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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비평

[문화 비평] <1987>이 삭제한 것들

연희관공일오비 2018. 4. 29. 22:34


 작년, 6월 항쟁 30주년을 맞아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이 개봉했다. <1987>은 제목 그대로 1987년의 6월 항쟁을 다루며, 정확하게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부터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는 지점까지를 주된 무대로 한다. 감독에 의하면 놀랍게도 이 영화 이전까지 6월 항쟁을 다룬 영화가 없었다고 한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을 나눌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각주:1]고 말했다. 감독의 말을 다시 쓰자면 과거에 대한 기억(“우리가 어떻게 살아왔고”), 그리고 그를 통한 현재적 성찰(“어떻게 살아야하는 지 고민을 나눌 수 있다면”)이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감독의 바람이 성공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 충분했는지부터 점검해야 할 것이다. 현재적 성찰은 기억 방식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좋은 기억 방식이란 재현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한 사건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필연적으로 맥락이 분절되고 재배치되며, 특정 사료들이 선택되고 조합되는 과정을 거쳐 재현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무언가 삭제하고 사건을 재창조한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1987>1987년과 6월 항쟁을 어떻게 재현했는지 살펴본다. 특히 이 영화가 누구 중심의 서사인가‘6월 항쟁을 어떻게 명명했는가를 묻고자 한다. 이를 통해 <1987>이 삭제한 것은 무엇인지, <1987>이 감독의 바람이 성공하기에 충분한 재현 방식이었는지 또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구의 서사인가?

 <1987>은 시종일관 6월 항쟁의 다양한 주인공들을 따라간다. 사인을 명확하게 밝힐 것을 지시하는 검사, 박종철의 시신에 물기가 있었음을 증언하는 의사, 사건의 내막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기자, 민주화 투사를 돕는 교도관 등 다양한 주인공들을 거치면서 투쟁의 일선에 앞서있던 민주세력을 집중적으로 가시화한다. 이윽고 영화는 이들과 독재세력이 맞서는 일대일 구도로 개편된다. 민주세력의 끊임없는 투쟁은 독재세력에 균열을 내기에 이른다. 몇몇은 고문을 당하거나 쫓겨 다니기도 한다.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독재세력이 굴복하게 된다. 이것이 이 영화의 커다란 서사다. 카메라는 계속해서 주인공들의 뒤를 따라다닌다.

 하지만 이 영화는 6월 항쟁에 이름을 남긴 주인공들만을 따라다님으로써 많은 것을 삭제하고 있다. 이 영화에는 6월 항쟁을 이끌었던 학생 세력, 명동성당 투쟁 이후 거리에 나오기 시작한 넥타이부대와 같은 기층 민중의 서사가 철저히 부재한다. 심지어 6월 항쟁에 있었던 수많은 논쟁과 그에 따른 판단들은 그려지거나 평가되지 않은 채, 권력에 맞서 성공적으로 싸운 주인공들의 이야기만 전시된다.

 이 영화에 그려지는 민중의 모습은 주로 피해자의 모습(죽은 이들이나 수감자 혹은 그들의 가족)이다. 시위대나 학생들의 모습도 나오지만 중요한 것은 6월 항쟁의 서사를 이들이 이끌어가지는 않는다. 고위급 인사들과 투사들만을 담는 카메라는 마치 6월 항쟁이 정치적 공작으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착각하게 한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시점을 따라가게 되고 관객은 6월 항쟁을 그들의 역사로만 떠올리게 된다.


△ 최 검사와 박 처장이 뒷골목에서 만난 장면. 이런 장면들은 1987년과 6월 항쟁이 정치적 공작의 결과물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나마 6월 항쟁의 주인공이 아니면서도 많은 조명을 받는 인물은 연희(김태리 분)일 것이다. 영화 내에서 연희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에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인물이다. 교도관인 삼촌이 부탁하는 일을 마지못해 하는 정도에 그친다. 새내기 때 친구와 찾아간 만화사랑 동아리에서 5.18 영상을 보여주자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도 한다. 따라 나온 이한열(강동원 분)에게 연희는 이렇게 말한다. 뭐 어쩌자는 건데요?” “그러다 또 사람 죽으면... 누가 책임 지냐고요!”

