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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국회에서도 약(弱)을 파나요?
A. 네, 많이 팝니다!
※ 2020년 9월 2일, 미래통합당의 당명이 ‘국민의힘’으로 변경되었습니다. 하지만 글 전반의 시기, 그리고 인용된 사건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과거의 이름이라는 판단이 들어, 본 글에서는 미래통합당의 이름을 국민의힘으로 수정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독자분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세상이 변한다. 변했고, 변하고 있다. 기득권만이 온전한 것들을 누릴 수 있었던 말도 안 되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숨어있던 이들은 얼굴을 드러냈고, 침묵하던 이들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마땅히 그래야 했던 것들이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구불구불, 때론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서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일 인분의 자리! 무언갈 쟁취하기 위해 흘렸던 땀과 눈물, 가끔은 피로 얼룩진 과거를 지나 결국 내 자리를 찾아 정착하고자 한다. 그런데 어라. 고개를 들어보니, 이곳이 과연 나의 자리가 맞는 건가?
코로나로 인해 한반도를 포함한 전 지구가 고통을 겪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올바른 일꾼을 뽑고자 하는 열망은 가득했다. 지난 2020년 4월 15일에 치러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는 최종 66.2%의 투표율로 마무리되어 한국은 꽤 성공적으로 총선을 기억하게 되었다. 어떤 정당이 웃고 울었는지는 길게 두고 보아야겠지만, 유독 이번 총선에서는 정당보다도 눈에 띄는 인물이 등장했다. 바로 최초의 시각장애 여성 국회의원, 김예지다. 그녀는 미래통합당에서 11번으로 등록된 비례대표 후보였고 결과적으로 비례대표 국회의원의 자리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그녀의 옆에는 국회의원이라는 직위보다 중요하고 의미 있는 수식이 함께 등장하곤 하는데, 아까도 언급했던 그 긴 소개, 바로 ‘최초’의 ‘시각장애’‘여성’ 국회의원이라는 것이다. 최초라는 말 하나만 붙어도 열광하는 대중들 앞에서, 약자로서 긴 세월을 버텨왔을 그 수식이 주는 감상은 새삼 달랐다. 보수를 표방하는 정당에 대해 네거티브가 강한 젊은 세대와 SNS 사용자들 사이에서 그녀에 대한 반응이 무감과 긍정을 넘어 응원에 가까웠다는 것이 대표적 예시가 될 수 있겠다.
정치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예지 의원의 안내견인 ‘조이’의 국회 출입에 대해 상당히 이례적으로 여야가 합동하여 흔쾌히 OK 신호를 보낸 것을 생각해볼까. 지난 2004년, 한국 최초의 시각장애 국회의원이었던 정화원 전 한나라당 의원의 경우 '의원은 본회의 또는 위원회의 회의장에 회의 진행에 방해가 되는 물건이나 음식물을 반입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국회법 제148조에 가로막혀 안내견 출입을 허락받지 못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16년이 지난 지금, 시각장애인의 안내견이 어떻게 ‘회의 진행에 방해가 되는 물건’일 수 있겠냐는 의견이 다수가 되었고 결국 조이는 모든 이들의 박수를 받으며 국회를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의당의 심상정 대표와 더불어민주당의 이석현 의원이 김예지 의원 및 조이를 향한 지지와 응원의 글, 그리고 그에 대해 김예지 의원과 미래한국당의 원유철 대표가 감사의 답글을 SNS에 기재하는 등 정치판에서 보기 드문 훈훈한 광경이 생기기도 했다. 1
그런데 이 흐뭇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감동도 잠시, 슬그머니 그런 생각이 든다. 여성이자 시각장애가 있는 국회의원이 미래통합당 출신이라니. 특히나 김예지 의원은 사회 내 약자로서의 위치가 다분히 강렬했던 인물이기에 그녀가 소속된 정당이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정당이라는 사실은 이제 다른 의미의 강렬함을 선사한다. 많은 국민에게 각인된 미래통합당의 모습은, 소수자와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과는 엇갈린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었나. 지금까지 그들이 보여준 당 논조의 반대 척도에 선 중심인물이 어째서 빨간 신발을 신게 된 것인가.
하지만 김예지 의원이 당선된 것을 보며 들었던 위화감은, 사실 처음이 아니다. 김예지 의원에 앞서서 자유한국당 소속 시절의 이자스민 의원을 바라보면서도 그랬고, 2 새로운 보수의 혁신을 일구겠다며 등장한 미래통합당의 청년 당원들을 바라보면서도 그랬다. 여성, 장애인, 이주민, 청년 등등. 왜 사회의 비기득권층, 혹은 약자들이 정치 무대에 서게 된 발판이 ‘그’곳이어야 했을까? 소수자성을 지닌 집단의 일원으로서 어떤 정치적 논조와 정치적 기대를 바라며 정치계에 뛰어들었을까? 그리고 정치 무대에서 활동하는 약자들을 움직이는 것은 그들 자신의 정치적 의지일까, 아니면 거대 정당 혹은 정치 전반의 활용 전략일까?
