계에 대해 묻지 않는다. 마사코와 새봄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위해 능청스럽게 연기하고 진실을 독촉하지 않으면서도 최선을 다해 그들의 행복을 위한다. 어린 새봄의 경우, 엄마가 첫사랑과 재회할 수 있게끔 겨울 여행을 계획할 정도로 열의가 넘치지만, 아직 엄마의 마음을 알아채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들키는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 영화 속 여성 중 가장 연장자인 마사코는 특히나 조용한 통찰에 도가 튼 듯하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장례식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집에 돌아온 쥰을 고모가 조용히 안아주는 씬을 좋아했으리라 확신한다. 세심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녀가 건넨 위로는 정확한 타이밍, 적당한 온도로 쥰을 넘어 우리마저 위안해줄 수 있을 정도였으니.


     윤희는 여행의 마지막 날 저녁이 되어서야 쥰을 만난다. 그마저도 새봄의 계략으로 인한 마주침이었다. 놀랍게도 영화는 우리가 모두 윤희와 쥰의 재회를 기대하게끔 만들어놓고는, 그 절정의 순간을 호들갑스럽게 강조하지도, 오래 보여주지도 않는다. 긴 눈 맞춤에 이어 “오랜만”이라는 짧은 인사, 그리고 함께 눈을 밟으며 소복소복 걷는 발소리가 전부다. 우리는 그들이 나눈 대화가 편지만큼 애틋하고 진솔했을지, 절절한 키스 한 번은 나눌 수 있었을지, 아니 하물며 20년간의 침묵과 고독을 뒤로하고 손을 잡을 용기조차 낼 수 있었을지도 전혀 알 수 없다. 엄마의 과거를 그렇게나 궁금해하고 고민했으면서도 윤희와 쥰이 마주치는 걸 확인하자마자 후련하게 뒤돌아서서 자기 갈 길을 가는 새봄처럼, 영화 또한 윤희와 쥰을 위해 충분한 존중의 거리를 확보해준다.

 


사랑이 태어나는 품

     한편,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윤희와 쥰이 직접 소통하는 장면이나 과거 회상이 적은데도 왜 우리가 그들을 이토록 애틋하게 응원하게 되는지 생각해볼 만하다. 내 감상을 풀어내자면 <윤희에게>는 희고 말갛고 느린 이야기다. 시공간의 공백을 채우려 애쓰기는커녕, 오히려 그 공백을 중심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다. 하얀 설원에서 모녀가 함께 천천히 걷는 모습, 쥰과 마사코가 눈을 치우는 모습 등을 오래도록 보여줄 뿐 아니라, 발췌할 대사가 거의 없을 정도로 말수가 적고, 팝콘을 씹기는커녕 옆 좌석 관객에게 내 숨소리가 들릴까봐 두려울 정도로 고요한 영화다. 이 조용한 영화 속의 어떤 단서들이 윤희와 쥰의 사랑을 설득력 있게 만드는 걸까?

 



“윤희, 너는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었어.”

     윤희는 현재 피곤하고 비루한 삶을 살고 있지만, 우리는 지친 윤희를 직접 보기 전에 쥰의 진심 어린 편지로부터 먼저 윤희를 소개받는다. 쥰의 그 소중한 마음을 내내 보고 듣기 때문에 우리에게조차 윤희가 아름답고 소중한 누군가가 되어버린다. 한편 쥰은 윤희에게만은 한없이 부드럽고 조심스럽다. 마음을 끝없이 곱씹고 삼키면서 예쁜 말들을 적어 내린다 (둘의 관계에서는 윤희가 ‘상-부치’다). 그는 결혼해서 자신을 이미 한참 전에 잊었을지도 모르는 윤희에게 자주 절절한 사랑의 시를 쓰고, 폐를 끼칠까 염려되어 그 편지들을 부치지도 못하고 쌓아둔다. 그러나 자신을 짝사랑하는 료코를 만날 때면 쥰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고독한 무표정과 침묵으로 일관하고, 그때의 모습은 평소의 윤희를 닮았다. 그는 정체성을 숨기는 사람에게 상처가 될 게 뻔한 매정한 말로 료코가 미처 꺼내지도 못한 진심을 미리 단호하게 묻어버린다.

