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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청년] 청년담론을 고발합니다.

연희관공일오비 2017. 9. 13. 11:42

 

이 글은 우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청년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많이 언급됐다. ‘청년 논객이라는 단어처럼 청년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단어부터, ‘청년담론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청년은 핫한 키워드이다. 도대체 청년이 누구길래? 청년담론이 뭐길래?


청년, 열심히 사는 사람

청년은 인간의 생애주기 유년-청소년-청년-중년-장년-노년-말년중에 한 단계일 뿐이다. 누구나 청년시절을 보내는데도 청년이 특수한 이유는, 청년은 미성숙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마치고 성인이자 사회인으로서 맞는 첫 단계이며, 가장 젊은 세대로서 기성세대와 다른 독특한 감수성과 이미지[각주:1]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청년은 신세대이고 그에 걸맞게 사회의 분석대상이 된다. 세대론 중에서도 신세대에 대한 관심은 이들이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세력이라는 기대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청년이라는 신분이 특수하고, 청년에 대해서, 청년에게, 청년이 하는 말들이 청년담론으로 묶인다.

사회에서 청년에 관해서 하는 말들은 많지만 지난 10년간만 보면 20대는 정치 참여에 소홀하다는 이유로 개새끼로 불리기도 했고, 그 경제적 능력과 관련해 88만원 세대라고 불리기도 했다. 3개에서 포기하는 것이 점차 늘어 이제는 N포 세대라는 이름도 얻었다. 이러한 이름표들은 신세대인 20대 청년을 분석한 결과물이지만, 뒤집어보면 구세대의 입장과 맥락이 반영된, 그들이 원하는 20대의 모습을 알 수 있다. 20대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해야 하며, 스스로 경제력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다. n개를 포기했다는 말은 그 n개는 당연히 해야 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사회에서 원하는 청년세대는 개인적인 삶과 사회적 삶 둘 다 열심히 사는 사람인 것이다.

억지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현상을 분석해서 붙인 이름일 뿐, 특별히 무엇인가 하는 모습을 기대한다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면 청년에 관해 한 말이 아니라 청년에게 직접 한 말을 생각해보자. 청년에게 무언가 말하는 사람들은 다 청년보다 늙은이들이다. 그런 늙은이들은 젊은이들에게 젊어서는 고생을 사서 한다며 20대의 노동력을 열정의 대가로 바치라고도 하고, 힘듦을 토로하면 배부른 소리라고 꾸중하며 노력, 자기계발을 하라고 한다. 부모 세대와 비교하며 잔소리를 하기도 예사며, 실패와 방황을 겪으면서도 좋아하는 것을 계속하라며 채찍질을 멈추지 않는다. 때로 위로와 응원을 하지만 그 속에는 지금까지 해왔듯 해라라는 말이 숨어있다. 결국, 늙은이의 말은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면서) 살아라. 이 메시지를 들어온, 그리고 타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 메시지를 내재하고 있는 20대는 노-력 했다. 취업이라는 관문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많은 노력은 취업을 위한 스펙쌓기로 변모하였고, 그 결과 단군 이래 최대의 스펙을 가진 세대이면서 동시에 역대 최고 실업률을 보이는 세대가 되었다. 이렇게 청년에 관해서, 그리고 청년들에게 하는 말은 결국 자기계발담론[각주:2]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될 수 있다.

 


열심히 사세요최고봉

 

청년대학생(o), 청년대학생(x)

긍정 과잉의 시대라지만, ‘할 수 있다를 너머 하라는 메시지를 듣는 세대가 우리다. 구세대의 삶이 열심히 살기만 하면 되는 시대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우리가 젊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사회에서 열심히 굴러야 할 대상으로 보거나, 같은 이유로 만만하여 잔소리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유야 뭐가 됐든 어쨌든 늙은이들이 원하는 젊은이들은 열심히 무엇인가를 하는 사람들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늙은이들이 말을 거는 젊은이는 모든 청년이 아닌 대학생 청년뿐이고, 그중에서도 수도권 지역의 대학생들뿐이라는 것이다.

