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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버스(Universe)를 넘어선 메타버스(Metaverse). 나는 메타버스에 한동안 (어쩌면 여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내 무의식을 잠식한 이 '메타버스'라는 놈이 내 꿈에 난입해 들려준 이야기를, 잊기 전에 글로 남기려고 한다.



1부 메타버스

내가 메타버스라는 단어를 접한 건 가상현실 스타트업인 바이너리브이알에서 인턴을 하던 무렵이었다. 사수이자 회사 공동 창업자였던 K님은 항상 출근길에 나를 태우고 회사로 향하셨다. 잠이 덜 깬 터인지라 대부분 시덥지 않은 이야기나 정적이 흐르던 이 시간에 어쩐 일인지 K님은 가상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라디오 녹음 파일을 틀으셨다. 연설자는 한창 가상현실 논의로 뜨거웠던 2003년, 세컨드라이프를 창업했던 philip rosedale이었다.

"How big is the Metaverse? Already a size of an earth. 20 years from now, the Metaverse will be 1,000 times the size of earth."

메타버스는 초월(Meta)과 우주(Universe)의 합성어인데 흔히는 요즈음 많이 거론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Mixed Reality 등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모든 공간을 칭한다. 그렇다고 상상 속의 가상 공간 따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여타의 현실과 다를 바 없는 - 가상 공간에 대한 것이다.

필립은 메타버스의 실재를 천천히 읊었다. 그의 말은 단단하게 걸어와 내 앞에서 블록처럼 어떤 형태를 쌓아갔다.

"인터넷에 접속 가능한 컴퓨터를 모두 연결하여 CPU 프로세싱 파워를 사용해 가상 현실을 만든다면, 우리는 지구 전체를 시뮬레이션 할 수 있다."

필립은 컴퓨터가 매해 팔리는 속도, 실제로 사용되는 컴퓨터 퍼센티지, 하나의 컴퓨터가 돌릴 수 있는 컴퓨팅 파워, 인터넷이 연결된 퍼센티지 등을 계산하여 메타버스가 지금, 현재 어떻게 가능한지 증명해나갔다. 지금과 같은 파급속도, 기술 발전 속도로 보면 최소한으로 짐작해봐도 매년 2배씩은 메타버스가 늘어난다는 결론이 나온다. 20년이면, 메타버스는 적어도 지구의 1,000배가 넘는 거대한 공간으로 자라난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메타버스의 가능성을 막연하게 동경했다. 지구보다도 큰 메타버스, 그리고 또 언젠가는 우주를 뛰어넘을 그 드넓은 프론티어, 우리는 그 공간에서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실현해낼까?

내가 인턴을 했던 회사 두 곳은 메타버스 상상을 더욱 부풀리도록 도와주었다. 바이너리브이알은 얼굴 표정 트래킹을 통해 가상현실에서 현실의 표정을 그대로 재현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었다. 리얼리티리플렉션은 3D 스캐닝을 통해 현실의 인물을 가상현실로 옮겨내는 기술을 바탕으로 디지털휴먼을 개발하고 있었다. 두 회사의 비전대로라면, 우리는 곧 우리의 표정과 행동, 모습을 모두 가상 공간에 옮겨낼 수 있을 터였다. 사회 전체를, 그대로 옮기는 것도 곧 가능해질 것이다.

메타버스는 더 이상 꿈의 공간이 아닌, 현실이었다.

거대하고 비어있는, 곧 우리가 그려낼 실존하는 가상 공간.


2부 공간과 장소

본격적인 이야기는 여기, 그러니까 내가 지금은 지긋지긋한 메타버스에 대한 꿈을 꾸면서부터이다. 아니, 정확히는 메타버스가 나의 존재를 덮어버리기 시작하면서부터랄까.