세상이 변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하고 있지만, 정의와는 거리가 먼 의도로 겉핥기식 변화를 끌어내 박수를 받는 이들이 존재한다. 모든 공간에 해당하지만, 유독 정치권에서 보이는 이들, 그리고 그들을 방관하는 거대한 정치 시스템이 눈에 밟혀 이들에 대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사회적 소수자와 그들을 정치로 끌어들이는 사람들, 약자와 그들을 이용하는 강자의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려 한다. 우리도 변하고 있다며 항변하고 호소하는 정치인들에게 무작정 박수를 보내지 않고, 변하는 ‘척’만 하는 그 의뭉한 속내를 들추어 감히 분노해보려 한다.
1.
약자를 이용하는 정치계의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정당을 분석하고 들여다보아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현존하는 모든 정당을 다룰 수 없음을 독자들에게 미리 양해 구한다. 따라서, 본론을 여는 첫 번째 타깃으로 미래통합당을 설정하려 한다.
사실 약자의 정치를 언급하기 위해서 그들 중 일부가 몸담은 보수 정당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그리고 미래통합당으로까지 열심히 탈바꿈했지만 사실상 바뀐 것이라곤 당 대표 이름뿐이라는 한국의 상징적 보수당은 지금껏 사회의 소수자들에 대해 어떤 정치적 논조를 유지해왔나. 사실, 정치에 꾸준한 관심을 주던 이들이 아니더라도 쉽게 연상되는 장면들이 있다. “1등 신붓감은 예쁜 여자 선생님, 2등 신붓감은 못생긴 여자 선생님, 3등 신붓감은 이혼한 여자 선생님, 4등 신붓감은 애 딸린 여자 선생님이다”라는 발언은 가벼울 정도다. 3 대선 후보에게 “간밤에 잘 쉬셨냐, 예전 관찰사셨다면 관기(官妓)라도 하나 넣어드렸을 텐데”라고 말하는 도지사와 “어제 온 게 정 지사가 보낸 거 아니었나?”라고 대답하는 대선후보의 ‘농담’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4 인용한 두 사건은 모두 사적인 장소가 아닌 대중과 기자들 앞에서 자발적으로 내뱉어진 발언으로 당시 해당 정치인들이 젠더 문제에 대해 얼마나 둔감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약 10여 년 전의 일로 상당히 오래전의 언사이지만 이와 같은 여성 비하 발언 또는 여성 비하 행태는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변화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사회 내부와 대중 사이에서 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특히나 이미지 관리가 중요한 정치인들의 경우 특정 집단을 향한 비하, 혐오 발언에 발끈하며 자기 일인 것마냥 대중 앞에 나서서 사과를 촉구한다. 하지만 보는 눈이 사라지는 사적인 장소에서는 그저 농담 삼아 따가운 말과 손짓을 던진다. 몇몇은 ‘너 참 예민하다’는 말로 피해자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때로는 성범죄를 저질렀던 일들을 덮으려다 밝혀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대놓고’ 하거나, ‘숨어서’ 하거나, 둘 중 어떤 것이 더 최악인지는 굳이 고르고 싶지도 않지만, 여전히 똑같은 속내를 가진 이들에게서 풍기는 구린내에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단지 ‘여성’ 비하 발언뿐일까. 정치계에서 그간 논란이 된 비하 발언은 그 앞에 붙여야 하는 대상만 바뀔 뿐, 참 많이도 나왔다. 한쪽 눈에 의안을 착용한 동료 국회의원에게 “눈이 삐뚤어졌다”라는 말을 SNS에 공격적으로 게시한 일도 있었고, 5 공개 초청토론회에서 “나이가 들면 다 장애인이 된다”라는 말을 내뱉은 일도 있었다. 6 모두 명백한 장애 비하 발언들이지만 해당 발화자들은 사과가 아닌 합의를 통해 일을 무마하려 했다. 누군가는 자신의 발언에 어떤 문제가 있느냐며 오히려 당당하게 반박하기도 했다. 이들에게 일반적인 핵심은 다르다. 문제가 되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 인생에 누가 될 수 있는 말을 했다는 것. 결국, 또다시 모른 척, 죄송한 척, 반성한 척. 앞서 언급한 ‘교묘하다’는 말과 너무나 잘 어울리지 않는가.
사실 이 모든 ‘비하 발언’을 모아서 하나의 글에 담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양도 양이거니와, 보는 이들을 기가 막히게 만드는 일들이 무자비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정 인물을 꼬집어 비판하거나 한두 가지 사건에만 집중하여 분노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크고 작은 논란거리는 정치에 뛰어드는 사람들의 수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어디서부터 잘못 끼워진 고리인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정치권은 끊임없이 혐오와 상처를 재생산하고 있다.
따라서 미래통합당(구 한나라당, 새누리당, 등등)의 소속 위원들의 인용된 발언들을 놓고 볼 때, 우리는 비교적 쉽게 느낄 수 있다. 소수자의 인권에 대해 이들이 얼마나 무감하고 둔감한지, 그리고 동시에 이들의 정치적 스탠스 자체가 보수, 진보 진영을 떠나 약자를 보호하는 데에 있어 얼마나 무력할 수밖에 없는지.
└ 나름의 새로움?
하지만 최근, 그 무력함 뒤에 따라 나오는 얼굴들은 우리의 지배적인 예측과 편견보다 훨씬 다양하고, 다채로우며, 젊다. 흔한 편견으로 얽혀 꽉 막힌 옛날 사람들만의 ‘보수’진영이 아니라, 색다른 보수로 등장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멈춰있는 발자국이 아니라, 느리지만 확실한 걸음을 걷고자 하는 이들은 한국 정치 내에서 보수 정당에 새로운 충격과 이미지 변화의 기회를 선사한다.