사회와 언론에서 다루었던 20대는 모두 대학생들이었다. ‘20대 개새끼2008년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에서 대학생의 참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비판하면서 생긴 말이다. 물론 20대 청년 개인의 집회참여는 있었지만, 대학 깃발을 들고 대학생 신분으로 참여하지 않았음이 문제로 여겨진 것이었다. 88만원 세대도 청년들의 경제적 무능력함에 관한 것이지만, 정규직일 수 있는데 그들의 무능력함(노력하지 않음)으로 인해 비정규직으로 일하게 되는 청년들에 대한 이야기다. 청년이 n개를 포기한 이유는 취업하기 위해서인데, 취업을 준비한다는 말은 취업준비를 해야 갈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암묵적으로 대졸자와 고졸자의 노동시장은 구분되어 있고, 각자의 공간을 벗어나기 힘들다. 그리고 작년 겨울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대한 대학 총학생회의 시국 선언이 이어질 때, 배재대의 시국 선언은 조롱을 받았다. 대학생의 정치참여를 강조하면서도, 대학의 서열에 따라 그 처우와 인식이 다르다는 것 또한 청년담론에 가려져 있는 불편한 사실이다.

젊은이 개인이 청년 집단으로 존재할 수 있을 때는 대학생 때이고, 사회에서 청년으로 받아들여지려면 일정수준 이상의 대학에 다녀야 한다. 반값등록금 투쟁과 안녕들하십니까자보전은 서울 내 4년제 대학 학생들이 그 주축에 있었고, ‘아프면 환자지, 청춘이냐라고 말한 유병재PD도 서강대 출신이며, 김예슬씨의 공공연한 대학 자퇴가 이슈가 된 것은, 공공연하게 고려대를 자퇴했기 때문에 이슈가 될 수 있었다. 김무성 의원이 열심히 살라고 했던 청년들은 아르바이트하는 청년들이었고 굳이 따지면 서울 내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아르바이트가 아닌 과외를 하며 부당대우를 받을 가능성이 낮은 청년들이다. 그렇지만 알바노조가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기획한 응답하라 맥도날드활동은 신촌을 비롯한 서울 내 3곳에서 이루어졌고, 알바천국은 아르바이트하는 청년들을 지원하기 위한 행사로서 서울 내 대학생들에게 간식을 지원했다. 사회는 20대라고 말하면서 사실은 대학생들을 호명하고 있었고, 그 대학생 중에서도 수도권 대학생만을 보았다. 그 이외의 대학을 다니거나, 대학을 다니지 않는 20대의 목소리는 들릴 공간이 없다.

 

청년 없는 청년담론

이렇게 청년 담론에는 청년이 없고 대학생만 있다. 그래서 청년 담론이 지방청년의 목소리와 가능성을 덮어버린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 소수의 청년조차 청년담론의 발화자가 아니라는 것도 문제이다. 주류청년담론인 자기계발담론은 개인들의 이야기가 쌓여 형성된 것이기 보다는 문화산업, 출판산업의 주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실제 청년 당사자들이 ‘A라는 목표를 위해 B를 열심히 하자라는 식의 구체적인 말들을 쌓아오지 않았다. 멘토라고 불리는 늙은이의 말이 남았고, 청년개인은 불안한 미래에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또 사회에서 대학생만을 청년으로 호명하고, 같은 대학생도 대학 서열에 따라 다르게 대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계발담론도 모든 대학생들에게 적용 가능한 담론이 아니다. 계명대학교 최종렬 교수는 지방대 학생들은 자기계발이 아닌 자기보존의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주류 청년 담론인 자기계발담론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밝혔다.[각주:3] 이미 한 차례(라고 하지만 12년 동안) 경쟁에서 낙오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가능성을 제한하고, 아예 경쟁 밖에 자신을 위치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지방대 특유의 집단스타일[각주:4]적당주의[각주:5]로 인해 꾸는 꿈의 크기에 한계를 정해두고, 그 꿈을 위한 노력의 크기와 과정도 제한한다. 그의 논문이 모든 지방대생의 이야기라고 할 수 없고, 어느 정도 맞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가 얼마만큼인지 -어떤 대학인지, 그 대학생들의 어떤 부분이 논문과 얼마만큼 일치하는지 등-를 확언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모든 젊은이들이 동일선상에 있지 않고 기울어지게 위치해 있으며, 그 기울기에 따라 개인이 목표로 하는 지점도, 그것을 향한 노력 가능성의 크기도 정해진다.