그 놈에 대해서는 잊고 지내던 어느 토요일, 영어 스터디에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운이 좋게도 룸메이트도 강남으로 가는 길인지라 차를 태워주기로 했다. 어제 잠을 설쳤는지, 나는 차에 타자마자 짧게 잠에 들었다. 몸이 살짝 흔들리며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살짝 눈을 떠보니 어디인지 모를 초록색 스타벅스 간판이 보였다. 드라이브스루로 아메리카노를 시키고는 다시 차는 익숙하지만 모르는 도로를 지나 목적지로 향했다. 잠깐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사이, 어느새 나는 스터디가 있는 카페 앞에 도착해 있었다.

돌이켜보니, 전날밤부터 이 치밀한 메타버스라는 놈은 나를 잠식하기 위해 잠을 설치게 세팅해 놓은 것은 아닐까.

꿈을 꾸었다. 나는 25년 평생 이사가지 않은 내 봉천2동 우정주택 504호 안 빨간색 소파에 앉아 있었다. 위 아래로는 반투명한 층이 겹겹이 희미하게 내비쳤다. 빨간색 소파는 내가 5살 때에나 있었던, 사진에서나 희미하게 기억하는 물체라는 것을 떠올린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동시에 나는 밑으로 보이는 희미한 레이러를 뚫고 내려갔고 내 엉덩이는 지금 우리 집에 있는 나무 의자 위에 놓였다.

메타버스 안이라는 것을 아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기억과 공간은 느슨하게 연결되어 나는 레이어를 타고 순식간에 다양한 공간으로 이동했다. 곧 이 과정은 눈을 감았다 뜨는 정도로 아주 짧게, 레이어가 있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게끔 찰나가 되었다.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은 메타버스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조잘조잘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2시간만에 유럽 50개국을 여행했다고 말하면서 에펠탑과 프라하성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누군가는 하루에 비지니스 미팅을 10개까지도 잡을 수 있다며 사업 확장에 크나큰 혁신이 일어날 것이라고 귀띔해줬다. 가상 공간은 거리와 공간을 마음대로 줄였다 늘였다 할 수 있었다. 공간은 나의 필요에 의해 원하는 장소들만으로 줄줄이 이어놓은 사탕 목걸이처럼 불필요한 '가는 길'을 제단해 버렸다. 매 순간이 달콤했다.

눈을 뜨자마자 나는 다시 눈을 질끔 감고 회사 사무실 한켠의 내 책상 앞을 떠올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출근길에 올라 17개의 정류장에 멈춰서면서, 조금 뒷편으로 돌아가 카페에 가면서, 테이크아웃한 아메리카노는 들고 회사 건물에 들어갔다. 고작 3층이면서 엘레베이터를 타고 눈을 감았다 떴다. 원하던 3층이 눈앞에 펼쳐지니 아침부터 답답했던 속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다시 메타버스에 들어갈 수 있을까 싶어 일찍 잠에 들었지만 한동안은 꿈을 꾸지 않았다.


3부 존재와 가치

그 놈은 치밀했다. 나는 봉천 2동 우정주택 504호가 노후 건물로 재건축 지정 지역이 되면서 회사에서 한 정거장도 안되는 거리로 이사를 했다. 그 날 그 꿈 이후로, 17정거장이나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그 이듬해, 나는 동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우연히 예전에 살던 우정주택 근처를 지나가게 되었다. 말끔하게 새로 지어진 신식 아파트 1층엔 상가들이 들어섰다. 초록색 스타벅스도 한켠에 자리를 잡았다. 멍하니 초록색 로고를 들여다보는 사이, 주머니 속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다. 친구 지영이의 문자에는 한 30분 정도 늦을 것 같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시간을 때울 겸 스타벅스 안으로 들어간 나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아메리카노를 시키고는 밖을 바라보게 되어 있는 쇠 의자 위에 앉아 턱을 괴고 커피를 마셨다. 동네는 다시 새것이 되어 반짝거렸다. 빨간색 소파가 그리워졌다. 사라진 장소 밑에 깔려 있던 공간에 덩그러니 놓인 기분이었다. 매일을 같이 하던 고등학교 단짝이었던 친구, 지영이는 이 날 결국 오지 못했다.