한국 최초의 귀화자 국회의원인 이자스민 의원은 정치활동을 새누리당에서 시작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 의원으로 선출되며 그녀는 대중과 여타 정당에 신선한 충격을 몰고 왔다. 한국으로 귀화하였지만, 필리핀 출신이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잃지 않았고 그녀는 이주민 단체 활동 경험을 배경으로 삼아 관련된 법안 발의를 주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자스민 의원의 선거 기간 동안 당시 야당은 그녀의 과거 행적에 대한 검증공방을 시도했는데, 이때 적지 않은 수의 대중들이 비판을 넘어선 인종 차별적 여론을 형성한 바가 있다. 몇몇은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며 불쾌한 반응을 드러내기도 했다. 7 이에 대하여 새누리당은 야당의 공격과 대중의 반응은 명백한 제노포빅 행태라며 반박했다. 인종차별 언행을 비판하는 새누리당이라니, 상당히 흥미를 돋우는 연결고리인 셈이다.
서론에서 글을 열었던 김예지 의원 또한 정치 인생을 미래통합당에서 시작했다. 최근 총선에서 당선되어 국회에 입성한 그녀는 시각장애 여성이라는 소수성을 함께 가지고 나타나 여야의 대통합을 이뤄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1대 국회가 시작된 지 아직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김예지 의원의 눈에 띄는 정치활동을 뽑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가 보수당원이라는 타이틀을 직접 선택함으로써 당내, 그리고 한국 정당 정치에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는 두고 볼 일이다. 미래통합당을 정치 입문의 첫걸음으로 선택했으나 그녀 또한 과거의 보수 정치인들과 똑같을 것이라는 손가락질은 더는 통하지 않을 테다. 다만 주목할 것은 보수 정당에 김예지 의원이 입당하게 되면서 과연 기존의 우리가 알고 있던 미래통합당이 이번엔 바뀌게 될 것인가, 바로 그 지점이다.
이주민과 장애 여성뿐만 아니라 청년 당원들 또한 보수의 얼굴을 변화시키는 역동적인 힘 중 하나다. 흔히들 젊음의 상징은 힘이자 변화를 수용하는 유연함이라고들 하지만 그것을 곧바로 ‘진보’성향과 연결 짓기는 어렵다. 정치 성향은 가장 개인적인 것 중 하나로, 청년은 전부 진보 정당의 지지자 내지는 최소한의 중도층일 것이란 예측은 오히려 개인의 정치 사상적 논거를 무시하는 일방적 편 가르기일 수 있다. 하지만 ‘정치적 편 가르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청년을 사례로 가져온 것은 아니다. 이자스민 의원, 김예지 의원에 이어서 보수 성향임을 드러내는 젊은이들, 다시 말해 보수 정당의 당원이 된 젊은 청년들은 당내에서 어떤 역할을 가지는지, 그리고 이들을 앞세운 보수 세력의 전략은 무엇이 되는지에 집중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이들이 더불어민주당도, 정의당도 아닌 ‘미래통합당’을 선택한 것은 비판받을 일이 아니다. 동시에 개인이 특정 정당을 선택하는 것은 의구심을 가질 일 또한 아니다. 다만 그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정치 성향에 따라 정당을 선택한 것에 반해, 그들을 당원으로 데려오며 미래통합당이 얻었을 정치적 이득과 당내 정치의 전략은 상당히 계산적인 면이 없지 않다. 소수자의 손을 잡고 국민 앞에 인사하며 새로운 보수가 되겠다고 우렁차게 외치는 식상한 쇼는 계속되는 반면, 실상 바뀌는 것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의원이던 시절 이자스민 의원은 법안 발의에도 열정적이었고, 국회에도 성실히 출석했다. 회의 불참석은 물론이고 정치를 하려는 것인지 말싸움을 하려는 것인지 모를 몇 의원들보다야 훨씬 준수하고 활동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야 모두의 지지층에게서 무시와 비방을 포함한 인종 차별적 발언을 들어야 했다. 8 당내에서는 마치 국회의원이 아니라 정당의 ‘이주민 대표자’라도 세워놓은 것 같은 처우를 받기도 했다. 다문화 가정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놓았으니 문제가 있으면 이자스민에게 가라, 또는 지역구에 항의할 것이 있는 이주민들에게조차 이자스민 의원에게 가보라고 대응하는 일이 잦았다. 9 한국 내의 이주민 대표자로의 지위를 대우하고 존중하기보다는, 관련된 일을 그녀에게 떠넘기는 듯한 태도였다. 홀로 싸우는 느낌이 들곤 했다며 회상하던 이자스민 의원의 말에서 우리는 소수자 개인이 짊어져야 할 정치적 부담감을 간접적으로나마 체감할 수 있다. ‘함께’ 변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옆에는 있겠지만) 너 혼자’ 변화시켜보라는 무책임한 권한 부가는 결과적으로 개인의 정치 활동력을 소모했고 변화를 기대한 국민의 고개를 돌리게 했다.