“혹시, 료코씨도 여태까지 숨기고 살아온 게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숨기고 살아요.”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 태어나는 윤희와 쥰이 평소보다 더욱 아름다운 존재가 될 뿐 아니라, 윤희와 쥰이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닮았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점차 당연하게 느껴진다. 엄마에게 “(경수) 이름까지 알아?”라고 묻는 새봄과 고모에게 “(윤희 딸의) 이름도 아는 거야?!”라고 묻는 쥰. 영화는 유사한 대사와 장면을 장치로 삼아 윤희가 사랑하는 두 사람인 새봄과 쥰을 직접적으로 겹쳐 보이게 만들기도 하고, 윤희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윤희처럼 담배를 피운다는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편 쥰이 사랑하는 고모는 오타루의 조용한 겨울을 딱 좋아하고, 쥰은 윤희 또한 그런 겨울의 오타루를 사랑할 것이라고 적는다.




“고모는 겨울의 오타루와 어울리는 사람이야. 겨울의 오타루엔 눈과 달, 밤과 고요뿐이거든.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이곳은 너와도 잘 어울리는 곳이라고. 너도 마사코 고모와 나처럼, 분명 이곳을 좋아할 거라고.”


 

     무엇보다도 윤희와 쥰의 사랑은 그 주변 사람들이 간절하게 응원하고 돕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연애는 당사자들의 자유로운 의지와 합의를 필요로 하지만, 그 외에도 당사자들이 경험하는 다른 관계, 그들이 몸담은 사회나 이전 삶의 맥락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윤희에게>는 사회적 편견 등의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끊기고 잊힌 사랑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아픔을 위로하듯이 둘의 재회 또한 타인들, 새봄과 마사코의 전폭적인 지지와 도움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진다. 윤희와 쥰의 가장 친밀한 존재인 새봄과 마사코가 워낙 애정 어린 지지를 보내며 그들의 행복을 염원하기 때문에, 우리도 자연히 윤희와 쥰이 그저 마음 놓고 사랑했으면 하게 되는 게 아닐까. 다채로운 새봄과 마사코의 캐릭터,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윤희와 쥰의 사랑은 고립되지 않고 맥락을 부여받는다.



봄맞이

     윤희와 쥰의 관계도 아름답고 마음이 아리도록 소중하긴 하지만, 그들의 경험은 너무 아프다. 자신을 숨기는 데에 길든 그들의 움직임과 얼굴에는 어떠한 영구적인 상실과 침잠의 흔적이 새겨졌다. 영화가 제시하는 후세대의 이상향은 새봄과 경수가 지닌 관계로 느껴졌다.


     새봄은 여러 면에서 윤희가 간절히 소망했으나 얻지 못한 것들을 대리하는 존재다. 딸이라는 이유로 대학을 다니지 못한 윤희를 위로하듯 새봄은 무사히 대학에 진학할 예정이다. 또한, 새봄은 고등학교 3학년임에도 가정의 개입이 없는 연애를 한다. 윤희의 겨울 안에서 포근하게 자라 새 봄을 산다. 이런 새봄이와 사귀는 경수는 윤희의 전남편 인호와는 달리 무례한 신파극을 연기하지 않는다. 영화 초반부에 새봄은 엄마를 향한 연애편지를 읽은 후 깊은 고민에 빠지는데, 경수에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줄 수도 없어 혼자 끙끙댄다. 경수는 무슨 일인지, 괜찮은 것인지 묻지만 새봄은 퉁명스럽게 대꾸하기도, 오늘은 그냥 가달라고 힘없이 부탁하기도 한다. 그때 경수는 대답을 재촉하거나 똑같이 부정적인 감정으로 맞받아치지 않고 새봄이 혼자서 감정과 상황을 소화할 시간을 준다.