그 날 밤, 아까 마신 아메리카노 때문인지 밤잠을 설치다 그 놈을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낮에 봤던 쇠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위로는 나무 의자부터 빨간색 소파까지, 얕은 레이어가 희미하게 비쳤다. 그리웠던 빨간 소파를 떠올렸다. 눈을 뜨지 않아도 느껴지는 소파의 포근한 빨간색에 푹 잠겼다. 나에게 메타버스는 장소들이 영원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x, y, z축을 넘어서 알파, 감마, 베타로 이어지는 겹겹의 레이어가 새로운 감각으로 나의 직관을 건드렸다. 무한으로 쌓이는 공간의 레이어 속에서, 우리는 떠올리는 것만으로 기존의 공간을 재현할 수 있었고, 또 상상의 공간을 쉽게 구축할 수 있었다. 사라져셔 아쉬웠던 공간들은 원한다면, 1초의 단위로도 재현되어 층층의 레이어 사이를 무한하게 채워나갔다. 한 번 생긴 레이어는 마치 새것처럼 반짝이며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을 암시하기라도 하듯이 곧게 뻗어 있었다.

이 날 꿈은 그 전과는 달랐다. 내 시간마저 무한인듯, 오래도록 꿈에서 깨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1, 2초 단위로 공간과 장소를 바꿔나가는 바람에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나는 곧 다른 사람들을 만났고, 다른 사람들이 창조해낸 공간들을 헤집고 다녔다. 달콤함이 입 안을 넘어 손가락 끝까지 펴졌다.

몇 만, 아니 몇 만의 몇 만이었을까. 헤아릴 수 없는 공간을 눈깜박임으로 바꾸면서, 나는 문득 스쳐 지나가는 공간 이외에 그 무엇도 생각할 수 없었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곧 내 생각은 공간으로 바뀌어 나는 그림자 하나 없는 하얀 공간에 덩그러니 놓이게 되었다. 초록색 스타벅스의 쇠 의자가 청바지를 뚫고 들어와 차갑게 허벅지에 닿았다. 벗어나고 싶어 어떤 장소를 떠올리려 애를 써봐도 머릿속에 아무 장소도 생각나지 않았다. 좌표축이 가득한 몇 차원의 공간만 머리 속에 떠다녔다.

"무엇 때문에 그리 달콤했던 거지..."

그제서야 나는 그 어떤 장소도 내게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든 갈 수 있다는 것은, 언제든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고 영원하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갑자기 레이어들이 날라들어와 종이처럼 날라다녔다. 더 이상 레이어들은 이어지지 않았다. 잘린채로 흩날리다가 무작위로 섞였다. 누구도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눈만 깜빡이면 원하는 레이어는 찾을 수 있었기에.

달짝지근한 입에서 침이 넘어가기가 힘들어지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겹겹의 레이어를 들여다보니, 재현된 것은 공간만이 아니었다. 사람들도 재현되었다. 나와 한시도 떨어지고 싶어하지 않았던 고등학교 시절 지영이부터 일이 바빠 약속 한 번 잡기 어려운 지영이까지 여러 겹의 지영이가 지지직거리며 내 주변을 멤돌았다. 지영이를 찾으려 하면 할수록 지영이는 더 쪼개졌다. 눈을 감았다. 다시 빨간 소파를 떠올렸다. 등 뒤의 감촉이 포근하게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떠보니 지영이는 온데간데 없고 다시 그 때 그 봉천2동 우정주택 504호였다. 한숨을 돌리고 발 밑을 내려다보자 다시 끝없는 레이어가 펼쳐졌다. 다시 편안하게 입안에 단맛이 퍼졌다. 숨을 깊게 내리쉬고 마시며 다시 발 밑을 바라봤다. 보일듯 말듯한 그 속에 눈살을 살짝 찌푸리자, 처음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눈치채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희미한 레이어에는 모두 어느 순간의 '내'가 있었다.

글 소우주(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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