 6월 항쟁 당시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우상호 의원은 연희의 고민이 그 당시 학생운동 하던 우리들의 고민이기도 했기 때문에”, “가장 설득력 있는 극중 인물이었다[각주:2]고 평가한다. 운동의 언저리에서 서성이던 사람들, 혹은 수배되거나 감옥에 갇힌 가족을 둔 이들의 서사까지 연희에 겹쳐져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연희는 분명 기층 민중의 서사 일부를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연희는 자신의 서사를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시종일관 사회운동에 회의적이었던 연희의 내면은 영화 내내 더 탐구되거나 발전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신문을 통해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피격 소식을 전해 들은 연희는 거리로 뛰쳐나간다. 그리고 버스 위에 올라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수많은 시위대의 모습을 목격한다. 연희는 무언가에 홀린 듯 팔뚝질[각주:3]을 시작한다. 연희의 태도가 갑작스레 변하는 이유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것이 <1987>의 마지막 장면이다. 연희의 서사와 고민들은 왜 해결되는지도 명확하지 않게 민주세력의 일원이 되면서 사라지고 만다. 남은 것은 역사에 이름이 남은 주인공들의 서사뿐이다.

 

진짜로 승리인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더 심각한 것은 마지막 장면 앞뒤에 배치된 장면들이다.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중대 성명 발표로 인해 급변하기 시작한 서사는 네 가지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윤상삼 기자(이희준 분)가 박처원 대공처장(김윤석 분)에게 고문, 살인, 은폐, 조작, 횡령. 끝났어 당신.”이라고 말하며 비웃는 장면, 최환 검사(하정우 분)와 민주화 투사를 도운 교도관이 멍한 표정의 박처원 대공처장을 마주하며 희미하게 웃는 장면, 공정보도에 힘쓴 기자들이 신나서 일하는 장면, 한병용 교도관이 누나에게 전화해 감동의 눈물을 나누는 장면. 이 모든 장면은 영화 내에서 고생해온 민주세력에게 카타르시스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뒤이어 연희의 팔뚝질 장면이 이어지고, 모두가 하나된 것처럼 보이는 6월 항쟁의 시위현장에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자막이 이어진다. “1987629일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6.29 선언이 발표됐다.” “최루탄을 맞아 병원으로 후송된 이한열은 75일에 사망했고” “79일 열린 장례식 노제에 100만여 명이 운집했다이어 그날이 오면이 배경음악으로 깔리며 실제 시위 장면들이 삽입된다. 1987년 문익환 목사의 열사여[각주:4]를 끝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 윤 기자가 박 처장에게 "당신 끝났어"라고 말하는 장면. 이 뒤로 1987년과 6월 항쟁을 승리 서사로 느끼게 하는 장면들이 배치된다.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장면들과 당시 영상들이 주장하는 바는 간단하다. 1987년 민주주의는 승리했다! 십 여 분간 이어지는 이 장면들을 거치며 우리는 박처원으로 대표되는 나쁜 공권력이 패배했고, 대통령 직선제로 대표되는 민주주의가 달성되었으며, 이한열 열사가 사망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국민이 하나 되어 노제를 치렀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삭제한다. <1987>6.29 선언이 속이구 선언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79일 장례식 노제가 이한열의 운구가 빠져나가고 청와대로 진출하다가 전경들에게 쫓겨 패퇴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쓰라림의 기억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각주:5] 노태우가 당선되었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6월 항쟁이 있고도 문익환 목사가 열거한 것만큼이나 많은 열사가 있었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1987>은 이런 불편한 역사적 진실들에 눈과 귀를 닫고 의도적으로 행복한 장면만 담아내며 영화를 닫는다. 6월 항쟁은 완전무결한 승리의 기억으로 박제된다.


또 다른 1987

 사실 이전에도 19876월 항쟁을 다룬 영화는 여럿 있었다.[각주:6] 그리고 그 영화들은 <1987>과는 다른 방식으로 6월 항쟁을 재현한다.