제21대 총선에서 열심히 뛰었던 청년 정치인들의 회의도 짙다. 그들은 본래 미래통합당의 주류와는 분명 다른 결의 논조와 신념을 띠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당내 분위기 및 당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바꾸고자 하는 열망이 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여당 지지자들에게는 비판받고 자당 지지자들에게는 수용되지 못하는 ‘새로움’은 그들이 속한 당에 큰 변혁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극우 유튜버와 정당 소속 정치인의 막말로 인해 분홍색만 보아도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이 많다며 본인이 속한 당을 꼬집어보지만, 여전히 그들은 자신만의 싸움을 하는 듯 보인다. 미래통합당은 청년의 얼굴을 앞세워 그간 부재하던 소통과 공감에서 비롯된 문제의식을 일깨우려 했다. 하지만 되려 청년은 당내에서 좌절감을 겪어야 했다. 노련하고 권위 높은 중견 정치인들 사이에서 유의미한 수준의 비판을 뱉기도 어려웠고 그것을 돕는 충분한 지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한 인터뷰에서 당의 전망과 장기적 계획에 관해 묻자, 당시 미래통합당의 청년 당원들은 “모르겠다”며 확신 없는 말을 되풀이했다는 문장이 등장한다. 10 모를 수밖에 없다. 호기는 묵직하게 앞길을 가로막은 기성세대와 마주 보며 그 방향성을 잃어가고 있다. 그들이 바란 진짜 보수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고, 그 사실을 인지할 때마다 우리는 바뀌어야 함을 강하게 주장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꼭대기까지 닿질 못한다.
슬프게도 보수 세력의 소수자들에 관한 자료를 찾을 때마다 빠지지 않는 단어가 있다. “얼굴마담”. 유흥업소에서 그곳을 대표하는 여성을 지칭할 때 쓰이던 말이 사회 전반에 퍼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정치계의 소수자들에게까지 사용되고 있다. 여성, 이주민, 장애인, 청년, 그 외 다양한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정치계에 등장할 때마다 이번엔 어떤 ‘얼굴마담’이냐며 조롱하는 반응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수자 스스로조차 회의감에 휩싸여 자기 자신을 소속 당의 얼굴마담 아니겠냐며 조소하는 일도 적지 않다. 정치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의미 있는 활동을 보여주는 ‘주체’가 아니라, 우리 당에도 이런 사람이 있음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객체’로 전락하는 것이다. 변화는커녕, 소수자들은 점차 당내 논리에 둘러싸여 빠져나오기 어려운 수렁에 갇히면서 움직이기도 힘들어진다. 약자를 이용하는 정당의 전략은 그만큼 교묘하고 넓게 뻗어있으며, 무시하기 힘들 만큼 강하다.
2.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 범위에서 벗어난 다양한 정체성의 정치인들이 소속 정당의 논리에 의해 이용되고 있음을 말했지만, 그 이용에 앞서서 전제되는 것은 ‘수용’이다. 비록 이주민이지만, 비록 장애가 있는 여성이지만, 어쨌든 특정 정당에 기용되었고 최종적으로 본인이 그 정당을 선택해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반대만큼 응원의 목소리도 컸다. 정당 지지자들에게는 은근한 기대를 품게 했고, 당원들에게는 그럴듯한 체면을 세워주었다. 하지만 이렇듯 ‘수용 가능한 소수자’들은 정치 무대에 발을 담글 수 있는 환경이 되어가고 있는 것에 반해, 아예 그 무대를 바라기조차 어려운 소수자들이 존재한다. 후자 중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바로 ‘퀴어’ 집단이다. 퀴어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언제나 정치 무대에서는 배제되었고 감히 담론화되기도 어려웠다. 단순히 정치계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성 소수자 집단은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이성애’를 당연시하는 사회 내부에서 구성원으로서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한다. 일반 사회보다도 더 좁고 꽉 막힌 정치계에 이러한 풍조가 그대로 옮겨가는 것 또한 당연하다.
정치계에서 퀴어 이슈를 다루는 방식은 단순한 차별보다는 아예 언급 자체를 꺼리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피하기 힘든 직격타로 질문이 들어오는 경우라면 적당히 돌려 말함으로써 그 어느 것도 정해지지 않은 것처럼 모호한 태도를 유지한다. 주로 총선이나 대선 기간이 다가오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제이지만 그 어떤 유력 후보도 온전한 긍정 의견을 보낸 적이 없다. 우리가 이 계산적인 인간들에게 화가 나는 지점은 확실하다. 정치인들은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퀴어 이슈에 대해 ‘그들의 정체성은 잘못되었다’라거나 ‘나는 그들의 사랑을 반대한다’라는 말을 하는 순간 인권단체와 그 외 다수의 소수자 집단에서 들어올 항의,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 등, 자신의 정치 인생에 끼어들 수많은 걸림돌. 그렇기에 적당히 언급을 꺼리고, 질문을 무시하며, 호소를 지나친다. 정치판에서 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금이 될 때도, 때로는 독이 될 때도 있다. 그들에게 퀴어 이슈는 어떤 반응을 보이든 도저히 금이 될 수 없는 대표적인 장애물이다.
└ 필터가 필요 없어요! vs 돌려 돌려, 돌림 말!