“좀 괜찮아지면 연락해.”


     그 외에도 경수는 새봄에게 자신 때문에 진로 계획을 바꾸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등 다른 여성 인물들처럼 한 발짝 떨어진 채 존중과 배려의 사랑을 수행한다. 그러면서도 새봄을 따라 홀로 오타루로 나설 정도로 적극적으로 돕기도 한다. 새봄과 경수를 ‘이성애자’ 커플이라고 쉽게 명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흔한 로맨스 서사에서 볼 수 있는 규범적 이성애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대사와 행동만 보면 젠더를 예측할 수 없다. 이렇게 누군가와 서로의 모습 그대로 진솔하게 사랑해본 새봄이기에 엄마의 사랑 또한 있는 그대로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윤희에게>는 ‘퀴어’를 주체로서 호명할 뿐 아니라 이상적인 수행이자 관계로서도 제시한다. ‘퀴어’라는 말은 이제 흔히 명사형으로 사용되며 특히 정체성을 일컫는 말로 자주 쓰이지만, 비규범적인 사랑을 특정인들의 정체성으로만 한정하는 태도는 다른 많은 가능성을 지운다. 오히려 퀴어적인 것을 규범적이지 않은 상태, 마음, 관계, 행위로까지 상상할 수 있어야 더욱 풍부해진다. 이 영화는 ‘퀴어’를 명사, 동사, 형용사로 다양하게 변주해가면서 퀴어적인 사람과 관계들을 보여준다. 인호, 류스케나 윤희를 정신병원으로 보낸 가족은 ‘정상성’을 대표하며 일상적인 폭력을 수행하고, 그 대척점에 있는 윤희-새봄, 마사코-쥰은 ‘정상 가족’에서 이탈해있지만 결핍되어 보이기는커녕 충만하다.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에 대한 추정이 사라지자, 사람 간에 정해진 역할도 사라져 좋아하고 싶은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한 알맞은 방법을 마음껏 고민할 수 있다. 중년인 윤희는 극 중에서 ‘엄마’만큼이나 ‘윤희’라는 본래의 이름으로 자주 불리며, 그 이름은 그저 청춘과 함께 지나가버린 것이 아니라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가장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윤희에게>는 침착하고 따뜻하게 정상성을 질문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퀴어적 상상력의 문을 열어준다.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

     마사코 고모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 대사를 반복한다. 오타루의 겨울은 고요하고 어둡다. 그러나 사실 마사코는 눈의 계절을 맞은 오타루를 누구보다 사랑하며 그곳에서 오래 살았다. 윤희도 스스로의 오랜 겨울 속에서 도무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눈을 담담하게 맞았다. 그리고 그녀의 지난한 겨울까지 아름답게 여기고 사랑해주는 주변 사람들이 있다.

엄마도 이참에 확 연애해버려. 엄마 아직 괜찮아.

아 겨울인데 왜 이렇게 눈이 안 오냐. 우리 해외여행 갈까? 눈 많이 오는 데로.”

     새봄은 삶을 소화하지 못한 채 그저 감내하는 엄마를 이끌고 윤희의 겨울 한 가운데로 뛰어 들어갔다. 간격의 미덕, 인내와 침묵의 아름다움, 그리고 배려를 위한 인물들의 최선이 오타루의 눈처럼 맑고 포근하게 쌓인다. 하루하루를 그저 고독하게 버티던 윤희가 영화의 말미에는 “작은 식당을 차리고 싶다”며 처음으로 미래에 관해서 이야기하게 되었다. 충분히 오랫동안 혼자만의 조용하고 고독한 겨울을 나던 윤희도 새봄의 손을 잡고 자신의 봄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우리들의 영원