 <명성, 6일의 기록>(1997, 김동원 감독, 이하 <명성>)<1987>이 보여준 주인공 중심의 재현 방식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이 영화는 6월 항쟁 당시에 있었던 명동성당 투쟁 이야기를 중심으로 6월 항쟁을 그려나간다. 감독에 의하면 영화를 제작하던 97년 당시에도 다양한 영화들이 6월 항쟁을 다루고 있었지만, 대부분 국본[각주:7] 중심의 역사 서술이거나 학생 운동만을 중점으로 다루었다고 비판한다. 6월 항쟁은 그들만이 이루어낸 업적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수많은 의견 충돌과 소수 의견이 존재했지만, 그 어떤 영화도 이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감독은 자신이 느낀 6월 항쟁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내기 위해서 삭제된 목소리들을 담겠다는 결심으로 영화를 제작했다.[각주:8]

 <명성>은 명동성당 투쟁 6일 차까지 세밀하게 그려내는데, 명동성당 투쟁을 둘러싼 학생 운동 세력의 판단, 넥타이 부대, 철거민, 천주교의 입장, 군부의 입장 등을 통해 6월 항쟁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어떤 한 세력의 시점이 중심이 되지 않고 다양한 농성 참여자들의 다층적인 기억이 충돌하고 경합한다.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그 내부에 있었던 투쟁들까지도 세밀하게 묘사된다.

 <용산>(2010, 문정현 감독)6월 항쟁을 승리의 기억으로 재현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이 영화는 감독이 용산 참사를 마주하면서 그 전부터 겪어온 죽음의 기억들을 소환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여기에는 87년의 기억이나 아랫집에 살던 한열이 형[각주:9]의 기억도 포함되는데, 이는 단편적으로만 그려질 뿐 특별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6월 항쟁 이후에도 죽음의 축제는 절대로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보[각주:10]였기 때문이다. 대통령 직선제도, 6.29 선언도 사람들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감독은 작품에서 아래와 같이 묻는다.

 “언제부터인가 난 그리 오래되지 않은 죽음과 폭력의 역사를 아주 먼 곳의 이야기로 흘려보내곤 했다. 민주화를 이룬다는 성취감에 세상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만을 이야기했었다. 그러나 우리의 빈곤과 소외의 아픔을 자산으로 하는 정치, 자본 권력들에 의해,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놓은 틀 안에 나는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다.” “내가 기억하는 죽음의 시간과 경험, 나는 정말 기억하고 살아가는 것일까?”[각주:11]

 <1987>의 장준환 감독은 앞선 두 작품이 제기하고 있는 재현의 문제들에 대해 충실하지 못했다. <1987>6월 항쟁을 역사에 기록된 주인공들만의 서사로 그려냈다. 6월 항쟁이 정치적 공작으로만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명성>에서 그린 철거민이나 시민들의 모습과 논쟁, 그들의 힘은 영화 내에서 삭제되었다. 그나마 연희의 서사마저도 주인공들의 서사에 묻혀버렸다.

 <용산>6월 항쟁이 대통령 직선제, 6.29 선언을 얻어냈지만 이것만으로는 민주주의가 이룩되지 않았음을 이야기한다. 사람은 계속해서 죽어 나갔다. 하지만 <1987>은 이런 역사에 대해 침묵하고 6월 항쟁을 완전무결한 승리의 기억으로 명명했다. 감독은 이에 대해 “<1987>은 그런 6월 항쟁의 매우 아름다운 부분을 들여다보고 있는 영화[각주:12]라고 언급했을 뿐 명확한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역사에 기록된 주인공들만의 서사와 완전무결한 승리의 기억으로 박제되어버린 19876월 항쟁. <1987>은 이걸로 충분했던 걸까?