지난 21대 총선에서 오세훈 후보와 고민정 후보 간의 질의응답이 떠오른다. TV 토론회에서 “동성애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반대한다.”며 질문을 던진 오세훈 후보와 “동성애의 경우 국민적 동의가 필요하다”라고 대답한 고민정 후보의 대화는 기가 막힌다. 11 사실 이는 전형적인 두 유형의 반응으로, 대놓고 혐오를 서슴지 않는 <유형 1>과 자신의 사견을 숨긴 채 유한 방식으로 도망가려는 <유형 2> 간의 대화이다. 찬반논리로 해석해서는 안 될 퀴어 이슈에 대해 한심한 질문을 던진 사람과 우회적 표현과 함께 또 다른 혐오의 단상을 보여주는 한심한 답변을 하는 사람의 조화는 처음이 아니다. 누군가는 장관 후보자 청문회에서 느닷없이 후보자의 퀴어 축제 참여 여부에 대해 진위를 확인하며 공격하거나, 국민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가족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동성혼과 동성애는 분명 반대해야 할 일”이라는 의견을 당당히 밝히기도 한다. 12 이들은 성 소수자라는 약자를 정치적 현안으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한 혐오감을 가감 없이 드러내 아주 성공적인 ‘혐오 정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쉽게 예측할 수 있지만, 앞서 언급한 <유형 1>과 <유형 2>는 각각 보수 야당과 진보 여당에서 주로 배출된다. 기독교 세력 및 보수적인 가족이론과 깊은 연관이 있는 보수 세력의 경우, 이성애의 여집합에 속한 모든 사랑과 결혼의 형태에 대해 부정하며 ‘그것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행위’라는 논리를 세우곤 한다. 이들에게 퀴어 이슈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당연하게 ‘배제’되는 것이다. 여타의 소수자 그룹에 대해서는 사회 분위기를 보아가며 유한 논조를 펼치기도 했었던 과거의 이력을 보았을 때, 퀴어 집단을 향한 이들의 무조건적 혐오는 유별나고 역겹다. 현재의 집권당인 진보 여당은 어떠한가. 차별금지법에 대해 언급하고, 사회 내 다양성을 존중하려 노력하지만, 결정적 순간에서는 성 소수자의 곁에 서지 않는다. 앞선 보수 정당보다야 인권의식이 준수할진 모르겠으나 이들은 퀴어 이슈를 부담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언급을 피한다는 것에서 확신할 수 있는 조심스러움이 존재한다. 결국,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이들은 하나같이 퀴어 문제와 퀴어 집단의 구성원들에 대해 일방적인 배제 현상을 방치 및 생산하고 있다.
당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소수자와 그마저도 불가한 소수자가 있다. 누군가를 수용할 능력이 있는 이들이 전자를 이용하고 후자는 혐오하는 정치 판도를 보면, 화를 삼키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멋대로 수용의 기준을 세우는 오만함과 이기심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맞서 싸우고자 하는 의지를 꺾어버리기도 한다. 그 뒤에 숨은 계산적인 – 그래서 그 무엇보다도 ‘정치인’스러운 - 면모를 모를 리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손익을 무섭게 따지는 집단에서 굳이 혐오 발언을 내세우는 데 감정을 제외하고도 유력한 이유가 없을 리 없다. 결국, 분노하는 이들의 초점은 더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정당과 강하게 연결된 사회 내 기득권층, 혹은 영향력을 마음껏 뽐내는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차다.
퀴어 집단을 반대하는 보수당의 논조는, 사실 정당 지지를 굳히는 데에도 한몫을 한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전(前) 회장이자 독실한 극우 전도자인 전광훈, 그리고 보수 세력 시위 및 단합대회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기독교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하나님과 성경 아래 단단히 뭉쳐진 집단임과 동시에 한국 보수 세력을 움직이는 거대한 원동력이다. 보수 세력에서 표방하는 논리와 기독교인이 믿는 교리 사이에는 비슷하고도 닮은 연결고리가 존재하고, 보수 정당은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일부 기독교인이 신앙심뿐만 아니라 정치색을 드러내는 것을 환영하며 아주 극진히 대접하기까지 한다. 역설적 이게도 전광훈이 이끄는 시위대의 주장은 기독교적 교리에 대한 회의감과 동시에, 그들과는 명백히 구분되는 기독교인에 대한 연대 의식을 저절로 피워낸다. 그들의 종교-정치 논리는 지나치게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그것을 지탱하기 위해서 표적으로 삼은 소수자를 향해 공격을 퍼붓는다. 여전히 온갖 혐오 발언과 조롱이 난무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자칫 큰 사회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노련한 보수 정당의 정치인들이 모를 리는 없다. 다만 방관할 뿐이다. 그들이 자신의 핏대를 세워가며 “동성애는 죄악”이고 “동성혼은 천벌 받을 짓”이라 주장하면 할수록 그들만의 연대는 돈독해지고, 결과적으로 보수적 종교인들의 지지율은 콘크리트가 되어갈 것이다. 이후에 조미료를 넣듯 정치인들이 때맞추어 혐오를 조장 및 선동할 수 있는 말만 툭툭 던져준다면, 지지자들은 열광하며 응답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혐오를 이어가는 가장 큰 이유다.