     18세기의 프랑스에서는 혼인 전에 여성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를 보내면 남성이 결혼 여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문화가 있었다. 외모지상주의적일 뿐 아니라 남성만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일방적인 시선과 권력을 지녔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는 여성의 제한된 숙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녀원에 들어갔다가, 혼처가 정해진 언니가 자살하면서 언니의 운명을 떠맡게 되었다. “밀라노의 귀족”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남자와의 강제적인 혼인을 피하고 싶었던 그녀는 초상화를 그리러 온 화가들 앞에서 포즈를 잡지 않고 도망쳤다. 딸을 기필코 시집보내려 하고 그것이 그녀를 구원할 유일한 길이라 믿는 엘로이즈의 유사가부장 어머니는 마리안느를 고용한다. 마리안느는 아버지의 업을 이어받아 활동하고 있는 여성 화가로, 엘로이즈의 곁에 ‘산책 친구’라는 명목으로 다가선다. 그는 6일간 낮이면 엘로이즈와 함께 산책하며 그녀를 관찰하고 밤이면 기억을 되짚어 그녀를 그린다.



당신을 그리기 위해선,

“오랫동안 꿈꿔왔어요.”

“죽음을요?”

“달리기요.”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보다 신분이 낮지만, 화가라는 직업을 통해 결혼하지 않고도 금전적 자유를 지니고 살아갈 수 있다. 이에 비해 엘로이즈의 높은 신분은 그녀의 자유를 보장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속박한다. 엘로이즈는 언뜻 보기에 ‘봉건 시대의 이상적인 여성’을 둘러싼 고정관념의 집합체나 다름없다. 귀한 집 소공녀인 데다, 수녀로 살았고, 곧 정략결혼을 할 예정이며, 그림의 피사체가 된다. 그러나 이 모든 조건을 가지고 출발해 편견을 차곡차곡 부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엘로이즈가 처음 등장하는 시퀀스에서, 그는 산책하는 내내 앞장서서 걷다가 바닷가에 이르자 갑자기 절벽을 향하여 돌진한다. 자동반사적으로 죽음을 원하는 거냐고 물은 마리안느에게 엘로이즈는 숨을 헐떡이며 달리기를 염원했다고 답한다. 엘로이즈는 영화 끝까지 이와 같은 뜨거운 삶의 의지와 에너지를 드러낸다. 수영할 줄 아냐는 질문에는 “수영을 할 줄 아는지를 모른다”며 바다에 풀썩 들어가 보기도 하고, 왜 수녀원에 들어갔냐는 마리안느의 물음에는 의외로 “평등이 주는 안락함”을 언급하며 그곳에서는 많은 책을 읽고 음악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마리안느가 시집가면 좋을 것이라는 말로 그를 위로하려 하자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당신은 선택할 수 있으니 날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그림이 완성되자 마리안느는 자신이 화가라고 고백한 후 엘로이즈에게 초상화를 보여준다. 엘로이즈는 두 가지 이유로 마리안느에게 실망한다: 그렇게 틈틈이 자신을 쳐다본 것이 사랑 때문이 아니라 고작 몰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였음에, 그리고 완성된 초상 속 여인이 자신의 실제 모습과는 달리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음에.



 


“이게 당신이 바라본 내 모습인가요.”

“그것만은 아니죠. 그림에는 규칙과 관습과 이념이 있어요.”

“그 안에 영혼은 없나요. 존재감은요.”

     일방적으로 기억을 더듬어가며 엘로이즈를 재현해야 했던 마리안느는 남성 의뢰인의 선호를 고려하여, 혹은 자신이 학습한 예술계의 관습대로 엘로이즈를 고분고분한 형상으로 그린 것일 테다. 그림은 아름다웠고, 어쩌면 그 밀라노 귀족 남자의 마음에 쏙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엘로이즈의 따가운 비판에 상처받은 마리안느는 결국 자신의 손으로 첫 초상화를 뭉개버린다. 이후 엘로이즈가 초상을 위한 포즈를 취하겠다고 자원하면서 엘로이즈의 어머니는 초상을 완성할 5일의 시간을 더 주고 그동안 집을 비운다.