글 편집의원 현욱

  1. 송경원 글, 인터뷰이 장준환, “<1987> 장준환 감독 - 현실을 목도하는 힘과 에너지”, 씨네21, 2017. 12. 26 [본문으로]
  2. TBS TV 인터뷰에서 가져옴. 전문은 다음과 같다. “사실은 그게 그 당시 학생운동 하던 우리들의 고민이기도 했기 때문에.”(우상호) “실제로 많았어요, 연희 같은 인물이.”(아나운서) “그럼요. 저는 6월 항쟁의 위대함은 그런 공포와 불안과 회의 속에서 고민하던 그런 한편으론 민주주의를 염원하던 사람들이 그런 불이익의 가능성을 딛고 손을 잡고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그 연희라는 인물이 가장 설득력 있는 극중 인물이었다 생각합니다.”(우상호) [본문으로]
  3. “주로 화가 났을 때에 팔뚝을 내밀거나 내흔들다.”(표준국어대사전) 시위 현장에 가면 구호들에 맞추어 팔뚝질하는 시위대들을 볼 수 있다. [본문으로]
  4. 문익환 목사가 이한열 열사 추모식에서 한 연설이다. 6.29 선언 직후 사면되어 나왔던 문익환 목사는 이한열 열사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열사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다음은 전문.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장준하 열사여! 김태훈 열사여! 황정하 열사여! 김의기 열사여! 김세진 열사여! 이재호 열사여! 이동수 열사여! 김경숙 열사여! 진성일 열사여! 강성철 열사여! 송광영 열사여! 박영진 열사여! 광주 2천여 영령이여! 박영두 열사여! 김종태 열사여! 박혜정 열사여! 표정두 열사여! 황보영국 열사여! 박종만 열사여! 홍기일 열사여! 박종철 열사여! 우종원 열사여! 김용권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본문으로]
  5. <명성>에서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 전경에 쫓겨 패퇴할 때를 회고하는 당시 서울지역 대학생협의회 의장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 날 그렇게 이제 풍비박산 날 때, 쓰라림이 있었거든요, 저 개인적으로도. 근데 많은 사람이 그랬더라고요. 6월 항쟁 그 한 달 내내 투쟁하는 과정에서 승리감을 가지고 있고, 한 번도 황당함을 느끼지 않았었는데,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 그렇게 깨지고 나면서 그런 게 많았죠. 느낌이 아주 그렇게 굉장히 안 좋아요, 하여간. 마치 이제 앞날을 예고하는 것 같은 거죠.” [본문으로]
  6. <명성, 그 6일의 기록>의 김동원 감독에 의하면 당시 97년도에만 해도 부산 6월 항쟁을 비롯해 6월 항쟁에 관한 영화가 여럿 제작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므로 장준환 감독이 6월 항쟁을 다룬 영화가 없다고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충무로 영화에 한정해서만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2014년 1월 9일 진행된 <명성, 그 6일의 기록> GV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Qiwb_QkuBFw) [본문으로]
  7. 국민운동본부의 줄임말. [본문으로]
  8. 같은 영상. 다음은 GV 중 인터뷰 내용 “그때 보니까 기층이 다 빠져있는 거예요. 빈민운동이나 농민운동 뭐 이런 쪽에는 그 기념사업회 안에도 들어가지도 못했고 거기서 나온 담론 속에서 언제나 빠져 있는 거를 보면서, 이게 사실은 그게 설사 옳은 일이던 잘못된 일이던 틀린 일이던, 룸펜 프롤레타리아들이 어떻게 보면 제 머리 속에 여러 모습으로 남아있는데, 그런 것들은 다 빠져있고, 이제 어떤 그 국본 중심으로 역사적으로 서술된다거나, 학생 중심으로 된다거나 이런 걸 보면서 그건 아니다라고 생각했어요. 그 때 굉장히 중요했던 것이 아마 어느 파업이나 여러 투쟁장소에서 여러 의견들이 충돌하게 마련인데, 그 안에서도 충돌되었던 의견들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막 소수 의견들을 이제 막 10년 후에도 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것들이 조금 아쉬웠고, 제 작품에선 아마 그 목소리를 쪼금 담고 싶었습니다.” [본문으로]
  9. 김동원 감독, <용산>, 2010 [본문으로]
  10. 같은 영화 [본문으로]
  11. 같은 영화 [본문으로]
  12. 글 유지영, 인터뷰이 장준환, “"박근혜탓에 몰래 만든 <1987>, 배우들 출연 요청 쏟아져"”, 오마이스타, 2017. 12. 2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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