결국, 퀴어 이슈는 정치권에서 혐오를 양산하기 좋은 주제임과 동시에 정당에는 지지율과도 직결된 주제다. 보수 야당은 지지자들을 집결시키고자 하고, 진보 여당은 지지자들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퀴어 이슈를 상대한다. 누군가에게는 인권, 사회권, 생존권이 달려 쓰라림을 참아가며 버텨내야 할 문제가 이들에게는 이 나라 국회에 배정된 하나의 자리를 차지하느냐, 마느냐가 걸린 문제로 탈바꿈한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밑도 끝도 없이 툭 던지는 ‘동성애 찬반’ 단골 질문과 보수 기독교 세력의 집회, 그에 반박하는 인권단체들의 성명은 수도 없이 보아온 전형이다. 그들은 적이 되는 상대 정당의 정치인이 퀴어나 동성애 이슈에 관해 큰 관심이 있었는지 따위는 따지지 않는다. 퀴어 이슈가 등판할 경우, 그 공간은 이미 그 자체로 서로를 흠집 내고 곤란한 상황에 빠뜨리기에 최적의 무대가 되기 때문이다. 필요할 때만 대뜸 불러다 쓰는 소모품, 그 이상 그 이하의 것도 아닌. 퀴어 이슈를 그저 수단으로 이용하는 끔찍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 곁에 함께 있다.
3.
숱한 비하 발언과 싸움판, 기사 사진만 보더라도 눈에 훤히 드러나는 정치 대전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 기대하는 정당이 있고 전혀 기대되지는 않지만, 충분히 상상이 가는 정당도 있다. 특정 사건이 발생했을 때 후속 조치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그 수준이 과연 본인이 내뱉은 말과 행동에 준하는 정도인지 마저 우리는 쉽게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예측 가능성은 지금껏 지나온 시간에 비례하여 더욱 정확해진다. 과거와 그간의 행적이 뒷받침되어서, 우리가 추측하는 상황이 결국 비슷하게나마 반복되는 것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도돌이표와 같은 정치환경에서, 과연 혐오의 모습은 어떤 방식으로 답습되는 것인가. 특정 소수자 집단을 배척하고 혐오하는 각 정치인의 발언들이 무조건 개인의 신념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그 개인마저 통제 및 강제하는 정당 내부의 장치가 존재하는가.
‘미래통합당이라면...’, ‘더불어 민주당이라면...’, ‘정의당이라면...’
상상은 자유다. 그 다양한 상상 속에서 저 문장을 끝마치는 수식과 설명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개인마다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묘하게도 정당 이미지에 대한 공통된 감각을 가지고 있다. 형언하고 정리하기는 어려워도, 당신네는 이럴 것이라는 엇비슷한 결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정당은 바로 그런 존재다. 한데 뭉치기도 어려운 다수의 인간이 옹기종기 모여 같은 깃발을 들고 서 있는 것. 손을 높이 뻗어 깃발을 당당하게 내보이고 있지만, 발을 디딘 지반은 그리 단단하지 못해 한없이 흔들리는 것. 일정치 못한 신념과 정치 성향이 하나의 깃발을 담보하기 위해 아찔하게 버티고 있는 것. 우뚝 선 깃발을 보며 집단을 명명할 수는 있겠으나, 깃발을 든 수많은 손으로 시선을 내릴 때 우리는 멈칫하게 된다.
정당 정치라는 용어가 공유되기 시작한 지점도 위 맥락과 비슷하다. 깃발, 즉 하나의 기조를 위해 당에 속한 내부인이 최선을 다하는 것. 그 깃발이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모양새가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이미 당원으로 활동할 것을 약속한 뒤부터는 그만의 모양새 따윈 중요치 않게 된다. 오로지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당의 깃발. 정당을 빼놓고서는 정치를 논할 수 없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소속 의원이 아닌 이상 발을 담그고 있는 집단은 하나씩 존재하며, 그 누구도 제 발을 담근 공간을 무시할 수는 없게 된다. 만약 싫다고 몸부림치고 싶다면, 해결책은 하나이며 아주 단순하다. (“그럼 네가 나가든가!”) 발을 빼야 한다. 얼마나 오래, 또는 얼마나 열심히 임했는지는 나중에 생각할 일이다. 싫다면 나가는 것, 그것이 또다시 정당을 유지하고 지키는 이들의 방식이다.