그렇다면 당사자인 청년들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긍정성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20대 청년들이 처음 스스로를 지칭한 단어는 잉여였다. 생산도, 소비도 하지 못하는 좀비 같은 상태를 온라인상에서 잉여라고 표현했고, ‘나 잉여야라는 말로 자조했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낮은 자존감과 우울/무기력을 겪는 상황을 2이라고 불렀다. 아픔을 겪는 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적인 문제인 것이다. 싫다를 너머 ()’,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극혐이라고 말한다. 이 나라는 헬조선이라고 외쳤고, 이런 헬조선에서 잘 사는 방법은 금수저로 태어나는 것이라는 수저계급론도 우리의 입에서 나왔다. 우리는 열심히 살아서 힘든 게 아니라, 그냥 사는 게 힘들고 이 현실이 살기에 힘들다. 아니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만 살아야 하기 때문에 힘들다.

 

못 푸릅니다.

청년의 청은 푸를 청이다. 여기의 푸름은 우리가 생각하는 초록도 파랑도 아니라, 막 돋아나는 새싹의 색깔이다. 그리고 이 푸른 빛은 기성세대와 다른 사고능력과 감수성일 것이다. 청년세대가 정말 신세대인지, 신세대가 어떤 세대인지 알지 못하더라도, 요즘 젊은이인 우리가 기성세대(구세대)와는 구별되고 그들과 어딘가가 다르다는 것은 잘 알겠다. 그러면 청년담론은 이러한 청년의 시기적 특수성과 관련된 이야기들로 채워져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청년담론이 하는 것은 청년이라고 호명하면서 대학간판에 따라 차별대우 하는 것, 그리고 당사자들의 말은 삭제하고 반대되는 말들을 쌓은 것이다. 청년 담론에 청년이 없다. 그래서 고발한다고 한 것인데,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않을까 싶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청년이 된다는 것은 곧 사회에서 온전한 한 명의 어른이 된다는 것과 같다. 법적 성인이 되면서 의무와 권리가 생기고, 개인적으로도 그 이전보다 자유로워지고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그러면서 사회에 자신을 표현하고, 사회와 대화할 수 있다. 그 형광 연두색을 맘껏 표현할 수도 있는 시기인 것이다. 이렇게 미성년자로서 받던 가정과 학교의 보호와 규제에서 벗어나 청년이 되면,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은 2갈래다. 대학생이 되거나, 근로자가 되거나. ‘금수저’가 아니라면 ‘먹고 사는’ 문제로 언젠가는 근로자로서의 삶의 공간에 들어가야 한다. 노동시장으로 들어가면 청년은 가장 말단에 위치하게 되고 하루의 많은 시간을 직장에서 주어진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청년으로의 푸름을 누리지 못한다. 본래 이 공간으로의 진입을 유예하고, 조금 더 나은 근로자의 삶을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이 대학생의 기간이다. 그리고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청년은 청년의 특수성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대학은 청년들이 온전하게 독점할 수 있는 공간이고, 그래서 캠퍼스 안에서는 청년들끼리만 모일 수 있고, 그렇게 모여서 뭐라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대학에서는 기성세대의 잔소리와 간섭으로부터 독립된 삶을 살고, 청년다움을 누릴 수 있다.  

그러니까 청년담론에 청년이 없는 것은 청년담론의 문제가 아니라, 청년이 청년이라는 이유만으로는 그 푸름을 발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슬프고 뻔한 결론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청년담론의 내용, 당사자인 우리가 외쳐야 하는 말은 바로 이 말이 아닌가 싶다. ‘우리 사회가 문제다라는, 새롭지 않지만 그래서 더 해야 하는 말.

글 편집위원 세진

  1. 정성호, 20대의 정체성 : 살림지식총서235, (주)살림출판사 [본문으로]
  2. 최근 학술적으로 ‘자기계발담론’에서의 자기계발을 성공이 아닌 ‘생존을 위한 전력투구’라고 정의하였다.(김홍중, 2015) 취업을 위한 스펙쌓기 또한 현 사회에서 위의 정의에 부합하는 자기계발이라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3. 최종렬 (2017). ‘복학왕’의 사회학. 한국사회학, 51(1), 243-293. [본문으로]
  4. “무엇이 집단적 세팅에 대한 좋은 또는 적절한 참여를 구성하는가에 대한 한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가정으로부터 나온 상호작용의 반복적인 유형” (Eliasoph and Lichterman, 2003, 최종렬, 2017: 286) [본문으로]
  5. 논문에서 밝히는 적당주의 집단스타일로 인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방대생은 경쟁 밖에 자신을 위치 지운다. 둘째, 설사 경쟁에 뛰어든다 해도 느슨하게 한다. 셋째, 성찰적 겸연쩍음으로 경쟁 과정과 결과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 (최종렬, 2017: 28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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