“당신은 웃지 않는군요.”

“분노가 언제나 승리하니까요.”

     초상을 그리는 내내도 엘로이즈는 ‘여성적’인 뮤즈 혹은 대상의 역할을 전복시킨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그려지는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한 대안적인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마리안느가 내재화한 일말의 ‘명예 남성’적인 시선과 태도마저 뒤바꾼다. 뮤즈로서 그림에 ‘협조’하기를 선언한 것부터 시작해, 마리안느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목덜미를 더 보여달라”고 말하자 “나를 남편의 시각으로 보는군요”라며 무게감 있는 농담을 던진다. 영화 속에서 가장 긴장감이 높은 순간 또한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의 관찰을 맞받아치는 장면이다. 어느 날 엘로이즈가 상처받은 마음을 숨기며 아무렇지 않다고 둘러대자, 마리안느는 의기양양하게 엘로이즈를 그리면서 자신이 알게 된 사실들을 늘어놓는다.

“당신은 당황하면 입술을 달싹이고, 화가 날 땐 눈을 깜빡이지 않아요.”

놀란 것도 잠시, 엘로이즈는 느긋하게 마리안느를 자신의 옆으로 부르더니 그의 습관을 동등한 수준으로 늘어놓는다.

“당신은 할 말이 생각나지 않으면 이마를 만져요. 당황하면 입으로 숨을 쉬죠.”

 

당신이 날 그릴 때 난 누구를 보겠어요?”

     사실은 ‘시선의 권력’을 가진 화가보다도 뮤즈가 화가를 바라보는 시간이 길다는 그녀의 재치 있는 발언 속에서 엘로이즈는 수동적인 뮤즈의 위치를 파괴하고 주체로서 태어난다. 엘로이즈가 주도적으로 그림 제작 과정에 참여하고 마리안느와 함께 사랑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그제야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제대로 그릴 수 있게 된다. 둥그런 윤곽과 선한 미소를 가진 여자를 상상해내는 대신, 엘로이즈의 굳건한 입매와 분노 서린 눈빛, 그리고 그 안에 깃든 영혼을 선연하게 담아낼 수 있게 된다.

“이번 그림은 마음에 들어.”

“내가 변했으니까.”

“내가 변한 걸 수도 있지.”


     영화 속에서 그림과 사랑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끈끈하게 얽혀있다. 좋은 그림과 사랑의 공통 재료는 평등한 시선과 소통이다.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에게 모델로서 가르쳐준 것은 둘이 서로를 사랑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나 다름없었다. 마리안느는 일방향적 시선과 섣부른 추정으로 엘로이즈를 가늠했고, 따라서 첫 그림은 실패했으며 초기의 호감은 사랑이 아닌 실망이 되었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그녀가 내재화한 무례한 폭력성을 일깨웠고, 함께 끊임없이 소통했다. 그 결과 엘로이즈는 자신의 본모습 그대로 마리안느에게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마리안느 또한 더욱 풍부한 시선을 얻었다. 그들은 제대로 된 그림과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서 변화했고, 그림과 사랑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더욱더 다채로워졌다.




환상의 시스터후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의도적으로 남성을 삭제했다. 주인공들에게 마법과 같은 사랑을 선물해준 섬에는 여자들을 태우기 위해 뱃사람 정도만이 오갈 뿐, 오래 머무는 남자가 없다. 엘로이즈의 아버지는 일절 등장하지 않고, 마리안느의 아버지도 그저 엘로이즈 어머니의 초상을 그린 화가로서만 언급된다. 심지어는 엘로이즈네 집에서 일하는 시녀 소피를 임신하게 한 남성도 등장하지 않고, 지역 축제에 모인 수십 명의 사람 중에서도 남자는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여자들만이 모인 곳에서 여성들이 모든 ‘명예 남성’적인, 혹은 주도적이고 전복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게 오로지 여성에게만 주목함으로써 같은 여자라고 해도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숙명이 극명하게 다르고, 그들이 싸우고 감내해야 하는 세계의 무게도 분명 다르다는 것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그리고선 그 수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연대를 일구어낼 방법, 현실의 장벽 앞에서 여성들이 함께 숨 쉴 방안을 모색하는 데에 집중한다.