└ 개별적이고도 집단주의적인 존재들
그렇다면 정당이 개인보다 우선시되는 정치 공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념보다도 ‘태도’이다. 개인의 가치관, 사고, 나름의 이성적 과정을 통해 도출된 무언가들은 정당 기조 앞에서 주춤한다. A라면 A고, B라면 B여야 하는 것이 정당 내 보기 좋은 통일성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정당은 강압적이기보다는 매력적으로 당원들에게 다가간다. 그 어떤 정당도 고집 센 이미지를 만들어 미래 당원들의 반감을 사고 싶어 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당은 나름의 시그널과 상징을 제공하며 관심 있어 보이는 이들에게 손을 건넨다. 13 그 손을 잡게 된 이들은 결과적으로 그 손에 흡수되어 당원의 이름표를 달고 당원으로 행동한다. 사고해서 변화를 ‘주동’하기보다는 행동함으로써 체제를 ‘수용’하는 입장이 된다. 문제가 되는 ‘태도’를 짚어야 하는 이유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개인보다 앞서는 정당에서, 개인을 위해 만들어주는 태도를, 개인은 그대로 학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전하고 과거보다 도덕적 결함의 존재를 강하게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정당 정치의 위력은 조금씩 약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여전히 특정 의제에 대해서는 개인의 목소리가 드러나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서로 다른 의견이 부딪히는 상황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당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개 대통령의 탄핵에 찬성하는 보수 정치인(반-아무개 파)과 탄핵을 반대하는 보수 정치인(친-아무개 파)이 나뉘어 싸우는 것처럼, 정당 내부에서 의견이 갈리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하지만 약자 문제는 어떠한가. 동성애를 응원하고 양성애를 이해하며, 시스젠더가 아닌 트랜스젠더의 존재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는 말을 그 어떤 정치인이 감히 뱉을 수 있을까. 혹은, 본 정당의 강력한 지지세력을 무시한 채 “사실 나는 차별금지법 도입을 매우 찬성한다”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사회적 소수자를 이야기하는 일은 사회 통상의 ‘일반적인 것’과는 다르다.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잘 알지 못하는 경우도 대부분이고, 사실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말과 행동 하나에 지지율이 뚝 떨어지거나 확 올라가는 정치 판도에서, 약자 문제는 함부로 분쟁을 일으켰다가는 되려 철퇴를 맞을 수도 있는 위험요소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도덕률이 존재하는 경우, 정치인들은 그것을 따라가려 애쓴다. 이미 공유되고 있는 도덕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행동은 그 어떤 이점도 주지 못한다. 하지만 아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 아직도 이야기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쉽게 무엇이 정답이라 말하지 못한다. 이때 인간으로서 생각하는 정답이 아직 없다면, 정치인에게 차선책은 정당이 생각하는 정답이다. 새롭게 생겨나고 있는 사회문제들, 우리가 아직 이름을 붙여 말하기 어려운 사회적 약자 집단들을 앞에 세워두고 갈팡질팡할 필요는 없다. 정당에서 합의한 것이 바로 정답이고, 상대 정당에서 반대하는 정책이 자신들의 무기가 되는 것이다.
정당은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시민과 권력을 잇는 다리이고, 권력의 관찰자이며, 의회정치의 장본인이라고 한다. 14 하지만 오히려 약자에게는 건널 수 없는 다리이고, 본질을 꿰뚫지 못하는 반쪽짜리 관찰자이며, 정치의 주인인 척 구는 장본인이다. 당원의 신념은 물론이고 정치적 이득을 볼 수 있다면 교묘하게 정의를 비껴갈 수 있게 하는 공간이 바로 정당이다. 결국, 사회의 소수자 집단을 향한 교활하고 체계적인 혐오 양상은 그 영역 안에서 반복적으로 재생산된다.
마치며.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가고, 많은 사람이 마주한다. 누군가에게는 기본적 삶의 질이 달려있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손에 쥔 이익과 손해가 당장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온갖 것들이 모두 포함될 수 있을 만큼 넓은 영역인지라, 정치는 그만큼 다루기 쉬우면서도 파고들기 가장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판에 선 이들에게 정당함과 올바름, 그리고 그에 따르는 책임감을 기대한다.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어떤 말을 ‘배설’했는지, 그리고 감히 어떤 이들을 기만하는지, 모두 샅샅이 뒤져 까발려놓아야 그 무거운 발걸음들을 강제로나마 옮겨놓을 수 있다.
기성세대에게 교육받고 자라난 기득권 그룹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용할 가치의 정도에 따라 쉽게 버려지고 배척당한다. 세상을 바꾸어보겠다며 나가본 정치계에서 약자로 취급되는 이들은 모든 풍파를 맞고도 보호받지 못하기 일쑤다. 때로는 그들의 앞에 서서 얼굴마담 역할을 하기도, 방패 역할을 하기도, 하다못해 욕받이 역할을 하기도 한다. 기자와 카메라 앞에 서서 환히 웃으며 악수를 하는 두 사람의 기묘한 사진 뒤에는 언급되지 못하는 정치 감정이 난무한다. 미소와 악수는 시늉일 뿐, 실질적인 정당 내 정치환경에서는 그 누구도 환하게 웃어주거나 손을 내밀지 않는다. 소수자와 약자, 또는 그 어떤 언어로도 정의되기 어려운 집단의 사람들은 호기롭게 들어간 정치판에서 자신도 모르는 새에 또다시 외부인으로 낙인찍힌다.
국회에 입성하는 의원들은 무슨 마음가짐이려나. 오늘도 어김없이 ‘출튀’ 15할 생각? 아니면 마이크는 놔두고 성능 좋은 자신의 성대를 시험해볼 생각? 그것도 아니라면, 저 멀리 지켜보고 있을 국민에게 보여주기 딱 좋은 ‘약’을 한번 만들어볼 생각? 선거철이 다가오고 중요한 정치적 전환점이 필요하게 될 때면, 정당과 정치인에게는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것처럼 보인다. 위약(僞藥)을 통해 실질적인 효과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약자는 정말 ‘약’이 되고, 정치는 ‘약팔이 장수’가 판치는 시장이 된다. 더불어 국민을 적당히 속이고 비난을 피해가기 위해서 다양한 종류의 ‘약’을 고르고 내보이는 과정이 중요해졌다. 하지만 정치는 감히 무언갈 팔아먹고 사는 공간이어선 안된다. 가짜 약으로 효과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도 강한 능력을 낼 수 있는 진심을 보여야 한다. 아무리 말과 말이 오가고 정의보다는 이익이 앞설 수밖에 없는 구조이더라도 더 이상의 약자 팔이는 용인할 수 없다.
김예지 의원으로 글을 열었고, 이자스민 의원의 사례를 가져왔다. 청년 당원들의 이야기를 빌렸고, 국회에선 언급조차 되지 않는 퀴어 이슈를 인용했다. 이외에도 수없이 존재할 작은 목소리들이 본 글의 바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좁은 정치판에서 그보다도 더 좁은 자리를 지켜내고자 하는 이들의 진심이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말해져야 하는 것들에 대해 써본다. 그들이 일 인분의 자리를 지켜내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당당히 자신의 공간을 넓혀갈 수 있는 세상이 올 시간을 기다리고 싶다.
작지만 활력 넘치는 목소리를 응원하고, 시끄럽기 그지없는 소음은 기꺼이 조롱하자. 여의도에 뻔뻔스레 얼굴을 들고 다니는 불법 약장수들에게 직접 침을 뱉을 순 없으나, 그들의 컴컴한 속내를 모르는 것이 아님을 되새기며 코웃음을 치자. 당신네가 써먹는 그 ‘약’이 언젠가는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커져서 국회를 확, 삼켜버릴 것이라고 귓가에 속삭이자. 꾸며낸 얼굴 위로 피어오를 박탈감과 낭패감을 상상하자. 사실, 조심해야 하는 이는 우리가 아니라 당신들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킬 순간을 기대하며.
글 편집위원 두별 (jhanstar@hanmail.net)
- 박종진, “안내견 '조이' 국회 출입 합동작전…보수·진보 따로 없다”, <머니투데이>, 2020.04.19.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0041914087620257 (검색 일자 : 2020.09.06.) [본문으로]
- 이자스민 의원은 2019년 10월 자유한국당을 탈당했고 현재는 정의당 소속이다. [본문으로]
- 2008년 나경원 한나라당 의원이 경남여성지도자협의회 초청 강연에서 교원평가제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면서 우스갯소리라며 했던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 참고. / 윤성효, “경남지역 여성단체, 나경원 의원 사과 촉구”, <오마이뉴스>, 2008.11.24. http://omn.kr/14zn (검색 일자 : 2020.09.06.) [본문으로]
-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충북 청주에 들른 이명박 전 대통령(당시 대선 후보)과 정우택 전 충북 도지사 사이 대화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 참고. / “”예전 같으면 관기라도 보냈을 텐데“, ”어제 온 게 정 지사가 보낸 거 아니야?“”, <오마이뉴스>, 2007.08.03. http://omn.kr/bkde (검색 일자 : 2020.09.06.) [본문으로]
- 최경민, “야 3당, '박지원 비하' 與 김진태 의원 국회 윤리위 제소”, <머니투데이>, 2016.10.10. https://news.mt.co.kr/mtview.php?no=2016101010047676884&outlink=1&ref=https%3A%2F%2Fsearch.naver.com (검색 일자 : 2020.09.06.) [본문으로]
- 전민경, “[단독]통합당 김대호 제명..“나이 들면 장애인” 또 비하 발언”, <파이낸셜뉴스>, 2020.04.07. https://www.fnnews.com/news/202004071815519581 (검색 일자 : 2020.09.06.) [본문으로]
- 김병철&김도훈, “[허핑턴포스트 10주년 기념 인터뷰] 다음 10년의 인물,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 ”, <허핑턴포스트>, 2015.05.06. https://www.huffingtonpost.kr/2015/05/06/story_n_7219364.html (검색 일자 : 2020.09.06.) [본문으로]
- 김세관, “이자스민 "악플도 다 읽어..모르면 바뀔 수 없다"”, <머니투데이 the 300>, 2016.01.01. https://the300.mt.co.kr/newsView.html?no=2015122913437646594 (검색 일자 : 2020.09.06.) [본문으로]
- 채혜선, “이자스민 “한국당서 왕따? 혼자서 싸우는 느낌이었다””, <중앙일보>, 2019.11.12. https://news.joins.com/article/23630137 (검색 일자 : 2020.09.06.) [본문으로]
- 이상원, “청년 정치인들이 미래통합당으로 간 까닭은?”, <시사 in>, 2020.05.21.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964 (검색 일자 : 2020.09.06.) [본문으로]
- 지난 4월 5일 서울 광진을 후보자 토론회에서 두 후보자 간의 대화이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 참고. / 김원철, “정의당, 오세훈·고민정 동성애 관련 발언 “한심한 질문과 답변”“, <한겨레>, 2020.04.07.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936004.html#csidx4036c0122876094bb1f8a0c5bbcdb6a (검색 일자 : 2020.09.06.) [본문으로]
- 오현석, “[국회M부스] 성소수자는 독소?…한국당의 동성애 혐오 정치”,
, 2019.05.20. https://imnews.imbc.com/news/2019/politics/article/5309435_29092.html (검색 일자 : 2020.09.06.) [본문으로] - 박병진. (2007). 개인과 정당 간 이념성향의 정합성. 한국사회학회 사회학대회 논문집, 509-534. [본문으로]
-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말하는 정당의 의미이다. [본문으로]
- 출석만 하고 튀기. 국회에서 열리는 회의의 불참률이 높은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불참하는 의원뿐만 아니라 출석했다가 사라지는 의원들도 많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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