     이상적 여성 연대는 모두를 속박하는 어머니가 떠났을 때 비로소 피어난다. 마리안느가 처음 엘로이즈네 집에 도착할 때 그녀를 맞이하는 사람은 시녀 소피고, 엘로이즈 언니의 자살이나 엘로이즈의 저항에 대해서 마리안느에게 설명해주는 사람 또한 소피다. 소피가 둘의 사랑에 의도치 않게 조력한 셈이다. 그런 소피와 엘로이즈, 그리고 마리안느만이 남은 집에서는 엘로이즈의 어머니로 대표되는 정상 규범 사회가 알지 못했거나 무시했던 두 가지 비밀 세계가 펼쳐진다: 하나가 여성 간의 성애적 사랑이라면, 또 다른 하나는 어린 소피의 원치 않은 임신과 중절이다. 이때부터 소피도 한 명의 주인공으로 부상하고,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사랑의 주인공인 동시에 소피의 삶과 선택을 조력하는 친구가 된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소피와 함께 밭으로 나가 임신중절에 필요한 약초를 따고, 소피가 두려워하지 않도록 임신중절을 도와줄 노파의 집까지 동행한다. 사회적 지위에 따르면 ‘귀족’이자 ‘주인’인 엘로이즈가 ‘평민’인 ‘시녀’를 위해 직접 부엌 공간에 가서 약을 우리고 요리를 한다. 그들은 함께 책을 읽고 의견을 나누거나 장난을 치기도 하면서 점차 신분을 초월한, 평등하고 안락한 관계를 꾸려나간다.



      시스터후드가 끈끈해지는 과정은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이 발전하는 과정과도 맞물린다. 소피와 함께 찾아간 마을 축제에서는 불 근처에 둘러 모인 여자들이 화음을 쌓아가며 노래하는데,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그들의 노래를 가만히 듣다가 불 건너편에 있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참을 수 없이 강렬한 이끌림을 느낀다. 둘의 마음이 타오를수록 마을 여자들의 노랫소리도 크고 확연해진다. 다음날 그들은 처음으로 진솔한 사랑을 나눈다. <윤희에게>에서처럼,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 또한 여성들 간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 배치되었고, 심지어는 사뭇 주술적으로 느껴지는 여성 커뮤니티의 돌림 노래 한가운데서 완성되었다.


     그림과 사랑을 분리할 수 없는 것이 영화의 중심적인 설정임을 고려하면, 세 명이 가장 친해진 순간에 마리안느가 소피를 그린다는 점을 염두에 둘만 하다. 소피가 노파에게 임신중절 시술을 받을 때 마리안느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리지만, 엘로이즈는 그 모습을 보라고 한다. 그날 밤, 엘로이즈는 소피를 눕힌 채 시술 장면을 재현하고, 마리안느에게 그 모습을 그려야만 한다고 말한다. 엘로이즈의 결심과 마리안느의 기술, 그 외에도 바라보고, 보듬고, 기억하는 시간을 거쳐 소피의 아픔은 고립되지 않고 셋이 함께 완성한 그림이 되었다. 시선과 기록에는 선택과 사랑이 서려 있다. 영화가 이전에 기록되지 않은 옛 퀴어의 삶을 그려내었듯이,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자신들이 아끼는 소피를, 그녀의 말할 수 없는 경험을 함께 기억하기로 선택했다.




영원히 영원히

     11일 중 고작 나흘간 진솔한 사랑의 감정을 나눈 그들은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섬세하게 서로를 훑어보고 차곡차곡 다가가는 모습들이 매력적이었음을 관객들은 알 수 있다. 서로의 작은 습관마저 알아챌 정도로 충분히 바라보고 이야기 나누었기 때문에, 그들은 클리셰지만 대다수 로맨스 작품이 설득력 있게 구현해내지 못하는, “있는 그대로”의 사랑을 쟁취했다. 마음이 열림에 따라 점점 자기도 모르게 물리적으로 가까워지던 그녀들은 마음의 무거운 중력을 거스르고 절제하며 거리를 확보했고, 진심을 드러내다가도 상대방의 마음을 함부로 가늠했을 때는 예의 바르게 사과하기를 반복했다. 그 조심스러운 태도가 두 사람의 사랑의 속도를 유사하게 맞추어주었으며, 서로를 믿게 했을 것이다.


“모든 연인들은 이렇게 무언가를 창조하는 느낌이 들까?”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서로의 시선, 표정, 몸, 열정, 추억의 조각들을 한데 모아 초상화뿐 아니라 둘만의 세계를 창조해내기에 이른다. 마리안느를 간직하고 싶다는 엘로이즈를 위해 마리안느는 책을 펼쳐 눈앞에 보이는 엘로이즈의 몸을, 그리고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이어 그려 두 사람이 뒤섞인 모습의 자화상을 만들어준다. 그 그림이 담긴 ‘28페이지’는 사랑을 기억하겠다는 둘만의 암호가 된다. 헤어지기 전의 마지막 밤, 둘은 자꾸만 감기는 눈을 뜨려고 애쓰면서 서로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본인들이 좋아하는 장면을 말하고 함께 곱씹으며 영원히 기억하리라고 다짐한다. 사랑을 위해 기록하는 시간을 보낸다.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한여름 밤의 꿈’은 갑작스레 끝이 나고, 그들은 다시 가부장 사회의 부품이 된다. 가부장 사회는 그들이 자신을 숨기고 연기하며 버텨내야 하는 현실로, 주인공들이 만들어내는 시스터후드나 진솔한 사랑의 이데아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돌아온 어머니 앞에서 어색한 타인들인 것처럼 연기한다. 이후 엘로이즈는 이탈리아 귀족과 결혼하고, 마리안느는 자신의 그림을 남성 귀족들이 득실득실한 전시회에 출품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실력을 인정받기 위해 아버지의 이름을 사용한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봉건 사회. 그 시대의 한계로 인해 헤어져야 했던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 것일까. 그들을 갈라놓은 모든 장벽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을 그저 가여워하기는 싫다. 어떠한 만남은 물리적인 헤어짐과 함께 끝나지 않고 평생 마음속에서 동행한다. 둘이서 함께 창조한 세심한 사랑의 기억들은 숨 막히는 삶 속에서 끝까지 뜨거운 생명력을 잃지 않게 하는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은 얼른 극장으로 달려가거나 영화를 다운받아 기다란 마지막 시퀀스를 경험해보셨으면 한다. 그 몇 분의 응시를 통해 전해지는 것은 슬픔인지, 그리움인지, 절망인지, 위안과 승리인지, 불타는 열정과 사랑인지, 혹은 그 모든 것인지.



욕망, 불망, 희망

     두 영화는 사실 여러모로 이상적이다. 그러나 눈과 달, 밤과 고요뿐인 오타루로 해외여행을 가고, 여성밖에 없는 마법 같은 섬에 갇히고 난 후, 그 비일상적인 자유 속에서야 비로소 두 영화의 사랑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 환상적인 여행 끝에 윤희는 쥰에게 단 하나의 편지도 부치지 못한 채 일상으로 돌아가고, 엘로이즈는 이탈리아의 귀족 남성과 결혼하여 마리안느와 다시는 마주하여 바라보거나 마음껏 이야기 나누지 못한다. 이런 씁쓸한 결말은 영화의 제작자들이 자유로운 여성애를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충분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의 이상적인 사랑은 그저 불가능한 사랑의 판타지라기보다, 간절한 생각 실험에 가깝다. 성적지향을 잠시 제쳐두더라도, ‘사랑’이라는 게 서로를 평등하게 바라보고 끊임없이 대화해야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면, 가부장제와 신분제의 굴레 속에서 엘로이즈는 필연적으로 여성을 사랑할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사회의 위계질서와는 분리된 수녀의 세계를 사랑했듯이 말이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가 바라보고 다가서기를 직접 합의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으니, 그녀가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한편, 윤희는 가부장적인 한국에서 여중 여고를 다녔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가 매일같이 마주하며 평등하게 소통한 사람 또한 대부분 여자였을 것이다. 자연스럽게도 그 수많은 여자들 중에서 마법 같은 한 명이 생기지 않았을까. 어린 시절 내내 여성들과의 관계를 사랑하고 그것만을 연습했던 사람이 성인이 되어서 갑자기 남성을 사랑하는 것이 과연 당연하고 보편적인 수순일까. 윤희의 이야기에선 변치 않는 마법의 주인공이 쥰이었다.


     이 영화들은 다만 이 정도 상상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지금 마주한 한계와 장벽, 고통과 인간관계를 고려했을 때 그가 어떤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가장 마땅할까? 화가와 피사체처럼 서로를 오랫동안 바라보는 관계 속에서는 어떤 마음이 피어날까, 혹은 안전한 사랑이 피어나기 위해서는 서로를 어떤 태도로 바라보아야 할까? 절대 남성과 평등해질 수 없는 사회에 사는 여자들은 어떤 관계를 경험하고, 누굴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사람을 갉아먹고 지치게 하지 않는 세심하고 예의 바른 사랑이 있을까? 혹은 그를 넘어, 어떤 관계들은 물리적 만남이 끝이 나고서도 영원토록 사람을 살게 하는 동력으로 남을 수 있을까? 하는, 이상적이기는커녕 지극히 현실적이고 중요한 상상들. 이런 사고 실험의 결말이 언뜻 보기에 비극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제자리로 돌아간 윤희와 엘로이즈 모두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고, 쥰과 마리안느 또한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통해 이러한 관계와 사랑의 가능성을 목격하고 상상할 수 있게 된 우리도 그들과 함께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성애’라는 정상성부터 빗나가며 시작하는 영화들은 매사에 조심스럽다. 이성애 규범성과 남성우월주의의 장벽이 겹겹이 쌓인 세상에서, 여성애자들의 영화는 필연적으로 사랑!을 함부로 선언하지 못하고 사랑?을 차곡차곡 질문하며 나아간다. 우리가 아는 관계와 연애의 문법을 유려하게 단언하기는커녕, 그 문법 자체를 뜯어보며 주연들만을 위한 고유한 언어와 이야기를 천천히 직조한다. 애석하게도 그 정도 섬세함과 예의는 있어야 이 끈질긴 이성애 규범적 사회 속에서도 여자들이 서로를 믿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며, 그래야 ‘이 정도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겠지?’라며 규범성을 잔뜩 내재화한 관객마저 납득시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간절한 사랑의 서사는 어떠한 감정과 과정의 비약 없이 충만하다. 감히 완전하다고 말하겠다.


     충분한 침묵을 주는 눈 같은 영화와 충분히 쳐다보는 불같은 영화가 연달아 나오다니. 매년 첫눈이 오면 <윤희에게>를 챙겨보고 마음의 불씨가 꺼지는 것 같을 때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찾아보게 될 것만 같다. 이 두 영화에 요동치고 위안받은 사람이라면 <아가씨(2016)>,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 <캐롤(2015)>을 포함한 다른 ‘레즈비언 영화’도 찾아보았으면 한다. 놀랍도록 정치적이고, 위트 있고, 세심한 사랑의 세계가 열릴 것이다. 필자의 충만한 선언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영화들이 많은 이들에게 “나의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같은 영화들이 될 것이다. 웬만한 진심 없는 사랑은 성에 차지 않고, 엄청난 사랑을 당당하게 상상하게 될 테니.



글 편집위원 노랑 (raryoo61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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